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우내 자고 있던 기억의 밀실에
불이 켜진다
일곱시부터 수선스레 산허리에 올라선
오늘 아침의 해는
하낫둘, 하낫둘 맨손체조를 마친 다음
장난꾸러기의 밀린 방학숙제도 들춰보고
물만 먹고 자라는 유리병의 히아신스
포름한 꽃대도 살짝 뽑아올린다
아이들을 놀래줘야지
눈이 내린 개나리
그 노오란 입술이 잿빛 하늘 아래
아직은 보이지 않지만
대학 캠퍼스의 벤치 위에서 정구장 너머로는
바이올린 협주곡 제1번 E장조
연둣빛 강물이 흐른다
안녕하셔요, 안녕하셨어요
빨강머리 안토니오 비발디 선생이
멋지게 모자를 쓰고 나온다
비발디 선생은 공연히 이른봄의 해를
한 번 치어다보곤 에취, 에취, 엣취 재채기를 한다
짤깍, 잠겨 있던 책상 서랍이 열리고
열쇠는 힘이 세구나
겨우내 자고 있던 기억의 밀실에
불이 켜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