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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7월 19일 - 나보다 늦게 가기

박웅호 |2010.07.19 09:14
조회 64 |추천 0

 원주로 출장을 갈 일이 생겼다. 장거리 운전이니 부모님 걱정이 당연할 법도 한데 괜히 아침부터 애 다루듯이 하는 것이 짜증스러웠다. 얼른 밥을 먹고 현관문을 열어 젖히는데 아버지가 하시는 말씀

 

 "나보다 조금 늦게 가면 돼."

 

 나보다 늦게 가다니. 이건 도대체 무슨 말인가? 남보다 조금 늦게 가라는 말이 혀끝에서 ㅁ을 외면하고 급하게 튀어나온 말이라 생각하고 별로 대단할 것 없는 출근길에 올랐다.

 

 슬슬 사람들이 모여든다. 여름이다. 후텁지근한 날씨 때문에 평소보다 짜증스럽게 매일 다니던 길로 접어 들었다. 똑같은 직선도로, 똑같은 곡선구간, 똑같은 공사중 표지판. 나에겐 똑같은 길일지 몰라도 여길 처음 오는 사람에겐 굉장히 당황스러운 도로겠거니 싶었다.

 직선이 쫙 펼쳐 있는가 하면 그 끝에는 탱크 저지선이 무슨 장승처럼 양 옆을 지키고 섰는 좁은 도로가 서 있고, 또 다시 직선이 나오는가 싶으면 그 끄트머리엔 공사중 표지판이 서 있어 초행길 운전자는 적잖이 당황스러울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시간은 촉박한데, 또 사고나던 그 날의 기억이 막 떠오르려는 순간에 곡선구간이 끝나는 직선도로에 차가 줄지어 서 있다. 대략 봐도 한 15대는 그렇게 서 있는 것 같다. 줄지어 선 차량들은 저마다 빨리 가겠다고 이리저리 차궁둥이를 흔들고 추월의 기색을 엿보지만 강원도 도로가 어디 그리 만만찮은 곳이 있겠는가?

 그러다 말뿐. 계속해서 그 대열을 유지한 체 몇 분인가 달려야만 했다. 아우~ 점점 짜증이 났다. 빨리 가야하는데. 빨리 가야하는데.

 

 순간 아~ 하는 탄성이 흘러나왔다. 나보다 늦게 가기. 생각해 보면 내 앞에 줄지어 선 차량들도 나보다야 빠르겠지만 그 앞을 지나간 어떤 차량들 보다도 더 느리게 가고 있는 것이다. 아무리 악셀을 밟고 차를 휘몰아쳐도 나보다 그 길을 먼저간 누군가는 있게 마련이고, 모든 차들보다 더 빨리 모든 길을 달릴 수는 없는 노릇인 것이다.

 남보다 늦게 간다는 걸 사람들은 남들에게 졌다고 생각하려는 경향이 있다. 남보다 늦으면 내 차가 남들보다 성능이 조금 뒤쳐지는 것 같아 짜증스럽고, 남들보다 내 삶이 도태되는 것 같아 삶을 무기력하게 만들기도 한다. 그게 바로 '나'인 것이다.

 눈에 보이는 것에만 얽매여 직선 도로 끝에 곡선 구간이 있고, 공사장 표지가 있는 것을 모르는 것처럼 무턱대고 악셀을 밟다 보면 사고의 위험이 그만큼 높아지듯이 '나'만을 생각하고 '나'의 그런 욕심을 이겨내지 못하면 언제든지 지난 번과 같은 사고가 나지 말라는 법도 없는 것이다.

 남보다 늦게 가는 건 쉽다. 오늘 같이 어쩔 수 없이 15대의 차량 행렬 끝에 끼어서 추월의 의지조차 내 보지 못하고 짜증을 냈던 것도 마찬가지다. 그냥 뒷차의 잘 빠진 엉덩이를 음흉하게 째려보며 길만 따라가면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보다 늦게 가는 건 쉽지가 않다. 항상 남보다 앞서고 싶어하고 남보다 우월한 위치게 서려하고 남을 이기려는 그 '나'를 다스리고 그 '나'에게 지는 법을 배우지 못하면 언젠가는 쓸데없이 다른 차를 추월하려다 사고를 낸 운전자 꼴이 되고야 말 것이다.

 

 나보다 늦게 가기. 모처럼 시속 50킬로미터로 천천히 출근을 했다. 계속해서 다른 차들을 추월하려던 '나' 때문에 조금은 짜증스러운 출근길이었지만, 아버지의 한 마디 말씀 덕분에 학교에 도착할 때쯤엔 아~ 천천히 오길 잘 했구나 생각이 들었다. 가끔은 이렇게 '나보다 늦게 가는' 출근길에 조금 더 많은 시간을 들여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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