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코틀랜드 길들이기
(서프라이즈 / 개곰 / 2009-11-07)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던 스코틀랜드 출신의 군주 제임스 2세가 명예혁명으로 1688년 왕위에서 쫓겨나면서 스튜어트 왕조가 끊긴 뒤로 스코틀랜드인은 스튜어트의 왕통을 잇기 위한 복위 운동을 벌였다. 그러나 1746년 컬러던 싸움을 마지막으로 스튜어트 복위 운동은 사실상 막을 내린다. 잉글랜드 왕의 아들이 직접 지휘한 왕당파 군대는 스코틀랜드인이 다시는 반란을 꾀할 엄두를 내지 못하도록 이 싸움에서 수천명의 스코틀랜드 군인을 잔인하게 "도살"했다.
그러나 영국이 본격적인 식민지 쟁탈전에 나서면서 군인이 부족해지자 스코틀랜드인도 컬러던 싸움이 있은 지 겨우 13년 만에 프랑스 군대와 싸우는 영국 전투부대의 일원으로 캐나다 전선에 투입되었다. 그리고 거기서 맹활약했다. 거친 스코틀랜드의 산세답게 스코틀랜드인은 싸움에 능했고 특유의 부족 의식으로 똘똘 뭉쳐 막강한 전투력을 보였다. 영국은 스코틀랜드 군인 덕분에 캐나다에서 중요한 교두보를 마련할 수 있었다.
영국의 해외 식민지가 늘어나면서 자연히 스코틀랜드인에게도 많은 기회가 돌아왔다. 스코틀랜드인은 브리튼 섬에서는 잉글랜드인에 눌려 사는 2등 국민이었을지 모르지만 해외에서는 큰소리치면서 1등 국민으로 살아갈 수 있었다. 특히 노예무역을 통해서 짭잘한 재미를 보았다. 1706년 잉글랜드와 연합왕국으로 나라를 합치면서 스코틀랜드 의회가 가장 먼저 들고나온 요구도 잉글랜드인이 독점하던 노예무역에 스코틀랜드인도 진출할 수 있게 해달라는 것이었다. 카리브해의 담배, 면화, 사탕수수 농장에 필요한 노동력은 아프리카의 흑인 노예로 조달했는데 그 중간 거점 역할을 한 것이 스코틀랜드의 항구 도시들이었다. 스코틀랜드는 노예무역으로 챙긴 막대한 자금으로 산업화를 이루었다. 지금도 자메이카에는 캠벨이라는 스코틀랜드 성을 가진 사람이 스코틀랜드보다 더 많을 정도로 카리브해 지역에는 스코틀랜드의 흔적이 뿌리깊게 남아 있다.
스코틀랜드인은 영국이 아메리카에서는 프랑스, 스페인과 벌인 싸움에, 유럽의 크리미아 같은 곳에서는 러시아와 벌인 싸움에, 아시아에서는 중국과 벌인 아편전쟁에, 심지어는 남아프리카에서 네덜란드인 후손인 보어인과 벌인 싸움에도 적극적으로 뛰어들어 무공을 세웠다. 남아프리카의 로디지아(짐바브웨의 옛이름)에서 백인 정권을 이끌면서 수많은 흑인을 학살한 이언 스미스도 스코틀랜드 출신이다. 스코틀랜드 군인들이 영국의 식민지 쟁탈 전쟁에서 눈부신 활약을 하니까 영국의 빅토리아 여왕은 스코틀랜드 예찬론자가 되었다. 1746년 컬러던에서는 거의 "민족 청소"에 가까운 살륙을 당하면서 영국 군주에게 멸시를 당했던 스코틀랜드인이 그로부터 150년 뒤에는 영국 군주의 숭배를 받기에 이르렀다. 2등 국민 스코틀랜드인은 대영 제국의 영토 확장에 지대한 공을 세우면서 1등 국민에 버금가는 대접을 받았다.
스코틀랜드 군인이 동족을 잔인하게 죽인 영국 군주를 떠받드는 영국군의 일원으로 열심히 싸울 수 있었던 것은 응분의 대접을 받아서이기도 했지만 무엇보다도 동족과 싸우는 전쟁에 동원된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스코틀랜드 군인은 이민족하고만 싸웠다. 만약 스코틀랜드인이 해외 전쟁에 투입되지 않고 가령 스코틀랜드에서 일어난 봉기를 진압하는 영국군의 일원으로 동원되었더라면 대부분의 스코틀랜드인은 심적 갈등을 겪고 군복을 벗거나 탈영하거나 심지어는 반란을 일으켰을 것이다. 적어도 자기 동족을 죽이는 원정에 앞장서지는 않았을 것이다.
지금 영국에서 아랍계와 이슬람계의 이민 2, 3세 젊은이들이 영국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는 가장 이유는 여러 가지 문화적 차이도 있겠지만 가장 큰 원인은 부모가 혹은 자신이 뼈를 묻고 살려고 이민 온 영국이라는 나라가 자기와 같은 문화와 종교를 가진 사람들을 죽이는 이라크 전쟁, 아프칸 전쟁에 앞장섰기 때문이다. 아무리 이민을 왔다고는 하지만 자기와 생김새가 비슷하고 종교가 같고 말이 통하는 사람들을 학살하는 전쟁에 앞장서는 나라에 정을 붙이기 어려워서다. 가정이긴 하지만 만약에 영국이 스리랑카라는 불교국을 미국과 함께 침공했을 경우 영국에 사는 아랍계와 이슬람계 후손은 이라크와 아프간처럼 극렬하게 반발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아니, 만약에 영국 안에서는 2등 국민 취급을 받는데 스리랑카에서는 1등 국민으로 큰소리치면서 살 수 있다면 은근히 영국이 식민지 확대로 나에게도 기회가 많이 돌아오기를 바라는 것이 인간의 자연스러운 욕망인지도 모른다. 그것은 스코틀랜드가 영국 제국에 길들여진 역사가 잘 보여준다. 스코틀랜드인이 비겁해서가 아니다. 입장이 바뀌어서 영국인이 스코틀랜드인의 처지가 되었다 하더라도 아마 스코틀랜드인과 별로 다르지 않은 길을 걸었을 것이다. 잉글랜드 군인도 스코틀랜드 군주를 떠받드는 스코틀랜드 군대의 일원으로 아마 열심히 싸웠을 것이다. 스코틀랜드 제국이 커지면 잉글랜드인에게 돌아오는 기회도 그만큼 많아진다.
그러나 스코틀랜드인도 잉글랜드인도 아랍인도 이라크인도 아무리 기회가 많이 생긴다 하더라도 자기 동족을 죽이는 싸움에는 선뜻 앞장서지 않았을 것이다. 적어도 그런 데 앞장선 사람이 스코틀랜드에서 잉글랜드에서 아랍에서 이라크에서 지도자 노릇을 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자기 동족을 죽이는 데 앞장선 사람이 그 민족의 지도자 노릇을 한다는 것 자체가 상식을 가진 인간 사회라면 있을 수 없는 언어도단이다.
그러나 그런 언어도단이 버젓이 통용되는 나라도 있다. 4.19 시민혁명으로 들어선 민주주의 정부를 군사반란으로 뒤엎은 박정희는 안정된 교직을 버리고 천황에게 혈서를 써서 늦은 나이로 만주 군관학교에 들어가서 일본 육사로 편입해서 졸업하고 관동군에 배치되었다. 관동군은 일본 제국주의와 싸우던 중국인과 조선인을 토벌하던 군대다.
프랑스 식민지 코르시카 출신의 나폴레옹이 프랑스 군인으로 프랑스 권력의 정상에 오른 것처럼 식민지 조선 출신의 박정희도 일본 군인으로 일본 권력의 정상에 오르기를 꿈꾸었던 것일까? 나폴레옹도 박정희도 야심에 불타는 식민지 청년이었다는 점에서는 똑같았을지 모르지만, 청년 나폴레옹은 열렬한 코르시카 민족주의자였다. 멀리는 페니키아인, 로마인, 사라센인부터 가까이는 피사인, 제노아인, 그리고 1768년부터는 프랑스인에게 유린당한 조국 코르시카에 대한 연민과 프랑스에 대한 적개심이 청년 나폴레옹의 심장 한복판에 있었다.
나폴레옹이 한때 동지였던 코르시카 민족주의자들과 결별한 것은 프랑스 혁명으로 구체제를 무너뜨리고 들어선 공화국 정신을 더 보편적 가치로 받아들였기 때문이었다. 프랑스 공화국 밑에서는 코르시카인도 프랑스인과 공존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나폴레옹의 코르시카 민족주의는 프랑스 제국주의의 폭정에 굴복한 것이 아니라 인종을 넘어 평등과 공존을 추구한 프랑스혁명 공화주의로 승화된 것이었다.
그러나 박정희는 조선을 무능한 왕조로 몰아간 일본 제국주의자들의 선전에 뼛속까지 세뇌되어 조국을 부정하고 자민족을 혐오한 사람이었다. 일본은 1850년대 중반 서양의 무력 위협에 무릎을 꿇고 잇따라 불리한 조약을 맺은 뒤 1876년에는 조선을 상대로 자기가 서양과 맺은 조약보다 훨씬 불리한 내용의 조약을 강요했다. 그러나 조선은 미국과 1882년에 일본보다 훨씬 유리한 조건으로 수호통상조약을 맺었다. 그런데 영국을 들쑤셔서 이것을 다시 파토낸 나라가 바로 일본이었다. 일본은 조선을 근대화시킨 은인이 아니라 자력으로 근대화하려고 안간힘을 쓰던 조선을 악착같이 훼방놓은 파괴자였다.
박정희가 충성을 다짐한 것은 민족들의 평등과 우애와 공존을 추구한 일본 공화주의가 아니라 일본 제국주의였다. 일본인 왕을 하늘처럼 섬기는 일본 천황제였다. 조선인 박정희는 일본인 왕에게 굴복했다. 일본인 왕에게 굴복한 박정희를 영웅으로 섬기는 사람들은 국민이나 시민이 아니다. 그들은 지역민이요 토민이다. 아니, 일본 왕의 자랑스러운 신민이다.
(cL) 개곰
원문 주소 - http://www.seoprise.com/board/view.php?table=seopris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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