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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 강론」33.개방(開放), 북벌(北伐) 그리고 당쟁(黨爭)

개마기사단 |2011.10.12 19:46
조회 145 |추천 0

 

병자호란(丙子胡亂)이라는 큰 시련을 겪은 조선은 이제 명분이 아니라 힘이 지배하는 국제 현실을 깨달아야 했다. 병자호란을 교훈삼아 개방정책으로 전환해야 했다. 소현세자(昭顯世子)말로 이를 실현하는데 적격인 인물이었다. 그러나 인질 생활에서 돌아온 소현세자는 곧 살해되었고, 조선은 더욱 폐쇄적인 나라가 되어 갔다. 인조(仁祖)의 뒤를 이은 효종(孝宗)은 북벌(北伐)을 단행하려 했으나 문치(文治)에 젖은 신하들의 격렬한 반대로 어려움을 겪었다. 북벌군주 효종의 죽음으로 벌어진 예송(禮訟)논쟁은 조선 당쟁(黨爭)의 기본 틀을 공존에서 배타, 즉 독존으로 바꾸는 계기로 작용했다.

● 소현세자(昭顯世子)와 개방(開放)

병자호란(丙子胡亂)은 조선에게 큰 시련이었지만 새로운 기회이기도 했다. 명분이 아니라 힘이 지배하는 국제 현실에 대한 인식을 바탕으로 개방할 수 있는 기회였다. 소현세자는 조선에 필요한 이런 변화에 적당한 인물이었다. 그는 새로운 변화의 물결을 남보다 빨리 감지하고 이를 받아들일 수 있는 능력과, 이상을 위해 자신을 버릴 수 있는 희생정신을 갖고 있었다.

인조(仁祖) 재위 9년(서기 1631년) 견명사(遣明使) 정두원(鄭斗源)이 가져온 서양의 화포(火砲)와 천리경(千里鏡), 자명종(自鳴鐘) 등을 처음 보고 깊은 인상을 받았던 소현세자는 병자호란 때 자신의 인질 문제가 쟁점이 되어 강화조약 체결이 어렵게 되자 스스로 이 문제를 풀었다.

"태산(泰山)이 이미 새알 위에 드리워졌는데, 국가의 운명을 누가 경석(警石)처럼 굳건하게 하겠는가? 일이 너무도 급박해졌다. 나에게는 일단 동생이 있고 또 아들도 하나 있으니, 역시 종사(宗社)를 받들 수 있다. 내가 적에게 죽는다 하더라도 무슨 유감이 있겠는가? 내가 성에서 나가겠다는 뜻을 말하라."

인조실록(仁祖實錄) 15년 1월 22일조

청(淸)이 세자와 대군 외에도 육경(六卿)의 아들까지 인질로 요구하자 호조판서 김신국(金藎國)이 병을 핑계대고 사직을 청하면서 인질을 피하려는 상황에서 나온 소현세자(昭顯世子)의 이런 결정은 조선 지배층에서 보기 드문 자기희생이었다. 심양으로 끌려간 소현세자는 세자빈 강씨(姜氏)와 봉림대군(鳳林大君) 부부 등 가족들을 비롯해 3백여명의 수행원과 함께 심양관(瀋陽館)에서 거주했다. 조선과 청나라는 심양관을 통해 양국 사이의 현안을 처리하려 했는데, 이런 점에서 심양관은 청 주재 조선 대사관이었으며 소현세자는 조선 대사인 셈이었다.

소현세자는 심양관에서 청의 파병 요구에 따라 조선인들로 구성된 조정군(助征軍)을 파견해야 했으며, 반청(反淸) 행위로 끌려온 조선 인사들을 보호하기 위해 노력해야 했다. 이를 위해 소현세자는 불가피하게 청나라의 실력자인 용골대(龍骨大) 등과 좋은 관계를 맺었다.

그러나 소현세자의 이러한 처신은 인조를 포함한 조선 내 반청세력의 불만을 사게 되었다. 반청세력은 겉으로는 청나라에 굴복하는 척하면서도, 내부적으로는 명나라에 은밀히 밀사를 보내 청나라의 압박을 받는 조선의 상황을 설명해 이해를 구하는 등 이중의 태도를 견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소현세자는 불모 생활을 통해 대세가 이미 청으로 기울었음을 알았다. 명나라는 비단 청나라가 아니더라도 내부에서부터 붕괴되고 있는 중이었다. 소현세자의 인질 생활 7년째인 1644년 3월 명나라의 마지막 황제 의종(毅宗)은 역졸(譯卒) 츨신의 유적(流賊) 이자성(李自成)이 북경을 점령하자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청과 마지막 결전을 위해 요동 방면으로 진격하던 명장(明將) 오삼계(吳三桂)는 산해관(山海關)에서 이 소식을 듣고는 도리어 청나라에 군사 차용을 요청했다. 이는 사실상의 항복 선언이었다.

청나라에서 이를 거부할 리 없었다. 섭정왕(攝政王)이던 구왕(九王) 다이곤(多爾袞)은 곧 산해관으로 가서 "인의(仁義)의 군대를 동원하여 유적 이자성을 멸하고, 중국 백성을 구원한다."는 명분으로 오삼계의 군대와 합류했다. 명목은 연합군이었으나 사실상 청군이 명군을 흡수한 것이었고 이로써 명나라는 실질적으로 멸망한 것이었다. 이때 다이곤은 소현세자를 대동하고 산해관으로 남하했다. 명나라가 실질적으로 멸망하는 장면을 보여주어 조선으로 하여금 친명반청(親明反淸)정책을 포기하도록 만들려는 것이었다.

다이곤은 북경을 향해 남진하는 길에도 소현세자를 대동했다. 1644년 4월 산해관을 떠난 청군은 질풍노도로 남하해 다음달 5월 북경에 입성했다. 청군의 남하에 놀란 이자성이 북경을 버리고 남쪽으로 도망감으로써 무혈입성한 것이었다. 소현세자는 다이곤과 함께 북경에 입성했다가 식량난으로 20여일만에 심양으로 돌아갔으나, 9월 다시 청나라의 황제를 따라 북경에 들어와 두달 남짓 머물게 된다.

소현세자는 여기서 서양 문물을 체험할 기회를 가졌다. 당시 북경에 와 있던 예수회 선교사 아담 샬(Adam Schall)과 교류하게 된 것이다. 1628년 중국에 파견된 아담 샬은 해박한 과학 지식으로 명황(明皇) 신종(神宗)의 신임을 받았다. 북경을 점령한 청황(淸皇) 세조(世祖)도 그의 과학 지식을 우대해 흠천감정(欽天監正)을 삼고 대청시헌력(大淸時憲曆)을 제작하게 했다. 아담 샬은 북경 동안문(東安門) 내에 거주하면서 선무문(宣武文) 내에 선교사 마테오 리치(Matteo Ricci)가 세운 남천주당(南天主堂)에 자주 머물렀고, 소현세자는 동안문 내 아담 샬의 숙소와 남천주당을 자주 찾아 교분을 가졌다. 동화문(東華門) 안의 문연각(文淵閣)이었던 소현세자의 숙소는 아담 샬의 숙소와 가까웠다.

두사람의 친교를 당시 남천주당의 황비묵(黃斐默) 신부는 자신의 저서에서 이렇게 기술했다.

'순치원년(順治元年)에 조선 국왕의 세자는 북경에 불모로 와서 아담 샬 신부의 명성을 듣고, 때때로 남천주당을 찾아와 천문학 등을 묻고 배워갔다. 샬 신부도 자주 세자 관사를 찾아가 오래 이야기를 나누어 두사람은 깊이 뜻을 같이했다. 샬 신부는 거듭 천주교가 정도(正道)임을 말하고, 세자도 자못 듣기를 좋아하여 자세히 물었다. 세자가 귀국하자 샬 신부는 선물로 그가 지은 천문, 산학(散學), 성교정도(聖敎正道)의 여러 서적과 여지구(輿地球)와 천주상을 보냈다. 세자는 이를 받고 손수 글을 써 감사하고 칭찬했다.

황비묵(黃斐默) 정교봉포(正敎奉褒) 제1책 25장'

이에 대한 소현세자의 답장에는 그의 개방적인 세계관이 잘 드러나 있다.

'어제 천만 뜻밖에 보내주신 귀중한 천주성화 및 각종 양학(洋學) 서류 등의 선물을 받고 제가 얼마나 기뻐하며 감사하는지 귀하는 상상조차 못할 겁니다. (중략) 우리 나라는 학문에 대한 광명(光明)이 결핍된 나라이기 때문에 오늘까지 이러한 진리를 모르고 살아왔습니다. (중략) 여지구와 천문 서적들은 천하에 없어서는 안될 것인데, 이제 이것이 저의 수중에 들어오게 되니 얼마나 다행이며 행복한 일인지 말로 표현할 수 없습니다. 우리 나라에도 이와 비슷한 종류의 기계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솔직히 말하면 이미 진부한 것들로서 정밀한 표준에서 어긋난 위물(僞物)인데 지금 진품을 향유하게 되었으니 어찌 기쁘지 않겠습니까? 제가 귀국하면 단지 궁중 보물로 간직할 뿐만 아니라 다시 인쇄해 뜻있는 사자(士子)들에게도 반포하겠습니다. 이렇게 되면 우리 나라도 무지의 황야에서 학문의 전당으로 변모할 것이며...(후략)'

조선의 개국(서기 1876년)보다 앞선 1644년에 소현세자는 이미 조선을 개방된 나라로 이끌기로 결심한 것이다. 이 만남 직후인 1645년 2월, 소현세자는 청나라로부터 귀국을 허락받는다. 이때 세자는 이방송(李邦訟), 장삼외(張三畏), 유중림(劉中林), 곡풍등(谷豊登) 등 천주교 신자인 청나라의 환관과 궁녀들을 동반하고 귀국했다.

그러나 소현세자의 이런 개방된 현실인식은 인조와 반정정권의 불만을 샀다. 앞서 1644년 정월 소현세자가 강빈을 거느리고 일시 귀국했을 때, 인조는 이들 부부를 냉담하게 대했었다. 사망한 강빈의 아버지 강석기(姜碩期)의 빈소에 왕곡(往哭)조차 허락하지 않을 정도였다. 세자 부부를 의심한 인조는 수시로 심양관에 내관을 보내 이들을 탐지하고, 그 결과를 비밀리에 보고하게 했다. 원나라 치하의 고려 왕족들이 원나라의 힘으로 국왕 자리를 차지했던 것처럼, 혹시 이들이 청나라의 힘으로 자신을 폐하고 즉위하려 하지 않을까 하는 의심을 품었던 것이다. 1637년 2월 심양으로 끌려갔던 소현세자 부부는 정확히 만 8년만인 1645년 2월, 서울에 도착했다. 한창 연부역강(年富力强)한 서른넷의 나이, 즉 인생의 가장 중요한 때인 20대 후반부터 30대 초반까지 타국에서 불모로 생활하며 국제 정세와 새로운 사상을 익힌 그의 가슴에는, 고국을 새로운 나라로 만들겠다는 의욕이 넘치고 있었다. 조선을 폐쇄의 나라에서 개방의 나라로, 성리학 유일사상 독존의 나라에서 천주학 등 다양한 사상이 함께 하는 공존의 나라로, 백성을 희생시키는 비현실적 명분의 나라에서 백성들의 생활을 우선으로 하는 현실의 나라로, 과학의 나라로 바꾸겠다는 의욕이었다. 그러나 세자와 그의 가족들을 기다리고 있는 운명은 너무나 가혹했다.

인조에게 있어 소현세자는 나라를 위해 이역만리 타국에서 고생하다 돌아온 아들이 아니었다. 집권 서인들에게도 그는 충성의 대상이 아니라, 자신들의 쿠데타 이념을 정면에서 부인하는 정적이었다. 인조는 심지어 환국한 세자에 대한 신하들의 진하(進賀)조차도 막았다. 부왕의 이러한 냉대에 상심한 세자는 귀국 두달만에 학질에 걸려 병석에 누웠고, 발병 사흘만에 급서(急逝)하고 말았다.

건장하게 귀국했던 세자의 급서는 무수한 의혹을 낳았다. 그 중 인조의 후궁 조소용(趙紹容) 배후설이 신빙성 있게 제기되었다. 소현세자의 치료를 맡았던 의관(醫官) 이형익(李馨益)이 원래 조소용의 사갓집에 출입하던 의사로서, 불과 3개월 전에 의관으로 특채된 점 때분이었다. 조소용과 세자빈 강씨의 관계가 원만치 못했던 것이 이런 의혹을 증폭시켰다.

소현세자가 독살되었음은 다음 기록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세자(世子)는 본국에 돌아온 지 얼마 안 되어 병을 얻었고 병이 난 지 수일만에 죽었는데, 온몸이 전부 검은 빛이었고 이목구비의 일곱 구멍에서는 모두 선혈(鮮血)이 흘러나오므로, 감은 천으로 그 얼굴 반쪽만 덮어 놓았으나 곁에 있는 사람도 그 얼굴빛을 분변할 수 없어서 마치 약물(藥物)에 중독되어 죽은 사람과 같았다. 그런데 이 사실을 외인(外人)들은 아는 자가 없었고, 주상(主上)도 알지 못했다.

인조실록(仁祖實錄) 23년 6월 27일조'

이 기록은 '주상도 알지 못했다.'고 적고 있지만, 인조는 시종일관 의관 이형익을 비호했고 장례도 예법에 어긋나게 간소하게 치러버렸다는 점에서, 인조가 정말 이런 사실을 몰랐다고 보기는 어렵다. 소현세자가 적장자(嫡長子)이므로, 인조실록의 사관이 그해 4월 28일자에 "의례(儀禮) 상복편(喪服篇)에 임금은 장자를 위해 참최로 3년을 입는다. 신하는 임금의 부모와 처자를 위해 기년복으로 종복(從服)한다."라고 쓴 대로 임금은 3년복을 입고 신하들은 1년복을 입어야 했다. 그러나 인조는 기년(朞年)으로 신하들은 시마(緦麻)로 끝내 버렸다.

인조는 나아가 원손(元孫)인 석철이 있었음에도 종통을 무시하고 자신의 차자(次子)인 봉림대군을 세자로 책봉했다. 인조는 이에 그치지 않고 조작으로 추정되는 저주사건을 이용해 강빈을 죽이고, 그 어머니와 오빠까지 죽여 버렸다. 인조의 증오는 강빈의 친정을 넘어 자신의 손자들에게까지 이어졌다. 인조는 소현세자의 세 아들을 모두 귀양 보냈고, 이 중 두 아들은 귀양지 제주에서 죽고 말았다.

이로써 소현세자가 꿈꾸었던 개방과 실용의 미래는 사라졌다. 소현세자가 순조롭게 즉위해 청국에서 익힌 세계 정세에 대한 식견을 바탕으로 정사를 펼쳤더라면, 인조와 쿠데타로 야기된 그 모든 국난들이 긍정되고 출산을 위한 산고쯤으로 평가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인조와 반정정권은 변화를 거부했고, 또 변화를 향한 모든 시도를 탄압했다.

● 효종(孝宗)과 서인(西人)정권의 동상이몽(同牀異夢), 북벌(北伐)

소현세자(昭顯世子)보다 일곱살 아래였던 봉림대군(鳳林大君)은 세자와 함께 불모 생활을 했지만 청나라에 대한 인식은 정반대였다. 소현세자가 차차 청이라는 거대한 실체를 인정하고 서구 문물을 받아들인 것과는 반대로, 봉림대군은 시종일관 청에 대한 적대감을 키워갔다. 봉림대군에게 청나라는 언젠가 힘을 길러 복수해야 할 대상에 다름 아니었다. 청나라는 조선에 씻을 수 없는 치욕을 안겨준 오랑캐의 나라로서 타도의 대상일 뿐이었다.

청나라와 함게 한 명나라 정벌길을 소현세자가 청나라를 현실로 받아들이는 계기로 삼았다면, 봉림대군은 청나라 군사의 허점을 캐는 계기로 삼았다. 봉림대군은 만 8년간의 인질 생활 동안 세차례에 걸쳐 명나라 정벌길에 동반했는데, 1641년 8월의 송산(松山)전역(戰役) 때는 청황(淸皇) 태종(太宗)과 함께하기도 했다. 훗날 송시열(宋時烈)과 기해독대(己行獨對) 때 봉림대군이, "오랑캐의 일으 누구보다 내가 잘 알고 있소."라고 말한 것은 이런 경험에서 나온 자신감이었다. 소현세자와 달리 8년간의 불모기간은 그의 사상을 조금도 바꾸어 놓지 못했다. 사실상 이 점이 그를 소현세자의 뒤를 이어 세자가 되게 했으며 1649년 5월 인조(仁祖)가 사망하자 서른하나의 나이로 조선왕조 제17대 국왕으로 즉위하게 했던 것이다.

형과 조카의 자리를 차지한 그는 자신의 치세이념을 북벌(北伐)로 정했다. 북벌을 위해서는 군비 확장을 해야 했다. 이를 위해 효종(孝宗)은 조선의 지나친 숭문주의(崇文主義)를 반성하고 숭무주의(崇武主義)로 나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효종은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옛 사람이 이르기를, '밭갈이는 남자 종에게 묻고 길쌈일은 여자 종에게 물어야 한다.'고 했다. 노비에 관한 말이 비록 문무지사(文武之士)에 대한 비유로 취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문(文)이라 이름하였으면 글을 읽고 학문을 강론할 뿐이며, 무(武)라 이름하였으면 병법(兵法)을 익히면 될 뿐이다. 무인을 등용하는 도는 차라리 거칠고 사나운데 지나칠지언정 나약하고 옹졸해서는 안된다. 오늘날 비국(備局)의 낭청이 슬기로운 힘을 지닌 자를 뽑지 아니하고 단지 글자나 아는 영리한 자를 뽑다 보니, 모두가 서생(書生)들뿐이다. 그러나 급한 상황에 적을 상대할 때에 서생을 쓸 수 있겠는가. 이는 우리 나라 풍습이 추구하는 하나의 커다란 병폐다."

효종실록(孝宗實錄) 3년 5월 15일조

효종은 이런 사고 속에서 무신(武臣)을 우대하는 한편, 군비 확장을 서둘렀다. 박무(朴茂)를 병조판서에 임명한 것이 군비 확장의 신호탄이었다. 효종의 군비 확장계획에 대다수 신하들이 반대했지만, 박무는 홀로 수륙군환정사목(水陸軍換定事目) 등 군정 개혁 5개조를 내놓아 군비 확장을 찬성했던 것이다. 그러나 박무는 병판을 맡은 지 얼마 되지 않아 곧 사망하고 말았다. 그러자 효종은 또 다른 군비 증강 지지자인 원두표(元斗杓)를 후임으로 삼아 북벌의 대임을 맡겼다. 그리고 무신인 이완(李浣)을 어영대장으로 삼아 문신 원두표와 조화를 이루게 했다. 원두표에게는 국방정책을, 이완에게는 그 실행을 맡긴 역할 분담 인사였다. 실로 원두표와 이완 이 두사람이 효종의 북벌계획과 실행을 뒷받침할 문무(文武) 신하였다.

효종은 영장제(營將制)를 부활했으며, 문신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무관(武官) 출신 유혁연(柳赫然)을 승지로 임명했다. 이런 과정을 거텨 효종은 1655년 가을, 1만 3천여명의 정예병이 펼치는 노량진 백사장의 열병식을 거행할 수 있었다. 이 열병식은 '사대부와 일반 백성은 물론 서울 사대부가의 아녀자들까지 모여 인산인해를 이루었다.'고 기록될 정도로 장관을 이루었으나, 일부 문신(文臣)들은 "청과 분쟁거리가 된다"며 반대하기도 했다. 효종이 재위 4년에 제주도에 표류되어 온 네덜란드 사람 하멜(Hamel)을 훈련도감에 배속시켜 조총(鳥銃)을 제작하게 한 것도 북벌에 대한 강력한 의지를 드러내는 조치였다.

그러나 효종의 북벌 추진에는 두가지의 애로사항이 있었다. 농민들의 경제적 어려움과 문신들의 반대가 그것이었다. 농민들은 농경 외에 북벌 준비를 위한 부역에 동원되자 불평했으며, 문신들은 백성 생활의 피폐를 명분삼아 이에 반대했다. 문신들의 속내는 효종의 숭무주의에 대한 반발이었다. 이들은 효종이 실제로 북벌을 단행할 경우 전화(戰禍)에 휩싸일 것을 우려하고 있었다.

재위 8년(서기 1657년)이 되자 효종의 강력한 숭무(崇武)정책에 대한 반발이 집중적으로 터져 나왔다. 이조판서 홍명하(洪命夏)와 영중추부사 이경여(李敬輿), 전 영의정 이경석(李景錫), 대사헌 민응형(閔應亨), 응교(應敎) 이경억(李慶億) 등이 줄줄이 나서 효종의 군비 확장을 비파하며 백성들의 생활을 안정시키는 안민책(安民策)을 촉구했다.

여기에 산림 영수 송시열에 효종 재위 8년 정유봉사(丁酉封事)를 올리는 것으로 효종 비판에 가세하자, 효종은 고립되고 말았다. 장유봉사는 "전하께서 재위에 계신 8년 동안은 그럭저럭 지나갔을 뿐, 한 자 한 치의 실효도 없었습니다."라고 효종의 치세를 격렬하게 비판하면서, 19개 항목에 걸쳐 여러 문제를 논의하고 있다. 그 핵심은 북벌보다는 양민(養民)에 힘쓰라는 것과 사대부를 우대하는 왕도(王道)를 기르라는 것이었다.

송시열이 이처럼 자신의 8년 치세 전부를 부정하고 나섰지만 효종은 송시열을 처벌하지 못했다. 오히려 효종은 송시열과 함께 양송(兩宋)으로 불리는 산림의 중심 인물인 송준길(宋浚吉)에게 벼슬을 내리는 것으로 양보할 수밖에 없었다.

효종은 송준길에게 인사권을 쥔 핵심 요직인 정3품 이조참의(吏曺參議)를 제수함과 동시에, 경연과 입시석상에서 다른 신하들보다 앞줄에 앉을 수 있는 특권을 주어 관계(官階) 이상의 우대를 베풀었다. 송준길은 산림(山林)의 당론대로 '군사'와 '안민' 중에서 백성들을 편안하게 하는 안민이 더 중요하다는 명분으로 군비 확장에 반대했다. 이는 사실상 북벌에 반대하는 것이었다. 송준길은 나아가 송시열과 이유태(李維泰) 등 산림 인사들을 등용할 것을 주청하고, 인조의 묘호 문제로 파직된 유계(兪棨) 심대부(沈大浮) 등도 복직시킬 것을 건의했다. 그러나 효종이 거부하자 출사 5개월만에 관직을 내놓고 물러갔다.

서인의 일파인 산당(山黨)이 중심이 되어 대부분의 문신들이 북벌에 반대하자, 효종은 결국 재위 9년 7월 송시열을 부르지 않을 수 없었다. 재위 9년 동안 군비 확장정책을 펼치는 과정에서, 효종은 이들 사대부의 지지를 받지 않으면 북벌이고 내치(內治)고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양송(兩宋)으로 대표되는 산림은 임금이 원하거나 벼슬을 내린다고 해서 따라오는 정당이 아니라, 자신들의 철학과 이익에 맞을 때에만 따라오는 정파였다. 그리고 효종과 양송의 정견이 달랐던 것이 문제였다.

효종은 이들이 북벌에 나서게 하기 위해 중대한 정치적 양보를 했다. 이들에게 사실상 정권을 내주는 조치를 취한 것이다. 즉 송시열을 요직인 이조판서에 임명해 인사권을 장악하도록 하고, 송준길을 대사헌에 임명해 탄핵권과 언론을 장악하게 했다. 효종 재위 9년 9월 이후, 조정은 사실상 양송의 것이었다. 양송은 이를 이용해 자당(自黨)인 산당 인사들을 대거 출사시켰다. 효종 10년 1월에는 인조의 시호 문제로 쫓겨난 유계를 병조참의로 임명한 데 이어, 3월에는 송준길을 병조판서로 임명하기도 했다. 실로 인사, 행정, 군사, 언론의 모든 것을 산림에게 내어준 것이다. 이에 따라 효종 초 북벌을 함께 추진했던 원두표, 이완 등 북벌 인사들은 정권에서 소외되었다.

효종이 산림에게 정권을 준 데에는 북벌 추진이라는 조건이 붙어 있었다. 효종이 비밀 서신을 보내 북벌을 독려하자 송시열은 상영릉문(上寧陵文)을 올려 대답했는데, 모호한 언사의 상영릉문에서 송시열이 제기한 유일한 군비 강화책은 약 17만여명에 이르는 승려들을 군사로 차출하자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는 효종이 이미 납공하지 않는 노비를 차출하기 위해 추쇄어사까지 파견했으나 실패한 데서 알 수 있듯이 현실적으로 실현 불가능한 방안이었다.

효종은 송시열에게 북벌의 분명한 의지를 밝히기 위해 재위 10년(서기 1659년) 3월 11일, 송시열과 단 둘만의 만남을 가졌다. 이것이 유명한 기해독대(己行獨對)다.

승지와 사관까지 배제한 이 날 독대에서 효종은 "오늘 이 자리를 마련한 이유는 현재의 대사(大事)를 논의하기 위함"이라고 분명히 못을 박았다. 효종은 또 "정예화된 포병(砲兵) 10만을 길러 자식처럼 사랑하고 위무하여 모두 결사적으로 싸우는 용감한 병사로 만든 다음, 기회를 봐서 오랑캐들이 예기치 못했을 때 곧장 관(關)으로 쳐들어갈 계획"이라면서, 그러면 '중원의 의사(義士)와 호걸들이 호응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효종이 세운 북벌계획의 요체는 포병 10만을 주축으로 북벌군을 조직해 북진을 단행하면 만주족에 억눌려 있는 한족(漢族)들이 호응할 것이라는 데 있었다. 10만 조선 포병이 기세를 울리면 중화사상(中華思想)을 가진 한족이 중국 각지에서봉기할 것이라는 얘기였다. 그러면 소수의 만주족으로서는 조선군과 한족을 동시에 상대하기가 곤란해질 테니, 효종의 전략은 바로 이를 노린 것이었다.

효종의 계획이 허황된 것만은 아니었다. 실제로 기해독대 15년 후인 현종(顯宗) 재위 15년(서기 1674년) 오삼계(吳三桂)를 중심으로 중국 남방 대부분의 지역에서 한족들에 의한 삼번(三藩)의 난이 발생하는 것이다. '우리 나라에서 붙잡혀 간 수만명의 포로가 내응(內應)할 것'이라는 효종의 희망도 실현 가능성은 충분했다. 효종은 송시열에게 이렇게 말한다.

"하늘이 내게 부여해 준 자질이 그리 용렬하지 않은데다가, 나로 하여금 일찍이 환란을 당하게 해 나의 부족한 면을 채워주었고, 나로 하여금 일찍이 궁마(弓馬)와 진법(陳法)을 익히게 했으며, 나로 하여금 저들 속에 들어가 저들의 형세와 산천 지리를 알게 했고, 나로 하여금 적지에 오랫동안 있게 해 두려워하는 마음이 없게 했소. 나의 어리석은 생각으로는 하늘이 나에게 이러한 시련을 겪게 한 뜻이 우연이 아니라고 스스로 생각하고 있소."

송시열(宋時烈) 송자대전(宋子大全)

효종은 몸의 기력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 내전(內殿)에도 잘 들어가지 않는 것으로, 북벌에 대한 강력한 의지를 표현했다.

그러나 효종의 이런 북벌의지에 대해 송시열이 제시하느 대안은, 치자(治者)의 근본 도리는 '몸을 닦고 집안을 다스린다.'는 듯의 수기형가(修己刑家)였다. 수기형가가 북벌의 선결 조건이라는 것이었다. 훗날 송시열이 반대당파로부터 '수기형가; 네자로 북벌의 책임을 때우려 했다는 비난을 받은 이유도 이 때문이다.

송시열이 이 독대에서 가장 중요하게 다룬 문제는 소현세자의 부인인 강빈(姜嬪)의 신원 문제였다. 이는 산림에서 의리 차원에서 제기한 문제이기도 했다. 물론 강빈이 억울하게 죽은 것이 사실이고 반드시 신원되어야 할 문제이지만, 북벌이라는 국가대사와 등가(等價)로 취급될 사안은 아니었다. 효종은 강빈의 죽음에 의혹이 있다는 송시열의 말에 수긍하면서도 "강씨가 역모를 꾀한 것은 의심할 것이 없다."라며 봉합했다. 이로써 강빈의 신워은 다시 묻혀진 것이었다. '강씨가 역모를 괴한 것이 의심할 것이 없다.'는 효종의 말까지 부인하면 효종의 종통을 부인하는 것이 되기 때문에 송시열도 여기까지 밀어붙일 수 없었다.

이렇듯 효종은 독대라는 파격적 형식을 통해 송시열에게 다시 북벌에 대한 의지를 분명히 했다. 효종은 송시열에게 "조만간 경에게 큰 임무를 맡기고 양전(兩銓)을 겸직하게 하려 한다."라고까지 말했다. 이 모든 파격에는 북벌 추진이라는 조건이 붙어 있었다.

송시열이 북벌 자체를 반대한다면 효종은 할 수 없이 산림을 버리고 북벌 지지자들을 끌어모아 다시 북벌을 추진할 것이었다. 산당으로서는 북벌을 추진할 수도 안할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송시열은 효종의 전폭적인 신임을 바탕으로 북벌을 소리 높여 외쳤지만, 실제로는 조선의 국력으로 불가능한 일이라고 여기고 있었다. 하지만 북벌이 불가하다는 말을 입 밖에 꺼낼 수는 없었다. 그 순간 효종과 맺은 암묵적 연합전선이 깨질 것이기 때문이었다. 작은 것 하나까지 직접 챙기는 효종이 인사권과 행정권 그리고 군사권까지 위임하며 맡긴 대임을 방기할 수는 없었다. 그야말로 진퇴양난이었다.

이런 진퇴양난에서 산당을 구해준 것은 효종의 급서였다. 송시열과 독대한 지 두달이 조금 더 지난 효종 재위 10년 5월 4일의 일이었다. 귀 밑에 종기가 나 음성(陰城)에 내려가 있던 어의(御醫) 신가귀(申可貴)를 급히 불러 침을 맞았는데, 고름과 피를 두서너말 쏟은 끝에 사망하고 말았던 것이다. 종기 때문에 급서했다는 이런 비정상적인 상황이 효종 사인에 많은 의문을 낳게도 했다.

효종이 걸었던 북벌의 길은 병자호란에 대해 조선이 취할 수 있는 두번째의 긍정적 방책이었다. 소현세자가 냉혹한 국제 정세를 인식하고 조선을 개방하려 했던 현실의 길이 첫번째 방책이었다. 이런 현실적 방책을 거부하고 청나라를 인정하지 않으려면 청나라와 정면승부를 벌여 현실의 승자가 되어야 했는데, 그것이 바로 북벌이었다. 대다수 사대부들이 불가능한 일로 치부했지만 효종은 확신을 갖고 추진하고 있었다.

그러나 개방도 북벌도 모두 좌절된 조선은 이제 제3의 길을 걸어야 했다. 명분으로는 청나라를 인정하지 않으면서 현실로는 청나라에 사대하는 모순의 길이자, 소중화(小中華)의 길이었다. 그리고 그 길은 좁은 나라 안에 갇혀 사대부들끼리 싸워야 하는 당쟁의 길이기도 했다.

당쟁의 워인을 제공한 것은 바로 효종의 죽음이었다. 효종의 국상(國喪) 때 계모 자의대비(慈懿大妃)의 복상 문제를 두고 벌어지는 논쟁, 바로 예송논쟁(禮訟論爭)의 시작이었다.

● 예송논쟁(禮訟論爭)의 시대

제1차 예송논쟁은 기해년은 1659년에 벌어졌다 하여 기해예송(己亥禮訟), 또는 상복 문제로 논쟁했다 하여 기해복제(己亥服制)라고도 한다.

예론이 중요한 정치적 이슈가 된 것은 조선 후기 성리학의 흐름과 관련이 있다.

이율곡(李栗谷)의 학통을 이은 김장생(金長生)은 집중적으로 예학(禮學)을 연구했다. 그래서 김장생을 조선 예학의 태두라고 일컫는데, 그의 에론을 아들 김집(金集)과 김집의 제자 송시열(宋時烈)이 계승했다. 조선 지배층은 양란(兩亂) 이후 백성들이 신분제 철폐로 대표되는 지배체제의 변화를 요구하고 나서자, 예학을 강조함으로써 이런 요구를 억누르려 했던 것이다. 서인들이 율곡의 개혁사상은 사장시킨 채, 율곡사상의 하나일 뿐인 예학을 고집한 이유는 오직 집권당이라는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키려는 데 있었다. 현실과 동떨어진 예학이 이렇게 학문의 주류가 되자 이것이 중요한 정치이론으로 등장하며 발생한 것이 예송논쟁이다.

성리학자인 서인들이 예학을 세움에 있어 근거로 삼은 것은 중국 고대의 주례(周禮)와 주자가례 등 중국의 예론이었다. 이에 따르면 상복(喪服)에는 다섯 종류가 있는데, 3년복인 참최(斬最)와 1년복인 재최(齋最), 9개월복인 대공(大功), 5개월복인 소공(小功), 그리고 3개월복인 시마(緦麻)가 그것이다.

이 규정에 따르면 부모상에는 자녀가 3년복을 입고, 부모도 장자상(長子喪)에는 3년복을 입어 1년복을 입는 차자(次子) 이하의 상과 구분했다. 가통(家統)을 잇는 장남에 대해서는 그만큼 우대한 것이다.

효종이 승하했을 때 문제가 된 것은 그가 왕통(王統)으로 보면 왕위를 계승한 적자(嫡子)이지만, 가통으로 보면 효종의 계모인 소현세자 다음의 차자라는데 있었다. 즉 적자로 보면 자의대비(慈懿大妃)가 3년복을 입어야 하지만, 차자로 보면 1년복을 입어야 하므로 효종(孝宗)을 인조(仁祖)의 적자로 보느냐 차자로 보느냐 하는 문제가 발생한 것이었다.

효종이 승하했을 때 조정에서는 의논 끝에 당시 이조판서인 송시열에게 의견을 묻는다. 이때 송시열은 우참찬 송준길(宋浚吉)과 상의해 효종이 비록 왕위를 이었지만 가통으로 보면 차자이므로 자의대비는 3년복이 아닌 1년복[基年服]을 입어야 한다고 답했다. 당대 최고의 예학자들의 주장에 따라 1년복으로 결정하려는 시점에 남인인 예조참의 윤휴(尹携)가 의례(儀禮) 참최장(斬最章)의 '제1장자가 죽으면 본부인 소생의 제2장자를 세워 또한 장자라 한다.'는 주석을 인용, 3년복을 입어야 한다고 반박하면서 예송논쟁이 시작되었다. 이때만 해도 예론이 본격적인 정쟁의 도구로 사용되지는 않았는데, 송시열은 의례 참최장 주석에 '서자(庶子)는 장자가 될 수 없으며...', '본부인 소생의 둘째 아들 이하는 다같이 서자라 일컫는다.'라는 구절을 근거로 1년복설을 거듭 주장했다.

나아가 송시열은 의례 3년조의 소(疏)에 '가통을 계승했어도 3년복을 입지 않는 네가지 경우[四種之說]' 중 '체이부정(體而不正)'을 거론했다. 사종지설(四種之說)의 체이부정은 효종처럼 몸은 아버지를 계승[體]했으나 가통으 이은 적장자(嫡長子)가 아닌 경우를 뜻한다. 사종지설의 정이부체(正而不體)는 소현세자처럼 적장자[正]이지만[而], 아버지를 계승하지 못했음[不體]을 뜻한다. 그런데 송시열이 체이부정을 논리로 1년복설을 주장하려 하자 영의정 정태화(鄭太和)가 "왕가(王家)의 일은 비록 처음에는 심히 적은 일이라도 훗날 그것으로 큰 화를 입는 수가 있다."면서 만류한 데서 알 수 있는 것처럼, 왕조국가에서 국왕을 체이부정으로 규정하는 것은 위험한 일이었다. 체이부정설이 왕위의 적통 문제로 비화되면 적장자가 아닌 효종이 부당하게 왕위를 이은 것으로 해석될 수도 있는 논리였다. 자칫 효종을 왕으로 인정하지 않은 것으로 몰릴 수도 있었다. 송시열도 이런 위험을 알았기 때문에 고례(古禮)가 아니라 국제(國制)와 대명률(大明律)을 인용해 1년복설을 주장했다. 국제와 대명률은 장자와 차자를 막론하고 모두 1년복을 입는다고 규정되어 있었다.

이처럼 송시열은 내면으로는 효종을 차자로 인정해 고례에 다라 1년복설이라는 논리를 세웠으면서도, 표면적으로는 장자와 차자 모두 1년복을 입는다는 국제(國制)를 내세워 1년복설을 주장하는 편법을 사용했다. 윤휴가 "임금의 상(喪)에는 모두가 참최복을 입는 것이 신하의 의리"라며 1년복설에 반대했으나, 송시열은 "대비는 선왕께서 신하로 섬겼던 분이며 아들이 어머니를 신하로 삼는 의리는 없다."면서 재반박했다. 윤휴가 다시 주(周) 무왕(武王)이 부왕인 문왕(文王)의 비 문모(文母)를 신하로 삼은 고사를 들자, 송시열은 이 때 신하로 삼은 인물은 문모가 아니라 무왕의 부인 읍강(邑姜)이라고 해석한 주자의 말을 인용하며 반박했다.

이처럼 논란이 계속되고 논쟁이 효종의 정통성 여부에까지 확대될 조짐을 보이자 현종(顯宗)은 우선 국제에 의거해 1년복으로 결정했다. 남인들과의 논쟁이 완전히 정리된 것은 아니었지만 서인들이 집권당이었기 때문에 1년복으로 정리된 것이었다.

그러나 다음 해인 경자년(慶子年, 서기 1660년)에 장령 허목(許穆)이 의례주소(儀禮註梳)를 근거로 "본처 소생의 제2장자도 역시 장자요 정당하게 적통을 이은 정체(正體)라 할 수 있으니, 3년복이 정당한 것"이라면서 다시 3년복설을 주장하고 나서 논쟁이 재개되었다. 영의정 정태화가 영돈녕 이경석, 영중주 심지원 등은 송시열의 주장을 지지했으나, 원두표는 서인이면서도 3년복설을 주장하는 등 이 문제를 둘러싸고 서인 내부가 분열했다. 그러자 국론 분열을 우려한 현종이 송시열을 지지하는 하교를 내려 이때의 예송 역시 송시열의 승리로 종결되었다.

그렇다고 집권 서인이 이를 빌미로 3년복설을 주장한 남인들에게 정치적 탄압을 가하지는 않았다. 이때만 해도 서인들은 예송을 정치적 측면으로 바라보기보다는 학문적 측면으로 바라보았던 것이다. 그러나 만년 야당인 남인들은 예송을 비단 학문에 국한하려 하지 않고, 서인들을 공격할 호재로 여겼다.

예송을 정치적 문제로 비화시킨 인물은 남인 학자 윤선도(尹善道)였다. 윤선도는 상소를 올려 "송시열이 종통(宗統)은 종묘와 사직을 관장하는 임금에게 돌려보내고, 적통(嫡統)은 기왕에 죽은 장자에게 돌려보내 종통과 적통을 둘로 나누었다."면서 공격하기 시작했다.

"차장자(次長子)가 아버지의 가르침을 받고 하늘의 명령을 받아 할아버지의 체(體)로서 살림을 맡은 뒤에도 적통이 되지 못하고 적통은 오히려 타인에게 있다고 한다면, 가세자(假世子)란 말입니까, 섭황제(攝皇帝)란 말입니까? 뿐만 아니라 차장자로서 왕위에 선 이는 이미 죽은 장자(長子)의 자손에 대하여 감히 임금으로 군림할 수 없고, 이미 죽은 장자의 자손 역시 차장자로 왕위에 오른 이에게는 신하 노릇을 않는다는 것입니까?"

현종실록(顯宗實錄) 1년 4월 18일조

송시열의 말에 의거하면 효종과 현종이 가짜 임금이 아니냐고 물음으로써 이 상소는 사실상 송시열을 역적으로 모는 것이었다. 소현세자의 셋째 아들이 제주도에 유배 중인 상황에서 이는 심각한 문제였다. 위기를 느낀 서인들은 일제히 단합해 윤선도를 공격했고, 윤선도는 위기에 몰렸다. 무고로 인정되면 반좌율(反坐律)에 의해 사형당할 수도 있었다. 우윤(右尹) 권시(權諡)가 "선왕의 사부이니 경솔하게 죽일 수 없다."고 주장했다가 오히려 대간의 공격을 받아 벼슬을 내놓고 낙향해야 했을 정도로 서인들의 기세는 등등했다.

현종 또한 '가세자', '섭황제' 운운하는 윤선도의 상소에 분노해 삭탈관작해 전리(田里)로 돌아가게 했다가 서인들이 반발하자 삼수(三水)로 귀양 보냈다. 이로써 제1차 예송논쟁은 외견상 송시열과 서인들의 승리로 끝났다.

제1차 예송논쟁은 조선 정치에 커다란 폐해를 던졌다. 각 당이 공존의 틀을 깨뜨리는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이제 남인은 서인을 정치 상대로 인정하지 않았고, 서인 또한 남인을 인정하지 않았다. 제1차 예송논쟁을 계기로 두 당은 서로 적당(敵黨)이 되었다.

막상 윤선도가 유배를 가게 되자 그에 대한 동정론이 일면서 다시 한번 국론이 분열되었고, 현종이 중재를 시도했으나 실패하였다. 그러자 현종은 "만일 다시 복제를 가지고 서로 모함하는 자가 있으면 중형을 쓰겠다."며 예송 거론 자체를 금지시켰다.

그러나 현종 재위 15년(서기 1674년) 2월 효종의 비(妃)이자 현종의 어머니인 인선왕후(仁宣王后) 장씨(張氏)가 세상을 떠남으로써 예송논쟁이 재연되었으니, 이것이 제2차 예송논쟁이다. 이 해가 갑인년(甲寅年)이기 때문에 갑인예송(甲寅禮訟)이라고도 한다. 제1차 예송논쟁의 당사자였던 인조의 계비인 자의대비가 그 때까지 살아 있었으므로 또 다시 그녀의 복제 문제가 대두되었던 것이다. 제1차 예송이 아들의 사망 때 어머니의 복제에 관한 것이었다면, 2차 예송은 며느리 사망 때 시어머니의 복제에 관한 문제였다.

맏며느리상에는 시어머니가 1년복을 입게 되어 있었고, 둘째 며느리 이하의 상에는 대공복(大功服)을 입게 되어 있었다. 2차 예송은 예조판서 조연(趙衍)이 당초 기년복(基年服)으로 정해 놀렸다가 남편인 효종 국상 때의 복제와 같다는 것은 문제라고 생각해 현종에게 그 당부를 물으면서 시작되었다. 예기(禮記)에 '남녀의 유별은 인간도리의 큰 것[人道之大者]'이라는 규정이 있는 것처럼, 효종 국상 때의 상복과 그 비 국상 때의 상복이 같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이 때 송시열은 낙향해 있고 서인인 김수항(金壽恒) 형제가 정승으로서 조정에 있었는데, 이들이 효종 비의 복제가 효종과 같을 수 없다면서 대공복을 입어야 한다고 다시 의정했다. 이렇게 자의대비의 복제가 당초 1년복으로 정해졌다가 9개월복으로 바뀌자 대구 유생 도신징(都愼徵)이 이를 공격하는 상소를 올려 예송논쟁에 불을 붙였다. 도신징은 대공복만에 아니라 1차 예송 때 기년복으로 정한 것까지 소급해 공격했다.

도신징은 기해예송 때 1년복으로 결정한 논리가 국제(國制)라면, 지금은 왜 9개월이냐고 따졌다. 국제에는 장자와 장부(長婦)의 복제에 대한 구별 없이 모두 1년복이었던 것이다.

'대체로 큰아들이나 큰며느리를 위해 입는 상복은 모두 기년의 제도로 되어 있으니, 이는 국조경전에 기록되어 있는 바입니다. 그리고 기해년 국상 때에 대왕대비께서 입은 기년복의 제도에 대해서 이미 "국조 전례에 따라 거행한다."고 했는데, 오늘날 정한 대공복은 또 국조 전례에서 벗어났으니, 왜 이렇게 전후가 다르단 말입니까.'

현종실록(顯宗實錄) 15년 7월 6일조

송시열이 1차 예송 때 '체이부정'이라는 말을 쓰지 않기 위해 국제를 들어 자의대비의 상복을 1년으로 정해 넘어간 것이 문제가 된 것이었다. 국제에 의하면 큰아들이나 큰며느리가 모두 1년복이라 하여 1차 예송 때 이를 전거로 1년복으로 정해놓고, 지금은 고례(古禮)를 들어 둘째 며느리로 대접해 9개월복으로 정하니 모순이 아니냐는 얘기였다.

현종 또한 도신징과 같은 문제 의식을 갖고 있었으므로 김수흥(金壽興)을 불러 당초 1년으로 정한 복제를 9개월로 바꾼 이유를 물으면서 대신들이 논의해 옳은 결론을 내리라고 주문했다. 이에 따라 판중추부사 김수항, 영의정 김수흥, 호조판서 민유중(閔維重), 병조판서 김만기(金萬基), 이조판서 홍처량(洪處亮), 형조판서 이은상(李殷相), 대사헌 강백년(姜栢年) 등 서인 대신들이 모여 협의했으나 혼쾌한 결론이 나오지 않았다. 15년 동안 예론을 공부해 확고한 논리를 갖추게 된 현종은 15년 전의 1년복과 지금의 9개월복이 같은 전거에 의한 것인지 다른 전거에 의한 것인지를 따져 물었다.

현종이 원하는 답변은 기해예송과 갑인예송이 모두 잘못되었다는 대답이었다. 그러나 궁지에 빠진 서인 대신들은 명확한 견해 표명을 삼간 채 허둥대고만 있었다. 영의정 김수흥 등 서인 대신들은 빈청에 모여 숙의하고 사종지설을 대략 설명한 다음, "이번 상복제도를 국가 전례의 대공복으로 사용한 것은 예경(禮經)의 뜻에 어긋나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마는 옛날 예의 정미한 깊은 뜻을 신들처럼 얕은 식견으로는 단정지을 수 없습니다."라고 애매하게 보고했다. 이 계사를 본 현종은 단안을 내렸다.

"경들이 이와 같이 근리하지도 않는 어긋난 말로 예법이라고 정해 선왕더러 정체(正體)가 아니라고 했으니, 임금에게 박하게 했다고 할 만한데, 어디에다 후하게 하려고 한 것인가? 더없이 중한 예를 결코 촉탁받아 한 의논을 가지고 정제(定制)라고 단정할 수 없다. 애당초 국조 전례에 정해진 기년복의 제도에 따라 정하여 행하라."

현종실록(顯宗實錄) 15년 7월 15일조'


현종은 다음 날 예론을 잘못 쓴 책임을 물어 영상 김수흥을 귀양 보냈다. 이로써 장장 15년을 끌어온 예론은 남인의 승리로 끝나게 되었다. 현종의 "어디에다 후하게 하려고 한 것인가?"라는 말은 효종에게 박하게 하고 송시열에게 후하게 하려는 것이 아니냐는 뜻이었다. 현종은 김수흥을 춘천에 부처한 다음 남인 허적(許積)을 영상으로 임명했다. 그리고 장선징(張善徵)을 예조판서로, 권대운(權大運)을 판의금으로, 송창(宋昌)을 집의로, 이익상(李翊相)을 대사간으로, 이하진(李夏鎭)을 사간으로 삼는 등 남인들을 대거 등용했다. 이로써 남인들은 인조반정(仁祖反正)에 참여햐 야당이 된 지 51년만에 집권당이 되었다.

현종은 그러나 같은 해 8월 갑자기 급서하고 말았다. 만 열세살의 어린 세자 순(焞)이 숙종(肅宗)으로 뒤를 이었고, 이로써 집권당이 거듭 바뀌고 왕비가 갈리는 파란의 시대가 열렸다. 숙종은 부왕의 뜻을 이어 송시열을 덕원부(德源府)로 유배하는 등 서인에 대한 공세를 계속했다.

새로 정권을 잡은 남인들은 송시열을 비롯한 서인들에 대한 처벌 여부를 둘러싸고 둘로 갈렸다. 강경 처벌을 주장하는 청남(淸南)과 온건 처벌을 주장하는 탁남(濁南)으로 나뉜 것이다. 송시열은 효종, 현종 두 조정[兩朝]의 스승이란 점과 허적 등 탁남의 온건 처벌론 덕에 목숨을 구하고 유배형으로 낙착이 되어 거제도로 유배지가 옮겨졌다.

두차례의 걸친 예송논쟁은 서인들이 인조반정 때 민심을 무마하기 위해 끌어들였던 남인이 정권을 잡는 구실을 했다. 효종의 정통성 시비가 걸려 있던 예송논쟁은 성리학 사회 조선에서는 극히 중요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이라는 두 차례의 큰 전란을 겪은 조선에 필요한 것은 임금에 대한 정통성 시비가 아니라, 변화된 사회에 걸맞는 새로운 정치체제였다. 백성들은 발전된 농업 생산력을 반영해 신분제 철폐 등 새로운 정치체제의 수립을 요구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조선의 사대부들은 이런 백성들의 요구를 억압하고 예론을 주요 흐름으로 몰고 갔다.

국왕의 정통성을 시빗거리로 삼은 예송논쟁을 계기로, 서인과 남인은 모두 공존(共存)을 포기하고 독존(獨存)을 추구하게 되었다. 그 결과 숙종 때에는 서로가 죽고 죽이는 살육전으로까지 비화되었다. 당쟁이 말기적 증상을 보이는 것이었다.


▶참고서적

휴머니스트(humanist) 版「살아있는 한국사 -한국 역사 서술의 새로운 혁명」
경세원 版「다시 찾는 우리 역사」
한국 교육진흥 재단(재단법인) 版「반만년 대륙 역사의 영광- 하나되는 한국사」
대산출판사 版「고구려사(高句麗史) 7백년의 수수께끼」
서해문집 版「발해제국사(渤海帝國史)」
충남대학교 출판부 版「한국 근현대사 강의」
두리미디어 版「청소년을 위한 한국 근현대사」

▶해설자

이덕일(李德一) 한가람 역사문화연구소 소장
한영우(韓永愚) 한림대학교 인문학부 석좌교수
고준환(高濬煥) 경기대학교 법학과 교수
서병국(徐炳國) 대진대학교 역사학과 교수
이인철(李仁哲) 한국학중앙연구원 학술위원
박걸순(朴杰純) 충남대학교 역사학과 교수
조왕호(趙往浩) 대일고등학교 교사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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