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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설화(雪化)

sOda |2003.10.25 12:35
조회 273 |추천 0

설화(雪化)

 

 

 

6.  전쟁놀이를 하는 계집


“아이고오...아가씨, 이렇게 몰래 나가시다 들키면 또 아버지께 혼나요!”

“그러니까 넌 방 앞에 있으라니까! 아버지가 찾으시면, 적당히 둘러대란 말이야~!”

“그건 안돼지요! 그러다 아가씨께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일은 무슨... 겨우 마을 어귀에 갔다오는건데... 약속할께~ 금세 다녀올테니까~”

“그래도 안돼욧!”

“그럼 너, 동이 만나러 못나가게 할테야!”

 

동이는 건너마을에서 한 번씩 언덕으로 소를 먹이러 오곤하는 농가의 청년으로 아옥이와 좋아 지내는 사이다.

아옥이는 그가 올때즈음이면 집안사람 몰래 문밖 출입을 하곤했다.

아옥이 표정이 떨떠름해졌다.

담이는 더 이상 아옥이의 훼방이 없을걸 짐작하고 뒤뜰 담으로 뻗은 나무를 타기 시작했다.

보통계집애라면 엄두도 못낼 높이의 나무를 담이는 훌렁훌렁 잘도 오른다.

 

“난 몰라요! 아가씨가 혼나든지 말든지!”

 

아옥이는 발을 구르며 원망섞인 말을 내뱉고, 담이는 그러던지 말던지 열심히 나무를 탄다.

담을 훌렁 넘은 담이는 쏜살같이 어디론가 달음질을 쳤다.

담이가 가는곳은 마을이 훤히 내려다보이는 언덕배기였다.


휘는 팔베개를 하고 누워 파랗고 높은 하늘을 하릴없이 보고 있었다.

결이 부탁한, 실은 명령에 가까운- 그 일이란 것이 휘 머리로는 이해가 가지 않는 일이었다.

한참 머릿속이 복잡해져 있을즘, 휘의 귀로 매서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네 이녀석! 여기가 어디라고 감히 염탐을 하는게얏!”

 

헉... 잠시 방심한틈을 타 발각된 것인가?

 

“순순히 말할 때 칼을 버리고 항복하렷다!”

 

그런데... 어째 목소리가 이상하다...?

사내 목소리 같지도 않고...

휘는 엎드린채 몸을 최대한 낮춘 후 수풀을 살짝 헤집고 소리가 나는 쪽으로 시선을 맞췄다.

순간...

휘는 터질듯한 웃음을 참느라 손으로 입을 막아야 했다.

열서넛쯤 되어 보이는 계집애가 풀로 수염을 달고 전쟁놀이(?)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나뭇가지를 검인냥 들고있는 모습이 꽤 그럴듯하다.

계집애는 위엄있는 모습으로 마치 포로를 심문하듯 흉내를 내고 있었다.

 

“네가 네 죄를 알렸다? 우리 부족을 부여로부터 지켜준다고 하나, 실은 너희 부족의 안전을 위한 일이지 않으냐? 부여와 너희 부족 사이에 우리 부족이 끼어 절충지 역할을 하고 있다는걸 모르는 건 아니겠지? 헌데도 너희는 무슨 큰 인심이나 쓰듯 경계를 지키는 군사를 빌미로 해마다 갖은 공물을 뜯어가니, 이런 금수만도 못한 짓거리가 어딨느냐?”

 

휘는 이 대목에서 자신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어려보이는 계집애의 입에서 어찌 저런 정확한 정황이 흘러나온단 것인가...

물론 관노부의 계집인지라 우리 계루부가 먹고 입는데 넉넉한 부족은 아니란 것을 모르고서 하는 말이지만 말이다.

계집애에게 생각을 뺏기고 있던 휘는 갑자기 발목에 뜨끔함을 느꼈다.

그리고 순식간에 발목부터 정강이까지 뜨거운 열기가 확 치고 올라오는 것을 느끼고 몸을 돌렸다.

 

“왠놈이냐!”

 

휘의 머리 위로 계집애가 나뭇지를 겨누고 서 있는 모습이 들어왔다.

여자애의 나뭇가지는 검인냥 정확히 휘의 목덜미를 겨누고 있었다.

그러나 뭐라고 대답을 하기도 전 벌써 휘의 초점은 흐려지고 있었다.

계집애의 얼굴도, 하늘도 모두 가물가물하다...

그리고 곧 모든 것이 캄캄해졌다.


7. 묘한 인연


휘는 정신이 오락가락하는 동안 숱한 사람들의 얼굴을 보았다.

현실인지 꿈인지도 모르게 낯선 사람들의 얼굴과 함께 결과 무록의 얼굴도 보았다.

 

“아도님, 살 수 있을까요?”

“네가 그자리에서 독을 많이 빨아냈으니 죽진 않을게다.”

 

몇 번 흐릿하게 주변이 보이다 이내 캄캄해지는 일이 몇 번 반복되었다.

하얀 뱀을 팔에 감은 여인이 자신을 비웃듯 돌아보는 이상한 꿈도 반복해서 꾸었다.

여인의 모습이 어찌나 관능적이고 아름답던지 휘는 몇 번이나 여인을 잡으려 손을 내밀었지만 그때마다 여인은 연기처럼 사라져 버렸다.

그리고 어느날...

휘가 눈을 뜨자, 전쟁놀이를 하던 계집애가 옆에 앉아 졸고 있는 것이 보였다.

여기가 어디지...

천하의 휘거련이 이게 무슨 일이람...

휘가 힘들게 몸을 움직이려 하자, 계집애의 눈이 발딱 뜨였다.

계집애는 손바닥을 척 벌리더니 휘의 눈앞에서 마구 저었다.

 

“아저씨, 내 손바닥 보여요? 몇개에요?”

 

보이긴 하는데... 그렇게 정신없이 휘저으면 몇 개인지 보이나...

 

“흠... 아직 정신이 덜 깼네.”

“다...다섯개...”

 

손가락은 다섯 개니까.

 

“어마나! 정신이 들었네! 아저씨 손가락 좀 움직여봐요, 발가락도요~”

 

휘는 정신이 조금 없었지만 계집이 시키는대로 손가락과 발가락을 꼼지락 거렸다.

 

“어마나! 독이 다 풀렸네! 역시 아도님은 대단하신 분이야~”

 

독이라니... 아도님은 또 누구야?

 

“아저씨, 거기가 얼마나 위험한 곳인데 팔자좋게 누워 있었던거에요? 아무리 우리마을에 있는 뱀들이 사고는 안 친다고 하지만, 그래도 낯선이들한테는 어찌 대할지 모른단 말이에요.”

 

뱀? 젠장... 내가 독사에 물렸었군.

휘는 퍼뜩 정신이 들며 고개를 이리저리 돌려 자신의 검을 찾았다.

 

“아저씨, 이거 찾아요?”

 

소녀는 한쪽에서 천으로 싸여진 물건을 내보였다.

길다란 모양새가 휘의 검이다.

 

“아저씨, 뭐하는 사람이길래 검을 가지고 다니는 거에요? 보니까 청동도 아니고 쇠로 만들어진 것 같던데... 매일 단련된 훌륭한 검이던데요...?”

 

뭐라 뾰족이 할 말이 생각나지 않는다.

독 때문에 머리도 굳었는가...

 

“아저씨, 사실은 무려라(경찰)한테 알리려고 했었는데요- 이 검 때문에 조용히 데려 온거에요.”

 

검 때문이라니...?

 

“검을 보면 분명 무려라가 끌고 갔을텐데, 죽을지 살지도 모르는 사람을 끌고가게 할 수는 없잖아요.”

“고맙...소.”

 

새삼 휘는 물수건을 갈아주는 계집을 눈여겨 보았다.

그땐 풀에 가려져 자세히 보지 못했는데, 이렇게 가까이서 보니 어리지만 매혹적인 얼굴이다.

유난히 희고 깨끗한 살결 때문에 얼굴에서 빛이나듯 환하고, 눈이며 코며, 거기다 도톰하고 붉은 입술까지... 한 두해 지나면 완전히 사내 넋을 빼놓을 미녀가 될것이다.

벌써부터 휘의 가슴이 울렁거리지 않는가...

 

“전쟁놀이는... 언제부터 했소?”

 

계집의 얼굴이 조금 붉어졌다.

 

“봐, 봤어요? 그냥 난... 계루부로 보내는 공물의 행렬이 늘 우리 마을을 지나가기 때문에 그걸 볼때마다 울화가 치밀어서...”

“...아까 잡은 포로는 누구였소?”

“헤헤... 그야, 관노부의 족장이죠. 하지만 이제 족장은 나이가 많이 들었을테니 사실은 후계자를 잡았다고 생각해요. 내가 나이가 더 들면요, 그 녀석을 잡아서 혼을 내줄거에요.”

 

계집은 사뭇 진지하게 주먹까지 불끈쥐며 의지를 보였다.

휘는 장정이 내뱉었으면 목을 쳤을지도 모를 말을듣고 웃음을 참느라 배가 아팠다.

이 말을 결이 들었으면 뭐라 했을까.

 

“담이 아가씨! 아버지 오셔요!”

“으응! 알았어, 금방 나갈께!”

 

담이...?

 

“참, 아저씨 이름은 뭐에요? 난 담이라고 해요.”

“...거련.”

“거련... 아직 독이 다 풀린건 아니니까 억지로 움직이려고 하지 말아요- 내가 몸종을 시켜 먹을 것을 좀 보내줄테니 먹고 자도록 해요. 내일은 몸이 더 가벼울거에요.”

 

계집... 아니, 담이가 나가려고 몸을 일으키자 휘는 방 안 가득 퍼지는 복숭아 꽃 향기를 맡았다.

이런 기가막힐 노릇이 있나.

솔직히 결의 말을 들었을땐 코웃음을 치지 않았던가 말이다.

족장의 후계자로 손색이 없는 결이 수년전 그것도 딱 한번 스치듯 만났던 계집애를 맘에 두고 있었다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히 휘에게 놀림당할 일이었다. 

그 계집이... 방금 나간 담이란 말인가...

결이 단순히 용모만으로 담이를 맘에 둔게 아니란것을 휘도 깨달았다.

담이가 나뭇가지를 목에 겨누었을때 뿜어져 나오던 위엄을 휘는 떠올렸다.

검을 보는 눈도 트여있다.

결... 그다음은 나... 우연인 듯 차례대로 우리를 만나게 된건 어쩌면 필연일까?


이때 갑자기 문밖이 소란스러워졌다.

휘는 재빨리 검을 움켜쥐고 문에 바짝 다가가 밖의 동태를 살폈다.

문 밖에는 병사들이 몰려온 듯 했다.

혹시 나를 잡으러...?

이번에는 방안의 벽장이 스르륵 열렸다.

경계하는 휘의 앞으로 담이가 튀어 나왔다.

 

“아저씨, 빨리 떠나요.”

“무슨 일이오?”

“이제 병사들이 날 찾으려고 온 집안을 뒤질거에요. 그럼 아저씨도 발각될테고, 무사하지 못할거에요. 벽장으로 올라가요.”

“그대를 찾는다니?”

“길게 설명할 시간 없어요. 이리 따라오세요.”

 

벽장을 넘자 다른 방이 나왔다.

휘는 몸이 쑤시고 힘들었지만 잘 버티며 담이 뒤를 따랐다.

뒤뜰에는 말 한 마리가 대기하고 있었다.

 

“세금을 걷는 아버지를 눈에 가시로 생각하는 지앙관료들이 아버지를 모함하고 나를 노비목록에 넣었다나봐요.”

“하지만 아버지는 귀족이 아니오?”

“말단 관료일 뿐인걸요. 거기다 우리 어머니는 옥저분이구요. 더 지체할 시간 없어요. 어서 가요-”

 

휘는 말에 올라 조금 망설이다 손을 내밀었다.

 

“나와 갑시다.”

“...!”

“내가 가는곳에 함께 갈수는 없지만 도망칠 수 있게 먼곳에 데려다 줄 수는 있소.”

 

담이는 조금 망설이는 빛을 보이더니 이내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내가 여기서 도망치면 우리 아버지와 노비들이 어떤일을 당할지 몰라요. 가세요.”

“그럼 그대는 노비가 되어 이국으로 팔려갈텐데?”

“방도가 있겠죠. 당신이 도울일은 없으니 어서 떠나세요.”

 

휘는 품안에서 단도를 꺼냈다.

비록 작은 검이긴 하지만 훌륭한 검이다.

 

“그럼 이걸...”

“고맙습니다. 유용하게 쓸께요.”

“당신은 내 생명의 은인이니 나도 언젠가는 당신의 목숨을 구할것이오. 그때까지 이걸 잘 간직하고 있어요.”


휘는 말머리를 돌려 박차를 가했다.

담이 어느 곳으로 팔려가든, 설령 다른 부족으로 넘어간다고 해도 결과 내가 힘을 쓰면 곧 구해낼 수 있을것이다.

휘는 애써 은혜를 입은 자의 도리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다른 마음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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