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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 저편이 아름다운 이유.......3
힘겹게 손녀의 부축을 받아 삽다리를 지나 오두막집에
도착해서 간신히 방에 들어가신 할머니는 곧바로
머리를 방문 앞으로 내밀고는 잔칫집에서 드셨던
모든 걸 댓돌위에 쏟아내셨습니다.
그런 후엔 어김없이 깊은 잠 속으로 빠져 드시는 내 할머니...
난 잠이드신 할머니의 불룩한 속바지 주머니 속에 손수건에 싸 온
무엇을 발견했습니다.
그 손수건 뭉치를 꺼내보니 그 속엔 무지개떡이랑 인절미, 부침개...
그리고 돼지고기,송화다식,검은깨다식,알록달록한 동글납작한 화려한 물감을
들인 사탕..... 등이 마구 한대 뭉쳐서 사탕의 그 화려했던
분홍빛과 초록빛 물감이 떡에도 부침개에도 온통 물이 들어 있었습니다.
할머니는 그렇게 잔칫집에서 사람들 눈치를 보면서
집에 있는 손녀를 주려고
잔칫집에 가면 어김없이 음식을 싸 오셨습니다.
난 학교에 들어가고 자라면서 너무 그 모습이 싫었습니다.
그래서 동네 잔칫날이 있는날 아침이면 할머니께
할메~~ 할메~~손수건에 음식 싸오지 마세요.
내가 챙피해 죽겠단 말이예요..라고 말하면...
오냐.... 그러마 하고는 대답하셨지만
할머니는 매번 손수건에 음식을 싸 오셨습니다.
그렇게 할머니는 동네잔치가 있는 날엔
꼭 큼직한 손수건을 잊지않고 챙겨 가셨습니다.
내 나이 열 살이 되던해..
설에 명절을 쇠러 오셨던 아버지...
그런 아버지가 설에 다녀가신지 열흘이 조금 넘었을때
갑자기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비보(悲報)를 접했습니다.
할머니께는 아들 셋 중에 제일 믿었던 아들이었지요..
원래 내가 태어나기도 전...
아주 오래전에 돌아가신 할아버지께서 약주를 못 하셨듯이
아버지 형제도 아무도 술을 못했습니다..
큰아버지와 작은 아버지는 지금도 살아 계시지만
여전히 술을 한 모금도 못하십니다.
하지만 아버지만이 엄마 돌아가신 후에 아버지의 방황하는 모습을 보고
한동네 사시던 내 고모부인 아버지의 매형이 가르쳐 주셨다고 하시더군요.
그래서 삼형제중에 아버지만이 유일하게 술을 조금씩 하셨지요.
키도 제일 크고 큰아버지와 작은아버지는 놀음을 좋아하셨지만
화투를 손에 대지도 않으셨던 살아보려고 어떻게든 잘살아 보려고
노력하는 제일 착한 둘째아들이자 나의 아버지...
새엄마와 사시면서 장날이면 가끔씩 장에서 먹을 것을 사 오시고
할머니를 위해 나무를 한짐씩 해 놓고 가시던 아버지...
그런 아버지가 내게는
동네 아저씨보다도 너무나 서먹서먹한 존재였습니다.
아버지는 할머니 집에 다니러 오시면
나를 언제나 무릎에 끌어다가 앉혔지만
난 아버지 무릎에 앉아 있는게 불편해서 꼼지락거리며
어떻게든 아버지 품을 벗어나 할머니한테로 빠져 나가기 일쑤였습니다.
끔찍이 사랑하던 아내 사이에서 태어난 하나뿐인 아이....
죽은 아내를 마치 찍어 놓은 듯이 꼭 빼어 닮은 아이....
얼마나 사랑하는 딸인데...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딸이건만...
내가 엄마와 닮았다는 것을 할머니께서
늘 말씀을 하셨으니까 알고는 있었지만
가끔씩 외할머니 댁에 다니러 가면서부터 지요.
그곳 동네 사람들은 내가 커가는 모습을 지켜보시고는
마치 네 엄마가 살아 돌아온 듯 하구나..하셨으니까요.
그래서 외할머니도 외할아버지도 제가 가끔씩 할머니 손잡고 가면
저를 외손녀가 아닌 여윈 딸을 보는 것 같으셨나 봅니다.
지금 내가 두아이의 부모가 된 입장에서 생각해보면
아내를 쏙 닮은 어린 딸이 아버지 품속이 낯설어 빠져 나오려고 했을때
어린딸의 그런 행동이 얼마나 아버지의 가슴을 미어지게 했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아버지는 집 두채 만이 있는 곳....
그것도 두 집 사이 마져도 100미터정도 멀리 떨어져있는
그런 외딴집에서
새엄마와 ..새엄마가 데리고 온 나하고는 피한방울 안 섞인 여동생..
그리고 새엄마와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난 남매...
그렇게 다섯 식구가 살았습니다.
아버지는 아침해가 뜨면 꽁보리밥 알루미늄 도시락하나 지게에 매달고
팔밭을 일구러 아침에 나가시면 별을 보면서 집으로
돌아 오실정도로 오직 일밖에 모르고 사셨습니다.
점심은 꽁보리밥에 반찬은 된장뿐...
그 된장에 밭에 심어놓은 풋고추 따서
찍어 먹는 게 아버지의 점심 반찬 이였습니다.
찢어지게 가난한 살람살이...
아버지는 젊은 몸뚱이 하나로 가난에서 벗어 나고
싶으셨나 봅니다..
몇년동안 남의 과수원에서 머슴처럼 일을 해주며 배운 기술로
팔밭에 사과나무를 심어 과수원을 해 보고 싶으셨던 걸까요...
아버지 돌아가시고 일년이 지난 후 할머니도 병이 나셔서
새엄마 집으로 갔을 때...
난 아버지가 일궈 놓으신 밭을 처음 보았습니다..
집에서 한시간이 넘게 걸리는 산골짜기...
산비탈을 학교 운동장 두배..아니 세배보다도 더 넓게 일궈 놓으신 밭...
그 밭에는 드문드문 거리를 두고 간격을 맞춰
아버지께서 심어 놓으셨던 사과나무가 자라고 있었습니다..
그 밭 말고도 저쪽 산비탈...이쪽 산비탈에도 밭을 일궈 놓으시고
아버지는 그곳에는 자두나무를 심어 놓으셨습니다.
새엄마는 그곳에 남은 자식들을 혼자 키우기 위해
해마다 담배를 심어서 아버지가 심어놓은 그 사과나무는
찌는 듯한 여름 한낮에 더위를 피하거나
그 나무 아래서 싸 들고 간 점심밥을 먹거나
여름방학 때 하루 종일 담배 밭에서 일하면서
보자기에 챙겨간 방학숙제를 할때
우리 4남매의 작은 그늘이 되어 주었습니다.
새엄마는 담배만을 위해서 일을 하셨기에
그 사과나무에서 사과를 얻기란 힘들었습니다.
사과나무엔 전혀 거름을 안했으니까요..
그렇게 죽기 살기로 산비탈 팔밭 떼기를 일구시고
살려고 발버둥치시던 아버지였는데..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그날.....
제 기억 속 그날은
할머니께서 대보름에 쓰실 나물들을 물에 담가 두셨던 기억이 납니다.
그날 담가둔 묵은 나물들 중에 잎이 커다란
아주까리(피마자) 잎이 왜 그렇게 기억속에
유난히 남는지 모르겠습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날은 그러니까 설을 쇠고 열흘이 남짓 지난..
보름을 하루 앞둔 음력 정월 열나흘 날이었나 봅니다..
지금 아버지 기일이 13일 인 것을 보면.....
돌아가시기 하루 전날인
살아 계셨던 날을 기일로 한다고 들었으니까요.
그래서 그렇게 갓 열 살 먹은 제 기억 속에
부엌 한켠에 물에 담가둔 아주까리 잎이 그렇게 선명하게 남아있나 봅니다.
할머니는 믿지 않았습니다.
며칠전 설에 다녀간 건강했던 아들의 모습이 눈에 선한데
무슨 거짓말을 하냐며 이야기를 전하러온 사람을
붙들고 부엌바닥에 주저앉았습니다.
할머니는 손녀의 손을 끌고 아버지가 사시던 외딴집으로
가셔서 돌아가신 아버지가 누워계신 방안에 들어가셔서는
덮어 놓은 길고 하얀 천을 들추고는
아버지의 얼굴을
할머니의 거친 손으로 마구 비비며 돌아가신 아버지 얼굴에
할머니 얼굴을 맞대고 부비시며 통곡을 하였습니다.
이게 무슨 마른하늘에 날벼락이냐며 ......
그 덩치에 찬밥덩이도 배불리 먹지도 못했는데..
불쌍한 내아들 ....억울한 내아들....하시며
하염없이 하염없이 우셨습니다..
난 그때 할머니가 천을 들춘 아버지의 모습을 보고
그 자리에서 놀라 기절을 했었던 것 같았습니다..
내가 다시 깨어났을 때는 아버지 상여가 나가는 날 이였으니까요
돌아가신 아버지의 모습이 너무나 무서웠습니다.
입 주위며 치아가 모두 온통 주홍빛이었으니까요..
아버지에 대한 내 기억은 여기서 흐린 기억 속으로 묻힙니다.
훗날에 할머니의 병환이 깊어져서
11살 가을에 새엄마 집에 같이 살려고 갔을 때
그곳은 아버지께서 돌아가셨던 외딴집이 아니고
다른 곳으로 이사를 한 집이였지만
외딴집에서 쓰던 장판을 그대로 가지고 와서 깔아 두었는데
아버지가 돌아가시며 토했던 그 주황빛이 물감처럼
장판에 묻어 파고 들어서는 아무리 닦아도 닦아지지가
않았습니다..
난 그 장판위에서 잠을 잤지만 그 붉은빛을 안 보려고 외면을 했습니다.
장판을 볼때마다 아버지의 돌아가신 모습이 생각나 섬찟하고
무섭기만 했으니까요.
새엄마는 아버지가 예전부터 속병이 있어서 가끔식 아팠는데
돌아 가시던 날 아침에도 팔밭을 일구기 위해 속이 아픈데
일을 하려고 하는 욕심에 속 아픈데 먹는 약을
새엄마가 어디서 구해다 놓은 것을
새엄마가 아침을 지으러 부엌에 나간 새 한 봉지만 먹어야할
약을 빨리 일어나려는 욕심에 두 봉지를 털어 넣으셨다고
말하던 기억이 납니다.
할머니는 그날 새엄마한테 마구 욕을 퍼부었습니다.
생때같은 내 자식 잡아먹은 년이라며...
서방 죽일려고 구해다준 약이라며...
내아들 살려내라고...
순사(경찰)를 당장 불러서 ... 원인을 밝히라고...
그렇게 울부짖으며 주저앉아 땅을 치며
통곡을 하시던 할머니를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어 말리던 모습이
오랜 세월이 흐른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이 나는 건 왜인지 모르겠습니다.
내가 열 살 되던 해 정월 대보름을 하루 앞두고
끝내 돌아가신 원인을 자세히 못 밝힌 채
서른아홉이라는 나이에....
한 집안의 가장으로서... 남자로서 한참 때였던 그 나이에
그렇게 꿈에도 못 잊으시던 사랑하던 색시 곁으로 가셨습니다.
아버지와 엄마는 혼인 후에 할머니와 함께 사시다가 1년만에 따로 살림을
나셨는데 새살림을 난 그곳이 ‘오구삼살방’ 이었고 그래서 “네 엄마는
멀쩡한 생사람이 이사를 잘못가서 살 맞아서 죽었다”라는 소리를
아주 어렸을적부터 동네 어른들께 듣고 또 들으며 자랐는데...
‘오구삼살방’이라는 곳이 무엇이며 어떤곳인지..
정말 그런곳이 있는지...미신인지... 세월이 많이 흐른 지금...
이 나이에도 이해가 가질 않습니다.
엄마가 묻히신 자리 바로위에 나란히....
다정하게 차가운 땅속에 묻히신 내 아버지...
아버지는 엄마가 돌아가신지 10년도 채 되지 않는 때에
색시가 너무 그립고 보고 싶어 그 곁으로 가셨나 봅니다.
내겐 참 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많질 않습니다.
두고두고 기억나는 건 아버지가 유난히 키가 컸다는것...
할머니 집에 오시면 나를 등에 업어 주셨던 기억이 나는데..
지금 생각해도 아버지의 등은 마주 넓었고
마치 거인한테 업혀 있는 것 같이 어린 내 모습이 건들거렸던 기억납니다.
아버지가 한걸음씩 발걸음을 떼 놓을 때마다
성큼성큼 크게 흔들거렸던 느낌에다가 천장이 가까이 닿을 정도로
아버지 등에 업힌 내가 천장과 가까웠습니다..
나중에 내가 자라고 흑백사진속의 아버지와 엄마의 혼례식
모습을 보고는 깨달았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찍힌 혼례식의 사진 속에서
사모관대를 입은 아버지의 키가 유난히 컸다는 것을...
내 아버지가 그 동네에서 제일 키가 클 정도로 정말
컸었다는 것을...
그리고 세분의 고모들도...큰아버지 작은 아버지..할머니...
주위 사람들의 말을 듣고 내 생각만 그런게 아니고
정말 아버지 키가 컸다는걸...
지금 생각하면 180은 되셨었나 봅니다.
그때는 그 정도 키면 참 큰 키였던 시절 이었겠지요.
아버지는 덩치도 크고 힘도 세어서
근처 군부대에서 모래가마니 나르기 대회에
나가셔서 일등을 해서 삽이며 농기구를 탔다는 소리를
할머니한테도...동네 사람들한테도 ...들었던 기억이 납니다.
내가 아버지를 닮은게 유일하게 한가지 있습니다.
그것은 왼손잡이 라는 거지요..
아버지도 나도....
우리집 4남매 중에서 저만 아버지를 닮은
왼손잡이가 되었답니다.
어렸을 적에 할머니께서 고쳐 보시려고
무던히도 노력하셨지만
난 끝내 고치지 못했습니다.
그래도 글씨 쓰는 것과 밥 먹는 것은 할머니께서
가르치셔서 지금도 오른손을 쓴답니다.
아무것도 아버지와 닮은게 없다고 생각했는데
그래도 있었습니다.....왼손잡이......
난 아버지와 닮은 왼손잡이였습니다.
이것이 아버지에 대한 내 기억속의 전부입니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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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에 쓴 글은 어쩌면
어린시절 내 기억뿐만이 아니라 자라오면서 주위의 어른들께
들어왔던 이야기들도 많이 제 기억 속에 남아
글을 쓰는데 마치 내 기억처럼 묻혀 들어 간 게 있을 듯 싶습니다...
어린시절 기억이라서 앞뒤를 맞추기가 쉽지를 않아 오락가락 했네요...
이해하시며 읽어주세요..........들국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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