누군가가 내게
"당신의 인생에 있어서 가장 아름다운 추억이 무어냐?"
라고 묻는다면 나는 스스럼없이
"도남 분교에서 근무한 2년 동안이어요".
라고 대답할 것이다.
젊은 날에 사랑하는 사람과의 추억도 있을 수 있고, 그 외의 추억거리가 얼마든지 있을 수 있는데 왜 하필이면 학교서 근무할 때의 추억일까? 어떤 추억이 있길 래 그럴까? 하고 궁금해 해볼 만도 할 것이다.
나는 도남 분교가 폐교되기 2년 전인 1995년∼1996년까지 2년 동안 그 곳에서 근무했었다.
우리 가족은 내가 몸이 약하여 요양 차 그 곳 사택에서 살았는데, 살면서 느낀 학교의 정취가 너무 아름다웠다.
학교의 교정에는 장미꽃 나무, 자목련 나무, 벚꽃 나무, 호두나무 그 외 나무와 꽃들도 많았는데 당시 근무하던 주사 님이 정성 들여 잘 가꾸어 단아한 모습들이 어우러져 아주 아름다웠다.
어느 봄날, 참새가 동백나무 속에 둥지를 틀어 새끼들이 이제 막 날기 시작하여 이 곳 저 곳으로 옮겨다니고 있었다. 그런 참새를 쫓아 아이들이랑 운동장을 달리며 헉헉거린 끝에 결국 새끼를 손에 쥔 적이 있었다.
"짹 짹 짹 짹…"
손끝에 느껴지는 뽀송뽀송하게 털이 난 작고 귀여운 새끼 새의 따스한 체온이 무척 기분 좋았지만 엄마 새의 안타까운 울부짖음과 두려움에 떠는 아기 새의 초롱한 눈망울이 가여워서 그만 날려보냈던 선생과 동심들의 추억이 서린 곳.
뒤는 산이요 앞은 바다로 면내나 마을과는 뚝 떨어져 있어서 공기 또한 아주 맑았고 저녁이면 바다 저편으로 해 넘어가는 모습이 그야말로 장관을 이루었다. 특히 가을에 보는 노을 모습은 더욱 아름다웠다.
억새꽃이 사방에서 살랑거리는 가을 내음 속에서 바다는 햇살을 받아 찬란한 은빛으로 반짝거리고 서녁 하늘에 불붙는 듯 펼쳐진 노을과 구름 사이로 내리쏟는 햇살을 보고 있노라면
'인간이 만든 최고의 예술 작품이 이보다 뛰어날 수 있을까?'
라는 생각이 언제나 들곤 하였다.
그 모습이 얼마나 아름다우면 사진 작가들이 종종 바다 쪽으로 사진기를 들이대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특히 잊을 수 없는 것은 여름에 선풍기가 필요 없었다.
부임해 간 첫 해 날이 유난히 더웠다. 남들은 더워서 헉헉거리는데 우리들은 사택에서도 교실에서도 교정에서도 선풍기가 필요 없었다. 이런 것을 아는 분들은 학교로 피서를 와서 교정 나무 밑에다 텐트를 치고 자고 가기도 했다. 참으로 신기한 곳에 자리잡은 학교였다.
마을 사람들도 학교에 대한 정이 유난히 끔찍했는데 그 이유는 학교 터를 마을 분들이 기증을 했고 학교를 세울 때 다 같이 참여하여 지었기 때문이었다.
한 때 그 곳에서 교사를 하셨고 학교를 세울 때 힘쓰신 정 연실 이라는 성함을 가진 마을 어른이 계셨는데 학부형이 아니신 데도 수고한다며 우리 집에 종종 밤이랑 박을 갖다 주시곤 하셨다. 동네 사람들은 순박하며 인심이 후했고 선생을 존경하는 풍토가 아직까지 있어 마을에 내려가면 언제나 반갑게 맞이하여 주었다.
근무한 당시 전교생이 22명이었는데 우리 반은 1, 2년 복식으로 모두 5명이었다. 그야말로 홈 스쿨(home school)이었다. 몸살을 해서 학교에 못나갈 땐, 사택으로 애들을 불러 상을 펴놓고 공부를 한 적도 있었다.
학교 사방으로 땅이 있어 텃밭이 많았는데 봄에는 조막손들에 괭이를 들려 함께 거름 치고 땅을 파서, 강낭콩이랑, 호박, 무, 배추 등을 심었던 기억도 생생하다. 점심때는 선생님들이랑 학교 텃밭에서 바로 뜯은 상추, 배추 등으로 무공해 야채의 상큼한 맛을 즐기기도 했었다.
자고 일어나 아침에 운동장을 내려서면 초록빛 싱그러운 풀잎들과 맑은 아침 공기 속에서 지저귀는 새소리의 아름다움은 베토벤의 '전원' 도 근처에 따라올 수 없었다. 황홀한 자연의 교향곡이 연주되는 아침이었다.
봄이면 새색시 같은 설레임으로 다가오던 자목련의 고운 자태, 연분홍 벚꽃이 화사하게 피어오르면 내려다보이는 쪽빛 바다와 어울려 무척이나 낭만적으로 보이던 내 평생에 잊지 못할 추억의 땅 도남 분교..
몸이 좋지 않아 요양 차 갔던 그 곳에서 엉뚱하게 아이를 잉태하여 결국 낳았는데 그 녀석이 막내이다.
학교의 물이 지하수였는데 물맛이 좋기로 소문나 타지에서 사람들이 종종 떠갔다. 물 좋고 정기 좋아 그런지 그 곳에서 낳은 아들놈이 무척이나 총명하고 다정하여 아들 셋 중에서 최고이다.
지금도 자주 아이를 길러준 젖어머니를 보러 가는데 그 때마다 학교를 보게 된다.
지금은 그 자리에 '도남 분교' 라는 간판 대신 '도산 예술 촌' 이라는 간판이 붙어있다. 그림을 그리는 분들이 교육청을 통해 폐교를 임대해서 작품활동을 하고 있다고 들었다.
그래도 그곳에 공장 같은 것이 서지 않고 지역예술의 주춧돌이 되고자 노력하는 뜻 있는 분들의 활동 무대가 되고 있기에 안심이 되기도 한다.
학교는 폐교되었지만 계속해서 다른 사람들에게도 내가 느꼈던 아름다움을 줄 수 있게끔 그 곳을 가꾸어 주시길 그 곳에서 활동하는 분들께 마음속으로 빌며 추억을 접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