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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살 핏덩이가 기독교를 고발합니다.

19살소년 |2008.04.08 19:21
조회 3,075 |추천 0

<성경과 구교/신교의 역사, 그리고 타락>


 

 

Antonio Allen Brow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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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독교 근본주의자들이 판을 치고, 종교라는 허울 좋은 이데올로기를 이용해 국민들의 유약한 심리와 사고를 침투함에도 모자라 정치판과 온갖 경제영역까지 잠식하고 있는 한국 사회의 현실과, 나아가 전 세계적 문제에 대한 19살 젊은 피의 분노에 키보드를 두들긴다.


 과거에 가톨릭에 깊이 귀의했던 때부터 관심을 가지고 깊이 읽었던 다양한 친종교를 비롯한 반종교 서적들과, 문헌학 관련 서적, 역사서, 철학 서적들의 내용 중 가장 핵심이 되는 내용들과 여러 매체에서 접한 정보들을 머릿속에서 기억해 낼 수 있는 최대한의 한도로 끄집어내어 구성했다.(그래도 A4 10장 분량이다. 자신 없음 읽지말길..)


 여기서 말하는 기독교인들은 개신교를 위주로 서술했지만 가톨릭을 포함한 모든 기독교교파(카톨릭-천주교, 프로테스탄트-개신교, 그리스정교)임을 밝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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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머리말


 

 한국 기독교 중 개신교의 주류파를 형성하고 있는 것은 미국에서 유래한 근본주의적 교파들이다. 따라서 그들은 신도들에게 성경 전체의 완벽성과 그들이 믿는 야훼(여호와)의 완벽성을 설파하며, 그 어떠한 역사적/문헌학적 오류도 인정하지 않게 하고, 그들의 근간인 유대교의 구약 해석조차 인정하지 않도록 세뇌를 거듭한다. 또한 그러한 오류를 눈앞에 보여주어도 신은 눈으로 믿는 것이 아닌 마음으로 믿는 것이라면서 진실을 외면하도록 종용한다. 결국 예수가 평생 갈구했던 율법과 교회권위에서의 탈출을 외면하고 예수의 이름을 빌린 새로운 사업장을 만들어 서민들의 주머니를 노략질하는 사업수완으로 삼는 게 한국기독교 전체의 현실이다.


 분명 이런 주장에는 일부 사이비를 전체의 잘못으로 매도하지 말라는(일반화의 오류라고들 한다) 뻔한 기독교도의 반발이 수반된다. 또한 테레사 수녀나(이미 크리스토퍼 히친스의 저서 ‘자비를 팔다’를 통해 그녀의 명성으로 인해 가려진 비리들이 폭로되었다) 자기 주변의 ‘훌륭한’ 목사들과 신도들(분명 그들의 눈에는 무엇이든 그들이 보기에 ‘참된’ 신앙적이면 훌륭하다)을 예로 들어 진정한 신앙인들도 존재한다는 자기들 나름대로의 ‘실증적’인 사례 또한 곁들인다. 여기서 또 근본주의자들은 성경도 읽어보지 않고 그런 헛소리를 하느냐며 성경의 오류는 없다는 말 그대로 ‘어이없는’ 주장 역시 서슴지 않고 한다.


 이런 말이 통하지 않는 근본주의자들과 안타까운 신자들을 위해 영미 언론 선정 100인의 지성인 중 5위를 차지한 논객 크리스토퍼 히친스는 ‘신은 위대하지 않다’라는 책을 통해 근본주의자들의 논리와 신도들이 정말 실증적이라고 생각하는 예로 반론하는 행위 자체를 봉쇄시키고 파괴하는 새로운 논의의 출발점을 제시한다. 또한 영미 언론 선정 100인의 지성인 중 3위의 영예를 차지한 과학자이자 영국 옥스퍼드大 교수인 리처드 도킨스의 ‘만들어진 신(원제 The God Delusion:신이라는 망상)’과 과학철학자인 미국 터프츠大 대니얼 데닛 교수의 ‘마법 깨기’까지 포함하여 세 명의 세계적 지성인들의 무신론 3부작에서는 정말 참신하고 명쾌한 논증 ․ 예증으로 종교의 폐해와 자기모순을 노골적으로 지적한다.


하지만 나는 그런 단계의 논의까지 갈 수준이 되지 못하므로 기독교라는 종교와 성경이라는 경전의 기원부터 역사 전체에서 드러나는 모순들과 전개과정상의 허구점을 지적하고, 그들이 믿는 ‘야훼’라는 신과 그의 아들 예수의 가족스토리의 인공성을 드러내려 한다. 기독교도들이 완벽이라고 보는 그 전제 자체를 깨려하는 것이다. 단지 세계의 지성인들이 밝혀내고 입증한 사실들을 재정립하여 설명하는 것에 불과하나 근본주의자들에게는 그들이 완벽하다고 전제하는 그 전제 자체를 깨주면 더 이상 논의가 되지 않기에 이것이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라고 본다. 신이 있고 없고를 떠나 그들이 전제하고 가정하는 신에 대한 증거들과 교회라는 타락한 성전 속에서 행하는 종교의식들의 허무맹랑함을 꼬집으려는 것이다. 아무리 ‘우리 교회는 진짜 제대로 된 교회다’라던가 ‘내가 아는 한 교회 사람이 악한 행동을 했다는 것은 듣지도 보지도 못했다’라던가 하는 어줍잖은 실증적 사례들을 들어서 종교가 인간에게 주는 교화의 역할과 선함을 강조한다고 해도, 그 근본이 어디서 시작되었는지, 교리가 어떤 의미를 띄고 있는지, 실제 그 선함을 대표하는 종교가 어떤 일들을 자행해왔는지를 살펴본다면 그러한 사례들과 호(好)교론적 주장들이 설 자리가 없다는 것을 깨달을 것이다.


 


 2. 성경과 구교/신교의 기원과 역사....그리고 타락



 구약은 신약의 주인공인 예수를 신성화하기위한 의도를 가지고 유대경전의 내용을 발췌 편찬한 것이다.


 그 소스가 되는 유대경전은 바빌로니아시대의 경험을 토대로 해 페르시아시대에 문서화되면서 정립되기 시작한다. 이것이 마치 연대기에 따라 순차적으로 쓰인 것이라 착각하지만 실은 그들의 민족의 정체성이 확립된 페르시아시대에 일괄적으로 쓰인 것이다. 바빌로니아의 신화와 페르시아 종교경전을 토대로 히브리민족성 고취를 위해 그들 나름대로 살을 덧붙여 각색했다는 것이다.


 바로 이시기(바빌로니아~페르시아시대)에 문화적으로 우월한 지배민족의 문화에 영향을 받아 피지배민족, 즉 노예 민족이었던 히브리인들에게 창조주 유일신이라는 개념이 자리 잡게 된다(바빌로니아-창조주, 페르시아-유대교, 메시아론 정립). 그 이전에는 유일신이라는 개념이 없었다. 샤머니즘 토착신앙 수준이었다. 그 이후(페르시아시대-메시아론 정립 이후)에 그 당시 히브리인들의 시각에 맞춰 모든 것이 일괄적으로 써지고 세월이 가면서 수정되며 덧붙여진다(노아의 방주의 경우 메소포타미아의 길가메시 서사시에 등장하는 홍수설화를 차용하는 등 여러 근처 다른 민족의 설화 등을 차용했다).


 지금의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활동한 예수라는 인물은 이들이 지켜온 사상이 전 세계에 주목받게 되는 씨앗을 마련한다. 후대에 편찬되는 바이블로 말이다.


 현 바이블의 시조(히브리원전)는 기원후에 편찬된 것이고 후에 로마교회 초대교부들에 의해 존재하는 유일무이한 성경으로 받아들여 채택되었다고 한다. 그것을 기반으로 번역과정에서 여러 차례 범위조정을 거쳐 현재의 바이블이 탄생했다고 알려진다. 그리고 프로테스탄트교회는 나름대로의 시각으로 가톨릭교회와의 차별을 두며 다시 그 범위를 축소조정하게 된다.


 로마교회의 존재에 당위성을 주는 것이 바로 성경이다. 따라서 성경은 로마교회 이전에 존재해야만 했다. 하지만 진실은 현 성경의 시조격인(헬라어원전은 물론) 히브리원전들조차 로마교회의 입맛에 따라 취사선택되어 제작되었다는 것이다. 바람직한 결과물을 위해 그 기원을 짜 맞추는 식이었다.


 기독교 성경의 기원을 논할 때 가장 주목해야 할 것은 일반적으로 알려진 것처럼 단지 로마의 초대교부들이 수동적으로 초기기독교인들이 사용했던 유일무이한 성경을 받아들인 것인가? 아니면 그 채택과 성립과정에서 그들의 입맛에 맞게 제작했는가?(한마디로 그들이 바이블을 결정지었는가)이다.


 분명한 사실은 로마교회 이전에 독자적으로 발생한 여러 형태의 소규모 그리스도교공동체가 존재했고 각자 나름대로의 교리를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다(지금의 조로아스터교를 차용한 형태의 교리와는 상당히 다른, 예를 들어 고대 힌두교의 윤회설 교리를 차용한 기독교집단이 있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럼 조로아스터의 사후심판론과 고대 힌두교의 윤회설을 서로 융합할 수 있었을까?).

 

 예수사후에 기독교는 아시아 지역을 기반으로 해서 소규모로 널리 퍼져있었다. 그러나 그 많은 집단 간에 교리의 일관성이 전혀 없었다. 지역 토착신에 예수라는 이름을 붙이는 정도이거나 예수라는 이름과 기타 아시아종교를 빌려 나름대로 세력을 행사하려드는 이들이 있었다. 로마전도라는 야심찬 희망을 갖고 있던 바오로(바울)은 아시아에 흩어져 있었던 각각의 모양새를 띄고 있었던 그리스도교 집단을 돌며 자신이 예수의 대리자라고 선전한 뒤 각 교회간의 일관성을 만드는 치밀한 사전작업을 시작한다. 예수가 일생토록 힘겹게 싸워야만 했던 율법의 권위와 교회권력을 다시 예수의 이름을 빌려 플라톤의 이원론, 즉 천국과 지옥의 이원론적 그리스 철학 구도에 심취한 로마인 바오로 자신의 교회를 만들기 시작한 것이다.


 뭐니 뭐니 해도 기독교회에 가장 막대한 영향을 끼친 이는 예수의 제자 요한으로써, 그의 사상을 살펴보자면 철저한 조로아스터교 신봉자였다. 그는 예수를 신격과 인격을 동시에 갖춘 조로아스터의 현신으로 묘사한다. 그의 사상이 바이블에 막대한 비중을 차지하게 된 것은 로마의 황제권수호와 긴밀한 연관성이 있다. 사도의 왕격인 교황의 권위는 바로 예수가 내린 것이다.


 인간이 범접할 수 없는 신이 내린 권위..... 거기에서 예수는 '신'이여야만 하는 이유가 성립되는 것이었다. 조로아스터교의 사후심판론도 교황권에 힘을 실어준다. 당시 우매한 대중들을 다루는 데에는 사후심판론 만큼 효과적인 교리가 없었다. 고대힌두교의 윤회사상은 그 뿌리가 다르고 교리에 맞지 않아 차용할 가치가 없게 된다. 이런 과정에서 기독교의 원조인 조로아스터교는 고대힌두교의 특정 교리들(특히 크리슈나와 관련)과 기존 조로아스터의 교리를 결합하여 예수의 초능력적인 모습을 중심으로 한 기독교로 대체된다.


 지금의 크리스트교를 정립한 이들은 교부라고 불리는 로마시대의 철학자들로써 그들의 지적능력을 자랑할 만한 엘리트집단이었다. 이런 그들도 크리스트 교리를 완전히 정립하는 데에는 역시 막판까지 진통을 겪었다. 로마와 황제권의 완전성을 해치지 않기 위해 완벽을 기해야만 했다. 교리에 반하는 예수의 이름으로 존재하는 소규모 기독교집단의 흔적을 비밀리에 발굴해 제거하는 노력이 수반된다.

 

 그럼에도 예수의 신성을 부각한 집단(trinitas-삼위일체론)은 인성을 부각한 집단과 팽팽히 대립하며 끝까지 설전을 벌이게 된다. 이 대립 전 끝에 결국 인성을 주장한 이들은 밀려나 추방당한 후 이단으로 몰려 끈질긴 살해제거의 위협을 당한다(이들의 교리는 게르만 지방으로 전파된다). 바로 이런 식이었다. 로마인들은 정통성 있고 결점 없는 종교국가를 세우기 위해 아주 무서울 정도로 완벽을 기했다. 그들은 신약을 편찬하는 데에도 예수의 생애의 대략적인 내용과 사도들의 활약상, 그리고 결론은 요한의 최후심판으로 내리게 되는 것이었다. 권위에 대한 복종을 유도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 과정에서 도마복음서와 유다복음서, 야고보서 같은 예수의 신성보다는 인성에 치우친 복음서는 이단으로 취급하거나 인정하지 않음으로써 일관성 있는 교리를 정립해간다. 예를 들어 도마복음서의 경우 현재 성경에 등장하는 복음서 어디에도 등장하지 않는 예수의 어린 시절을 담고 있다. 전체적인 맥락은 예수 자신이 신의 아들임을 알지 못하는 매사에 냉혈함으로 무장한 차가운 소년에서 신의 아들임을 알아차리고 변모해가는 따뜻한 청년으로 성장하는 인간적인 모습을 그리고 있다. 도마는 예수의 제자 중 가장 증거에 치우친 실증적인 인물이었다. 예수의 부활을 확인하기 위해 옆구리의 구멍에 손을 집어넣기까지 한 자였기 때문이다. 이런 자의 복음서를 인정하지 않는 것은 도대체 왜일까?


 바이블은 로마교회의 정통성을 나타내기 위한 일종의 교서로 후에 교회에 의해 악용되기도 한다. 공관복음이라고 알고 있는 3대 복음은 결국 같은 내용이지만 지역이 다른 3개 파의 내용이 조금씩 다르기 때문에 어느 하나만 채택할 수 없었다. 떨어져 있던 기독교인들이 믿음의 대상인 예수에 대해 일관성 있는 시각을 갖기 위해 후대에 편찬한 것이다.

예수의 생을 다룬 복음서 모두 3자의 입장으로 서술하고 있다. 그중에 일인칭시점의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요한복음도 요한의 추종자가 쓴 것으로 4개 복음서 모두 예수의 제자들이 직접 서술한 것은 아니다. 요한은 조로아스터 교파에서 따온 종말론과 최후심판을 각색한 내용의 계시록을 직접 집필한 것으로 추정된다. 아무튼 로마의 교부들은 이렇게 크리스트교 경전을 완성시키고 세상에 그리스도교를 대신할 철학이나 종교는 없다고 결론내리고 이들의 교회는 보편적인 교회라는 뜻으로 '가톨릭Catholic' 이라 불리게 된다(영어의 circle, 동양종교에서 완전성을 뜻하는 원. 기독교의 '기독'은 이 '가톨릭'을 한자식으로 발음한 것임). 또한 그리스철학을 크리스트교 내로 포함시켜버리고 철학의 가치를 절하시켰다.


 가장 완벽한 종교라 말하는 것은 또한 로마의 종교여야 하는 당위성을 말하는 것이기도 하다. 후에 정치적인 이유로 동방정교(비잔틴교회 혹은 그리스정교회)가 분리해나간다.


 종반엔 종교혁명이라는 이름으로 기회주의자들, 즉 프로테스탄트들이 날조와 눈가림으로 우매한 농노, 걸인, 백성들을 현혹시켜 그 세를 확장하기에 이른다. 그들은 하늘로 부터 주어지는 권력 즉 예수의 대리인인 사도로써의 권위를 얻을 수 없기 때문에 로마교회가 편찬한 교서인 '바이블'에 목숨을 걸게 되었다. 종교개혁을 주도한 마르틴 루터는 성경의 내용에 대한 해석이 바티칸의 교황청과 매우 달랐다. 그래서 루터는 자기 마음에 들지 않는 부분이 있으면 무조건 수정하거나 혹은 삭제해 버렸다. 그는 마카베서 상, 하권을 비롯한 7권의 책과 에스더서와 다니엘서의 일부를 없애 버렸다. 결국 이러한 날조와 자기 멋대로의 해석들을 그들의 눈먼 사업에 악용하다보니 현재의 안구에 습기가 차게 되는 안타까운 상황에 다다르게 된다. 칼뱅 역시 이러한 비판을 피해갈 수 없다(칼뱅은 루터보다 더 사악하고 더 편협한 의도를 지닌 자로, 미국과 한국의 대표종파의 창시자이다. 이러한 칼뱅의 죄는 여기서 낯낯이 밝히고 넘어가기도 너무 방대하기에 나중에 따로 정리하고자 한다).

 로마인들이 탄생시킨 짜집기 경전인 바이블이 생겨난 이후에도 교황이 소집한 주교회의를 통해 예수의 신성이나 교회권위에 문제될만한 내용들의 수정과 삭제 거쳐 현재 그들이 읽는 성경이 생겨난 것이다. 교황성하이하 주교단의 생각이 성령의 생각이다. 지금의 가톨릭은 물론 중세시대의 비이성적 모습과는 거리가 멀지만(당연히 종교도 시대의 흐름에 발맞춰한다) 중세에 독립한 프로테스탄트교회는 아직도 그런 행태를 보이고 있다. 가톨릭교회와의 개별성 말하고 동시에 가톨릭의 교서인 성경으로 자신들의 정통성을 주장하는 자가당착적 행태에 집착하게 되고 결국 기독교의 본고장 유럽에서는 쇠락하게 된다. 하지만 추상적 관념 수준이 떨어지는 미국이나 제3세계, 그리고 한국에서는 여전히 맹위를 떨치고 있다. 미국은 학계에서도 가장 무식한 국가로 평가되는, 돈 말고는 자랑할게 아무것도 없는 국가로 유명하다. 역시 제3세계에는 지성인들의 비율이 극히 드물다. 또한 한국은 미국의 근본주의교파의 대표적인 식민지이다. 어쨌든 철학과 학문의 고장인 유럽에서 외면당하는 개신교는 그들의 새로운 본고장인 미국과 아시아 일부국가, 제3세계 가난한 국가들을 자신들의 안마당으로 삼게 된다. 그리고 이 안마당을 확대하기 위해 완벽한 흑백논리와 극단적인 배타주의, 이분법적 사고로 예수를 믿는 것만이 진리이고 그와 반하는 자들은 모두 지옥에 갈 것이라는, 따라서 프로테스탄트 진영이 아닌 국가들을 모두 자신들의 교화와 정복 대상(이것을 선교라고 일컫는다)이라고 생각하는 국가이데올로기도 심화시킨다.


 그리고 프로테스탄트 교인들은 성경을 숭상시하고 구절구절 암송까지 하면서 정작 성경의 기원조차 모르는 무지함을 들어낸다. 히브리 문자가 BC몇 년 경에 생겼는지도 모르고 히브리인들이 쓰는 언어가 왜 아랍어인지 헬라어인지 아무것도 모르고 그냥 목사가 “성경이 파피루스에 상형문자로 적혀있다” 아님 “석판에 고대 산스크리트어로 적혀있다” 아니면 “하늘에서 내려왔다” 따위의 황당한 소리를 한다고 해도 그대로 “믿습니다!” 이런 식이다. 그리고 누구나 믿는, 정당성과 타당성이 입증된 역사적 사실을 기록해놓은 서적을 근거로 가져다줘도 완강히 거부한다. 이것은 이미 그들에게서 올바른 사리분별력을 담당하는 이성이 떠났다고 보면 된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이미 진리가 아니라 그들의 아집을 옹호하는 것이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말씀이니까 그게 이치에 맞던 맞지 않던 무조건 옳으니 의심하면 안 된다. “의심이 들어도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신다.” 이렇게 자기세뇌를 하는 것이다. 누군가 이에 대한 비판을 가하면 머리로 이치와 논리를 따져 하나님의 존재를 의심하고 믿지 않는 자는 결국 지옥에 갈 것이며 의심하지 않고 가슴으로 하나님을 받아들이는 자기 자신은 천국에 갈 것이라는, 즉 자신의 비판적사고력의 결여를 정당화 하고 자위하는 행위를 하게 되는 것이다.


 사실 프로테스탄트들에 대해 비판적인 견해를 덧붙이자면...


 난 어렸을 적 영국에서 공부를 했었고 유럽사를 깊이 배웠다. 유럽의 역사교과서를 보면 면죄부란 말이 없다. 이것은 가톨릭이 아니라 프로테스탄트 쪽에서 처음 나온 말이다. 다시 말해 그들이 이런 말을 유포시켰다는 것은 민심이 혼란한 틈을 타 기회주의자들의 이권을 챙기려는 의도들이 다분히 작용을 했다고 생각할 수 있다. 초기 프로테스탄트로 개종한 이들의 대다수가 무지한 농민들이었다. 이들은 봉건제도로 영주들에게 착취당하고 있었고 이들의 무지함을 이용해 그 원인을 가톨릭교회로 전가시켰다(물론 농민반란이 일어나 프로테스탄트교회가 다시 카톨릭으로 전복되는 사건도 있었다). 교회에 바칠 헌금을 가로채고 성직자들이 누리는 명예를 가지려는 의도였다. 그 의도는 그들이 이권은 누리되 성직의 의무는 버리는 행태를 취한데서 드러난다. 이들이 사업을 하는 데는 언변이 가장 중요한 덕목이다. 그래서 이들은 말로 시작해서 말로 끝낸다. 종교개혁이라 부르짖는 그들의 말과 달리 프로테스탄트 성직자들은 금욕과 희생을 버리고 가톨릭교회의 영향력에서 벗어나 급격히 세속화 된다.


 성직자가 개인재산을 축적하고 여자와 성관계를 가지고 가정을 꾸리고 자식에게 재산을 세습하는 즐거운 인생을 누리게 된 것이다. 로마교회에서는 교회의 부패와 성직자의 세속화를 막기 위해 금지하는 것들이었다. 결국 고대 로마인들이 그토록 공들여 쌓아온 기독교는 이제 종교혁명으로 인해 한순간에 개인 사업장으로 전락을 하게 되었다. 종교혁명을 로마교회의 세력에서 벗어났다는 긍정적인 면으로만 평가하기에는 무리가 따른다.


 너무 비판적인 견해만을 밝히는 것 같아 분명 지금 이 글을 읽는 교인들의 분노심은 이루 말로 표현할 수 없겠지만, 그들이 즐겨 말하듯이 ‘사실은 사실일 뿐’이고, 나는 그 사실을 내가 배웠고, 내가 직접 문헌을 통해 확인해보았고, 정말 인간이 만들어낸 ‘신’이 죽었다는 걸 실감한 나의 지식한계 속에서 풀어써 넣은 것뿐이다. 날조와 왜곡이라는 것은 없는 것을 있다고 하는 것이고, 사실이 아닌 것을 사실이라고 하는 것으로 종교의 전유물이지, 니체가 말 한 ‘인간에게 보다 합리적이고 유용한 진리를 가르쳐주는 것이 최대의 가치관’이라고 여기는 합리주의자이자, 철학을 사랑하는 사람이자, 논리를 무엇보다 중히 생각하는 무신론자가 취할 행동이 아니다. 실제로 하이데거, 프로이트 등의 인류철학사에 한 획을 그은 실존주의, 인간중심주의 진영에 가까운 철학의 대가들은 올바른 이성의 판단을 위해서는 그 의도와 의미가 아무리 좋다고 정평이 난 종교라도 생각과 가치관을 흐리게 하여 판단의 오류를 야기한다고 했다. 비록 프로이트의 종교의 기원에 대한 심리학적 논증은 대중적 이해의 측면에서 실패했지만 말이다.


 이런 나의 신념을 가지고 “어린놈이 뭘 얼마나 안다고 건방지게 자기 말이 사실이라고 왜치느냐”, “진실인지 아닌지 어떻게 확신하느냐” 묻는다면 대답은 간단하다. 정말로 신은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만들어진 신’의 저자인 리처드 도킨스가 말 했듯이 기독교의 야훼가 존재할 확률은 제우스가 존재할 확률이나, 비행 스파게티 괴물이 존재할 확률이나, 토르, 토착종교의 온갖 신들이 존재할 확률과 같을 뿐이라는 것이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내가 밝히고자 하는 진실은 구약의 잔인한 신(왜 잔인한지 도저히 이해를 못하겠다면 이성적인 자세로 창세기만이라도 읽어보라)인 야훼를 중심으로 이루어진 유대교와, 예수라는 일반인보다는 훌륭했던 자를 초능력을 가진 특별주인공으로 등장시킨 신약을 중심으로 한 크리스트교, 그리고 같은 뿌리를 지닌 이슬람교 따위의 종교들의 기원과 그들이 증거로 내놓는 문헌들(성경)의 허구성이다. 신의 존재를 묻는 질문까지 간다면 결국 ‘신은 없을 것이 자명하다’라는 의견을 보이겠지만 그것은 이 글의 중심 주제가 아니다.


 굳이 따져야 한다면...


 1800년대 후반의 철학자이자 실존주의 철학의 대가인 니체가 말했듯이 신은 죽었다.


(니체가 말한 ‘신은 죽었다’를 무신론적 해석으로만 바라보는 것에 무리가 있음을 잘 안다. 그는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가 오래된 가치들, 특히 기독교적 가치들을 강력하게 보수적인 입장에서 수호하고 있기 때문에 비인간화와 타락화로 가고 있다고 꼬집은 것이었다. 따라서 기독교적 가치관을 대체하는 새로운 도덕가치관이 필요하다고 주장한 것이다. 이러한 새로운 가치관을 발견해내고 신의 존재에 의해 자신이 존재한다는 명백한 자기기만을 허용치 않고 스스로 존재이유를 구명하는 초인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바로 신을 죽인 것은 타락한 우리 자신들이라는 것이다. 그의 입장에서는 예수가 역사적으로 가장 초인에 가까운 자라고 보았다. 예수는 사회통제 수단으로서의 종교와 종교지도자들의 권위를 비판하였고 자신의 운명을 긍정하는 초인의 자격을 겸비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위에서 밝혔듯이 이러한 그의 사회 변혁을 향한 노력과 가르침은 사도 바오로(바울)에 의해 모두 무산되었고 왜곡되었다. 현재의 종교인들 중 예수를 존경한다는 핑계를 대며 예수를 쫓아 살려고 하는 자들이 과연 있나 살펴보라. 당신이 성직자라면 자신 스스로의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보라!)


 저 위 하늘 가장 높은 곳에 있는 권좌에 앉아 인간의 시시콜콜한 모든 일들, 모든 개인사생활에 개입하고 개인적인 기도를 들어주는 신은


 그의 이름을 빙자하여 자행된 인간에 대한 온갖 살육들, 그의 이름으로 만들어진 온갖 이데올로기들을 이용하여 사업수완에 이용하는 교회들, 그러한 교회에 자신의 주머니의 돈을 모두 털어 기꺼이 가져다 바치는 교인들, 이런 알고리즘을 내면화 하는 것을 수용하지 않는 이교도/무신론자에 대한 기독교인들의 증오심, 불관용, 증오심, 불관용, 증오심......(현대시대의 가톨릭은 이교도에 관대함으로 예외다.)


 10계명은 그들 가슴 어디에도 있지 않다


 예수의 말 한마디도 그들 가슴에는 남아 있지 않다(왼뺨을 때리면 오른뺨을 내밀라고 했던가?).

 

 이런 구제불능의 인간들, 신에게 자유의지를 부여받았다는 이 구제불능의 인간들을 신은 책임지지 않는다. 그는 방관자이다. 신약이 종료된 시점부터 그는 쭉 방관자였다. 아니 이미 그는 구약에서부터 방관자였으며 사탄이었다. 용서라는 것이 없는 질투의 화신인 구약의 야훼를 보아라(그 스스로 자기는 질투의 신이라고 표명하고 있다!). 인육을 즐기는, 대량학살을 즐기는, 근친상간을 즐기며 가학피학성 변태성욕자인 야훼의 행적들을 보아라. B.C와 A.D를 거쳐 종교의 이름으로 자행된 모든 살육들과 지금도 강간 성폭행 당한 뒤 목숨을 잃고 있는 어린 소년 소녀들을 보아라. 그 모든 비극의 뒤에서 음흉하게 미소 짓고 있는 야훼를 보아라.


(신약을 거쳐 가면서 가족을 꾸려서 그런 건지, 정신과에 입원해서 분노관리 심리 상담을 받은 건지, 어쨌든 약간 정신상태가 나아진 야훼를 발견할 수 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하나뿐인 아들을 죽여 버림으로써 여전히 망나니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정말 제대로 된 세상의 신이었다면 진작에 해고되고도 남았다.)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주었다고 이런 비극들을 외면하는 것은 기독교도들이 그렇게 반대하는 혼전성교로 인해 여자를 임신시켜놓고 도망가는 망나니 남자와 무엇이 다르다는 것인가?(아이러니하게도 기독교 측에서는 이런 모든 비극들은 신의 책임이 아닌 인간들의 책임이라고 역설한다!)

 

 어떤가. 냉철하게 생각해보자. 정말 신이 있는가? 신이 우리를 내려다보고 있고 우리를 항상 사랑하고 우리를 지켜주고 있는가? 선택받은, 기독교인인 당신만을 지켜주고 있는 건가?


 좋다.


 신이 있건 없건 어쨌든 기독교는 온갖 종교 중 가장 최고의, 최대의 선을 추구하는 비영리적인, 가장 선에 가까운 도덕 적가치관을 기반으로 한 지상최대의 봉사 집단이라고 치자.


 허나 그렇다고 쳐도 현재 한국개신교회는 종교혁명의 초기 정신에서 너무나도 멀리 와버렸다. 아니, 초심을 이미 잃어버려 돌아갈 길이 존재하는지 의식할 능력 자체를 잃은 상태이다. 하지만 나무의 뿌리를 보면 그 열매를 안다고 원래 그 시작부터 사심으로 어긋나있기 때문에 거기에 합당한 결과가 도출이 되는 것이다. 무조건 다른 이들에게 책임을 전가하고 자신의 본 모습을 부정하고 인정을 하지 않는 것은 비겁한 일이다. 차라리 종교혁명이 일어나지 않았더라면 어땠을까? 한국에서 예수와 기독교가 이렇게 욕먹는 날이 왔을까???


 참고로 말하자면 내가 정말 사랑하는 여자 친구에게 종교는, 기독교는 생활의 중심이다. 양육이라는 것을 항상 빠짐없이 나가서 인간이 만들어낸 신의 말씀에 ‘양육’당하고, 철야예배에 새벽예배를 빠짐없이 나가 그것을 통해 자기 자신을 정화한다고 믿고, 교회의 온갖 굵직한 일들은 모두 도맡아 하는 정말 충실한 하나님의 자녀이다. 또한 나의 가족 모두 역시 충실한 가톨릭교도이고, 모두 세례를 받았고, 나 역시 안토니오 아바스라는 세례명을 가진 사람이다. 예수의 몸이라는 빵, 즉 영성체를 받아먹을 자격시험까지 10살짜리 막내를 끝으로 가족 모두가 세뇌교육을 힘들게 통과한, 집 안에는 예수의 상과 예수가 매달린 십자가가 온 방에 붙어있는 그런 가정에서 살고 있다.


 하지만 모든 나의 열정, ‘나’라는 인간으로 살고자 하는 본능을 비롯한 이성, 세계의 존재 자체가 주는 과학적 증거, 성경을 완독하고 다시 읽고 또 읽으면 읽을수록 느껴지는 야훼(여호와)의 잔인함과 비도덕적인 성품, 신의 이름으로 자행되는 온갖 살육과 부패의 온상들은 그 어떠한 입발림으로 좋은 의도를 가지고 있다고 기독교를 칭찬해도 내가 수용할 수 없게 한다. 이는 비단 기독교만의 문제가 아닌 인간의 주체성을 신이라는 인공적 존재의 발 아래에 두려하는 모든 종교의 가치관들이 내게 ‘인간답게 살고 싶다면 거부하라’라고 외치는 것 같다.


 하지만 이런 나의 인간답고자 하는 열정과는 달리 여자 친구에게서 느낄 수 있는 어떠한 대상을 향한 ‘유일한’ 열정은 종교와 그녀의 ‘주님’을 생각하는.... 이렇게 표현하는 게 내심 미안하지만 여자 친구의 ‘광신적 사랑’에서 밖에 느낄 수 없다.


 내가 들이대는 무수한 실증적 증거들과 소리들에 눈을 감고 귀를 감으며 대화의 무필요성을 전제해버리며 신의 존재에 대한 어떠한 의구심 일체를 가지려 하지 않는다.


 교회의 타락과 부패가 노골적으로 드러나 있는 자료들과 정보들을 접해도, 교회 옆집 걸러 또 교회가 있는 온통 빨간 십자가 투성이인 한국 사회의 전경을 보아도 전혀 충격을 받지 않는다. 세상이 타락했기 때문에 저 착한 목사님들의 교회가 늘어나는 것이라는 주장까지 펼친다.


 그럴 때 마다 그냥 여자 친구의 종교를 인정하고 더 이상 관심을 가지지 말고 여자 친구의 성품 그대로를 있는 그대로 사랑하자라는, 회의적이고 포기를 종용하는 마음이 가슴 한 켠에 자리 잡는다.


 사실 나는 알고 있다.

 내가 여자 친구 마음속의 ‘주님’보다 큰 존재가 되지 않는 한 난 결코 그녀에게서 신이라는 존재를 놓게 할 수 없으리라는 것을.


 하지만 기독교인들이 말하는, 무신론자는 사탄의 사도이고 그들은 세상의 해악이라고 외치며 손가락질의 대상으로 전락하는 나는 누구보다도 뜨거운 가슴으로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다.


 그렇다 해도, 내 가슴이 아무리 뜨거워도, 초기에 내가 가진 궁극적인 목적, 내 주위 사랑하는 사람들 만큼에게는 종교에서 벗어나 자신의 주체성을 지킬 수 있도록 하는 목적은 사실상 이제 거둬야 한다. 철학하는데 있어 부정적인 측면에서 가장 최종적으로 빠지게 되는 허무주의적 회의주의가 아닌, 더 현실 가능성이 있는 결론을 도출하기 위해 기존의 목적에 대해 회의하는 것이다.


 리처드 도킨스가 말했듯이, 무신론자들은 권위에 순응하기를 거부하고 독자적으로 사고하고 행동하기에 집단을 단결하여 한 목소리를 내기가 힘들다.


 하지만 그것이 가능해졌다고 해도 결국 또 다른 집단적 권위를 생성하게 될 것이고 신념의 자유라는 인간의 존엄성을 박해하는 종교의 성향을 지닐 위험이 생길 것이다.


 이제 내가 바라는 것은, 신을 놓을 수 없다면 약간이라도 괜찮으니 존경하는 예수와 한 치도 닮지 않은 개신교도들이 모인 타락한 교회에서 조금씩 뒷걸음질을 해달라는 것이다. 자신의 열정과 몸과 마음을 모두 교회에 헌신하는 그런 소모적인 행동만큼만은 자제해달라는 소박한 소망뿐인 것이다. 왜 예수를 표방하며 위장하는, 하지만 예수와는 전혀 닮은꼴을 찾아볼 수 없는 교회에 자기 자신의 모든 열정을 쏟아 부으려 하는지,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종교에 갇혀 판단능력을 스스로 제한하려 안간힘을 쓰는 것을 볼 때마다 무릎 꿇고 울며 애원하고 싶은 심정이다.


 왜 종교를 자기 자신의 무한한 가능성을 위하여 적당한 한도 내에서 이기적으로 이용하려는 인간 본성에 기인한 사고를 하지 못하는 것일까? 새삼스럽게 다시 세뇌의 무서움을 깨닫는 바이다.


 솔직히 말하자면 이런 글을 쓰는 내 행위 자체가 소모적인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내 진심을 알리고 싶은, 자신이 믿는 종교에 대한 어떤 역사적 사실과 정보에서 스스로 멀어지고 귀를 닫으려 하는 여자 친구와 나아가 종교에 귀의하려 하는 여러분 모두를 염려하는 내 진심을 알아준다면 이 글을 작성한 시간은 나와 여러분들에게 더 나은 방향으로서의 인격형성과 사고형성, 자기철학의 완성으로 도약하는 참으로 값진 시간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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