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책갈피

부르주아 계급의 역사적 기원, 로마제국과 프랑크족

hanolduol |2006.11.10 10:52
조회 76 |추천 0

귀족들의 두 번째의 커다란 적수는 행정감독관들의 앎이었다. 재판관들의 앎과 마찬가지로 이들의 앎도 귀족의 권한과 부를 좀먹게 했기 때문이다. 이 앎 역시 왕을 현혹시키고 그에게 환상을 심어주는것이었다. 왕이 자신의 권한을 행사하고 사람들의 복종을 얻어내며 재정을 확보할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 앎 덕분이었다. 이것은 행정적, 경제적, 수량적 앎이다. 이런 앎에 대항하여 귀족들은 다른 형태의 인식, 즉 역사를 부각시키고자 했다. 부(富)의 역사, 다시 말해서 부의 이동, 수탈, 도적질, 속임수, 빼돌리기, 빈곤화, 파산등의 역사이다. 왕과 부르주아지에 의해 자행된 부도덕한 행위들의 결과인 실제적인 부(富)가 어떤 파산, 어떤 부채, 어떤 부당성으로 축적되었는지를 보여주기 위해 부의 생산이라는 문제의 뒷편으로 돌아가 보는 역사이다. 그러니까 그것은 부의 분석이 아니라 끝없는 전쟁에서 귀족들이 파산하는 과정의 역사이고, 교회가 교묘한 계략으로 토지와 소득을 차지하는 과정의 역사이며, 부르주아지가 귀족을 빚지게 하는 과정의 역사이다. 한 마디로 국왕의 금고가 귀족들의 소득을 깎아먹는 과정의 역사이다.
그러면 구체적으로 불렝빌리에가 역사 속에서 찾아낸 잊혀진 앎, 교묘하게 감추어진 계약은 무엇인가? 그는 5세기, 결국 서로마 제국의 붕괴를 불러온 야만족(로마인들은 북방의 게르만 족을 이렇게 불렀다)의 갈로-로멩지역(기원 원년부터 로마가 5백년간 지배하고 있던 프랑스의 옛 지역) 침입으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프랑크족(게르만의 한 부족)은 언제 골(Gaule, 프랑스의 옛 지명)에 침입했으며, 그들은 거기서 무엇을 발견했는가? 이것이 그의 첫 번째 질문이다. 17세기의 전설적인 역사 이야기에 의하면 프랑크족은 원래는 골인이었으마 일찌기 골 지방을 떠나 라인강 저편으로 이주해간 골인들이며, 그들이 고토에 다시 돌아왔을 때 갈로-로멩 체제는 로마의 지배권과 행복한 화해를 이룬 도원경과도 같은 사회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불렝빌리에가 묘사한 골은 그저 단지 로마인들에게 정복된 땅이었을 따름이다. 정복된 땅이란 로마의 절대권, 다시 말하면 로마인들에 의해 제정된 황제권 혹은 왕의 특권이 골에서 결코 백성과 국토와 한 몸이 되어 받아들여지고, 수락되고, 토착화된 권리가 아니었다는 의미이다. 이 권리는 그저 정복의 사실이었을뿐이고, 골은 그저 예속된 나라였을뿐이다. 로마의 지배권은 백성들로부터 동의된 통치권이 아니고 단지 한 민족에 대한 이민족의 지배였을뿐이다. 로마 지배 시대의 골이 아주 행복한 도원경이었다는 17세기 당시의 전설을 무산시키는 이 묘사는 왕의 권한에 대한 도전이다. 왕이 로마의 절대권을 계승했다고 주장하지만 그것은 골의 영토에 대한 기본적이고 본질적인 권리가 아니라 그 과정이 결코 명예스럽지 못한 한 특정 시기의 역사에 유래한 권리일뿐이라는 것이다. 게다가 그 로마의 절대권은 결국 게르만에 의해 전복되고, 쓸려나가고, 정복되었다. 그것도 우연한 군사적 패배에 의해서가 아니라 내적 타락의 필연성에 의해서였다. 여기서부터 불렝빌리에는 골에 대한 로마 지배의 실질적인 효과를 분석한다.
기원 원년 줄리어스 시저가 골 지방을 점령한후 로마인들은 그들에게 맞설수 있는 유일한 토착의 군사 세력인 귀족 무사들의 무장을 해제했다. 귀족을 무장 해제시키고, 정치적, 경제적으로 그들의 지위를 저하시킨 것은 하층민의 인위적인 지위 부상에 의해 가능했을 것이다. 이때부터 로마인들은 자신들이 필요로 하는 귀족을 새로 형성했는데, 이것은 무사 귀족이 아니라 - 무사들은 그들에게 대적할 위험이 있으므로 - 행정적인 귀족이었다. 이들 행정적인 귀족이야말로 골의 로마화에 있어서, 그리고 특히 골의 부를 끌어내어 그들에게 유리한 재정을 확보하는데 있어서 아주 유용한 존재였다. 이렇게 해서 민간적, 사법적, 행정적 귀족이 탄생했다. 이 귀족의 특징은 첫째 로마법에 정통하여 그것을 아주 섬세하고 정확하게 수행할수 있었고, 둘째 로마어를 할줄 알았다는 것이다. 새로운 귀족이 나타난 것은 어학 실력과 법 수행의 주변에서였다. 이처럼 무인 계급을 없애고 문치의 귀족을 만들어낸 순간부터 로마인들은 라인강 저편에서 온 침략자로부터 골을 지킬 능력이 없게 되었다. 더 이상 군사 귀족이 없었으므로 그들이 점령하고 있는 이 골의 땅을 지키기 위해 그들은 용병, 다시 말해서 돈을 받고 싸우는 병사들에 의존하지 않을수 없었다. 돈을 받고 싸우는 용병의 유지는 엄청난 재정을 필요로 했다. 로마의 지배층은 이 부담을 골인들에게 지웠다. 골인들로부터 용병을 차출했을뿐만 아니라 용병의 유지 비용도 그들에게 물렸다. 이 부담으로 산업은 정체되고 사람들은 가난해졌다. 프랑크족의 골 정복이 가능했던 것은 바로 이런 총체적 황폐화의 상태 안에서였다. 그러나 아무리 그렇다 하더라도 부유하고 인구가 많은 골 지방이 어떻게 그리고 왜 가난하고 인구도 별로 많지 않은 소수의 게르만 민족에게 정복되었는가의 의문이 남는다. 여기에서 불렝빌리에는 스와송의 항아리 라는 하찮은 에피소드를 역사에서 발굴해 자기 가설의 중요한 지렛대로 삼는다. 나중에 메로벵 왕조의 시조가 된 프랑크족의 왕 클로비스전리품을 나눠주는 의식을 거행할 때, 그는 한 항아리 앞에서 이건 내가 가져야지! 라고 말했다. 그러자 한 전사가 일어나 이렇게 말했다. 당신은 이 항아리를 가질 권리가 없소. 아무리 왕이라도 당신은 다른 사람들과 똑같이 전리품을 나눠야 하오. 당신은 전쟁에서 얻은것에 대해 아무런 선매권도, 절대적 선점권도 갖고 있지 않소. 전쟁을 통해 노획된 것은 여러 정복자들에게 절대 소유물로서 분배되어야 하고, 왕이라고 해서 우선권을 갖고 있는 것이 아니오. 이 일화는 게르만 무사들의 독립적이고 자유스러운 기질과 민주적인 체제를 잘 말해준다. 그리고 이것은 또 게르만인들이 로마적인 권력 조직에 얼마나 거부감을 갖고 있었는지를 잘 보여준다. 이것이야말로 비교적 적은 숫자로 골에 침입하여 그때까지 가장 강했던 제국을 격파할수 있었던 프랑크족의 수수께끼를 풀어주는 열쇠이다.
프랑크인들은 로마인들의 허약성과 대비되는 강건함을 갖고 있었다. 그들의 힘은 우선 로마인들이 없어도 좋다고 생각했던 것, 다시 말하면 무사적 귀족의 존재에서 나왔다. 프랑크 사회는 완전히 무사들을 중심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로마의 군인들이 용병인것과는 달리 이들은 모두가 프랑크인들이었다. 이 무사 귀족들은 왕을 하나 갖고 있었지만 그 왕의 기능은 평화 시절에 분쟁을 해결하고 사법적 문제를 다루는 것 뿐이었다. 왕들은 민간의 법관일뿐 그 이외의 아무것도 아니었다. 게다가 왕은 무인 그룹의 공동의 동의로 선출되었다. 그들이 수장(首長)을 뽑는 것은 강력한 조직과 유일한 권한이 필요한 전쟁 기간뿐이었다. 그리고 그 수장의 직위도 절대적인 다른 모든 원칙들에 복종하는것이었다. 수장은 전쟁의 수장이고, 반드시 민간 사회의 왕일 필요는 없었지만 가끔은 일치하기도 했다. 역사적으로 아주 중요한 클로비스 같은 사람은 분쟁을 해결하기 위해 뽑힌 민간의 재판관이면서 동시에 전쟁의 수장이었다. 여하튼 프랑크의 사회는 평화시에는 최소한의 권력만이 있는 사회, 그러니까 최대한의 자유가 있는 사회였다. 그런데 이 무사적 귀족들이 누렸던 자유는 만인의 평등과 관용의 자유가 아니라, 지배에 의해서만 행사될수 있는 자유였다. 다시 말하면 타인 존중의 자유가 아니라 잔인함의 자유였다. 무례하고 거친 풍습, 용맹스럽고, 경박하고, 신의가 없고, 탐욕적이고, 참을성이 없고, 성마른 자유의 애호자들 니체에게서 우리가 발견하는 이와같은 야만인의 초상은 바로 불렝빌리에의 텍스트에서 빌어온것이다. 금발 머리에 기골이 장대한 이 게르만의 전사들은 골에 들어오면서 갈로-로멩인들과의 동화를 거부하고, 특히 로마 제국법에 대한 복종을 거부했다. 그들은 너무나 자유스러워서, 다시 말하면 너무나 오만하고 자만심이 강하여 전쟁의 수장이 로마적 의미에서의 군주가 되는 것을 두고 볼수가 없었다. 그들은 자유스럽게 지배와 정복을 탐했으므로 각자 개인적인 자격으로 골의 땅을 차지했다. 그래서 전쟁의 수장이었던 왕은 프랑크의 정복으로 골 땅의 주인이 되지 않았고, 전사들 각자가 직접 승리와 정복의 과실을 향유했다. 요컨대 스와송의 항아리의 첫 번째 에피소드는 아득히 먼 봉건제의 희미한 밑그림이었다. 무사들은 각자가 땅 한 조각씩을 가졌고, 왕도 자기 몫의 땅을 가졌다. 따라서 골 영토 전체에 대한 로마식의 통치권은 없었다. 무사들은 각기 독립적이고 개인적인 영주가 되었으므로 그들의 머리 위로 로마 황제의 계승자가 될 왕을 받아들일 하등의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게르만인들은 싸우는 것 이외에는 다른 직업이 없었다. 그들은 농사를 짓는 골인들을 군사적으로 지켜 주는 대가로 농민들에게 지대(地代)를 요구했다. 이렇게 해서 현물 지대를 내는 농민들과 무사 계급 사이에는 안보와 생산의 상호교환에 의한 행복한 공존 관계가 형성되었다. 이것이 6세기 이래 거의 15세기까지 유럽 사회를 특징짓는 역사적-사법적 체제로서의 봉건제이다. 불렝빌리에 이전에 그 어느 역사학자도 봉건제를 말한적이 없다는점에서도 불렝빌리에의 역사적 중요성은 매우 크다.
로마를 멸망시키고 골을 차지할수 있게 해준 이 무인적 성격이 나중에 차츰 그들의 지위를 약화시키는 요인이 된다. 처음에 유리했던 똑같은 요소라도 시간과 상황이 달라지면 정반대의 불리한 요소가 될 수 있다. 귀족들은 광대한 토지의 여기 저기에 흩어져 살면서, 전쟁 수행의 대가인 지대의 부양을 받으면서 점차 자신들이 만들어낸 왕으로부터 멀어졌으며, 동시에 자기들끼리의 전쟁에만 몰두하게 되었다. 그 결과 그들은 자신이나 자녀들의 교육, 훈육, 라틴어 학습, 지식같은것을 모두 소홀히 하게 되었다. 이것이 그들을 무력하게 했다. 무사적 귀족들은 마침내 권력과 부의 핵심을 잃고, 결국 왕권의 굴레에 예속되었다. 프랑크의 왕은 그가 전쟁 동안에만 지명된 전쟁의 수장이라는 점에서 처음에는 이중적인 상황의 왕이었다. 그의 권력의 절대적 성격은 전쟁이 지속되는 기간 동안에만 효력이 있는것이었다. 그런데 이 이중적 상황의 왕이 조금씩 항구적인 세습왕이 되어 마침내 유럽 대부분의 왕국들이 나중에 경험하게될 절대권력의 왕이 되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났는가? 우선 별로 많지 않은 숫자의 군대가 적어도 처음에는 사람들이 말을 잘 듣지 않았을 거대한 나라에 정착했다는 사실에 의해서였다. 프랑크의 군대가 점령지 골에서 상당 기간 전쟁 태세로 있었다는 것은 지극히 정상적인 일이다. 점령이 장기화함에 따라 전쟁의 수장이었던 사람이 민간의 수장을 겸하게 되었을 것이다. 이와같은 군사 체제의 연장에는 상당한 문제와 어려움이 있었을 것이다. 평화시까지 군사 독재가 연장되는 것을 수락할수 없었던 프랑크 전사들로부터 반발도 없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왕은 자기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무장해제인채 남겨두는 것이 좋았을 골인들과 외국인들로부터 모집한 용병에 새로이 의존하지 않을수 없었다. 이렇게 해서 차츰 귀족들은 자신의 절대권을 유지하려 애쓰는 왕권과 왕의 절대권 유지를 위해 조금씩 동원된 골 민중 사이에 끼여 꼼짝 못하는 신세가 되었다. 여기서 스와송의 항아리 의 두 번째 에피소드가 시작된다. 자신에게 스와송의 항아리를 갖지 못하도록 한 무사에게 원한을 품고 있던 클로비스는 세월이 한참 흐른후 군대를 사열하다가 그 무사를 행열중에서 찾아낸다. 바로 그 순간 클로비스는 커다란 도끼를 집어들고 스와송의 항아리를 기억하라 고 외치면서 무사의 두 개골을 박살내 버렸다. 이것이 바로 절대왕정이 탄생하는 순간이다.
그러나 왕정이 절대 왕권을 구성하는 중요한 계기는 왕권과 구 골 귀족들 사이의 연합 때문이었다. 프랑크 군대가 들어 왔을 때 가장 고통 받은 계층은 골의 구 귀족들이었다. 그들은 게르만의 무사들에게 토지를 박탈당하고 특권적 지위도 빼앗겼으므로 아무 할 일이 없게 되었다. 그들에게 유일하게 남은 도피처는 교회였다. 그래서 골의 옛 귀족들은 교회로 도망쳤다. 그들은 교회 체제를 발전시켰을뿐만 아니라 교회를 통해 그들이 유포시킨 신앙 체계에 의해 자신들의 영향력을 민중들에게 뿌리박고 확산시켰다. 귀족들은 또한 교회 안에서 라틴어 실력을 연마했고, 절대지배권의 법인 로마법을 갈고 다듬었다. 프랑크의 군주들이 한편으로는 자기 동족의 무사 귀족들에 대항하여 민중에 의존하려 했을 때, 그리고 또 한편으로는 왕이 절대권을 갖는 로마 방식의 국가를 건설하려 했을 때, 교회에 피신했던 골의 구 귀족 말고 어디에서 적합한 연대 세력을 찾을수 있었겠는가? 그들은 민중에 대한 영향력도 막강했고, 무엇보다도 특히 로마법에 정통해 있었다. 이렇게 해서 교회는 라틴어와 로마법의 지식, 그리고 사법적 수행능력과 함께 절대왕권의 커다란 연합세력이 되었다. 무사 귀족의 머리 위로 왕권과 민중이 연합했고, 또 한편으로는 교회, 라틴어, 사법능력에 의해 왕권과 옛 골 귀족이 연합했다. 라틴어는 공식 언어가 되었고, 학문 언어, 법률 언어가 되었다. 귀족이 그들의 권한을 잃게 된 중요한 요인은 그들이 다른 언어 체계에 속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귀족은 게르만어를 말했고, 라틴어를 몰랐다. 그래서 모든 법체계가 라틴어 칙령으로 자리 잡기 시작했을 때 그들은 자신들에게 무슨 일이 닥쳤는지도 몰랐다. 이렇게 해서 소유와 지배에 탐욕스러웠던 게르만인들, 현재에 그토록 집착했던 금발 머리에 몸집이 큰 이 무사들은 조금씩 자기 자신의 땅과 나라에서 일어나는 일에 대해 완전히 무관심하게 되고, 마침내 재산과 권한을 모두 박탈당한 기사(騎士)적 인간 혹은 십자군적 인간으로 변했다. 불렝빌리에는 십자군 원정을 귀족의 무력화(無力化)가 절정에 달한 시점으로 이해한다. 그들이 예루살렘에 도착한 바로 그 시기에 왕과 교회와 골의 구 귀족들은 그들의 땅과 권한을 완전히 박탈할수 있도록 라틴어로 법을 정비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불렝빌리에의 호소가 시작된다. 그것은 천년에 걸쳐 서서히 권한을 박탈당한 귀족들에게 무력의 반란을 호소하는 것이 아니다. 그가 귀족에게 호소한 것은 앎을 되찾으라는 것이었다. 즉 자기들 고유의 기억의 되살림, 의식의 각성, 인식과 지식의 회복등이다. 그대들이 박탈당한 - 아니 어쩌면 그대들이 한 번도 소유하려 하지 않았던 - 앎의 지위를 회복하지 않는한 그대들은 결코 권리를 되찾지 못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대들은 어느 일정 시기부터 적어도 사회 내부에서 진정한 전투는 더 이상 무기에 의해서가 아니라 앎에 의해서라는 사실도 알지 못한채 언제나 싸움에서 패배하고 말았다 이것이 불렝빌리에의 메시지라고 푸코는 해석한다. 귀족이 힘을 되찾고 역사의 주체로 떠오르는 것은 그들이 자의식을 되찾고, 앎의 직조(織造) 안에 다시 편입됨으로써라고 불렝빌리에는 말하고 싶었을 것이다.

추천수0
반대수0

공감많은 뉴스 시사

더보기

뉴스 플러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