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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복전쟁의 대지존 광개토호태왕』2.선사(先士)의 가르침 ⑴

개마기사단 |2011.11.05 19:26
조회 58 |추천 0

 

서기 384년 겨울, 북방의 매서운 칼바람이 고구려 궁성의 심장이라도 도려낼 듯 우악스럽게 달려드는 밤이었다. 침전에서 곡성(哭聲)이 터져나왔다.

 

시위(侍衛)로부터 국왕의 부음(訃音)을 전해 들은 왕제(王弟) 고추가(古鄒加) 이련(伊連)은 황급히 입궐하여 침전으로 바쁜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얼마 전부터 그의 형인 소수림왕(小獸林王)의 병세가 심상치 않았지만 이리 갑자기 세상을 떠날 줄은 전혀 예상치 못했던 일이었다.

 

소수림왕은 평소 후사가 없음을 안타깝게 여기고 있었지만 미련을 두지는 않았다.

 

소수림왕은 이련의 아들 담덕(談德)에게 왕위를 물려줄 마음이었다. 담덕은 어리기는 하나 어른을 능가할 정도로 담대하고 총명했으며 누구도 함부로 범접하기 힘든 기상을 갖춰 주변을 놀라게 했다.

 

국왕은 기회 있을 때마다 담덕을 불러 옆에 두고 위대한 선조들의 이야기를 들려주곤 하였는데, 그 모습이 너무도 다정하여 궁인들이 부자간이라고 착각할 정도였다.

 

하지만 국왕은 담덕을 태자(太子)로 삼을 수는 없었다. 그 이유는 신융왕후(神隆王后) 계씨(桂氏)의 연치가 아직 젊어서 충분히 후사를 기대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담덕을 태자로 삼는다면 그가 왕후를 지지하는 세력의 표적이 될 것은 명약관화(明若觀火)했다.

 

소수림왕이 기회를 엿보고 있는 사이, 예기치 못했던 죽음의 그림자가 서서히 드리우고 있었다. 그것은 너무도 은밀하게 다가왔다. 전혀 눈치를 챌 수 없었다. 자신의 목숨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게 된 국왕은 담덕의 아버지이자 자신의 아우인 이련에게 왕위를 물려줘서 총명한 담덕이 나중에 장성하여 아무런 저항도 받지 않고 고구려의 통치자가 될 수 있도록 기틀을 다져 놓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소수림왕은 왕실의 법도에 따라 현재 신융왕후가 아들을 낳지 못하였으니 아우인 고추가 이련에게 왕위를 물려준다는 유언을 남기고 숨을 거두었다. 국왕의 침소로 들어선 이련은 경직된 표정으로 국왕의 유언을 전하는 시위장의 말소리를 묵묵히 들었다.

 

“폐하께서는 돌아가시는 순간에도 나라를 걱정하셨습니다. 유언하시길 후사를 고추가(古鄒加) 전하(殿下)께 맡긴다고 하셨습니다. 또한 붕어(崩御) 사실과 새로운 성상(聖上)의 즉위를 공포(公布)하여 혹시라도 있을지 모를 불순한 세력의 도발이나 백성들의 혼란을 막으라고 하셨사옵니다.”

 

소수림왕은 자신의 죽음으로 촉발될지도 모를 귀족들의 돌발 행동과 이를 틈타 군사적 행동을 할 수도 있는 후연(後燕)과 백제(百濟)의 침입을 염려했던 것이다.

 

이련은 시위장의 도움을 받아 모든 절차를 마치고 왕위에 올랐다. 기습적인 이련의 등극에 신융왕후와 그의 일족은 어찌할 바를 몰랐다. 이련은 도성 수비대와 근위대를 장악하고 있었으므로 그들도 함부로 어찌할 수 없었다.

 

이련은 소수림왕이 안배해 놓은 대로 조정을 장악하고 각 성의 성주들로부터 충성을 확인함으로써 혼란을 최소화하면서 왕위 계승을 일단락지을 수 있었다.

 

소수림왕은 죽음에 임박해서도 깔끔하게 일을 마무리지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고구려 제18대 제왕으로 등극한 담덕의 아버지가 바로 고국양왕(故國壤王)이다.

 

고구려에 새 국왕이 즉위하는 어수선 사이에 전진(前秦)에 의해 멸망했던 전연(前燕)을 모용수(慕容垂)가 재건하여 후연(後燕)을 세웠다. 모용수는 전연을 건국한 문명제(文明帝) 모용황(慕容皝)의 다섯번째 아들로 군사적인 재능이 출중하여 전연의 대장군으로서 혁혁한 전공(戰功)을 세웠던 중원 제일의 양장(良將)이었다. 그러나 조카인 경유제(景幽帝) 모용위(慕容暐)의 견제를 받다가 전진에 투항하여 세조(世祖) 부견(苻堅)의 신하가 되었다. 383년 세조가 동진(東晉)을 침공했다가 비수대전(淝水大戰)에서 동진의 명장(名將) 사현(謝玄)의 전략에 말려들어 대패하자 모용수는 자신의 병력을 이끌고 하북 지역으로 와서 유주(幽州)와 기주(冀州)를 차지하고 후연의 개국(開國)을 선포했다. 이 모용수가 바로 후연의 초대 황제인 성무제(成武帝)이다.

 

후연이 유주와 기주를 차지했다는 것은 고구려의 서쪽 변경인 남소성(南蘇城)이 위기에 빠졌다는 것을 뜻했다. 고국양왕은 385년 봄에 대사자(大使者) 아불파연(阿佛破然)을 군영사(軍營使)로 임명하고 대형(大兄) 모두루(牟頭婁)를 참좌(參左)로 삼아 4만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현도성(玄菟城)과 화려성(華麗城)을 공격하게 하였다. 이에 성무제는 대방왕(帶方王) 모용좌(慕容佐)에게 명령을 내려 고구려군을 막는 임무를 맡겼다.

 

모용좌는 본래 사치와 향락을 좋아하고 구중궁궐(九重宮闕)에서 호의호식(好衣好食)하던 사람이라 군사와 병법을 제대로 알지 못하였다. 아불파연과 모두루는 매우 손쉬운 전략으로 후연의 군대를 함정으로 끌어들여 보기좋게 격퇴한 뒤 현도성과 화려성을 함락시키고 후연의 백성과 병사 1만여명을 포로로 삼아 개선하였다.

 

그러나 고구려에게 당하고 가만히 있을 후연이 아니었다. 후연 최고의 명장으로 일컬어지는 모용농(慕容農)이 같은 해 겨울에 5만의 대군을 이끌고 고구려를 반격하여 현도성과 화려성을 다시 빼앗았던 것이다. 현도성과 화려성은 고구려가 서쪽 변경을 안정시키는 데에 반드시 확보해야 할 중요한 요충지였으므로 이 패배는 고구려 입장에서는 큰 타격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해가 바뀌어 386년 1월에 담덕 왕자가 태자(太子)로 책봉되었다. 담덕이 태자가 되면서 고구려의 왕실은 내실이 튼튼해졌으며 고국양왕이 형인 소수림왕을 닮아 병약해 언제나 우환덩어리로 남아 있었던 후계자 문제가 확고히 확립되었다.

 

담덕 태자는 부왕(父王)에게 조의선인(早衣先人)을 강력하게 활용할 것을 건의하였다. 그들에게 일반 병사들과 같은 훈련이 아닌 특수훈련을 시키되 사명감이 투철한 조의선인군을 좀 더 확대·개편해서 태자의 친위부대로 양병(養兵)할 것을 건의하여 고국양왕의 윤허(允許)를 받아냈다.

 

그 동안 담덕 태자를 따르던 5천의 조의선인군을 1만명으로 확대해 전투가 발발할 때는 언제나 앞장서서 공격하며 삼족오(三足烏) 깃발을 휴대하여 위용을 떨치도록 체계화시켰다. 일반 병사들보다 훨씬 어렵고 위험한 임무를 수행하는 사람들이기에 녹봉도 일반 병사에 비해 3배를 줘 보상토록 했다. 그리하여 산악전도 수중전도 언제나 조의선인군이 먼저 적진에 침투해 삼족오 깃발을 휘날리며 용맹스럽게 적군을 교란시켜 아군이 보다 쉽게 전투를 승리할 수 있게 했다.

 

담덕 태자는 이윽고 호어사대(護御使隊)의 호위를 받으며 조의선인 정예병을 합친 2천여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약연(藥演) 공주가 기다리고 있는 동부여(東扶餘)의 궁성으로 행차하였다.

 

담덕 일행은 평양성을 떠난 지 일주일만에 하무지(河茂祉) 선사(先士)가 있는 목단강(牧丹江)변에 무사히 당도했다.

 

일행이 멀리 보이기 시작하자 조의선인이었다가 하무지의 제자가 된 갈요(葛要)가 달려와 담덕 태자를 맞이했다. 그는 하무지가 담덕을 도와 국정(國政)에 참여할 수 있도록 설득하려는 목적에 의해서 자의 반 타의 반으로 하무지의 제자가 되어 그와 함께 그 곳에서 생활하고 있었다.

 

“태자(太子) 전하(殿下)! 경하드리옵니다.”

 

담덕 태자는 그를 끌어안으며 반가움을 표하였다.

 

“그래, 그 동안 선사님을 모시고 잘 지냈느냐? 그리고 선사님은?”

 

갈요가 뒤를 가리키며 말했다.

 

“저기 오시옵니다.”

 

갈요가 가리키는 쪽을 보니 과연 하무지가 말을 타고 달려오고 있었다.

 

“선사님!”

 

“태자 전하!”

 

오랜만에 만난 담덕 태자와 하무지는 기쁜 얼굴로 서로 마주 보며 달려갔다. 태자가 먼저 왼쪽 무릎을 굽히며 예를 표하였다.

 

“그간 강녕하셨습니까? 그 동안 사정이 여의치 못해 이렇게 늦게 찾아뵘을 너그럽게 양해해 주십시오!”

 

“전하, 어서 일어나십시오. 소인이 민망해서 고개를 들 수가 없나이다.”

 

하무지는 담덕 태자의 변함없는 성격과 인품에 새삼스럽게 감동하였다.

 

두 사람은 한동안 잡은 두 손을 놓을 줄 몰랐다.

 

“전하께서 저에게 소식과 물음을 주셨사옵고, 또한 중대사를 앞두고서 이 곳에 운둔하고 있는 저를 찾아 주시니 황공하옵나이다. 이는 전하께서 하늘이 내리신 일세의 영걸이 틀림없음을 증거하는 것이옵니다.”

 

태자가 혼례식에 앞서 하무지를 찾은 것은 그의 지략을 발판 삼아 고구려의 번영을 이루기 위해서였다.

 

앞으로 자신에 의해 천하의 중심이 될 고구려를 통치하는 패왕(覇王)이 되겠다는 야심이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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