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평등’은 ‘사회적 불평등’이라는 말과 다르다. 불평등이란 인간이 태어나면서부터 가지고 있는, 근원적인 ‘차이’혹은 ‘다름’의 다른 이름이다. 조물주가 자신의 모습을 담아 인간을 만들 때, 백인과 황인, 흑인을, 그리고 남자와 여자를 만들었다. 조물주는, 같은 ‘인간’이지만 다른 속성을 지닌 인간들을 무한의 가짓수로 구별하고, 그것으로도 모자라 공간으로 인간들을 나누고, 시간으로 벽을 만들어 영원히 서로 같아질 수 없게 했다. 인간의 개체수가 무한정 늘어나 은하계를 가득 채운다 해도, 그 중에 ‘같은’ 인간은 나올 수 없다. 그것은 조물주가 개체 하나하나에 저마다의 영혼을 불어넣었기 때문이다.
다르다는 것은 하나의 선물이자 축복으로, 다르기 때문에 특별할 수 있고, 다르기 때문에 고유한 가치를 지닌다. 죽음 앞에서 평등한 것 하나를 제외하고는, 모든 인간은 불평등하다. 타고난 재주가 다르고 생각이나 외양, 기호도 제각각이어서 혹자는 남이 가진 재주를 시기하고 자신의 무능을 한탄하기도 하지만, 인간은 저마다 존재의 목적이 있다. 이때의 ‘차이’와 ‘다름’, 즉 불평등이란 가치문제와 별개로, 인간을 포함한 우주 만물의 속성이다.
그러나, 불평등하다는 말이 ‘사회적’이라는 수식어를 달면, ‘불평등’의 의미는 차원을 달리하여 ‘비교’를 수반한다. 고유의 ‘다름’에서 일탈하여 남과 내가 ‘다름’을 인지하는 순간, 불행이 시작된다. 우리는 이러한 불행을 에덴의 사과를 먹은 후 서로가 ‘다름’을 ‘알게 된’ 아담과 이브에게서, 여호와가 아벨과 자신을 달리 대함을 알게 된 카인에게서 찾을 수 있다.
조지오웰의 소설 동물농장을 보면, ‘네 다리는 좋고, 두 다리는 나쁘다’라는 문구가 나오는데, 이는 동물들을 이끄는 돼지들이 다른 동물들을 인간에 대항해 단결시키기 위해 사용한 계율로, 두 다리의 인간과 네 다리의 동물들이 ‘다름’을 ‘인지’시키고 공포심을 유발하여 내부로 단결하도록 만드는 장치이다. 돼지들의 판단 아래 날개달린 동물들의 날개는 다리로 인정하여 두 발로 서 있는 오리와 닭도 ‘네 다리’로서 ‘같은’ 편이 된다. 소설 속에서, 두 다리 인간들과의 대결구도 속에 동물들의 지배층으로 자리매김한 돼지들은 인간처럼 두 다리로 걷기 시작하고, ‘네 다리는 좋고, 두 다리는 나쁘다’던 계율은 어느새 ‘네 다리는 좋고, 두 다리는 더욱 좋다’는 계율로 바뀌고 만다.
비단 소설에서뿐만이 아니라, 인류의 역사에서 이런 장면은 끊임없이 반복되어왔다. 지배하는 사람들은 역사의 어느 순간에서든 지배당하는 사람들의 불안감과 공포, 박탈감과 분노를 다룰 줄 아는 집단이었다. 이들은 신화와 종교, 철학과 공포를 활용하였고, 근세 이전까지 훌륭하게 지배체제를 고착시킬 수 있었다. 그러나 지배당하는 집단의 의식이 성장하면서 기존의 방식은 한계에 부딪혔고, 프랑스 혁명에서 나타난 ‘민중’의 누적된 힘은 막을 수 없는 물결인 듯 보였다. 하지만, 이제까지 누적돼 왔던 ‘민중’의 힘은 지배와 피지배의 구도를 뒤엎기에는 턱없이 모자랐다. 권력은 귀족에게서 부르주아에게로 넘어갔을 뿐이고, 마치 ‘두 다리는 더욱 좋다’던 돼지들의 농간처럼, ‘계급적 지배’에서 ‘자본적 ․ 사회적 지배’로 이름이 바뀌었을 뿐이었다.
지금 우리의 현실은 동물농장보다 나을 게 없다. 역사의 고비마다 시대의 흐름을 바꿨던 청년들은 자본주의 상품의 달콤한 아편에 취해 무기력해졌고, 취업을 구실로 목을 쥐고 흔드는 경제 시스템 아래 비판력을 잃고 순종적인 취업준비생으로 길들여졌다. 과거와 현재의 정권은 이구동성으로 ‘청년실업문제 해결’을 외치고 있으나, 정작 해놓은 일이라곤 공공근로나 비정규직만 양산한 것뿐... 그러한 현실에 저항해야 할 청년들의 체감온도는 아직도 양지에 있는 듯 하다. 그들은 동사 직전에야 한기를 느끼게 될지도 모른다.
권력이나 부를 가진 자들은 보수적일 수밖에 없듯이, 그들이 외치는 ‘사회적 불평등 해소’의 구호는 허구일 뿐이다. 지배당하는 자들이 그럭저럭 버티며 살아갈만한 지금의 상태는 지배하는 자들이 권력을 유지하는 데 최적화된 상태이다. 지배하는 자들은 변화를 원하지 않는다. 부득이하게 변화해야 한다면, ‘사회적 불평등 해소’와 ‘청년실업문제 해결’을 외치며, 지배당하는 자들을 그들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이끌어 갈 뿐이다. 지배층에서 도태되는 일부의 자리를, 지배층으로 새로 편입되는 일부가 채우고, 지배와 피지배의 영속적인 관계는 그렇게 신진대사를 한다. 결국, ‘사회적 불평등’이라는 것도, 그것의 ‘해소’라는 것도 모두가 허구인데, “사회적으로 불평등하다”며 사람들을 선동하고 그것을 해소할 수 있다는 환상을 보장하며 힘을 빌리는 사람들은 어제도 오늘도 지배하는 자들이었다.
의식의 성장 없이 선동에 이끌려 다니는 한, 변화는 없다. 오랜 세월 정련된 지배의 구조에 이용당할 뿐이다. 그런 점에서, 사회적 불평등을 외치는 ‘가진 자’들은 더욱 경계해야 한다. 그들은 ‘적’을 설정하고, ‘허구’를 경고하며, ‘환상’을 약속하기 때문이다. ‘동물농장’에는 이런 문구가 나온다.
‘모든 동물은 평등하다. 그러나 어떤 동물은 더욱 평등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