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5년의 강변가요제와 BORNAGAIN
글자크기
2010-11-04 19:54 공개 설정
조회수 311 스크랩 0
-- 게시판 뷰페이지에서 줄넘김 --
#ptr_content {
font-size:100%;
line-height:25px;--content_lineheight_change --
}
#ptr_content *{
font-size:100%;
line-height:25px; --content_lineheight_change --
}
당시 대학가요제의 양대 산맥이었던 MBC 강변가요제는 예선부터 경쟁이 치열했다. 뛰어난 뮤지션으로 인정받는 더 클래식의 리더 김광진은 양대 가요제에서 1차 예선의 벽을 넘지 못하고 탈락을 고배를 들었을 정도다.
1회 대회 대상 곡 홍삼트리오의 '기도'는 기성가요계를 강타했다.
4회 손현희의'이름없는새'에 이어 5 회때는 인천전문대 혼성듀엣 4막5장의 이선희가 'J에게'로 대상을 수상하며 국민가수로 떠오르는 발판을 마련했다.
이때부터 강변가요제는 가요계의 확실한 신인가수 등용문으로 평가받기 시작했다. 이를 입증하듯
1985년 6회 대회는 대상을 수상한 건국대 혼성듀엣 마음과 마음의 '그대 먼 곳에' 뿐만 아니라 금상을 수상한 동의대 혼성보컬그룹 어우라기의 '밤에 피는 장미', 은상을 받은 외국어대 권진원의 '지난 여름밤의 이야기'와 장려상을 수상한 서울예전 박미경의 '민들레 홀씨 되어'까지 총 4곡이 가요차트에 등극하는 절정기를 구가했다. 박미경은 90년대에 '이브의 경고'로 정상에 올랐던 바로 그 댄싱 퀸이다.(이하 중략)
그외 유미리의 '젊음의 노트', 금상과 가창상을 수상한 도시의 그림자의 '이 어둠의 이 슬픔', 동상을 수상한 바다새의 '바다새'가 동시에 등장했다. 87년 8회 대회는 헤비메탈 록밴드 티삼스(드럼 체제민?)가 탁월한 연주력과 가창력을 뽐낸 '매일 매일 기다려'로 동상을 수상했다.
당시에는 '대학가요제에서 나가려고 대학에 갔다'고 말하는 학생이 무수했다. 노래깨나 한다고 생각하면 대학가요제에 한 번 나가볼 '음모'를 꾸미는 것은 일반적인 분위기였다. 하지만 영원한 것이 있을까. 22년간 수많은 히트가요를 양산시키며 대표적인 여름 음악축제로 각광받았던 강변가요제는 90년대에 접어들면서 내리막길을 걷기 시작했다.
(이상 펌글)
외래어 디엔드에서 팀명을 [부활]로 개명한 후, 아직 데뷰앨범을 내기전인,1985년, <제 6회 강변가요제>에 김종서를 리드보컬로 현, 위대한탄생의 베이스, 이태윤과 레드제플린의 드러머 존보넴의추종자, 황태순(황보넴)그리고 대한민국 최초의 트윈기타 4인조 시스템으로 , 이지웅과 김태원이 출격한다.결과는 다소 예상?은 했지만 예선 탈락이다.
그런데 이 대회는 확실치는 않으나, 또 하나의 천재 싱어가 속한 그룹을 예선에서 무참히 탈락시켜 버인다.
훗날 김종서의 후임으로,,,그리고 솔로로 독립하여 라이브의황제 칭호를 들으며, 가요계 정상에 오르는 이승철이 리더로 있던 아마도?[파이오니어]라는 팀일 것이다..
인연치고는 묘하지 않은가? 두팀 다 예탈이라는...
ㅋㅋ
김종서가 정식 앨범 데뷰를앞두고 [부활]팀을떠나자 기다렸다는듯 이승철이 [부활]의 리드보컬이 된것이다. 운명이란 묘했다.인연이란 그런것이다.
조건없이 만나서 조건없이 헤여지던 시대였다.
지금과 같은 노예계약서 같은것은 존재하지 않았다.
언더 그라운드 출신이지만 자유와 반항정신에 투철한 아이들이다.
결코 구속이나 힘에 의해 다스려질 아이들이 절대 아니라는것이다.
(당시 종서는 후에 들은 이야기로 시나위에서 데뷰준비를 했는데 엉뚱하게도 임재범이 시나위에서 먼저 데뷰를하고 그 다음에 시나위보컬이된다.태원이 녀석은 그사실조차도 내게 숨겼다 종서가 군대간다고...만일 그때 내가 그 사실을 액면 그대로 알면 젊은혈기였던시기로 한 성격을가졌던 나로서도 상상치 못할 일이 벌어질것을 미연에 방지한것이다,아마 온전치 못했을것이다, 그러나 후에 어린이 대공원 라이브 콘서트시 만났을때, 꼴 밤 한대 쥐어박았다.물론 그것도 지금에 와서 생각해보니 잘못된 행동이였고 좀 더 따뜻하게 대했어야 했는데 하는 생각과 반성은 한다.지금 운동을 하는 내 아들을 보니 더욱 그렇다. 다 지나간 아름다운 일이다,^&^ )
한국 가요계 심사현실이 생뚱 맞던 시절이다.
이래저래 시간만 허송했다는 생각이지만, 지금생각해보면 그런 경험이 공중파방송을 어찌 대해야하는지 알수있게해 준 귀한 무대 경험이였다고도 생각이든다.
(연습라운딩치고는 확실한 연습을 한것이다)
이제 바야흐로 이태원의 4인방<들국화>가 야생의 진한 향을 전국에 흩날리고,해를넘겨 1986년 록 그룹의 황금기가 도래한것이다.
해가 바뀌자마자...
한국록의 지존 신중현의장남 신대철의 [시나위]가 임재범을 포스트에 세우고 메탈엔진을 가동시켰고, 베테랑 유현상이 이끄는[백두산]이 삼손,김도균을 앞세워 활화산같은메가톤급 용암을 분출하기 시작했다. 대학 최강그룹, 이두헌의 [다섯손가락]도 새벽기차로 가요계 주류로 화려하게 입성에 성공 메이저 밴드가 됐다.
그해 말 10월3일 개천절!
나도 서둘러서....한국 록의 바다에 한 대의 배를 발진시키기로 작정했다.
그리고 여담이지만 클래씩컬 록그룹이라는 고급 이미지를 홍보했다.
대한민국 최초의 정통 록그룹이라는 강한 이미지가 필요했다.
나의 이런 행동이 록마니아들에게 많은 반감이 있었던것 같지만 난 매니자다.
죽느냐 사느냐 인데 음악성만 논할수 없었다.
당시 팀들의 슬로건은....
*****시나위-대한민국 최초의 헤비메탈 그룹.
*****백두산-대한민국 최초의 헤비 록 그룹
그럼 ?난...나의 [부활]은?
난 갈길이 없었다.
인터넷 '하이 로' 게임에 스윙이라는 흔들기가 있다.
'에라~모르겠다 정통 밴드로 가자!'
한 술 더떠...
'클라식칼 밴드 고급으로 가자'
이래서 대한민국 최초의 록그룹 매니저가 본의 아니게 되는것이다 라는 것이다.
대한민국 최초의 록매니저 운운하는것은 그런 뜻이다.
깊은뜻은 없다,
오해들 마시라~~~
그리고 그시절 나의 무모한 열정~ 절대 후회없다,
매니저로 본질이 홍보다,지금이라도 더한 과대 홍보를 할 것이다.
그 시절로 돌아갈수 있다면,,,,
이젠 지나가버린소중하고 아름다운 기억 일 뿐이다.
아무리 김태원이 바빠도 연락이야 하려면 못하겟는가?
그런데 그럴 필요가 없는것이다.
서로의 마음에 남아있는것이 더 중요한것 아닌가?
또 이야기가 옆으로 샜다.
전문 글쟁이가 아니라....
아뭏튼,입수식의 테이프는 '희야'였다.
'비와 당신의이야기'와 수 많은 고민끝에 내린 결정이였다.
역시 내 판단이 옳았다고 생각한다.
희야는 양홍섭의 곡이다.
어느누가 첫앨범에 자신의 작사 작곡을 올리고 싶지 않겠는가?
그댄 내 파워도 짱이였다.
'희야로 간다'
그럼 끝이다.
그걸로 모두 토를 달 수 없었다.원석을 발견한 내가절대자 였다.
(글의표현이 좀 과한것같다,ㅋㅋ그래도 그땐그랬다 뭐~)
또 얘기가 샜다.
김태원을 함장으로 엔터프라이즈급 대형항공모함이다.
판도 안 낸 무명 록그룹 부활릐 리드보컬을 홍보한 기사가 떠 오른다.
(종서에게 내가 화났던 부문이다)
***<4옥타브를 넘는 로버트 플랜트의 추종자 김종서!>***
이 문장을 일간스포츠 국장에게 직접 부탁했더니 토씨하나 고치지않고 써주었다.
(이 이후에 김종서를 능가하는 고음의 소유자는 나타날 수 없었다)
다~~ 지나간 여담이다.
그리하여~~~
제트엔진의 팬텀기와 같았던 김종서를 대신해서 수직 이착륙이 가능한 헤리어기로 교체한다.
그가 스트브페리와 같은 미성의 소유자 이승철이다.
그룹에서 솔로로 독립하면 히트할수 없다는 통념을깨고 라이브황제로 등극한다.
박수를 보낸다.
그 둘 김태원과 이승철은 언제든 분리 독립이 가능한 형태를 자연스레 유지한다.
해체와결합!
네버엔딩스토리가 그 증거다.
지금 서로가 40대 중반...이제 예능에서 자신의 존재를 알린 김태원과 앞으로10년 아님 20년후, 한번쯤은 더 결합하지 않을까 ?조심스레 추측해본다.
1986년 입수식에 참관했던 한 사람으로 기억해 본다.
.
2010/11/4오후8시에...
제플린 함장 지미페이지 와 ... 존폴존스 (베이스이자 만능 뮤지션0
드럼의 제왕, 존 보넴과 ....보컬의 지존, 로버트 플랜트
1971년 월간 팝송 화보 (지금의 브로마이드 시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