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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포소설>피 막 - 3

살인교수 |2003.11.25 02:08
조회 1,787 |추천 0

피막

 

피막(避幕) : 예전에 사람이 죽기 직전에 잠시 안치해 두는 마을에서 떨어진 외딴집

 

 

강주민은 세수를 하듯 손바닥으로 얼굴의 빗물들을 쓸어낸 후 조진선을 바라보았다.
"어쩔까요, 교수님? 우선 비부터 피해야 하니 들어갈까요?"
"예, 그렇게 하는 게 좋을 듯 싶네요. 산성비 맞아봤자 좋을 건 없으니까요."
"저, 그럼 이거라도 머리에……."
강주민은 주머니에서 꺼낸 손수건을 조진선에게 내밀었다. 무언가 호의를 베풀 때가 되었다
고 기대하고 있던 조진선으로선 만족한 웃음을 흘렸다. 그녀는 자신의 손수건이 있음에도
꽁꽁 숨겨둔 채 강주민이 건넨 손수건으로 머리를 감쌌다.
"자, 다들 피막 안으로 대피합시다. 폭우가 이렇게 쏟아지는데 마냥 맞고만 있을 수는 없지
않습니까! 게다가 금방 그칠 비도 아니고."
강주민은 현장을 통제하는 지휘자인양 모두가 자신의 말에 일사 불란해 질 것은 요했다.
"자, 어서 갑시다!"
강주민은 그렇게 소리치며 언덕 위를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그가 달리자 남아있던 사람들도 일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여보 같이 가요! 저 지금 옷이 다 젖어 버려서 잘 움직여지지가 않아요. 옷이 몸에 착 달라
붙어버렸어요."
안향숙이 앞서 뛰어가는 남편에게 서투른 호소를 해 보았지만 남편은 한 마디 대꾸도 없었
다. 그녀는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랐다. 그녀는 조금 전 남편이 조진선에게 손수건을 건
네주는 장면을 목격했었다. 그것은 도저히 용납하기 힘든 일이었다. 버젓이 아내가 있음에도
다른 여자에게 호의를 베푼 것을 용서할 수 없었다.
그녀는 사납게 이를 갈며 빗속을 달렸다.
"저기, 이장님 어쩌시렵니까?"
저만치 가려다 말고 되돌아온 황사장이 이장을 향해 물었다. 이장과 처녀 보살은 쏟아지는
비를 그대로 맞으며 어떤 미동도 하지 않았다.
"이장님, 그냥 돌아가시는 게 어떠세요? 여기 일은 너무 심려치 마시고요. 저도 이장님 마음
다 압니다. 저희들이 정말로 염려되셔서 하시는 말씀이라는 것도 알고요. 하지만 저희들에게
도 다 생각이 있습니다. 이장님이 걱정하실 일은 절대로 없을 것입니다. 그러니 제발 돌아가
주세요!"
황사장이 애걸하는 투로 말하자 이장은 조용히 그와 시선을 맞추며 입을 열었다.
"이보게 황사장. 난, 정말 자네들을 위해서 이러는 거네. 그걸 어째서 모르는가? 보살님은
자네들이 진정으로 걱정되어 몸소 여기까지 오신 거라네. 자네들같이 치기만 앞세우는 인간
들은 절대로 령(靈)을 다스리지 못하네. 진심으로 걱정되어 충고하는 걸세."
그는 의미심장함을 알리려는 듯 잠시 말을 멈추었다가 다시 말했다.
"보살님께서 자네들의 운명을 예언하셨다네. 참혹했어! 정말 참혹했다고! 내 말을 소홀히 듣
지 말게. 정말로 큰 일이 일어날 걸세."
이장은 빗물 섞인 눈을 가늘게 찌푸리며 황사장을 주시했다. 처녀 보살 역시 비에 흠뻑 젖
은 채로 황사장을 뚫어지게 응시했다.
너무 진지한 그들의 모습에 황사장은 어딘지 범상치 않음을 느꼈다.
황사장은 이 마을 토박이라 처녀 보살에 대한 소문은 익히 들어왔었다. 그녀를 직접 보기는
처음이지만 그녀의 예언이 단 한번도 틀린 적이 없다는 중년 여인들의 찬사는 무수히 들어
왔다.
불현듯 일 주일 전의 일 하나가 생각났다.
승승장구하던 중소기업의 젊은 사장이 처녀 보살에게 사주를 보러 갔었다. 그는 처녀 보살
에게 목돈이 생겨 투자를 하고 싶은데 어느 곳이 좋겠냐고 물었다고 한다. 하지만 처녀 보
살은 그의 얼굴을 척 보자마자 무시무시한 얘기를 던졌다고 한다.
"그 돈으로 관이나 사두고 장사치를 준비나 해 둬! 수 일 내로 저승사자가 자넬 데리러 올
것이야!"
당시 그 말을 들은 젊은 사장은 처녀 보살을 당장에 명예훼손죄로 고발해 버리겠다며 노발
대발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는 결국 변호사를 부를 수 없었다. 그 다음날 자신의 지붕에서
안테나를 손보던 그는 쾅하는 폭발음과 함께 허공으로 날아가 버렸다. 집안의 가스관이 폭
발했던 것이다. 그의 시체는 이웃집 지붕 위에서 머리가 깨진 채로 발견되었다.
사람들은 그가 보살에게 대들지 않고 살 수 있는 방도를 사정사정하며 여쭈었더라면 그런
참변은 면했을 지도 모른다고 수근댔다.
황사장은 문득 시선이 마주친 처녀 보살에게서 섬뜩한 기를 느꼈다. 그는 가볍게 몸을 떨었
다. 그녀의 예언은 단 한번도 틀린 적이 없다!   
황사장은 긴 한숨을 내쉬며 침착하게 말했다.
"이장님, 먼저 한 가지만 약속해주세요. 우선 조교수님이 하자는 데로 지켜보기만 하세요.
그 여자가 정말로 일을 그르치겠다 싶기 전까지는 절대로 나서지 마시라고요. 어차피 형식
적으로 하는 것 일 테니 별다른 문제는 없을 겁니다. 제 말 무슨 뜻인지 아시겠지요?"
그는 시선을 처녀 보살에게로 돌린 후 머리를 조아리며 부탁했다.
"보살님께도 꼭 부탁드리겠습니다. 일단은 저들이 하는 데로만 지켜봐 주시길 부탁드립니
다."  
말을 하면서 황사장은 땀을 닦던 손수건으로 최대한 우산을 만들어 자신의 머리를 보호했
다.
"자, 그럼, 우선 비부터 피하고 봅시다. 어서들 가시죠."

 

폭우는 회오리바람까지 동반하며 대단한 위력을 보였다. 쏟아지는 장대비가 땅에 구멍이라
도 뚫을 것 같았다. 엄청난 비의 기운이 몰아치며 피막의 붉은 벽돌을 때렸다.
문은 덜컹거렸으나 안으로 굵은 빗장을 쳤던 지라 쉽게 열릴 것 같지는 않았다.
피막 안은 어둡고 습했다.
밖에서 본 것보다 안은 넓었다. 여섯 평 남짓한 공간에 여러 가지 가재기물들이 굴러다녔다.
벽에도 오래되어 녹슬고 닳은 철제 기구들이 주렁주렁 걸려 있었다. 벽 사방에는 거미줄이
가득했지만 신기하게도 거미는 한 마리도 보이지 않았다.
양초가 있으리라 곤 생각지 못했으나 큼직한 양초들이 낡은 바구니 속에서 많이 발견되었
다. 그것들을 꺼내 적당한 선반 위에 불을 붙였다. 황사장은 촛불 하나를 손에 든 채 실내
이곳 저곳을 둘러보았다.
안쪽에는 작은 방이 하나 더 있었다. 그 방의 문은 밖에서 관건 되어 있었다. 세월의 때가
묻은 누런 창호지는 심하게 떨어져 나간 곳 없이 비교적 양호한 편이었다. 그 문 위로 천장
과 가까운 벽에 조선시대 사람들로 보이는 여러 얼굴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었다. 실제로 조
선시대 사람들인지 어쩐지는 알 수 없었으나 하나같이 나이가 지긋이 든 노인들이었다.
장인하는 그 얼굴들이 소름끼쳤다. 특히 그림들 중 고구마처럼 얼굴이 길고 눈이 양옆으로
찢어진 모습의 할머니 상이 그를 유독 괴롭혔다. 언젠가 비슷한 모습을 한 귀신을 꿈속에서
본 듯했다. 그것이 기시감(旣視感)인지는 모르겠으나 마치 꿈속의 그 귀신이 사는 소굴로 애써 들어와 있는 듯한 기분이 들어 영 불쾌했다. 귀신은 소년이 어리석게도 자신의 소굴로
들어올 줄 알았다는 듯 입가에 보일락 말락하는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그것은 겁도 없이
내가 사는 곳까지 들어왔으니 이제 이 악몽 속에서 영영 나가지 못할 것이야, 하는 엄포 같
았다.
인하는 그림에서 시선을 거둔 후 아버지의 등뒤로 숨어버렸다. 그래도 그림 속의 귀신이 긴
손을 뻗어 어딜, 하며 목덜미를 잡을 것 같아 무서웠다. 그는 아버지의 등에 얼굴을 파묻었
다.
장건영은 손을 뒤로해서 아들의 머리와 등을 쓰다듬어 주었다.  
그는 음울한 기분을 떨칠 수 없었다. 아들과의 계획이 완전히 수포로 돌아간 것에 대해 극
심한 분노마저 느껴졌다. 그는 설계사인 자신이 어째서 피막 같은 데나 들어와 있어야 하는
건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게다가 강령술이니 푸닥거리니 하는 것에 동참하고 싶은 마
음은 추호도 없었다. 빨리 이 따분한 인간들로부터 벗어나 아들의 생일을 멋지게 축하해주
고 싶었다.
그는 강주민을 향해 매서운 눈길을 보냈다. 그는 자신에게 등을 보인 채 심령학 저명인사라
는 여자와 도란도란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장건영은 지금 이 시각 이 장소에 자신이 있어
야할 하등의 이유도 없음을 절실히 느꼈다.
꼭 그런 사람이 있었다. 쓸데없이 자기 옆에 누군가를 두고 싶어하는 사람. 특별히 시킬 일
이나 동행해야 할 필요성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기어코 자기 옆에 꿰차두고 싶어하는 사람.
강아지처럼 졸졸 따라다니게 해야만 직성이 풀리는 사람. 단지 개처럼 끌고 다녔다는 데에
우쭐한 만족감을 느끼며 즐거워하는 사람. 그래서 결국 그 만의 개인 시간을 한 줌도 없게
만들어 버리며 우월감에 빠지는 사람.
장건영은 주먹을 꼭 쥐었다.  
아들의 생일날이 이제 몇 시간 남지 않았다는 것에 안타까운 마음을 가지고 있는 나의 심정
을 강주민은 분명 알고 있을 것이다. 틀림없다! 저 자식은 분명 알고 있다! 내가 아들 때문
에 애태우며 조바심 나 있다는 사실을. 그런 나의 심정을 훤히 꿰뚫고 있으면서 의도적으로
보내주지 않고 있다! 뿐만 아니라 그의 그런 사악한 의도를 내가 간파하고 있다는 사실까지
다 알고 있음이 분명하다. 그는 내가 언짢은 감정이 쌓이고 쌓여 분노에 다다라 있다는 것
까지 모두 알고 있다. 녀석은 그런 놈이다! 그래보았자 내가 어떤 식으로도 그에게 감정을
표출할 수 없으리라는 것을 그는 자신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기에 저렇게 뻔뻔한 얼굴로 나
의 분노를 곱씹으며 즐기고 있는 것이다!
장건영은 강주민의 뒤통수를 가만히 응시했다. 강주민은 무언가 잔뜩 신이라도 난 사람처럼
손뼉까지 치며 주위의 시선을 자기에게로 집중시키려 했다. 장건영은 그런 모습을 바라보며
손톱이 빠져나갈 만큼 단단히 주먹을 쥐었다.
곧이어 그는 아들을 잠시 떼어놓은 후 강주민을 향해 걸어갔다. 그의 몸이 시커먼 어둠과 하나가 되어 서서히 강주민에게로 다가가고 있었다.
"난 저 방이 왠지 소름끼쳐. 꼭 닫아 놓은 것이 마치 엄청난 비밀 같은 것을 간직하고 있는
것 같아. 마치 판도라의 상자처럼 말야. 아마 저 문이 열리면 우리가 감당할 수 없을 만큼
커다란 공포가 덮쳐 올 거야. 분명히 그럴 것 같아. 내 직감은 정확한 편이잖아?"
창호지 문 앞에서 기웃거리며 말하던 이유미는 문득 아무도 자신의 말을 듣고 있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녀는 바람 소리가 날 정도로 고개를 홱 돌렸다.
어느 틈에 박철준은 조진선 옆에 고양이처럼 붙어 있었다. 그들은 강주민과 사이좋게 얘기
를 나누고 있었다. 무슨 얘기들을 하는지 조진선이 소녀같이 까르르 웃으며 박철준의 가슴
을 툭 쳤다. 박철준은 말 잘 듣는 머슴처럼 히죽거렸다. 강주민이란 작자는 품속에서 시가케
이스를 꺼내 조진선에게 권했다가 그녀가 사양하자 박철준에게 권했지만 그도 사양했다. 그
는 하는 수 없다는 듯 한 개비만 꺼내 자신의 입술에 물었다. 손목에서 반짝이는 롤렉스시
계가 탐욕스러웠지만 그의 얼굴엔 졸부의 기름이 줄줄 흐르고 있음을 그녀는 느낄 수 있었
다.
그들 뒤로 강주민의 아내가 못마땅한 얼굴을 하고선 돌부리 위에 아무렇게나 걸터앉아 있었
다. 안향숙의 몰골은 말이 아니었다. 두껍게 한 화장이 얼룩덜룩 지워져 있었다. 화려한 드
레스는 비에 쫄딱 젖어 숨이 죽어 있었고 우스꽝스러운 큰 모자는 한쪽이 엉망으로 찌그러
져 있었다. 그래도 그녀는 그 거추장스러운 모자를 벗지 않았다. 촛불에 아른거리는 그녀의
얼굴에서 남편과 조교수를 향한 저주가 묻어 남을 유미는 읽을 수 있었다. 어쩐지 자신의
처지와 닮아있다는 동질감이 느껴져 몸서리가 쳐졌다.
저런 우스꽝스러운 여편네와 닮아 있을 수는 없었다.
유미는 손가방 속에서 작은 손거울을 꺼냈다. 화장기 없는 그녀의 얼굴이 나타났다. 그녀는
비에 엉겨붙은 머리카락을 손질하면서 얼굴의 물기도 털어 냈다. 손질을 좀 하니 잠깐 사이
더 예뻐진 것 같아 만족스러웠다. 화장기 하나 없는 맨 얼굴이었지만 늙은 여우 따위에게는
충분히 자신 있었다.
그녀는 오 분만에 다시 박철준을 마음을 빼앗아 오겠노라고 다짐하며 거울을 집어넣었다.
거울을 손가방 속에 넣으려던 유미는 별안간 깜짝 놀랐다. 그녀는 손가방을 뒤져 다시 거울
을 집어들었다. 거울 속에는 놀란 듯 두 눈을 동그랗게 뜬 자신의 얼굴이 보였다. 그녀는 야
릇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기울였다.  
조금 전 그녀는 거울을 집어넣기 직전 무언가 다른 상이 거울에 잡혔다고 생각했다. 거울
속 자신의 얼굴 너머로 창호지 문이 조금 열려 있었고 그 어두운 틈으로 하얀 얼굴 하나가
보였던 것 같았다.
그녀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등뒤를 확인했다. 짧은 순간 무서운 상상이 그녀의 머릿속을 지
배했다. 하지만 상상과는 달리 문은 여전히 굳게 닫혀진 상태였다.
유미는 닫힌 문을 자세히 쳐다보았다. 그 문은 오래 전 죽음을 앞둔 사람들을 가둬 두었던
문이다. 저 방안에는 생매장하듯 아직 죽지 않은 사람들을 집어넣은 탓에 그들의 성난 원혼
들로 빼곡할 터이다. 그 원혼들은 악귀가 되어 산 사람들을 헤하려 할 것이다. 산 사람들이
오기만을 기다리며 억겁의 세월을 인고해왔을 테다. 오직 산 사람들의 피를 맛보기 위해!
그녀는 불길한 상상을 멈추었다.    
그녀는 한 손으로 얼굴을 쓸어 올린 후 가볍게 뺨을 쳤다. 괜한 두려움 거리를 만들고 있는
자신이 한심했다.
그녀는 이내 자신의 착각을 탓하며 다시 거울을 집어넣었다. 어서 가서 박철준의 근육질 가
슴을 어루만지며 불쾌해하는 늙은 여우의 면상을 감상해야 했다.
그녀가 한 걸음 움직였을 때였다.
등뒤에서 미세한 소음이 들렸다. 그것은 중병에 시달리는 사람이 내뱉는 힘없는 기침소리와
흡사했다.
이유미의 두 발이 마비된 것 마냥 굳어졌다. 재차 등뒤를 확인해볼 엄두가 나지 않았다.
미세한 인기척은 계속 들려왔다. 으음, 하는 낮은 신음소리와 몸을 뒤척이는 소리였다.
유미는 공포에 떨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모두 촛불을 중심으로 재 각각 흩어져 있었다. 누구
하나 그녀에게 시선을 주는 이 없었다.
이번에는 문짝이 조금 들썩였다. 안쪽에서 문을 열려고 하는 소리 같았다.
유미는 호흡이 정지할 것만 같았다.
"참 어쩌다 보니까 일이 이렇게 사납게 되어 버렸네요. 허, 그것 참, 비까지 쫄딱 맞으며 이
게 무슨 난리랍니까? 하하. 이거 교수님 너무 고생시켜드리는 거 아닌지 모르겠네요."
강주민은 조진선과 대화하는 것이 마냥 즐거운 지 연신 웃음을 흘리며 시가를 뻐끔거렸다.
"어차피 이 곳에서 강신술을 하기로 되어 있었는데요, 뭐. 저는 오랜만에 빗속을 뛰어 다니
니 오히려 기분 좋더군요. 마치 어린아이로 돌아간 듯한 기분이었어요."
"어린아이요?"
강주민이 과장되게 궁금한 표정을 짓자 조진선이 답해주었다.
"어렸을 때야 친구들과 놀다가 비를 맞기도 하고 일부러 빗속을 뛰어다니기도 하잖아요. 하
지만 어른이 되면 그런 것을 제한 받게 되잖아요. 비가 오면 우산을 써야 하고 빗속을 걸을
때는 첨벙거리면 안 된다는 식으로 말이죠. 그러니 동심을 즐기고 싶어도 사회적인 관념 때
문에 그럴 수가 없잖아요. 하지만 오늘 같은 경우는 갑자기 폭우가 쏟아진 덕분에 마음껏
어린 시절의 기분을 낼 수 있었잖아요. 누구 하나 뭐라 하는 사람 없이 말이에요. 그렇게 제
약받는 것이 없으니 정말로 어린 시절로 되돌아간 듯한 기분이 들었어요."
그녀는 자신의 마음속에 순수한 동심이 충분히 남아있음을 피력하기 위해 일장 연설을 늘어
놓았다.
"이야, 거 참 낭만적인 말씀입니다."
강주민이 감탄과 존경의 눈빛을 담아 보내자 조진선은 얼른 겸손해하면서 수줍어하는 지적
인 여교수의 가면으로 바꿔 썼다.
그 가면이 박철준의 눈에는 버젓이 보였다.
그래도 상관은 없었다. 그녀가 재력가를 탐하는 것은 예전부터 알고 있던 사실이었다. 자신
또한 출세를 위해 그녀에게 빌붙어서 영양가를 탐하는 기생충에 불과했으니.
그는 출세만 한다면 그 다음부터는 절대로 그런 비굴한 삶을 살지 않겠노라고 늘 자신에게
다짐했다. 그런 기생충 같은 삶은 힘없고 나약할 때의 얘기였다. 어느 정도의 출세가도만 달리게 된다면 그 후부터는 자신의 땀과 노력으로 충분히 정당한 성공을 일구어 낼 수 있을
테니까.
하지만 그 때까지는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기생충 같은 삶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근사하게 미소짓는 조진선을 바라보았다.
그녀 역시 나를 근사한 외모를 지닌 기생충쯤으로 여기고 있을 것임이 틀림없다. 하지만
그녀 자신도 역시 근사한 미소를 가진 또 하나의 기생충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과연 자각하
고 있을지 궁금하다. 스스로는 억지로라도 부인하고, 외면하고 싶을 테지만 남들이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는 사실만은 어쩔 수 없을 테다. 그녀에 대한 타인의 적개심은 그녀 자신이
기생충이라는 사실을 자각하지 않을 수 없게끔 종용하고 있다. 심지어 그녀의 기생충인 내
가 그녀를 또 다른 기생충이라 여기고 있음도 그녀는 간파하고 있을 것이다. 그녀 정도의
센스라면 충분히 감지하고도 남으리라. 그것이 대단히 불쾌하겠지만 어쩔 수 없다는 것도
그녀는 알고 있으리라. 어차피 기생충들은 공존해야 살 수 있는 법이니까!
"좋습니다. 따뜻한 커피 한잔씩 마시고 곧바로 시작하도록 하죠."
강주민은 신명나는 일이라도 앞둔 사람처럼 손뼉을 치며 주위를 집중시켰다.
"커피라뇨?"
조진선이 물었다. 그녀의 혀는 벌써부터 따끈한 커피 맛을 갈망하고 있었다.
"예, 제가 커피를 워낙 좋아해서 항상 가지고 다니거든요. 제 차 뒷좌석에 있는데 누가 좀
가져왔으면 하는데, 가만있자…… 장기사가 어디 있지? 이 사람이 어디 있는 거야, 지금……."
"아니에요. 그냥 얘한테 시키면 돼요."
조진선이 그의 말을 가로막고 나섰다. 그녀는 박철준을 힐끔 바라보며 말했다.
"네가 좀 갔다 오도록 해. 괜찮겠지?"
박철준은 두 눈이 둥그래진 상태에서 입술만 어색하게 미소지었다.
"그럼요, 제가 갔다 오죠! 차 키 주시죠, 강회장님."
"아니, 그럴 필요 없는데, 장기사 시키면 퍼뜩 갔다 올텐데. 이 사람 이거 대체 어디 간 거
야, 내 옆에 안 붙어 있고."
박철준은 강주민에게서 차 키를 건네 받으려다가 말고 별안간 말했다.
"저기, 강회장님 뒤에 계신데요. 장기사님 말입니다."
그 말에 강주민은 천천히 뒤를 돌아보았다.
약 삼 보 떨어진 곳에서 그가 다가오고 있었다. 촛불이 없는 위치에 있어서 그런지 그의 얼
굴이 잘 안보였다. 언뜻 시커먼 어둠이 다가오고 있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강주민이 뒤를 돌아보는 사이 조진선의 시선은 한 쪽 구석에 웅크리고 서 있는 이장과 처녀
보살에게로 돌아갔다.
"뭐야, 저 사람들 안 갔어? 뭐 하러 여기까지 쫓아 온 거야."
그 순간 조진선은 헉, 하고 짧은 탄성을 내질렀다. 떨어진 거리였지만 처녀 보살의 눈동자가
정확히 자신을 응시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뭐야, 재수 없게!"
그녀는 시선을 피하는 척하며 곁눈질로 처녀 보살을 관찰했다.
처녀 보살은 눈을 부릅뜬 채 피막 내를 꼼꼼히 살피는 듯했다. 그 때 이장과 황사장이 다가와
처녀 보살에게 뭐라고 말을 건넸다. 소근거리는 터라 뭐라 말하는지는 들리지 않았다. 하지
만 처녀 보살이 뭐라고 중얼대자 이장과 황사장은 얼굴이 하얗게 질려버렸다. 무언가 굉장
한 얘기를 들은 모양이었다.
"아니 지금 그게 무슨 소립니까?"
황사장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사지가 뻣뻣해지고 오금이 저려왔다.
이장도 믿어지지 않는다는 얼굴로 처녀 보살을 뚫어지게 보았다.
처녀 보살은 허공을 응시하며 나직한 음성으로 말했다.
"피막 안에 있는 자들이 열 명이 아니란 말야!"
"그……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분명 열 명이지 않습니까?"
그는 손가락을 펴가며 셈을 해 보았다.
강회장, 그의 아내, 조교수, 조교수의 학생 둘, 장기사, 그의 아들, 이장님, 보살님, 그리고 자
신!
꼭 열 명이 정확했다.
"열 명이 맞는데…… 보살님 대체 지금 무슨 말씀을……?!"
그 때 보살이 그의 말을 자르며 소리쳤다.
"하나가 더 있어!"

 

피막 4에서 계속... by 살인교수

http://cafe.daum.net/suttleb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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