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디 엔드 오브 더 월드
“공부를 다시 시작하겠어요. 하지만 학교로 돌아가지는 않을 거야. 서울에서 자취를 하면서 검정고시를 보도록 할게요.”
병원에서 나온 지 아마도 한 달은 지난 것 같은 어느 날, 내 곁에서 함께 게임도 하고 등산도 하고 그렇게 날 돌보아주던 삼촌이 군대에 간지 며칠 지나지 않아, 나는 철저히 혼자가 되겠노라고 결심하며 말문을 열었다. 내 부모는 공부라면 껌뻑 죽는 그런 다른 가정의 부모들과는 달랐지만 이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최선의, 그리고 최악의 길이라고 생각했기에 부딪혀 보기로 했다.
“그래. 하지만 학교 선생님이 다시 돌아와도 좋다고 하는데, 그냥 학교로 돌아가는 건 어떻겠니?”
“학교는 싫어.”
“왜 싫은지 말을 해야지, 왜 그러는데? 서울 가서 살면 돈이 많이 들잖아?”
“그냥 싫어, 싫다고! 돈은 내가 벌면서 공부 할 거니까 혼자서 서울로 가겠어.”
“알았다. 아무튼 좀 더 알아보고 생각해 보자.”
늘 이런 식이었다. ‘좀 더 생각해보자’, ‘기다려보면 알아’라는 말. 가장이란 그 집 아이들의 생각과 행동까지 통제해야 하는 전권을 가진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사는 사람이다. 단지 게임기를 생일 선물로 갖고 싶다는 어린 아이의 소원을, 먹지 못하는 생굴을 먹어야 사준다는 계약으로 자녀를 구슬리는 사람이다. 자식은 무조건 강하게 커야 한다는 생각으로 교육을 하다 보니 나는 몸과 마음이 따로 노는 이중인격자가 되어 이제 어느 곳에서도 치료를 받을 수 없게 되었다. 따듯한 말 한마디, 친절한 배려와 관심, 지속적인 애정과 사랑에 굶주려 아무에게나 사랑을 구걸하게 되어 버린 나는 모든 잘못을 그에게서 찾을 수밖에 없었다.
“내가 나가서 공부하는 걸 막겠다면 나도 더 이상 집에 있지 않겠어요.”
“기다리라고 했잖아! 어련히 알아서 해줄까봐!”
누군가는 가족들 사이에서, 특히 한국의 가정에서는 논리가 필요없다고 한다. 논리보다 정이 먼저고 사랑이 먼저라고... 하지만 분명한 건 사랑이나 감정에도 논리가 작용한다는 사실이다. 멀리 있는 사람보다 가까이 있는 사람을 사랑하게 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며 화를 내는 아버지의 감정에는 분명 시퍼렇게 살아있는 나름의 논리가 있다. 하지만 나는 그러한 말도 안 되는 감정의 논리와 부딪히기가 싫었다. 여기서 둘이 부딪힌다면 파탄밖에는 없다는 걸 잘 알기 때문에...
이틀 뒤에 어머니는, 서울 동대문에 검정고시로 유명한 고려학원이 있으니 같이 가서 등록을 하자고 했다. 하지만 집안 사정상 자취는 어려우니 통학을 하라는 조건을 달았다. 역시나 그 조건, 조건, 조건... 나는 일단 알겠다고 했다.
서울로 가기 위해서 전철을 탔다. 금정역, 안양역, 관악역을 지나 가리봉역에 도착했을 때 누군가가 지하철에서 내리면서 나와 슬쩍 부딪쳤다. 고의는 아닌 접촉, 하지만 우연이라 하기엔 너무나 익숙했던 타자의 몸짓을 느낀 나는 눈을 들어 그 사람을 쳐다봤다.
진아였다... 여전히 짙은 검은색 머리를 하고, 핏기 없는 투명한 얼굴도 그대로인 모습의 진아는 길을 찾기 위해서인지 바로 내 앞에서 지하철 문을 내렸고, 두리번거렸다. 아마도 진아는 나를 못 본 듯 했다. 아니, 나를 몰라 본 듯 했다. 정신병원과는 다른 곳에서, 아니 어쩌면 너무나 커져버린 이 세계라는 정신병원 안에서 서로를 알아보기에는 우리가 너무 어렸던 것일까. 나는 여기서 내려 진아에게 말을 걸어야 할지 몰라 망설였다.
지하철 문이 닫히려는 순간, 그 순간의 시간은 영원한 것 같았다. 영원한 것은 시공간에 새겨진 기억과 그 기억을 담보하는 존재밖에 없다. 수억만 분의 시간으로 지하철 문은 아주 느리게 닫히고 있었고 나의 생각은 영원을 향해 열렸다. 의식이 또렷할수록 현실의 모든 사건과 행동들은 제약을 받게 되었는데 마치 시간이 정지했을 때만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는 그런 상황처럼 느껴졌다.
문이 닫혔다. 우리의 간격은 서서히 멀어졌다. 이것이 정말 마지막이라는 것을 함께 예감하면서... 무언가 가장 소중한 것을 이렇게 떠나보내야 한다는 순간에 느끼는, 이러한 순간을 창조한 신의 말도 안 되는 섭리와 그 순간이 나의 운명임을 받아들여야 하는 인간의 의지 사이에 존재하는 너무나 많은 모순들은 아마도 나를 평생 괴롭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처음으로 나를 모독한다. 그러한 느낌들은 이제 하나의 갈망으로만 남아서 나는 바보가 되는 것일지도...
「이름은 중요한 거라구.」
진아가 나에게 말해주었던 것, 그 하나의 테제(these)는 진아의 존재와 일치되어 나의 추억 속으로 멀그스름히 기억될 뿐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