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견이 고구려에 대한 출병을 서두르게 하여 장마와 전염병이 겹치는 계절로 군사를 일으키게 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영주의 수비군을 끌어들여 전과(戰果)를 올리는 방법도 주효할 것입니다. 비록 영주의 수비군이 10만 대군이라고는 하지만 우리에게 유리한 지형으로 유인하기만 한다면 결코 어렵지 않은 싸움이 될 것입니다. 영주총관(營州總管) 위충(韋沖)은 용맹이 뛰어난 장수로 알려져 있으나 지략은 부족한 인물로 오히려 우리가 말갈(靺鞨)의 병력으로 맞선다면 얕잡아보는 마음이 생겨 유인작전(柔靭作戰)에 쉽게 말려들 것입니다."
"그들을 어디로 유인할 작정이오?"
대성왕이 물었다. 문덕은 정면에서 그를 응시하며 대답했다.
"지금은 1월 초순으로 매우 추운 겨울이오. 요하(遼河)의 강물이 얼어붙어 배나 뗏목을 띄울 필요도 없이 말을 타고 달리면 쉽게 도강(渡江)을 할 수 있는 시기요. 아군이 영주성을 공략하다가 못 이기는 척 요하로 달아나면 역시 위충은 영주성의 전 병력을 끌고 아군을 추격해올 것이오. 그 때, 얼어붙은 요하의 강물을 깨뜨린다면 영주성의 적군을 모두 물귀신으로 만들 수 있지 않겠소?"
문덕의 기발한 책략에 좌중의 사람들은 모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대성왕이 다시 문덕에게 물었다.
"그렇다면 을지 공은 적군을 유인할 방법이나 얼음판이 된 요하의 강물을 깨뜨릴 방법도 이미 마련해 놓으셨단 말이오?"
"물론이오. 수나라와의 첫번째 전쟁은 적군을 우리 경내로 들어오기 전에 격퇴시켜 승리할 수 있소이다."
수나라의 군대가 고구려 경내로 들어오기 전에 이를 물리칠 수 있다는 을지문덕의 단언에 영양태왕은 놀란 표정과 함께 믿음직스러운 눈빛을 보냈다.
"과연, 그대는 기인이오. 짐은 그대를 믿고 이번 작전을 수행할 것이오. 을지 공의 책략이라면 짐은 하늘 끝 땅 끝까지라도 가겠소!"
"황공하옵니다."
문덕은 고개를 깊이 숙였다. 보통의 군주라면 참으로 받아들이기 어려운 계략이었다. 하지만 젊고 패기가 넘치는 영양태왕은 기꺼이 자신의 책략을 따라주고 있는 것이었다. 태왕의 목소리에 뒤이어 또 하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강이식이었다.
"폐하, 여기 을지문덕 공에게 이번 전쟁을 지휘할 모든 권한을 주는 것이 어떻겠사옵니까?"
사람들은 모두 놀랐으나 태왕은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짐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소. 어떤 직위가 적당하겠소?"
"군사(軍事)와 병략(兵略)에 있어서는 태왕 폐하를 제외한 모든 고구려인이 그의 말에 복종하도록 하는 직위가 필요할 것으로 사료되나이다."
강이식은 고구려의 육군 병력을 총지휘하는 병마원수의 직책을 맡고 있었다. 그런데 자신보다 더 높은 직위를 을지문덕에게 주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었다. 영양태왕은 고개를 끄덕이고 밖을 향해 외쳤다.
"온 대장은 밖에 있는가? 보검(寶劍)을 한자루 가져오게."
태왕의 명령을 받은 도성(都城) 수비대장 온준(溫俊)이 금으로 장식한 보검을 들고 들어왔다. 태왕이 자리에서 일어나 검을 집어들자 다른 사람들도 모두 일어섰다.
"을지문덕은 짐의 어명(御命)을 받으라!"
문덕은 태왕 앞에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였다.
"조의제인(皁衣制人) 을지문덕(乙支文德)을 대모달(大模達)의 직급과 더불어 삼군대장군(三軍大將軍)에 임명하니 성심을 다해 짐을 도와 고구려의 번영을 위해 공을 세우도록 하라!"
문덕은 태왕으로부터 상방검(尙方劍)을 받아들고 큰 소리로 외쳤다.
"소신 을지문덕은 견마지로(犬馬之勞)를 다해 태왕 폐하를 보필하겠나이다!"
마침내 민족의 영웅 을지문덕이 고구려의 전군을 통솔하는 총사령관으로 역사의 전면에 등장하는 순간이었다. 떨떠름한 표정으로 을지문덕을 바라보는 대성왕을 제외하고는 영양태왕과 연자유, 강이식은 기대와 격려의 눈빛으로 을지문덕을 주시하고 있었다.
영양태왕 재위 8년째가 끝나가는 겨울, 희끗한 눈발이 흩날리는 평양성의 남문대로변에 위치한 어느 저택의 객실에는 몇몇 사람이 모여앉아 심각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탁자 중앙에 자리한 위엄 있는 표정의 사내는 이 집의 주인인 대성왕(大成王) 고건무(高建武)였다. 고건무는 두 눈을 지그시 감은 채 참석자들이 내뱉는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대성왕 전하(殿下)! 더 이상 방관하다가는 난리납니다. 수나라의 태세가 심상치 않습니다. 전쟁이 터지기 전에 무슨 수를 써야합니다."
"그 동안 수나라의 황제가 두 번이나 우리 고구려에 사신을 보내 조공을 보내지 않은 것을 탓하는 국서를 보내왔습니다. 지금 태왕 폐하께서 수나라에 복종하지 않으시겠다는 결심이 중원에 알려진다면 저들은 백만 대군을 일으켜서 우리 나라를 쓸어버리겠다는 최후 통첩을 할 것입니다."
대성왕을 둘러싼 자들은 대사자(大使者) 고소심(高少心), 조의두대형(皁衣頭大兄) 도병리(都丙利), 절노부욕살(絶奴部褥薩) 사비유(史備流) 등이었다. 그들은 어떻게든 수나라와의 전쟁을 피하고 화친을 하자는 온건파였다.
"지금이라도 사죄의 글을 보내고 조공을 바쳐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그것만이 국토를 보존하고 백성들의 생명을 보호하는 길입니다."
거듭되는 주장을 듣던 고건무는 마침내 눈을 뜨며 긴 한숨을 내쉬었다.
"본인도 여러분의 견해에 기본적으로 동감하오. 그러나 수주(隨主) 양견(楊堅)이 정말로 최후통첩에 가까운 국서를 보낸다면 화친론을 주장하기 어렵겠소. 그건 바로 항복을 의미하는 것이오."
고소심이 다시 입을 열었다.
"그것이 어찌 곧 항복을 의미하겠습니까? 수나라 황제의 비위를 적당히 맞춰주면서 안으로 국력을 계속 다지자는 얘기지요."
고건무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나의 형님이신 태왕 폐하께서 광개토호태왕(廣開土好太王) 영락제(永樂帝) 시절의 영광을 재현하겠다는 의욕에 가득 차 계신데 그런 말을 함부로 하기는 어렵소. 지금은 폐하의 뜻에 따를 수밖에 없소."
그 말에 모두들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다. 잠시 어색한 침묵이 흐르다가 도병리가 마른침을 삼키며 입술을 떼었다.
"그래도 전하 외에는 반대론을 제기해줄 사람이 없습니다. 다음에 회의가 소집되면 그때 꼭 한 말씀 해주십시오."
고건무는 자리를 박차고 벌떡 일어나며 소리쳤다.
"그만 하시오! 그대들은 내가 태제(太弟) 자리를 대양왕(大陽王)에게 빼앗기는 모습을 보고 싶은 것이오?"
영양태왕(嬰陽太王)은 후사에 아들이 없고 딸만 얻는 바람에 유사시 대성왕(大成王) 고건무(高建武)와 대양왕(大陽王) 고연(高然) 두 아우 가운데 한명에게 왕위를 물려주어야 하는 신세가 되었다. 그러나 아직도 영양태왕은 신하들의 잇따른 권유에도 불구하고 태제(太弟) 책봉을 거행하지 않고 있었다. 두 아우를 저울질해서 자기가 차기 태왕에 가장 적합하다고 생각하는 동생에게 태제의 자리를 줄 것이란 의미였다.
태제 자리를 들먹인 고건무의 말에 도병리는 고개를 푹 숙였다. 고건무는 뒷짐을 지고 창가로 걸어갔다. 그는 창가에 서서 아직도 눈발이 은은히 나부끼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기다리시오. 본인이 태왕위에 오르는 날이 오면 여러분의 세상이 될 것이오. 무모한 전쟁은 형님의 시대로 끝내고 평화 속에 만 백성이 맘 푹 놓고 농사만 지을 수 있는 세상을 만들겠소."
"......"
"그러나 일단은 형님의 뜻에 따라야 하오. 수주가 최후통첩을 보낸다면 더 더욱 고구려의 자존심을 위해 따를 수밖에 없소."
고건무는 고개를 돌려 좌중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우리 고구려의 힘은 그렇게 약하지 않소. 수와 한판 결전을 치러도 결코 망하지 않소. 서로가 양패구상할 뿐이오.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백제나 신라가 업수이 볼 정도로 약해지지도 않소."
그 말에 모두들 더 이상은 어쩔 수 없다는 듯 체념어린 표정으로 한숨만 푹푹 내쉬었다. 고건무는 다시 좌석으로 돌아와 앉았다.
“자, 심각한 얘기는 그만 하고 술이나 드십시다.”
고건무는 먼저 잔을 높이 들어 올려 입에 갖다대었다. 그러자 다른 이들도 모두 공손히 술잔을 들어 입술을 축였다. 그렇게 잔이 서너 배 돌던 가운데 문 밖에서 발걸음 소리가 나더니 곧 이어 다급한 외침이 들려왔다.
"대성왕 전하! 수나라의 사신이 국경을 넘었다는 정보가 들어왔습니다."
고건무는 별일 아니라는 듯 답했다.
"흐음, 올 때가 되었지."
"그런데 그게 좀 이상합니다."
"이상하다니? 들어와서 얘기하라."
문이 열리며 집사가 허리를 굽힌 채 포권하고 들어섰다.
"인솔하는 지방관이 사신 행렬을 그냥 그대로 인솔하여 오고 있답니다."
"뭣이!"
고건무의 눈꼬리가 치솟았다. 동석한 귀족들은 긴장의 눈빛을 발했다. 지금까지는 수나라의 사신이 국경을 넘으면 무조건 가마에 태우고 군마로 사방을 에워싸서 대로변을 유심히 관찰하지 못하게 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그냥 길가의 사정을 자유롭게 보도록 하면서 오고 있다는 것이 아닌가?
"흐음, 이제 전쟁 준비가 다 끝났다는 뜻인가?"
고건무는 침음성을 발하며 중얼거리더니 벌떡 일어나 창가로 다가갔다. 흩날리던 눈발은 다 멎고 하늘이 푸른빛을 환히 드러내고 있었다.
"드디어 형님께서 전쟁을 시작하시려는군. 고구려가 수를 치는 게야. 서토(西土)의 막강한 대국인 수나라를! 그나저나 그 사신은 자신이 살아 돌아가지 못할 몸임을 깨닫고 있을까?"
다소 걱정기가 어린 독백이 무거운 대기 속으로 나지막이 울렸다.
編作對象原書
유현종 著「대제국 고구려」아침나라編(2001년版)
정수인 著「우리 민족의 자부심 고구려의 역사」새움編(2005년版)
김진명 著「살수대첩」랜덤하우스중앙編(2005년版)
정호일 著「천손왕국 대고구려」우리겨레編(2001년版)
이일우 著「영광, 대고구려」정신문화사編(2004년版)
이언호 著「연개소문」큰방編(2006년版)
서길수 著「동아시아 문명의 중심 고구려」사계절출판사編(1999년版)
한종호 著「마지막 영웅」지문사編(1999년版)
오재성 著「만주는 과거 우리의 역사 무대였다!」국사광복국민운동본부編(2002년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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