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에 내려와 얼마 전 가게를 이전한 친구를 보고 돌아오는 길이었습니다.
골목을 돌아서 나오는데 저 앞에 낯익은 사람이 걸어옵니다.
하늘거리는 원피스를 입은 모습이 눈에 익었습니다.
강산이 한 번 반이 넘게 바뀌고 나서 그녀를 보지만 그 걸음새 그 모습을 쉽게 알 수 있었습니다.
정오의 운동장 한 가운데에 서 있는 것 처럼 가을햇볕 같이 다가오는 그녀를 피할 수 없었습니다.
시골다방에 마주 앉아 보고 있으니 세월의 자욱이 화장기 넘어로 엿보입니다.
오랜 시간 뒤였지만 그녀와 마주하면 왠지 편안합니다.
그랬습니다. 우리는 참~ 편안한 사이였죠.
침묵이 어색하지 않은 사이.....
그저 얼굴만 보면 거북할 것 같아서 눈길를 옆으로 돌리니
조그만 수족관에서 금붕어 몇 마리가 뻐끔뻐끔 헛담배질을 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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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를 처음 만난 것은 일학년 여름방학이었습니다.
여름방학에 군청에서 지역출신 대학생들을 모집하여 알바로 만리포에서 같이 일하게 되었죠.
만나던 이야기는 하고 싶지 않습니다.
지나간 과거이고 기억하고 싶지 않기 때문에.....
혼란과 갈등이 포화된 수상한 시절에 전 군대를 갔고
제대를 6개월 쯤 앞두고 나와서 그녀가 근무하던 곳에 가서 뒤늦게 그녀의 소식을 알 수 있었습니다.
절망감이란 것이 무엇인지 처음 겪었습니다.
무작정 간 곳이 그녀를 처음 만났던 만리포 바닷가였습니다.
예전의 그 갯바위에 앉아 소주 몇 병을 비웠습니다.
그늘진 하늘에서 눈송이가 흩날리더니 점차 거세지더군요.
잿빛하늘에서 온세상을 파묻을 것 처럼 눈을 퍼부었습니다.
척척척... 내리는 눈이 산과 백사장을 뒤덮고
바다는 시퍼렇게 멍들어 갔습니다.
쌓인 눈에 길이 막히고 낡은 민박집에서 저는 그렇게 밤을 맞이했습니다.
밤새 바다는 창문 앞까지 다가와서 신음하더군요.
전 도무지 알 수 없었습니다.
난 너에게 무엇이었는지 또 넌 나에게 무엇인지......
온몸의 진액을 다 토악질하고 나서야
23살의 몸둥아리는 어둠속으로 어둠속으로 그렇게 침전되어 갔습니다.
어느새 도둑처럼 다가온 아침에 껍데기만 남은 몸으로 나가보니
하늘은 여전히 흐리지만 바다는 저 멀리 물러가 있더군요.
그 텅빈 백사장을 뒤로 하고 돌아오며 그렇게 그녀를 지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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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여년 만에 만난 그녀는 조용히 지나온 이야기를 합니다.
큰아이가 중학교에 들어갔고 둘째가 열살이라고.......
어렵게 작년에 집을 장만했다고.....
반 쯤 남은 커피잔에 입을 대면서 눈빛으로 말합니다.
넌 어떻게 살았냐고.......
나... 난 비행기 타봤어.
비행기?
응....... 해외에 나갔다 왔어.
노총각인 저는 그녀처럼 열심히 살아온 자랑거리가 없습니다.
가벼운 침묵을 깨고 저 자신도 모르게 물었습니다.
"근데 그 때 우리가 사랑한 걸까?"
엉뚱한 질문에 조금 굳어지던 얼굴이 풀리면서
입술이 살짝 올라가는 그녀 특유의 옛날 표정이 살아납니다.
"어머! 얘... 그거 반칙이다."
"어.. 그래?"
왜 그리 빨리 가야했는지, 나에게 아무말 못하고 갔는지,
지금 어디에 사는지, 무엇을 하는지 묻지 않았습니다.
전화번호도 물론 묻지 않았습니다.
태풍에 쫓기어 서둘러 올라와 빈 방에 들어오니 정막함이 짙게 배여있습니다.
눅눅한 침대에 몸을 누이고 담배를 물고있으니
그녀의 옛 미소가 자객처럼 숨어있다 나타납니다.
가슴 한 구석이 아려옵니다.
아.... 베였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