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하다.
해고될 일 없는 나의 작은 꽃집이 있기에
진조 공원에 노숙자가 있기에
리시안샤스가 아직은 시들지 않았기에
때되면 태우러 오는 시내버스가 있기에
TV볼륨을 아무리 키워도 나무랄 사람이 없기에
자고일어나면 내일이 있기에
너무나 행복하다.
그러나, 행복이 넘쳐흐르는데
삶은 지루함의 연속이다.
한 번만 용기를 내서 소통의 무언가를 전했다면 1초동안은 날 향해 웃어 주었을까?
1분만이라도 대화다운 대화를 나눴다면 1시간은 그로 인해 행복해질 수 있었을까?
하루만 시간을 거꾸로 돌릴 수 있다면 나는 1년을 새롭게 살 수 있었을까?
퇴근시간- 사실 퇴근 시간이라고 할 것 까지도 없는 것이었지만, 내가 사장이자 종업원이므로 -이 지나서도 자리를 뜨지 못하고 앉아 그런 종류의 생각들로 하염없이 다른 세상으로 흘러들어가고 있었다.
흘러들어간 세상에는 후회라는 이름의 점잖은 신사와 체념이라는 아름다운 아가씨가 살고 있었다. 후회씨와 체념양은 사랑하는 사이였던 것 같다. 언제나 함께 했고 서로의 모자란 점을 채워주며 부족함없이 살았었다. 그러나 후회씨의 무지막지한 이기심에 못이겨 체념양이 그와 함께하던 집에서 뛰쳐나왔고 혼자가 된 후회씨는 마음에 큰 상처를 입었다. 체념양이 떠난지 오래지만 후회씨는 체념양이 다시 돌아와 자신을 다잡아 주길 바랬다. 맘 약한 후회씨는 자기비판이란 두터운 옷을 껴입고 체념양을 찾아나섰지만 눈씻고 찾아보아도 체념양은 더이상 후회씨의 앞에 나타나지 않았다는 뭐 그런 이야기다.
뒤죽박죽의 머리속을 주먹쥔 손으로 두어번 쥐어 박았다. 캉캉거리는 빈 깡통 소리가 날 것 같아 두려웠던 주먹이 오히려 무언가 가득 담긴 듯한 둔탁한 소리가 나자 더욱 힘껏 머리를 휘갈겼다.
몇대 얻어맞은 머리로부터 1초, 1분. 1시간이 지나감에 따라 생생했던 그와의 첫 만남이 감정으로 더럽혀져갔다. 나의 사적인 감정들로 객관적이고 군더더기 없던 현실이 빛바랜 추억화 되고 미화되다 못해 무시무시한 망상으로 번져갔다.
검은색 하프코트에 하얀 후드티를 단정하게 받쳐입은 슈이치가 서 있었다. 언제나 봐왔던 무미건조한 표정이 아닌 들뜬 표정의 슈이치가 나를 바라보며 입을 열고 있었다. 검정 하프코트에 달린 금장단추가 둘 사이의 공기를 무겁게 만드는 것 같았다.
엉거주춤하게 일어나 노란색 해바라기가 커다랗게 그려진 하얀 앞치마에 손을 몇번이나 문질러 닦았다. 그는 장미꽃다발을 사러 왔다고 말하며 애매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그것은 미소라고도 말할 수 없는 미묘한 무언가였다.
미소를 닮은 미묘한 목소리가 허공을 맴돌기만 할 뿐 내게 전달되지 않았다. 마치 TV의 아름다운 화면에 음소거가 된 상태마냥 나는 그의 입모양이 벙끗 거리는 것을 보고 한참이 지난 뒤에야 우리 두 사람이 아닌 제 3자의 목소리가 공기중에 떠도는 것 처럼 느껴졌다.
처음으로 듣는 그의 목소리가 어색하기만 했고 몇 번이고 상상해봤던 그의 목소리들 중 무엇이 가장 흡사할까를 놓고 고민하고 있었다. 짧디 짧은 순간이었지만 내가 만들어낸 익숙한 그의 목소리- 단 한번도 들어본 적 없는-와 진짜 그의 목소리 사이에서 혼동이 온 것은 사실이었다.
장미꽃 종류도 묻지 않고 포장지 색깔도 묻지않고 벌벌벌 떨며 꽃을 가져와 포장을 했다. 그 역시 아무말도 하지 않고 내가 하는 모습을 지켜보고 섰다.
얼마 안있어 슈이치는 내게서 꽃다발을 건내받았다. 꽃을 내려다보는 그의 표정이 사정없이 '행복하다'를 외치고 있는 것 같아 어딘지 모를 쓰라림을 스스로 인지하고 만다.
멀리서 바라보기만 했던 그를 처음으로 마주했지만 꿈만 같은 소통의 일원이지만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정신착란 혹은 분열증을 일으킨 사람마냥 아둥바둥거리며 연신 손을 앞치마에 문지르고 있었다.
그의 눈에는 내가 꽃값을 지불하고 그냥 가면 어쩌나 하고 전전긍긍하는 사람처럼 비췄는지 아, 하는 작은 탄성을 내지르며- 그 탄성마저 나를 긴장하게 했다 - 닥스의 짙은 갈색과 초록색 체크 문양의 가죽 지갑을 뒷주머니에서 꺼내어 값을 지불했다.
그는 얼마냐고 묻지도 않았고 나는 얼마라고 대답하지도 않았다. 입만 벙긋벙긋 거리는 내게 싱긋 웃어보이며 2만원을 내밀었다.
2만원인거다.
그가 내민 것은 2만원이지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2만원인 거다. 그 2만원이 너무나 크게 보여 미친듯이 앞치마에 닦아대던 양 손이 또다시 떨고 있었다.
머나먼 조선시대, 임금이 하사한 상금을 받을 때 우리 조상은 이렇게 손을 떨었을까. 더 머나먼 삼국시대, 포로가되어 사약을 받을 때 우리 조상은 이렇게 손을 떨었을까.
슈이치는 그렇게 돌아서 나갔다. 그의 기분좋은 콧노래만 남겨놓고. 언젠가 들어본 적 있는 것만 같은 노래를 흥얼거리며 홀로 행복한 세상으로 흘러들어가 버렸다.
현실에서 그가 사라지고 난 뒤에도 나는 손을 떨고 있었다. 손에 쥐고 있던 이만원이 임금의 상금도 적장의 사약도 아님을 나중에서야 깨달았다.
이것은 그냥 2만원이다.
나는 더이상 아무렇지도 않았다. 그저 남겨주지 못한 3000원의 몫 만큼 마음으로 그를 배웅했다. 나는 더이상 아무렇지도 않았다. 정말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