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얼빈[哈爾濱]의 가을 아침은 청명했다. 적(敵)이 오는 길목에서 그 청년은 적의 사진을 보고 또 봤으리라. 과연 적은 이 곳에 도착할 것인가?
동아시아를 쥐고 흔들던 68세의 정치계 거물, 그의 이름은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그에게로 한 청년이 걸어간다. 세 발의 총성(銃聲)! 일본의 겐로[元老]인 이토 히로부미는 그 자리에서 절명한다. 그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자신을 쏜 청년이 누구인지 알지 못했다.
1910년 2월 7일 관동도독부(關東都督府) 고등법원(高等法院) 제1호 법정.
완전 무명에 가까웠던 32세의 식민지 청년. 그의 법정투쟁(法庭鬪爭)이 시작된다. 그는 당당했고, 논리 정연했으며, 마지막까지 품위를 잃지 않았다.
“주저함은 없었는가?”
“더 말할 것도 없이 곧바로 뚜벅뚜벅 걸어 용기 있게 나가 ‘저것이 필시 늙은 도적 이토일 것이다’ 판단하고 곧 권총을 뽑아 들고 그 오른쪽을 향해 네 발을 쏘았다. 대한의 독립은 내 삶의 목적이요, 평생의 사명이다.”
피시운 세르게이 우수리스크 국립사범대학교 총장 “그는 재판에서도 당당한 행동을 보였고 자신의 죽음을 두려워한다는 것을 보여주지 않았다. 그는 재판에서 남자답게 행동하였다. 일본인 재판관들은 그의 행동에서 두려움이 없었다고 말했다. 그는 어떠한 협박에도 반응하지 않았다. 나에게 안중근이란 인물은 남자다움과 희생을 의미한다.”
1백년전의 하얼빈역. 이토 히로부미는 왜 그 곳으로 왔던가? 그리고 안중근은 왜 그를 총살해야만 했던가?
신운용「안중근 의사 기념사업회」책임연구원 “별로 알려지지 않았던 사람이 동양에서 가장 위상이 높았던 정치인 이토 히로부미를 제거했을 때 국제적인 충격이란 건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이다. 이토 히로부미가 조선인 청년의 총탄에 맞아 사망했다는 건 그 자체로 충격이었다.”
미츠노 코오지 야먀구치 현립대학교 명예교수 “일본의 역대 수상(首相) 가운데 가장 훌륭한 정치인 세 명을 손꼽아 평가할 때에 항상 이토 히로부미가 들어간다. 당시 일본 정치계의 최고봉이었다.”
그의 죽음으로 일본 열도는 충격에 빠진다. 그의 장례는 국장(國葬)이었다. 일본인들에게 그는 국장을 치르고도 남을 인물이었다.
일본 참의원 건물 앞에는 그의 동상이 서 있다. 그는 지금도 일본 근대화의 원훈(元勳)으로 추앙받는다. 총리대신을 네번이나 역임하며 조선통감으로, 조선병합의 시나리오를 주도했던 인물. 조선을 넘어 대륙으로 나가겠다던 그의 야망은 식민지 청년이 쏜 단 세 발의 총탄으로 끝나게 된다. 그것은 한 명의 약소민족의 영웅이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그 날 이후 안중근(安重根)은 동아시아의 전설이 된다.
안중근은 의거(義擧) 직후 현장에서 체포된다. 그의 몸에는 굵은 쇠사슬이 동여매어졌다. 그 순간에도 그는 당당했고, 그의 얼굴은 평온했다. 그 때 그의 나이 서른 하나. 그 해 가을 안중근의 소문은 빠르게 퍼져나갔다. 중국 지린성 훈춘시, 당시 이 일대는 조선인들의 피난처였다. 일본의 침략을 피해 조국을 떠났던 그들에게 안중근의 의거 소식은 말 그대로 환희요, 희망이요, 자랑이며, 긍지였다.
조금만 가면 그 곳이 있다고 했다. 안중근이 머물렀다는 그 집. 훈춘시 권하촌. 드디어 그 곳으로 들어선다. 안중근 의사의 생애가 적힌 비석. 그 옆에 초가집 한 채가 서 있다. 오래된 절구통 하나가 빈 마당을 지키고 있는데, 텅 빈 방 안에는 갈대를 엮어 만든 돗자리가 하나 깔려 있고, 그 위에 작은 철제 침대 하나가 놓여 있다. 마을 사람들은 그 때 분명히 안중근 의사가 머물렀던 집이라고 말하고 있지만, 사실 그가 이 곳에 머물렀다는 정확한 기록은 어디에도 없다. 그저 모든 것은 풍문이고 전설일 뿐이다.
변병률 한국외국어대학교 교수 “안중근 의사가 하얼빈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한 이후에 그와 관련된 여러가지 소문들이 그 분을 겪었던 일들이 전설처럼 전해내려오면서 지금까지 조선족 사이에 남아있던 것이다.”
왜 그러지 않았겠는가? 조국을 떠나와 있던 그들에게 안중근은 희망이자 긍지였다. ‘그가 우리 마을에 머물렀다’ 분명치 않은 그 소문 하나가 얼마나 많은 이들을 눈물겹게 했을 것인가? 전설이 만들어낸 텅 빈 집 마당가에선 홀로 앵두가 자라고 있다. 이 곳만이 아니었다. 안중근은 이미 동아시아의 영웅이었다.
김우종 흑룡강성 사회과학원 고문 “나는 북한에도 여러번 가서 안중근 기념비도 다 촬영해왔고 해주의 안중근 기념박물관도 가서 전시해놓은 것 확인하고 왔다. 한국이 남북으로 갈라져 있지만 북한에서도 안중근 관련 영화도 만들어지고 안중근 기념관도 세우고 남한에서도 안중근 기념관을 만들고 그래서 안중근은 아시아에서는 중국내에서 각 당파, 한국에서도 남북이 다 공인하는 이런 영웅 인물인 것만은 사실이다.”
‘안중근 열풍’은 재판이 진행되면서 더욱 확산됐다. 재판과정에서 보여준 그의 당당한 태도는 입에서 입으로 전해졌다.
“피고는 이토 공의 생명을 잃게 했는데, 피고의 생명은 어떻게 할 생각인가?”
“나는 원래 내 몸에 대하여는 생각해 본 적이 없다. 이토의 죄악을 일일이 진술하고 이후 나 자신을 법에 맡길 생각이었다.”
세르게이 총장 “그에게는 조선 양반들이 보여준 명예 규칙이라는 게 있었다. 그 명예 규칙은 바로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조국을 지키는 일이다. 죽음의 두려움을 극복하는 것이다. 그는 그것으로 사회, 정치적으로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되는 것이다.”
안중근의 고향은 황해도 해주. 그의 20대는 모험과 정열로 채워져 있다. 당시 그의 집안은 상당한 부자였다. 안중근은 학교를 짓고 계몽운동을 하며 그 재산의 상당부분을 소진한다. 학교를 짓던 시절, 그러나 그 때까지도 그는 정열이 넘치던 평범한 청년이었을 뿐이다. 1907년 그는 서울로 온다. 그의 나이 29세였다.
바로 그 해에 헤이그 밀사 사건이 터진다. 이토 히로부미가 이완용 괴뢰내각을 구성하고 한국 통치를 구체화하고 있던 시절, 고종(高宗) 황제는 이상설(李相卨)·이준(李儁)·이위종(李瑋鍾) 세 밀사를 파견해 을사늑약(乙巳勒約)의 부당함을 세계 만방에 알리고자 한다. 1907년 7월 5일, 헤이그 밀사 파견의 소식을 전해들은 이토 히로부미는 장교들을 대동하고 입궐한다. 그는 고종이 써 보낸 밀서의 사본을 제시하며 성토한다. 그것은 명백한 협박이었다.
“이와 같이 음흉한 방법으로 일본에 대한 거부권을 행사하려는 것은 일본에 대한 적대적 의도가 있는 것으로 간주, 일본은 조선에 대해 전쟁을 선포할 권리를 보완하겠다.”
그로부터 14일 뒤인 7월 20일, 고종 황제는 강제로 퇴위됐다. 명색으로는 순종(純宗)에 대한 양위였다. 양위식 날 그 자리에는 고종도 순종도 참여하지 않았다. 기이한 양위식이었다. 대한제국의 용상은 비어있는데 그 자리를 이토는 야금야금 걸어 들어오고 있었다. 조선통감 이토 히로부미, 그는 치밀하게 한국병탄의 시나리오를 써 갔다.
고종 퇴위 열흘 뒤인 8월 1일, 대한제국 군대의 해산이 선포된다. 다음날 해산에 저항하며 군인들이 봉기하지만 그 봉기는 한나절을 넘지 못한다.
김삼웅 독립기념관장 “안중근 의사께서는 그 때 그 현장을 지켜보셨다. 일본군은 현대식 무장을 한 정규 군대고 우리는 비무장에 기껏해야 구한국 군대가 사용하고 있던 탄환도 없던 그런 소총들, 이런 걸 가지고 일본군과 싸우려니 전투가 되겠는가? 그래서 한국 군인들이 수백명이나 죽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면서 ‘이런 식으로 일본 제국주의와 싸워서는 안 되겠다’ 생각했다.”
신운용 연구원 “1907년에 들어와서 국내적인 상황이 ‘교육사업만으로는 한국 독립을 담보할 수 없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 돌파구로써 국외 망명을 시도한다.”
군대 봉기 사건이 일어난 바로 다음날인 8월 3일, 안중근은 간도로 떠난다. 반도 3천리를 등에 지고 낯선 이국 땅으로 떠나는 29세의 조선인 청년. 그의 가슴 속을 짓누르고 있을 격정과 울분과 슬픔과 통한의 깊이를 나는 감히 헤아릴 길이 없다.
안중근은 훈춘을 거쳐 러시아 땅 연해주로 들어선다. 당시 블라디보스토크는 한국인 망명객들로 북적였다. 포그리치나야 거리, 당시 한국인들이 모여 살던 곳이다. 한국인들이 모여 살던 곳에는 모두 ‘개척리’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한국인들이 개척을 해 이룬 마을이란 뜻이다. 현재 이름도 거기에서 비롯됐다.
송지나 극동국립대학교 교수 “포그리치나야 거리는 당시 코리이스카라고 불리웠다. 옛날에 한국인이 여기서 살았던 거리라는 뜻이다.”
당시 러시아는 러일전쟁(露日戰爭)을 치른 후였기 때문에 일본에 대한 감정이 좋지 않았다. 동병상련(同病相憐)의 감정이랄까? 러시아인들은 일본에 의해 쫓겨온 한국인들에게 너그러울 수 밖에 없었고 때문에 자리잡기가 쉬웠다. 무엇보다 조국 땅이 지척에 있다는 것도 고국을 떠난 한국인들에게는 큰 위안이었다. 바다를 건너면 3천리 반도, 바로 조국 땅이었다.
송지나 교수 “아무르 만을 둘러싸고 육로로 가면 바로 트라스키노, 북한 땅이다. 한반도의 두만강에서 이쪽으로 여기 얼음이 1미터 반 정도 언다. 겨울에는 얼음으로 만을 건너오고 여름에는 육로 아니면 배를 타고 이쪽으로 왔다.”
루스키 섬은 망명해온 한국인들이 의병항쟁을 도모하며 군사훈련을 했다는 곳이다.
알렉산더 트로포프 극동문서보관소장 “여기서는 한국 독립운동가들의 활동이 수월했다. 러시아 땅에 건너온 한국인들은 한국과의 접경지대에서 거주했으며 이 때문에 무장단체를 구성하기가 쉬웠고 국경을 넘어 일본군을 습격함으로써 일본의 군사력을 저하시키곤 하였다.”
이곳에서 안중근(安重根)은 최재형(崔在亨)과 이위종(李瑋鍾)을 만난다. 그리고 또 한 사람, 단 한장의 사진도 남기지 않고 이름만을 남긴 사람 바로 이범윤(李範允)이다. 당시 그들은 반일의병항쟁(反日義兵抗爭)의 거두들이었다. 안중근은 그들과 협력하여 동의회(同義會)란 조직을 만들어 활동하였다.
신운용 연구원 “안중근 의사가 동의회에 가담했다는 것은 한국인사회에서 그의 위치가 역할을 인정받았다는 하나의 증거가 될 수 있겠다. 동의회에 참여하면서 그 결과물로써 국내진공작전(國內進攻作戰)까지 벌이게 되고 이런 과정 속에서 점점 러시아 한국인사회의 지지를 받게 된다.”
망명으로부터 꼭 1년, 안중근의 나이 30세. 마침내 그의 최초의 의병항쟁이 시작된다. 1908년 7월 초 안중근과 전덕제(全德濟)·엄인섭(嚴仁燮) 등이 인솔한 의병들은 두만강 하류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 1개 중대 병력을 물리치고 국내진공작전을 펼쳤다. 성공적인 출발이었다.
그러나 7월 19일 회령 지역까지 진입했던 안중근의 의병 부대는 일본군 2개 대대 병력의 기습공격으로 영산전투(永山戰鬪)에서 대패하고 만다. 당시 안중근 부대의 임무는 함경도 산악지대에 있던 홍범도(洪範圖) 부대에게 탄약(彈藥)과 군량(軍糧)을 전달하는 일이었다. 하지만 이미 의병 3백여명이 두만강을 넘는다는 정보를 입수한 일본군은 길목을 지키고 있었고, 의병부대는 속수무책(束手無策)으로 와해되고 만다. 참혹한 패전(敗戰)이었다.
그런데 바로 그 전투에서 안중근 부대는 일본군 병사 네 명을 사로잡는다. 허나 안중근은 이 포로들을 석방해 버린다.
변병률 교수 “의병항쟁의 전개과정이 전환점이 되는데 그 부분 때문에 ‘포로들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 고민하게 된다. 그런데 안중근 의사의 원칙은 만국공법(萬國公法)을 주장했던 것이다. ‘포로를 죽이는 것은 만국공법에 어긋난다’ 그러니까 안중근 의사는 국내진공작전을 비정규전(非正規戰) 형태의 게릴라 작전이 아니라 정규전(正規戰)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한국을 대표하는 독립군과 일본군간의 정규전이고 그 정규전에서 아군에게 사로잡힌 포로는 만국공법에 따라 대우해야 한다.”
신운용 연구원 “국내진공작전에 실패하고 나서 러시아 한국인사회는 냉기류가 흐르게 된다. 왜냐하면 한국인사회에서 군자금을 부담해서 줬는데 결과물은 없고 러시아 정부의 압력은 더욱 심해지고 최재형 세력이 결국은 군자금을 풀어야 하는데 의병항쟁 패배 이후로는 최재형 세력이 군자금을 풀지 않는다.”
‘포로를 포로답게 대우하자.’ 허나 안중근의 이상(理想)은 철저히 배신당했고 수많은 원망이 뒤를 이었다. 그의 부대는 해산되었고 지원은 끊겼다. 안중근은 이제 그 전쟁을 홀로 치를 수 밖에 없었다.
그는 마지막까지도 자신이 대한제국의 군대를 대표하는 참모중장(參謀中將)의 자격임을 주장했다. 그는 죽는 순간까지 대한의용군(大韓義勇軍)의 참모중장으로서 위엄을 지켰다. 나라 없는 군대를 안중근은 홀로 지키고 있었다.
그는 카톨릭 신자였다. 혹 그 신앙이 그의 고독한 전투에서 한 줌 위안이 되었을까? 그 끝에서 그는 동지들과 함께 손가락을 자른다. 안중근을 포함해 12명의 동지가 약지(藥指)를 끊으며 피로 맹세하고 그 피로 ‘대한독립(大韓獨立)’이란 글귀를 쓰며 태극기에 서명했다. 사람들은 훗날 손가락을 끊어 맹세했다고 해서 단지동맹(斷指同盟)이라 불렀다. 손가락이 끊어진 손바닥 인장(印章), 이 영원한 안중근의 상징이 그렇게 만들어지고 그렇게 완성됐다.
신운용 연구원 “일반적으로는 단지동맹이라 하는데 이건 용어가 잘못된 것이고 안중근 의사는 정천(正天)동맹이라 했다. 하늘의 뜻을 바로 실천한다는 뜻인데 하늘의 뜻이란 바로 한국의 독립이고 동양의 평화이니까 이걸 구체적으로 어떻게 실천에 옮길 것인가 하는 그 무리 세력에 안중근 의사가 주축이 되었다는 뜻이다.”
안중근이 동지들과 함께 손가락을 끊었던 곳, 러시아 연추마을에는 아무것도 없다. 단지 그들이 모인 집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곳에 비석만이 서 있을 뿐이다.
대륙의 눈보라가 휘몰아치는 초겨울의 밤이었다. 그들은 이 허허벌판 어딘가에 손가락을 묻고 눈보라 속으로 흩어진다. 그 때가 1909년 2월 7일, 안중근의 나이 31세였다. 어디로 갈 것인가? 적(敵)이 있는 곳으로, 적의 심장이 있는 곳으로 가서 마지막 전쟁을 치르리라.
적과의 거리는 점점 더 멀어지고 있었다. 안중근이 손가락을 끊던 그 해 6월, 이토 히로부미는 조선통감을 사임하고 일본으로 돌아온다. 외형상 은퇴였다. 허나 이토 히로부미의 야망은 끝난 것이 아니었다. 그의 한국병탄 시나리오는 성공적으로 끝났다. 이제 그는 조선에 있을 필요가 없었다. 그의 야망은 조선을 넘어 이미 만주를 향하고 있었다.
하급무사 출신으로 10대부터 돈벌이에 나서야 했던 이토 히로부미. 그러나 그는 메이지유신[明治維新]을 이끌던 거물들의 눈에 띄면서 승승장구(乘勝長驅), 마침내 내각총리를 네 번이나 역임하는 거물로 성장한다. 그즈음 이미 그는 일본 최고의 실력자였다.
조선통감 사임 4개월 후인 10월 16일, 그는 일본을 떠나 만주로 향한다. 그게 마지막 길이 될 것이란 점을 어찌 상상이나 했을까?
일본 국민들은 만주로 떠나는 이토 히로부미를 열렬히 환송했다. 그의 어깨에 대일본제국(大日本帝國)의 야망이 실려 있었다. 조선은 끝났으니 이제 만주, 일본 국민들은 들떠 있었고 이제 이토가 그 야망을 실현해줄 터였다.
김삼웅 관장 “대한제국을 이름뿐인 나라로 만든 을사늑약(乙巳勒約)을 강제로 체결하게 하고 일본으로 돌아갔지 않았던가? 일본으로 간 이토의 야망이 ‘조선병합 정도로는 안되겠다. 만주까지도 점령해야겠다’ 이런 야심을 갖고 우선 만주로 건너갔던 것이다.”
이토 히로부미의 만주 방문은 국제적으로도 큰 이슈였다.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의 극동문서보관소에는 당시 수많은 신문들이 이토의 방문을 대서특필하고 있는 사실을 찾아볼 수 있다. 당시 러시아는 이미 내전(內戰)에 돌입하고 있는 상태, 일본과 싸울 여력이 없었다. 러시아 정부는 코코체프 재무장관을 내세워 일본과의 ‘나눠먹기’를 선택한다. 즉 일본의 만주개발권을 허용해주고 대신 만주를 분할점령하는 것이었다. 바로 이를 위해 이토가 오고 있었다.
세르게이 총장 “코코체프 장관과 이토 히로부미간의 만주에서의 회담에 대한 본질은 북동아시아 지역에 대한 러시아와 일본의 이해득실을 조정하는 것이었다. 러시아는 이 때 몽골을 청국으로부터 독립시켜 영향력을 행사하려 했다. 결국 러시아의 활동에 힙입어 1911년 몽골 자치주 독립이 거의 확실시되는데 이 과정의 희생양이 바로 한국이었다.”
적(敵)이 오고 있다. 안중근이 움직이기 시작한다. 의병항쟁의 동지였던 우덕순(禹德淳)과 함께였다. 동지들이 구해준 무기는 브라우닝식 M1890 권총(拳銃). 아주 작아 숨기기에는 용이했지만 위력이 약하고 적중률이 떨어지는 치명적인 단점이 있었다. 안중근은 ‘덤덩탄’을 사용하기로 결정한다. ‘덤덩탄’은 표적을 관통하지 않고도 몸 안에서 파열이 일어나 살상률을 높일 수 있는 총탄으로 권총의 결점을 보완하려는 안중근의 의도였다.
안중근은 블라디보스토크 역으로 들어선다. 언젠가 독립이 이루어지면 이 곳에서 열차를 타고 꼭 한번 이탈리아나 프랑스 같은 유럽 국가를 여행하고 싶었다던 안중근. 그 꿈의 정거장에서 꿈을 뒤로 한 채 31세의 청년이 기차를 탄다. 충돌할 듯 달려가는 두 대의 열차. 그 곳에서 안중근의 탄환은 불을 뿜을 것이다.
거사(擧事) 나흘 전인 1909년 10월 22일 밤, 안중근과 우덕순은 유동하(劉東夏)의 안내를 받아 하얼빈에 도착한다. 적은 아직 오지 않았다. 안중근의 거처는 한국인 조직이 미리 선을 대놓고 있었다. 하얼빈시의 삼림가. 당시 한국인 모임의 회장으로 독립운동을 지원하던 김성백의 집이었다.
김우종 고문 “여기는 원래 집이 계속 서있으니까 호수로 별로 변하지 않는다. 여기가 삼림가 28호인데 지금은 대부분 공장으로 변했다.”
밤늦게 도착한 안중근 일행은 이곳에서 하룻밤을 자고 다음날 아침 일찍 집을 나선다. 그들은 하얼빈 공원으로 간다.
김우성 고문 “이 공원 벤치에 앉아서 거사에 대한 계획이나 활동에 대해서 의견을 교환하던 곳이다. 옛날에는 하얼빈 공원이었지만 지금은 조린 공원으로 불리고 있다.”
공원에는 동포들이 만들어 놓은 안중근의 공간이 있다.
김우종 고문 “이 곳도 조린 공원이지만 우리가 하얼빈 공원, 안중근 의사와 관련이 있는 곳이라고 해서 이 공간을 만든 것이 안중근 기념관 예정지이다.”
안중근의 유묵(遺墨)을 딴 비석도 세워놓았다. 남북이 통일되는 날 이곳에 소박한 안중근 기념관을 세우겠다는 게 동포들의 뜻이다. 거사를 앞둔 청년들, 그 때 그들은 무슨 대화를 나누었을까? 러시아어 통역을 위해 대동했던 유동하는 아직 어렸고 안중근과 우덕순은 31세 동갑이었다. 실제적인 거사는 두 사람의 몫이었다.
김우종 고문 “안중근 의사는 23일 ‘내가 이번 행동에서 살아남을 수 없다’는 필사의 결심을 내린 것 같다. 하얼빈 역 앞에도 가보고 재홍교 다리 위에서 하얼빈 역을 빤히 내려다볼 수 있다. 그러니까 다리 위에서 하얼빈 역 광경을 잘 돌아보기도 하고 그 앞에서 중국인이 운영하는 사진관이 있었다고 한다. 세 분이 앉아서 사진을 찍었는데 그것이 안중근이 남긴 마지막 기념사진이었다. 후에 감옥에 가서 찍은 사진도 있지만 자기가 주동적으로 찍은 사진은 그것이 마지막 사진이었다.”
그 때 그가 섰던 그 다리 재홍교에서 하얼빈역을 내려다본다. 수많은 길들이 흘러드는 곳, 적은 과연 어디로 올 것인가? 그에게도 가고 싶고 갈 수 있는 길은 많았다. 그는 이탈리아나 프랑스 같은 나라들을 꼭 가보고 싶었다. 얼마나 푸른 꿈인가? 불가능한 것만도 아니었다. 그러나 식민지 청년은 그 날 그 모든 꿈들을 이곳에 묻어버린다.
답사를 마친 그들은 마지막 사진을 찍는다. 생애 마지막 사진이 될지도 모르는 순간, 그들의 얼굴은 평온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거사는 함께 하는 것으로 되어 있었다. 그러나 운명을 예감했던 것일까? 그날 밤 숙소로 돌아온 안중근은 한 편의 시(詩)를 남긴다.
‘장부가 세상에 나가니 그 뜻이 크도다. 때가 영웅을 만들고 영웅은 때를 만드는도다. 천하를 응시하매 언제 업을 이룰 것인가? 동풍은 점점 가까워지고 장사의 의기는 뜨거워지누나 분연히 한번 감이여 반드시 목적을 이루리라! 도적 이토야, 어찌 너의 목숨을 살려줄 수 있으리? 여기에 이를 줄 어찌 알았으랴? 사세가 그러하도다. 동포여, 속히 대업을 이루자. 만세 대한독립이로다.’
그 다음날 안중근 일행은 갑자기 계획을 바꾸어 하얼빈을 떠나 채가구 역에 도착한다. 통역을 맡았던 유동하는 하얼빈에 남겨두고 조도선(曺道先)이 합류한다.
김우종 고문 “하얼빈 역을 돌아보니까 하얼빈 역에서 거사하는 것이 너무 크고 경계가 삼엄하고 그러니까 성공하기 어렵다는 생각에서 간 곳이 채가구였다.”
당시 채가구 역 지하에는 매점이 있었다. 매점이 있던 공간은 이제 막혀버려 그 현장에 들어갈 수 없다. 폐허가 돼버린 저 지하 매점터, 안중근 일행은 그곳에서 하룻밤을 묵었다. 이토가 거쳐갈 길목, 이곳에서 거사를 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하얼빈의 유동하로부터 전보가 날아온다. 이토의 경로와 이동이 바뀌었다는 전보였다.
전보를 받자마자 안중근은 두 동지를 남겨둔채 홀로 하얼빈으로 간다. 사실 그 전보는 소문만 듣고 친 잘못된 정보였다. 어떻게 해도 운명은 피할 수 없음인가? 그 잘못된 정보로 안중근의 거사는 성공한다. 만약 안중근이 원래 계획대로 채가구에 머물렀다면 거사는 가능하지 않았다.
이토의 열차는 채가구에서 정차하지 않았다. 유동하의 혼선과는 달리 이토는 안중근이 처음 입수한 원래 정보 그대로 움직이고 있었다. 저격당하기 전날 밤 이토는 관성자 역에 도착, 성대한 파티를 열었다. 이 자리에서 이토는 시 한수를 남긴다. 이 노회한 정치인도 자신의 운명은 예감하지 못했던 것일까? 그의 시에서는 여전히 제국주의적 야망이 불타고 있었다.
‘만 리의 평원 남만주, 풍광활원하고 하늘은 가을이라 그 해의 전쟁의 기억은 분노만 남았으니 지나간 행인은 애수를 느끼는구나. ’
10월 26일 적은 분명히 하얼빈으로 오고 있었다. 오전 7시 안중근은 역으로 나간다. 도착 예정 시간 9시, 검은 정장으로 차려입은 안중근은 역 안 다방으로 들어갔다. 그렇게 두시간, 마침내 이토를 태운 열차가 들어온다. 안중근은 나가지 않았다. 그는 끈질기게 기다렸다.
김우종 고문 “거기 다방에 가서 차를 마시며 기회나 볼까 하다가 7시에 나가서 근 두시간 거기에서 있었다. 그러니까 9시 20분 지나서 열차가 들어오는 것이다. 다른 사람 다 나가니까 환영곡이 울리고 옆에서 아주 열차가 벌써 들어왔다. 들어올 때까지도 안중근 의사는 나가지 않았다.”
플랫폼이 환히 보이는 다방에 앉아 끈질기게 기다린다. 이토가 열차 밖으로 나올 때까지..... 열차는 9시 정각에 들어왔다. 이토는 열차 안에서 코코체프 장관의 접대를 받는다. 마침내 25분, 헌병들이 술렁이기 시작하는 순간.....
“탕, 탕, 탕!”
단 세 발, 이토는 그 자리에서 쓰러진다.
김우종 고문 “이것밖에 없다.”
남은 것은 아무것도 없다. 동포들이 박아놓은 표식만이 그 날의 현장을 증언해주고 있다.
김우종 고문 “여기가 이렇게 돌아서 그때 플랫폼 위치는 그냥 이 자리이다. 원래 이 위치는 안중근이 쏜 자리가 아니라 이등박문이 거꾸러진 자리... 여기가 안중근이 쏜 자리다.”
적과의 거리 7미터, 총탄은 단 한발도 빗나가지 않았다.
그는 침착했다. 플랫폼의 한가운데까지 저벅저벅 걸어들어와 정확하게 조준하고 확실하게 쏘았다.
김우종 고문 “저 문이 원래 귀빈실 개찰구였다. 그때는 이 지하도가 없이 그저 플랫폼 하나뿐이니까 저기로 나와서 여기에 러시아 군인들이 두 줄로 섰었다. 두 줄로 선 여기쯤이 앞줄이고 1미터 반 여기에 뒷줄 섰는데 그 앞뒤줄 중간에 가서 이등박문이 저쪽으로 다시 돌아서 가는 걸 옆에서 권총을 들고 쏜 것이다.”
“탕, 탕, 탕!”
안중근은 현장에서 체포된다. 저격 직후 거머쥐었던 권총을 던지고 안중근은 “코레아 우라!”라는 구호를 세 번 외친다. 이토 히로부미는 자신을 저격한 이 청년의 얼굴을 끝내 보지 못했으리라. 그는 현장에서 절명했다.
이토 히로부미의 시신은 바로 일본으로 호송됐고 성대한 국장(國葬)이 치뤄진다. 일본 열도가 눈물 바다였다.
동아시아의 운명을 쥐고 흔들었던 이 정치인을 일본인들은 아직도 추앙한다. 대륙을 향하던 대일본제국의 야망, 그 한가운데서 사라져간 인물. 일본인들은 그를 추앙한다. 그의 몸에 왜 이 탄환이 박혀야만 했던지 침략자의 역사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진정한 영웅은 그가 아니라 그를 총살한 이 청년의 몫이었다.
김우종 고문 “안중근 의사의 제일 큰 공적은 두가지다. 하나는 하얼빈에서의 이토를 총살한 의거, 다른 하나는 여순감옥에서의 근 반년에 달하는 옥중투쟁이다. 하얼빈에서의 의거는 전후해서 모두 열하루사이다. 하얼빈에서의 의거를 볼 때 참 안중근 의사야말로 평범한 사람들과 비교할 수 없는 그런 영웅적 정신과 기개를 가진 인물임을 알 수 있다.”
체포 후 안중근은 일본총영사관으로 호송된다. 현재 그 자리는 소학교로 바뀌었다. 이곳에서부터 안중근은 제2의 전쟁을 시작한다.
김우종 고문 “저 지하실에 일본 사람들이 임시 구류소를 만들어서 안중근 의사가 체포돼서 러시아 헌병대에 한 반날 정도 감금됐다가 26일 저녁 10시에 여기로 왔다. 그래서 26일 저녁 10시부터 11월 초하룻날 아침 9시까지 여기에 감금됐다.”
그것은 불법이었다. 당시 하얼빈의 사법권은 러시아 측에 있었다. 그러나 일본은 그것을 무시한다.
김우종 고문 “아마 이 지하실이 후에 좀 개건돼서 변했지만 위치로서는 이 방이 안중근 의사가 감금됐던 방이 아닌가?”
안중근의 6일간의 거처. 그러나 그 흔적은 찾을 수 없다. 어렵게 남아있는 이 사진 한장조차도 이곳이 여관으로 이용될때의 사진이다.
6일 후 일본인들은 안중근을 여순감옥으로 이송한다. 이곳에서 안중근은 열한차례의 심문을 받고 재판을 받는다. 이 또한 지금까지도 논란이 되는 부분이다. 안중근에 대한 사법권은 분명 러시아에만 있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쟁을 원치 않았던 러시아는 이 모든 과정을 눈감아버린다. 러시아의 묵인 속에서 안중근은 일본의 점령지였던 이 곳 감옥에 감금된채 일본의 재판을 받는다. 그가 머물렀던 방은 특별감옥이었다. 이 감옥에서 그는 일본의 불법재판에 맞서 최후의 전쟁을 벌인다.
그는 끝까지 자신이 대한의용군의 참모중장임을 주장했다. ‘위국헌신(爲國獻身) 군인본분(軍人本分)’ 사형이 집행되던 날 아침, 그가 마지막으로 남겼다는 문장이다. 국가의 안위는 위태로운데, 그에게는 군대가 없었다. 그는 그 나라 없는 군대를 홀로 지킨다. 병사가 없는 외로운 장교, 외로운 전쟁이었다. 그러나 그 전쟁은 백만대군이 하는 전쟁보다 더 큰 위력을 발휘한다.
감옥에 수감된 직후부터 안중근은 각종 수단을 동원해 일본의 침략행위를 만방에 고하기 시작한다. 필사본으로 남아있는『안응칠역사』이 자서전에도 일본의 침략행위는 낱낱이 기술돼 있다. 더 놀라운 건『동양평화론(東洋平和論)』이다. 사형선고를 받은 직후부터 쓰기 시작한 미완성의 논문, 그는 여기서 일본의 침략적 제국주의를 정면에서 반박하며 공존의 정치체제를 대안으로 제시하고 있다.
그의 재판과정은 또 어떠했는가? 그는 재판 자체를 하나의 정치투쟁으로 바꿔버리며 국제적 이슈를 만들어낸다. 그는 일본 법정을 조롱한다.
“피고의 거짓 진술로 지금 사실 확인 때문에 큰 곤혹을 치르고 있다. 숨김없이 사실대로 진술하라.”
“이토는 한국 보호가 한국 이천만 동포의 희망이라고 소리높여 말하며 세계를 속이고 있다. 그에 비해 내 진술 몇가지를 두고 속였다고 말할 정도가 되는가?”
김삼웅 관장 “심문을 당할 때 단지동맹 동지들이나 의병항쟁을 할 때 지도자들의 이름을 대부분 말하지 않았다. 말하더라도 가명을 댔고 그런 점이 안중근 의사의 숭고한 희생정신이다. 자신은 희생되더라도 동지들을 보호해야 되겠다는 애국심이다.”
안중근은 이토를 단 한번도 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그의 눈은 예리했고 총격은 명중했다.
김우종 고문 “생각해보라. 무명의 청년이 낯선 지방에 와서 당시 하얼빈은 러시아 사람들이 통치하던 지방이었다. 러시아 사람들이 통치하던 지방에 와서 일본 제국의 괴수를 단독으로 처단한다는 건 일반 사람들이 감히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다.”
하얼빈의거[哈爾濱義擧]가 안중근의 영웅성의 출발이었다면 재판과정은 그 영웅성이 완성되는 지점이었다. 안중근에게 고등법원은 이미 법정이 아니었다. 일본 제국주의의 핵심을 응징하는 전쟁터였으며 일본 제국주의를 고발하는 선전장이었다.
“내가 이토를 죽인 것은 개인적인 원한이 아니다. 한국 독립전쟁의 일환이다. 나는 대한의용군의 참모중장 자격으로 전쟁에 나서 조국의 독립과 동양의 평화를 위해 적장인 이토를 사살한 것이다. 따라서 나는 범죄자가 아니라 전쟁 포로이며 마땅히 만국공법에 따라 나를 처리해야 할 것이다.”
변병률 교수 “단지 이토 한 사람을 처단한 것에 그치지 않고 더 나아가서 한국 국민들이 일본에게 당한 실상, 일본 제국주의 세력의 침략에 대한 실상을 낱낱이 고하려고 했던 것, 그리고 세계 만민의 공감대를 이끌어내려고 했던 측면, 조사과정에서라든지 사형과정에서 여러가지 영웅으로서 갖고 있는 의연한 인간으로서의 품격, 한 줌 흐트러짐이 없는 그런 모습들이 이후에 절절히 전해지면서 안중근 의사의 영웅적인 모습이 많이 알려졌고 또 우리가 그렇게 알고 있는 것이다.”
안중근은 일본 법정에 목숨을 구걸하지 않겠다며 항소를 포기한다. 과연 군인다운 최후였다.
“나의 행위는 동양 평화를 위해서이다. 한·일 양국 국민이 서로 일치 협력하고 평화를 도모하기를 희망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교수대에 서는 순간까지도 나는 동양 평화를 위해 기도할 것이다.”
김삼웅 관장 “『동양평화론』을 보면 여순을 평화지대로 만들고 동양 한·중·일 세 나라의 국민이 일전씩을 모아서 국제은행을 만들고 연합군대를 만들고 삼국의 청년들이 합동으로 합동을 하는 학교를 세우고 이런 구상들이 안중근 의사가 제기했던 후에 유럽에서는 70년 후에 EU공동체가 만들어지지 않았던가? 그러니까 EU가 구성되기 70년 전에 안중근 의사가 제안한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안중근 의사는 지나간 인물이 아니라 지나간 미래상이다.”
1910년 3월 26일 오전 10시 15분, 그 날 비가 내렸다. 그 빗속에서 안중근은 최후를 맞는다. 그는 죽는 순간까지 품위를 잃지 않았다. 이 흐린 흑백사진 한장을 남기고 그는 사라진다. 그가 산 생애는 꼭 30년 7개월, 향년 32세였다. 그의 마지막은 평온했다. 처절했으나 장엄하고 외로웠으나 위대했던 대한의용군의 참모중장. 그 아름다웠던 청년의 최후를 나는 다시 생각한다.
의거 직후 안중근의 권총에는 한 발의 탄환이 남아있었다. 그 의미는 무엇이었을까? 혹자는 그것을 남아있는 전쟁의 상징이라고 했다. 훗날 독립전쟁에 쓰여질 수천발의 총탄은 그 한발의 총탄에서 시작되고 있었다.
‘내가 죽은 뒤에 나의 뼈를 하얼빈 공원에 묻어두었다가 우리 국권이 회복되거든 고국으로 반장해다오. 대한 독립의 만세 소리가 천국에 들려오면 나는 마땅히 춤추며 만세를 부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