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가야는 어떤 나라인가?
가야(伽倻)라는 나라는 서기 42년 김해 등 낙동강 중하류지역 남변한(南弁韓) 땅을 중심으로 김수로(金首露)가 금관가야(金官伽倻)를 세운 후 발전하다가 490여년 만인 532년에 신라에 병합되고, 가야연맹국의 하나로 금관가야 다음의 강국이었던 대가야(大伽倻)는 520년 동안 존속하다가 572년 신라에 의해 정복되어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졌다.
그 강역은 드넓은 때를 기준으로 보면 낙동강 하류유역을 중심으로 북쪽은 문경(聞慶), 동쪽은 의성(義城), 대구(大邱), 경산(慶山), 양산(梁山) 일대이며, 서쪽은 지리산, 구례, 남쪽은 일본 열도까지로서 5백여년간 강한 국력을 행사했으며 고유한 신선도(神仙度)의 실천과 불교의 처음 전래 등으로 문화적 저력을 갖췄고 아시아대륙의 양기(陽氣)와 태평양의 음기(陰氣)가 맞닿아 화합하여 비옥한 농토를 이루며 풍요로운 해산물 생산과 철기문화의 발달로 주체적 역사 발전을 이루면서 고구려, 백제, 신라와 함께 동등한 위치에서 국가를 영위했으나, 승리자의 역사만을 부각시키는 삼국사기의 영향으로 삼국시대(三國時代)라는 고정관념이 500여년이나 계속된 가야사(伽倻史)를 한국 역사 속에서 제외하고 지금까지 부수적인 존재로만 잘못 각인되어 왔다.
김부식(金富軾)이 편찬한 삼국사기(三國史記)는 가야를 신라의 정복과정에 따른 피동적인 존재로 단편적인 기술에만 그치고 있으나, 일연(一然)이 쓴 삼국유사(三國遺事)의 가락국기(駕洛國記)는 가야의 왕계를 비롯하여 그 형성과정을 기록하고 있으며, 삼국유사 금관성(金官城)의 파사석탑(婆裟石塔)은 허황후(許皇后)와 장유화상(長遊和尙)이 가져온 것으로 우리나라 최초의 불교전래를 증거하고 있다.
가야는 처음에 구야국(狗耶國)에서 일어난 금관가야(金官伽倻)를 중심으로 그 밑에 5가야가 있는 연맹왕국이었다. 5가야로는 아라가야(阿羅伽倻), 고령가야(古寧伽倻), 대가야(大伽倻), 성산가야(星山伽倻), 소가야(小伽倻)가 있었는데, 아라가야는 지금의 함안(咸安), 고령가야는 지금의 진주(晉州), 대가야는 지금의 고령(高靈), 성산가야는 지금의 성주(星主), 소가야는 지금의 고성(固城)에 각각 자리잡았다.
일본서기(日本書紀) 흠명기(欽明紀) 23년조의 문헌에서는 가야가 신라에 병합될 당시에 가라국(伽羅國), 안라국(安羅國), 사이기국(斯二岐國), 다라국(多羅國), 졸마국(卒麻國), 염례국(捻禮國) 등 10개의 소국(小國)이 있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그 밖에도 여러 국명이 보여 그동안 가야연맹의 수에 변동이 있었음을 나타내고 있다. 삼국사기(三國史記) 32권 악지(樂志)에 전하는 악성(樂聖) 우륵(于勒)이 작곡했다고 하는 가야악 12곡명은 가야에 12국이 존재했음을 시사하고 있다.
본가야(本伽倻; 金官伽倻)를 건국한 김수로(金首露)는 강역 확대에 나서 신라와 교섭하기도 했는데 신라 파사이사금(婆娑尼師今) 재위 23년에는 경주까지 거동하여 자신의 국토분쟁 해결 환영연에서 자신을 받들지 않는 6부 가운데 하나인 한지부 추장 보제(保齊)를 참살하라고 요구하고 귀국한 일도 있다. 가야의 성장기에 그 세력권은 크게 나누어 김해와 웅천(熊川) 중심의 본가야, 함안과 마산만 중심의 아라가야, 고령과 대구 중심의 대가야로 볼 수 있는데, 본가야가 쇠약해진 뒤에는 대가야와 아라가야가 2대 중심세력이었다. 지금 함안의 말산리, 도항리, 가야리, 신음리 등지의 수십개에 달하는 거대한 고층고분군의 장엄한 유적을 볼 때 아라가야의 국력이 얼마나 대단했던가를 짐작할 수 있으며, 그 규모에 있어서도 단연 가야연맹 중 으뜸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금관가야(金官伽倻)는 군왕 밑에 아도간(我刀干) 등 9간이 있어서 정치조직으로서 중요한 정책은 9간 회의에서 결정됐으며 김수로도 9간 회의를 통해 왕위에 올랐는데, 이 9간은 왕위세습제가 확립된 후에는 왕명 집행기구의 역할을 했다.
김수로는 또 정치제도의 발전을 위하여 9간을 고귀한 이름으로 바꿨는데, 아도(我刀)는 아궁(我躬)으로, 여도(汝刀)는 여해(汝諧), 피도(彼刀)는 피장(彼藏), 오도(五刀)는 오상(五常), 유수(留水)는 유공(留功), 유천(留天)은 유덕(留德), 신천(神天)은 신도(神道), 오천(五天)은 오능(五能), 신귀(神鬼)는 신귀(臣貴)로 각각 고쳤다.
가야에는 지배계층을 나타내는 관직제도가 있었는데 각간(角干), 아간(阿干), 대아간(大阿干), 아질간(阿叱干), 급간(級干), 사간(沙干) 등이 그것이며 농토에 대한 업무를 담당하는 양전사(量田使)도 잇었다. 중앙관청장으로는 천부경(泉府卿), 사농경(司農卿), 종정감(宗正監) 등의 관직명이 있었다. 왕실 창고는 내고(內庫)라고 했다. 일본서기 흠명기(欽明紀) 2년조와 5년조의 문헌을 보면 금관가야인 남가라와 훼국(喙國), 탁순(卓淳) 등 세 가야국이 신라에 멸망당하자 백제의 성왕(聖王)이 주가 되어 세 가야와 왜(倭)의 대표가 모여 3가야 부흥에 대해 의논하는데, 한기(旱岐), 군(君), 하한기(下旱岐), 상수위(上首位), 이수위(二首位) 등 독특한 관직제도가 실재했음을 알 수 있다.
가야는 또 정비된 군사제도와 강한 군사력을 보유했던 것 같다. 김수로가 수포를 건설할 때 무기고를 마련했고 석탈해(昔脫解) 집단을 추격할 때 수군의 군선 5백척을 사용한 것으로 보아 강한 해상왕국으로 추정된다. 신라 탈해왕(脫解王) 재위 21년에 낙동강 유역 양산지역인 황산진구(黃山津口)에서 신라군과 가야 군대 간의 첫 전투가 벌어졌는데, 금관가야의 세력이 신라와 주도권 쟁탈전을 할 정도로 강성했음을 알 수 있다. 삼국사기 신라본기(新羅本記) 지마이사금(祗摩尼師今) 4년조의 문헌에도 신라가 가야를 두 차례 공격했으나 금관가야가 신라의 정예병 1만여명을 격퇴시킬 정도로 강한 군사력을 보유했음을 나타냈고, 고구려의 영락기공비문(永樂紀功碑文)에는 영락(永樂) 10년에 대가야와 아라가야가 백제 및 왜국과 더불어 신라를 공격하자 신라에서 고구려에 지원군을 요청하였고, 광개토호태왕(廣開土好太王)은 이에 응해 이듬해에 보기병(步騎兵) 5만명을 파견하여 신라 국경 내에서 성지를 부수는 대가야, 왜국 연합군을 격파하고 낙동강 중류지역까지 추격하여 섬멸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때 고구려군에게 격파당한 연합군 가운데 왜군이 가장 적었으며 가야의 군사 규모가 상당하였음을 추정할 수 있는데 가야가 군사력만큼은 상당한 수준이었음을 알 수가 있는 대목이다. 또 신라 진흥왕(眞興王) 15년에 백제와 대가야의 연합군이 관산성전투(管山城戰鬪)에서 신라군에게 패배하여 연합군의 전사자가 2만 9천여명에 이르렀다고 하는 것으로 보아 대가야의 군사력이 상당했을 것으로 보이며, 이 전쟁 후 8년만에 대가야가 무력하게 패망하고 있는 사실도 그러한 점을 짐작하게 한다.
● 가야의 대외관계
가야는 국가적 발전과 함께 대외관계도 활발했으나 그 내부가 연맹체인데다가 주변에 고구려, 신라 및 깊은 유대관계가 있는 백제와 왜국이 팽창정책을 쓰는 사이에 끼여서 대외관계가 복잡하였다. 그 밖에 중국 및 처음 불교를 전해준 아유타국과의 관계가 주목을 끈다. 삼국유사(三國遺事) 가락국기(駕洛國記)는 처음 신라와 가야 간의 관계에 대하여 석탈해(昔脫解)가 신라에 당도하기 전에 가야에 도착하여 김수로(金首露)와 왕위를 다투었으나 덕성과 전술의 부족을 느끼고 패배를 인정한 뒤 다시 북상하여 경주지역으로 이동했음을 전해주고 있다.
삼국사기(三國史記) 신라본기(新羅本記)에는 서기 77년 탈해왕(脫解王) 21년 8월에 아찬(阿飡) 길문(吉文)이 황산진구(黃山津口)에서 가야 군대와 전투를 벌여 승리, 적군의 수급(首級) 1천여급을 얻었다는 기록이 있으며 내해왕(奈解王) 17년까지 신라와 가야 사이에 일곱차례의 전쟁이 있었고, 성을 쌓고 화해를 요청하는 등 모두 12회의 무력(武力) 충돌이 있었다고 되어 있다.
이 가운데서 특기할 것은 파사왕(婆娑王) 23년에 음집벌국(音什伐國)과 실직국(悉直國)이 국경을 다투어 재결을 청하므로 파사왕이 지혜로운 김수로(金首露)를 경주로 초대하여 해결한 일과 내해왕(奈解王) 14년에 골포(骨包), 칠포(漆浦), 고사포(古史浦), 보라국(保羅國), 고자국(古自國), 사물국(史勿國) 등 포상팔국(浦上八國)이 아라가야를 침략하려 하자 가야의 왕자가 지원군을 요청했고 국왕이 우로(于老)와 이벌찬 이음(利音)에게 명하여 6부의 병력을 이끌고 가서 구원하도록 했다는 사실이다. 이 전쟁은 3년 동안 이어졌는데 신라군은 포상팔국의 장수들을 죽이고 그들이 포로로 삼은 가야의 백성 6천명을 구해 돌려주었다고 한다. 이 전쟁으로 백제, 가야, 왜국 사이의 해상통로가 단절됐으나 야마대국(邪馬臺國)의 신공왕후(神功王后)는 탁순국(卓淳國) 국왕으로부터 본국의 선단이 오기 위해 해로를 조사한다는 정보를 사마숙미(斯摩宿彌)로부터 듣고 사자를 입조시켜 해상통로가 재개되었다.
한편 227년 백제와 가야와 왜국은 병비를 갖추어 탁순국에서 회합하고 백제 장수 목라근자(木羅斤資)와 왜장 사백(沙白) 가야 장수로 추정되는 사사노궤(沙沙奴詭) 등으로 연합군을 만들어 신라를 공격하여 남강 유역 주변인 비자벌(比自伐), 남가라(南加羅), 훼국(喙國), 안라(安羅), 다라(多羅), 탁순(卓淳), 가라(加羅) 등 7개국을 평정했다.
서기 400년에는 고구려의 광개토호태왕(廣開土好太王)이 파견한 정예군 5만명이 대가야, 아라가야, 백제, 왜국의 연합군을 낙동강 유역에서 격파하였고 475년에는 장수태왕(長壽太王)이 백제의 수도인 위례성(慰禮城)을 함락시킴에 따라 백제는 웅진(雄津)으로 남천했으며, 신라는 그 기화를 틈타 북방과 추풍령을 넘어 보은의 삼년산성까지 진출하였다.
4세기에 들어서면서 가야는 신라와 백제 사이에서 독립자존의 길을 모색하면서 중원 왕조와의 외교관계를 전개하였다. 삼국사기(三國史記) 신라본기(新羅本記) 권3,4에 의하면 가야는 479년 제(齊)나라에 사신을 보내 당시 상황을 보고했음이 나타나고 있다. 대가야의 이뇌왕(異腦王)은 479년에 신라의 법흥왕(法興王)과 결혼동맹을 맺어 대외적 안정을 도모하기도 했다.
일본의 야요이[彌生]문화 유적에 속하는 대마도(對馬島)의 소성도유적(小姓島遺蹟)에서 가야의 김해 지내동(地內洞) 토기와 가장 잘 닮은 토기가 출토되어 기원전 1세기 이래 서기 4세기까지 김해, 대마도, 이키[壹岐], 북구주를 연결하는 해로가 倭.人 전용 항로로 되어갔고, 그 이전 야요이문화가 한반도에서 구주지역으로 전파될 때도 대마도는 중간거점이었으며 야마대(邪馬臺)정권 뿐만 아니라 그 뒤의 야마도[大和倭]시대에서도 한반도 교섭의 한 거점이었다.
대마도를 통해 야마대의 구주(九州)로 가야 사람들이 건너가고 문화를 전해주었음은 두 지역에서 발굴되는 고인돌이나 토기, 철기 유물 등을 통하여 확인할 수 있다. 지금 일본에서는 서북구주(西北九州)지역에서만 고인돌아 편재하고 있다. 그 지역은 대체로 하천이나 해안의 소구릉이나 충적대지상에 위치하고 있어 고인돌시대 사람들은 농경생활이 주업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일본에 전파된 초기의 고인돌은 개석식(蓋石式)과 기반식(基盤式)이 혼재된 것으로, 이는 한국 남부지방에서 구주지방으로 기원전 10세기경에 전파된 것으로 추정되며 야요이문화 단계로 생각된다.
야요이시대의 토기는 김해의 지내식(地內式) 무늬없는 토기에서 그 기원을 알 수 있으며 그 같은 토기는 쓰시마, 구마모토현 등지에서발견되기도 했다.
야요이시대부터 일본에서 나오는 철기는 대부분 단철이나, 단조철이 주철도 된 철부(鐵斧)도 나오는데 이는 한반도의 수입품으로 생각되며 일본에서 출토된 철정(鐵錠)은 가야나 신라지역 출토형태와 같아서 이 철정이 한반도로부터 수입된 것이라는 견해가 많다.
철정의 제조과정은 1200C의 고열에서 선철(銑鐵)로 사강(沙鋼)을 만드는 기술적 과정을 거치는데 북천동 철정과 구정리 철정은 이런 과정을 거쳐 만든 것인 바, 당시 왜국에서는 철의 대량생산도 불가능했고 제철기술도 부족하여 철기문화가 고도로 발달하고 국제교역의 중심지였던 가야의 제철기술에 의존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한다.
가야국 당시 남해안에서 일본 열도쪽으로 가는 해로는 삼국지(三國志) 위지왜인전(魏志倭.人傳)에 의하면 구야한국(狗倻韓國)에서 쓰시마, 이키, 이도국 해로와 이키, 이즈모 해로가 주로 이용되었는데 그 중심지역으로 김해 지내동(地內洞)이 주목되며, 특히 김해시와 부산시의 경계가 되는 낙동강 서지류 중간지점인 해발 100m 지점이 해상국가인 가야와 왜지로의 해상교통에 있어 기점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이곳이 임나루인데, 국제무역항으로 구주지역의 가야인과 가야 문화는 동쪽으로 진출하여 기내지역(機內地域)에 미치고 야마토[大和] 정권 성립에 영향을 미쳤다. 가야인들은 이즈모[出雲]지방을 큐슈 후쿠오카에서 기내쪽으로 진출하는 하나의 거점으로 이용했는데 김해 부원동(府院洞)에서 나온 적갈색 토마(土馬)와 회청색 어형(魚形)이 기우제 등의 신마(神馬)로 간주되는 이즈모지방에 집중되어 있어 주목되며 한반도의 토마와 관계가 있을 것으로 짐작된다.
● 가야의 멸망
서기 6세기에 들어서면서 고구려의 세력에 밀린 백제와 신라는 자기 발전을 위하여 가야에 주목하였으며, 가야의 분국(分國)이었던 왜(倭)가 야마토[大和]정권에 패배함으로써 가야는 국제적으로 고립되었다.
일본서기(日本書紀) 계체기(繼體紀)에는 512년 백제가 야마토정권에 사신을 보내어 가야국이 지배하던 상다리(上多唎), 하다리(下多唎), 자타(姿陀), 모루(牟婁) 등 4현에 대한 기득권을 요구하고 야마토정권이 이를 인정하는 등 가야를 잠식하고 신라와 맞서게 되었다.
신라는 가야 지역에 대한 세력을 확장했는데, 법흥왕(法興王) 9년에 대가야국의 이뇌왕(異腦王)이 사신을 보내 청혼하자 법흥왕이 이찬(伊澯) 비조부(比助夫)의 누이동생을 보내 결혼하게 하여 월광태자(月光太子)를 낳았다. 신라와 대가야의 이 통혼은 가야의 통합운동을 저해하고 신라의 가야 병합에 단서가 되었다.
대가야왕에 의해 배치된 주변소국 신라인들로 불화가 일면서 아라가야에 속했던 탁순국왕 아리사등(阿利斯等)이 자국 안의 신라인을 독자적으로 돌려보내자 신라가 탁순국 북경의 성책을 공갹하는 과정에서 훼기탄국(喙己呑國)이 신라에 항복한다. 이를 본 가야 남부제국은 자구책으로 정치합의체 결성을 시도하고 아라가야는 백제, 신라, 왜국의 사신을 초빙하는 국제회의를 열어 힘을 과시하지만, 백제는 영향력 확대를 위해 531년 아라가야로 쳐들어가 걸모성(乞毛城)을 차지한다.
이에 탁순국왕 아리사등은 왜국의 모야신(毛野臣)을 중재인으로 백제, 신라 사이에 평화협정을 맺자고 하였으나 신라는 532년 이때를 가야통합의 호기로 생각하고 본가야를 군사적으로 병합시켜 버렸다. 이로써 본가야는 건국 490여년만에 멸망하였다.
본가야가 망한지 2년 뒤 탁순국왕 아리사등은 자기 지역에서 독자행동을 하는 왜국의 모야신을 쫓아내려고 백제와 신라에 청병을 하지만, 백제는 모야신을 포함하여 탁순국 자체까지 공격하여 그 부근에 구례(久禮) 모라성(牟羅城)을 쌓고 군대를 주둔시켜 아라가야 서쪽 소국을 통솔하면서 압박을 가했으며, 신라는 상하가 친백제와 친신라로 갈라져 서로 다른 마음을 품고 있는 탁순국을 병합하고 구례 모라성에 주둔하고 있던 백제군마저 축출하였다. 백제는 이어 한강유역을 신라에게 빼앗기자 가야지역 진출을 서두르게 되어 554년에 신라와 관산성전투(管山城戰鬪)를 벌였으나 패배하고 성왕(聖王)은 전사하였다.
신라는 이듬해에 창령에 비자벌주(比自伐州)를 설치하고 561년에는 진흥왕(眞興王)이 비사벌주를 순행하여 순수비를 세웠으며, 이듬해에 이사부(異斯夫)와 사다함(斯多含)이 군사 5000여명을 거느리고 쳐들어가 대가야를 정복하였다. 이때에 가야(伽倻)의 다른 9개 소국도 함께 신라에 병합되어 이로써 가야는 완전히 멸망하게 되었다.
철기문화를 바탕으로 부강한 읍락국가를 이루면서 활발한 농업생산력을 과시했던 가야가 멸망한 원인을 분석해 보면, 첫번째 가야의 제국(諸國)이 분지를 따라 형성되면서 세력이 비슷하여 하나의 연맹국이 되기는 했으나 강력하게 통일된 왕국을 이루지는 못했다. 두번째 가야 제국의 중심이었던 본가야에서 초대 국왕인 김수로(金首露)가 사망한 뒤 지배집단이 대거 일본으로 건너가 분국인 야마대정권을 새움으로써 너무 많은 인력과 선진문물이 왜국으로 이주한 반면, 본가야의 국력은 분산, 약화되어 거등왕(居登王)이 신라에 화친을 요청하는 등 약한 모습을 드러냄으로써 주변국인 백제와 신라 사이에서 위협을 당하게 되었다. 세번째 가야의 경제적 기반의 하나인 무역에 있어 백제와 왜국, 신라가 가야의 중계무역을 제치고 직접 무역에 나서 경제기반이 약화되었고, 가야 말기에 이르러 민심이 친백제와 친신라로 나뉘면서 일부 계층이 부의 편재에 따르는 사치를 하는 등 사회분열현상이 생겼다. 네번째 가야는 고구려, 백제, 신라, 왜국 사이에서 대외적으로 국제정세의 희생물이 되었다. 일본지역에서 가야와 친밀했던 분국 야마대국이 무너지고 기내의 야마토 정권이 백제와의 깊은 유대관계를 가짐으로써 가야는 배후세력의 하나를 잃었다. 또 신라와 백제 간의 동맹에 의해 고구려의 남하를 저지한 백제와 신라는 한강유역과 가야지역을 놓고 영토 확장에 나섰는데, 가야는 우호관계에 있던 백제와 사이가 벌어지고 결국 신라의 무력과 회유로 멸망하게 되었다.
▶참고서적
휴머니스트(humanist) 版「살아있는 한국사 -한국 역사 서술의 새로운 혁명」
경세원 版「다시 찾는 우리 역사」
한국 교육진흥 재단(재단법인) 版「반만년 대륙 역사의 영광- 하나되는 한국사」
대산출판사 版「고구려사(高句麗史) 7백년의 수수께끼」
서해문집 版「발해제국사(渤海帝國史)」
충남대학교 출판부 版「한국 근현대사 강의」
두리미디어 版「청소년을 위한 한국 근현대사」
▶해설자
이덕일(李德一) 한가람 역사문화연구소 소장
한영우(韓永愚) 한림대학교 인문학부 석좌교수
고준환(高濬煥) 경기대학교 법학과 교수
서병국(徐炳國) 대진대학교 역사학과 교수
이인철(李仁哲) 한국학중앙연구원 학술위원
박걸순(朴杰純) 충남대학교 역사학과 교수
조왕호(趙往浩) 대일고등학교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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