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자유시사변(自由市事變)
이 때에 이만에 주둔하고 있던 대한독립군단(大韓獨立軍團)은 자유시(自由市) 부근으로 이동하여 적계군(赤系軍)의 교관을 초청해 신식 군사훈련을 받았다. 자유시란 흑룡강을 사이에 두고 중국 땅의 흑하란 도시를 마주보며 자리잡은 알렉셰브스크란 도시를 일컫는다.
소비에트 정권은 세계 약소민족의 해방을 위해 지원을 아끼지 않겠다고 공언한 터여서, 일찍부터 연해주의 한국인들이 자유와 해방을 도모할 수 있도록 이곳에 자유로운 활동을 보장했던 데서 붙여진 이름이었다.
그러나 이곳에서 자유시사변이라는 수난을 겪으며 많은 독립군 장병이 희생될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일본 측은 거듭해서 소련 공산당(蘇聯共産黨)의 원동정부(遠東政府)에 대해 연해주 한국인 세력 제거를 요구하였다. 처음에 한국인 무장 독립운동 세력을 우호적으로 받아들였던 원동정부였지만 차츰 마음이 달라졌다. 적백내전(赤白內戰)으로 나라 안이 어수선한데 강력한 군사력을 갖춘 일본과의 갈등을 지속시키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사실 소련은 제1차 세계대전 때 독일과의 전쟁으로 국력이 소모된데다, 계속되는 내전으로 지칠 대로 지쳐 있었다.
일본을 다독거릴 필요가 있었던 원동정부는 은근히 대한독립군단의 명칭을 없애고 그 병력을 적계군에 포함시키자고 압력을 가해 왔다. 그러나 홍범도(洪範圖)·김좌진(金佐鎭)·이청천(李靑天) 등 독립군의 주요 지도자들이 그런 제의를 받아들일 리가 없었다. 나라의 독립을 쟁취하기 위해 총기(銃器)를 집어 든 것이지 소련의 군인이 되어 내전에 참가하려고 이 고생을 겪은 것은 아니었으니까. 그러자 원동정부와 적계군 간부들의 친선적인 태도가 싹 사라졌다.
게다가 대한독립군단 내에서도 결집력을 잃고 분파적인 행동이 나타났다. 전부터 연해주에서 활동하던 부대와 만주에서 넘어온 독립군 간에 근본적인 융합이 어려운 터였다. 그런데다 연해주에서 기득권을 가진 부대조차 두 갈래로 나뉘어 맞서게 되었다. 군권 장악을 두고 충돌한 것이다.
적계군(赤系軍)과 전로고려공산당(全露高麗共産黨)을 배경으로 삼은 오하묵(吳夏默)에 대항하기 위해 니항군(尼港軍) 지휘관 박일리아가 상해파(上海派) 고려공산당(高麗共産黨)과 손잡고 보병 자유대대를 무장 해제시키는 돌발사태가 벌어졌다. 이에 오하묵이 앙심을 품고 이르쿠츠크의 공산당 국제동양국에 교섭하여 임시고려군정의회(臨時高麗革命軍政議會)를 설립했다. 그리고 연해주와 아무르 주의 모든 한국인 무장 단체를 통제하는 권한을 쥐게 되었다. 대한독립군단 지도자들은 대의 명분에 따라 박일리아의 니항군 세력과 가까워졌다.
하지만 국권이 엄연히 소비에트 정권에 속한 땅인데 어떻게 공산당의 통제권을 무시할 수 있을 것인가? 그들이 바라는 대로 협상 테이블에 나가서 내키지 않는 합의에 서명을 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 합의란, 앞으로 모든 반일 무장 단체는 상해(上海)의 대한민국 임시정부(大韓民國臨時政府)와 관계를 끊는다는 것과, 공산당 본부의 지휘권을 인정하며, 대한독립군단의 본영을 이만에서 자유시로 옮겨 온다는 내용이었다. 이 합의에 따라 홍범도 휘하의 대한독립군(大韓獨立軍)과 안병호(安秉鎬) 휘하의 대한국민회(大韓國民會) 경비대, 최진동(崔振東) 휘하의 군무도독부(軍務都督府) 병력이 자유시로 이동했다. 그러나 김좌진 장군의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는 소련 공산당을 신뢰할 수 없다고 항변하면서 대한독립군단과 결별하였다. 박일리아의 니항군은 명령에 불복종할 기세를 보이다가 마지못해 자유시 교외에 머물면서 사태를 관망하고자 했다.
자유시에 모여든 대한독립군단의 모든 병력은 오하묵의 주장대로 고려혁명군(高麗革命軍)이란 이름으로 편성되었는데, 각 부대별로 묶어 3개 연대와 1개 경비대를 구성했다. 이러한 결정이 니항군에 뒤늦게 전달되었지만 박일리아는 이 명령에 저항했다. 그러자 6월 28일에 오하묵의 부대와 소비에트 적계군 제29연대 병력이 니항군의 주둔지를 포위했다. 적계군의 연대장이 본부로 들어가 설득했으나 결실을 얻지 못했다. 그러자 오후 4시에 장갑차 2대와 30여정의 기관총, 기마병 6백여기 등을 앞세우고 총공격에 돌입하였다.
주둔지에는 박일리아의 부대뿐만 아니라 고려혁명군에 편입되길 거부하던 많은 독립군 장병들도 함께 있다가 날벼락을 맞았다. 그들은 전투가 시작된지 1시간만에 큰 타격을 입고 흑룡강 쪽으로 후퇴하였다. 박일리아의 부대와 광복단(光復團)·야단(野團)·북로군정서 산하 함희(咸熙) 소대(小隊)·흥업단(興業團) 등의 독립군들이 전사자 272명, 익사자 31명, 실종자 250명, 포로 917명 등 피해를 입고 와해되었으니, 이 사건이 자유시사변(自由市事變)이었다.
항일독립운동사(抗日獨立運動史)에서 자유시사변은 매우 안타깝고 비극적인 사건으로 언급되고 있다. 일본 제국주의 세력을 타도하고 조국의 독립을 쟁취하기 위해 무기를 들고 일어났던 독립군의 용사들이 협력 관계라고 여겼던 소련 적계군의 공격을 받고 뿔뿔이 흩어지며 다수의 사상자가 났다는 소식은 한국인 민족지도자들의 가슴을 미어지게 만들었다. 자유시사변은 그 내막이 아직 자세히 밝혀지지 않고 있으나, 한국인 민족운동 세력 사이의 투쟁 노선을 둘러싼 내분과 원동정부의 한국인 무장 세력에 대한 전략 등이 복합적으로 엇갈려 발생한 것이었다. 만약 오하묵과 박일리아가 단합했더라면 후일 유리한 상황을 만들어 갈 수 있었을 것이다. 특히 항일무장투쟁(抗日武裝鬪爭)이란 측면에서 그러하다. 대한독립군단의 주요 간부였던 홍범도 장군은 누구보다 소련 적계군과의 합작을 통한 일본 제국주의 세력과의 항쟁을 구상하고 이의 중요성을 주장했었지만, 그가 기대했던 일은 값비싼 대가를 치르고야 가능한 것이었다. 이후 홍범도 장군은 코민테른 동양비서부에 의해 적계군 제5군 직속 한국인 여단 예하 제1대대장으로 임명되어 항일전선(抗日戰線)에서 멀어지게 되었다.
한편, 북로군정서의 총재였던 서일(徐一)은 자유시사변으로 대한독립군단이 큰 타격을 입게 되자 당벽진(當壁鎭)에서 둔병제(屯兵制)를 실시하여 독립군의 재기를 위해 힘쓰고 있었다. 그런데 1921년 8월에 일본군에게 매수된 토비(土匪)들이 야간에 농장을 습격하여 농사짓고 있던 한국인 청년들을 무참히 살해하고 농작물을 약탈해 간 사건이 벌어졌다. 서일은 청년들의 희생에 대한 책임을 지고 대종교 수양법의 하나인 조식법(調息法)을 운용하여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이것이 당벽진참변(當壁鎭慘變)이었다.
당벽진참변이 있은 지 얼마 뒤에 김좌진이 국내에서 활동했던 조직인 대한광복회(大韓光復會) 수장인 박상진(朴尙鎭)이 대구 감옥에서 교수형(絞首刑)을 받고 순국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뜻을 같이하여 항일투쟁을 벌였던 동지들이 사망했다는 소식을 전해들은 김좌진은 눈 앞이 캄캄했다. 그러나 청산리대첩(靑山里大捷)에서 함께 독립군 장병들을 통솔하여 일본군을 무찔렀던 전우(戰友) 이범석(李範奭)이 찾아오자 김좌진은 독립군의 재기에 한가닥 희망을 갖게 되었다.
이범석이 김좌진의 집을 방문한 것은 어느 초가을 오후였다. 이 때에 김좌진은 교민들과 함께 개간한 논으로 가서 농사일을 거들다가 점심을 먹기 위해 집으로 돌아왔다. 뒷마루에 낯선 신발 한짝이 제멋대로 아무렇게 놓여 있었고, 문틈으로 방에서 코고는 소리가 요란하게 새어 나왔다. 김좌진은 눈살이 찌푸러졌다. 서일과 박상진의 사망 소식을 듣고 크게 상심하던 그는 사람들이 찾아오는 것마저 싫어졌기 때문에 누구든지 만나는 것도 마음이 편치 않았다.
“누가 왔소?”
김좌진 장군이 무심코 장주문을 열자 구척장신의 사내가 깜짝 놀라며 일어나더니 밖으로 뛰어나왔다.
“장군님, 오랜만입니다.”
“아니, 이게 누구요? 이범석 동지가 아니시오?”
김좌진은 반가운 얼굴로 이범석의 손을 맞잡았다.
“장군님, 정말 반갑습니다. 그동안 장군님께서 어디에 계시는지 수소문하느라 진땀을 뺐습니다. 늦게 찾아뵈어 송구스럽습니다.”
“이거 참으로 뜻밖의 일이오. 이게 얼마만이오?”
김좌진은 이범석을 방 안으로 끌고 들어왔다.
“자유시사변이 있은 후로 대부분의 독립군 장병들은 뿔뿔이 흩어지고 소련 공산당 놈들마저 자기들에게 협력하지 않은 독립군을 색출하여 제거하려고 혈안이 되어 있습니다. 저는 그간 민병대를 조직해서 우리 교민들을 살해하고 노략질하는 마적단을 소탕하는 항전에 주력하고 있었습니다.”
“장하오. 여기까지 찾아오느라고 고생이 많았겠구려. 자, 누추한 방이지만 편안히 앉아 쉬시오. 내 요 앞에 잠깐 나갔다 오리다.”
김좌진이 잠시 자리를 뜬 뒤에 이범석은 혼자 방 안에 남아 고개를 돌리며 이곳 저곳을 둘러보았다. 이 곳이 과연 일지군(一枝軍)을 이끌고 항일전(抗日戰)을 펼쳤던 독립군 사령관 김좌진 장군의 거처란 말인가? 초라한 방 안에는 깨끗하게 닦여진 한 자루의 장총(長銃)과 몇 권의 병서(兵書)가 눈에 뜨일 뿐 어느 촌부의 집과 다름이 없었다.
잠깐 다녀 오겠다던 김좌진은 아무리 기다려도 오지 않았다. 빈 방에서 오랫동안 기다리기 지루해진 이범석은 밖으로 나갔다.
저 멀리 조그마한 연못가에서 사람의 그림자가 아른거린다. 혹시나 하고 그리로 가 보니 과연 연못가에서 낚시줄을 던지고 입질하는 김좌진이 낚시 찌에 신경을 쓰다 보니 이범석이 그 곳에 다가오는 것도 모르고 있었다.
“아니, 장군님. 여기에서 무엇을 하십니까?”
“응, 반가운 손님이 왔는데 반찬거리도 없고 오늘 따라 잘 물리던 고기도 잘 안물리는구려. 귀빈이 오신 줄 알고 미리 몸을 피한 모양이오.”
김좌진은 태연하게 말하면서 났기대를 주섬주섬 도로 거두었다. 할 말은 많았다. 소련 땅에서 헤어진 지도 어언 1년 반, 파란 많은 세월을 보내면서 서로의 뜻을 알고 마음을 솔직하게 털어놓을 수 있었던 이 두 항일투사의 회고는 끝이 없었다.
이범석은 지난날의 성패에 대하여 이야기하면서 자신이 다시 소련 땅에 들어가 서북창(西北廠)에서 고려혁명군(高麗革命軍) 1개 기병연대 병력을 지휘하는 연대장으로 복무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렸다.
“제가 서북창에서 복무하고 있는 것은 어디까지나 저의 호신책에 지나지 않습니다. 비록 공산당의 지휘를 받고 있지만 먼 미래를 위해 와신상담(臥薪嘗膽)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겠지요. 여하간 만나자마자 다시 헤어지게 되어 섭섭하기 짝이 없지만 이범석 동지를 이렇게 보게 되니 다시 내 몸에서 힘이 솟구치는 기분이오.”
“장군님, 힘을 내십시오. 지금부터 한참 활동하실 때입니다. 언제든지 제가 필요하시다면 전보나 한장 띄워 주시면 만사를 제치고 달려오겠습니다.”
“고맙소.”
두 사람은 다시 만날 때를 고대하면서 석별의 정을 나누었다. 김좌진은 떠나는 이범석의 뒤를 바라보며 무운장구하기를 기원하였고 그의 모습이 산모퉁이에 가릴 때까지 바라보고 있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