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혼자 술 한잔 하다가 알코올로도 답답한 마음이 풀리질 않아서 넋두리처럼 글 써봅니다.며칠 전만 해도 전 약혼자가 있었습니다. 뭐 상견례도 하기 전이었지만 양가 부모님들 다 아시고, 날짜 잡기만 기다리고 있었죠. 그런데 그놈의 돈이란 게 뭔지.... 4년 연애가 허무하게 날아가 버렸어요.
전 30대 초반 회사원입니다. 전 남자친구와는 직장에서 만났고요. 대학은 명문대를 들어가긴 했지만 그 후로 방황을 많이 해서 휴학도 하고 대학원도 겨우겨우 졸업하는 바람에 사회생활 시작은 상당히 늦었습니다. 그래서 남친, 아니 이제 전남친이라 해야겠네요. 전남친과는 동갑이었지만 그 사람이 한참 선배였어요. 전 스펙도 좋지 않고 나이도 많았지만 운이 좋았는지 조건 상당히 좋은 직장이었습니다. 그만큼 일이 빡빡했어요. 일도 서툴고 대인관계도 서툴고 늘 말수 적고 무뚝뚝한 제가 어디가 그렇게 좋아 보였는지, 그 사람이 먼저 대쉬를 하더라고요. 처음엔 아무 감정도 생기지 않아서 난감했는데 어리버리해서 힘들어하는 저를 적극적으로 챙겨주는 다정함이 좋아서 결국 사귀게 되었습니다.
저랑 성격이 많이 달랐어요. 저는 표정도 늘 무뚝뚝하고 말도 필요할 때 외엔 잘 안하는 성격인데, 전남친은 남자 치고는 굉장히 애교도 많고 사람을 잘 챙겼어요. 저한테만 그랬으면 좋겠는데 주위 사람 누구한테다 다 그래서....... 솔직히 순탄하기만 한 연애는 아니었습니다. 뭐, 그래도 어찌저찌 해서 결혼 이야기까지 나오게 됐어요. 둘 다 나이가 적지 않으니 양가 부모님도 얼른 결혼하라고 성화셨고요.
그래서 며칠 전부터 서로 자금 상황을 오픈하고 집문제 등 계획을 짜고 있었어요. 저는 월 300 정도 법니다. 씀씀이가 크지는 않아서 부모님께 드릴 적금 80, 제 필요를 위한 적금 100, 제 생활비 50(집을 친구와 나눠쓰고 그 친구가 좀더 생활비를 많이 내서 별로 들지 않아요) 기타 저축 70 정도로 꾸려가고 있었습니다. 기타 저축에 몇달에 한 번씩 옷이나 화장품 등을 한꺼번에 마련하기 위해 따로 떼어두는 돈이 있었구요, 그 외 제가 키우는 고양이들을 위해 하는 저축이 있습니다. 고양이를 네 마리 키우거든요. 그렇게 정 깊은 주인은 아니예요. 네 마리씩이나 되는 것도 구구절절 사연이 됐지만 너무 길어지니 그냥 넘어가고...... 어쨌든 제가 거뒀고 제가 주는 밥 먹으며 자라서 이젠 밖에 내보내도 혼자 힘으로 살아가지도 못할 아이들이니 끝까지 제가 책임지고 싶었습니다. 평소에야 고양이한테 돈 별로 안 들지만 한번 아프기라도 하면 동물병원비 장난 아니잖아요. 치료하면 살릴 수 있는데 돈 때문에 안락사하고 버리고..... 그런 처지 되기 싫어서 마련해둔 돈이에요.
여기서 전남친하고 트러블이 생겼어요. 전남친은 제가 고양이를 좋아하고 키우는 건 알고 있었지만, 따로 저축까지 하고 있을 줄은 상상도 못했다네요. 너무 이상하대요. 맘이 좀 상했지만 그럴 수도 있다고 넘어갔습니다. 사정을 설명했어요. 끝까지 책임지고 싶어서 그런다고 말했지만 여전히 이해를 못하더군요. 결혼해서까지 계속 고양이한테 그렇게 돈 들일 거냐고 따지더군요. 저는 나도 결혼하면 돈 많이 들어갈 거 각오하고 있다, 만약 부족해지면 당연히 그런 돈들부터 줄일 거다, 그렇게 말했습니다. 전남친도 싸우기는 싫었는지 더 얘기 안하고 흐지부지 넘어갔어요.
그 다음엔 좀더 심각했습니다. 부모님께 드릴 적금 보더니 놀라더군요. 왜 이렇게 많이 쓰냐고.... 이것만큼은 저도 양보 못한다고 했습니다. 제가 20대 때 방황하면서 부모님 속 엄청 썩였거든요. 그닥 좋지도 않은 가정 형편에 대학원 가겠다고 고집 부려서 몇천만원 등록금 신세졌고, 거기다 제때 졸업도 못하고 빌빌대면서 걱정 많이 끼쳤어요. 뒤늦게 철들고 나니까 부모님이 너무 짠하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첫 월급 받자마자 한 일이 부모님께 돈 보내드리는 거였고, 적금 들고 어느 정도 모아서 바로 한 일이 부모님 소원이셨던 해외여행 보내드리는 거였어요. 80만원 적금은 행여 부모님 노후자금 모자랄 때 대비이기도 했지만 그렇게 가끔씩 제가 효도하고 싶을 때 쓰기 위한 돈이었어요. 물론 결혼 후까지 적금 부을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 안했습니다. 중간에 쓸 때도 있었지만 부모님도 처음 한 번 외에는 제가 여행 보내드린다 해도 무슨 사치냐며 손사래 치셨고, 제가 용돈을 드려도 제 결혼자금으로 고스란히 모아두시고 안 쓰셔서 5년 동안 모인 적금은 상당한 액수였어요. 저는 결혼 후에는 어차피 지금처럼 용돈 많이 드리지도 못할 테니, 이 적금은 부모님께 드리고 갈 거라고 했죠. 부모님도 제 결혼에 어느 정도 보태주신다고 하셨으니까요.
전남친은 좀 툴툴대더군요. 그렇게 큰돈 드릴 필요가 있느냐는 식으로. 이때는 정말 기분이 안 좋았지만 남이니까 그럴 수도 있겠지 하고 참으려 애썼습니다. 정작 본인은 자기 부모님께 1억 드릴 거라고 자랑했으면서...... 그런데 며칠간 계속 결혼계획 얘기할 때마다 지나가는 말 식으로 트집을 잡는 겁니다. 집값 모자랄 텐데 그거 보태면 안되냐, 장인장모님 어차피 그 돈 자기한테 되돌려 주실 거 아니냐, 이런 식으로......... 너무 짜증이 났습니다. 그러면서도 자기 부모님이 집 해주신다고 했으니까 나도 돈 많이 드리고 결혼할 거다 계속 이러는 거예요. 어차피 그 아파트 절반은 대출이고 나머지 돈도 상당 부분 전남친이 모은 돈에서 나가는 걸로 했는데...... 큰 아파트도 아니고, 저도 부모님이 보태주시기로 한 돈에 제가 모은 결혼자금 더하면 전남친이 집값에 쓰기로 한 돈과 그다지 차이도 안 났습니다. 그런데도 계속 자기가 이해해주고 손해본다는 식으로 물고 늘어지니까 정말 정나미가 확 떨어졌습니다.
그래서 큰맘 먹고 얘기를 했어요. 내 부모님 계속 물고 늘어지는 거 정말 기분 안 좋다, 내가 내 욕은 참아도 부모님 욕 못 참는 사람인 거 잘 알지 않느냐, 당신은 당신 부모님은 애틋하게 생각하면서 내가 내 부모님 생각해서 내 돈 쓰는 건 아깝다는 식인 것 같다, 계속 이런 식이면 차라리 난 결혼 안하겠다 이렇게요. 진짜로 계속 이러면 차라리 파혼이 낫다고 생각했습니다. 결혼해서도 계속 속 썩일 테니까요.
전남친은 일단 알았다고 하더라고요. 사과는 안 했지만..... 그래도 이해는 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날은 그렇게 넘어갔는데..... 며칠 후에 전화해서 그러더라고요. 진짜 지금 생각하면 웃음만 납니다.
"oo아, 우리 부모님 결혼 전에 해외여행 한번 보내드리고 싶은데 돈이 좀 모자란다. 너 그 적금에서 보태주면 안 될까?"
와...... 그 순간 꼭지가 돈다는 게 뭔지 실감했습니다. 제가 보태주면 좋겠다도 아니고, '그 적금'에서 보태라니. 차라리 그냥 보태달라고 했으면 어차피 미래의 시부모님이니 조금 찜찜하긴 해도 보탰을 겁니다. 그런데 며칠 동안 내가 파혼을 각오하고 그 돈이 제게 어떤 의미인지 설명했는데....... 진짜 뭐 이런 놈이 다 있나 싶더라고요.
전남친 저보다 훨씬 잘 벌어요. 입사도 저보다 훨씬 일찍 했고 능력 좋다고 인정받아서 승진도 빠릅니다. 부서가 약간 다른데 성과급이 더 많아서 저보다 최소 100은 더 받는 거 같아요. 성과급 많이 나올 때는 그보다 더 받는 때도 많고요. 치장에 관심이 많아서 옷에 돈도 많이 쓰고(전 남자들 슈트가 여자옷보다 훨씬 비쌀 수도 있단 걸 전남친 통해 알았네요) 손에 드는 서류가방 하나도 최소 십몇만원 중급 정도 브랜드는 들고 다닙니다. 제 눈에는 낭비로만 보이는 큰 차도 몰고 다니고요. 그래도 나름 저축 잘 하고 자기 벌이에서 쓰니까 아무 말 안 했어요. 그런데 자기 부모님께는 돈 쓰는 걸 거의 못 봤습니다. 명절이나 생신 때 적당한 선물 해드리고 땡이었어요. 그런데 느닷없이 해외여행이라니, 그것도 '내 적금'에서 보태서??
고래고래 악다구니를 하고 전화를 끊어버렸습니다. 좀 황당해하는 거 같았는데 나중에 카톡으로 그러더군요. '니네 부모님한테 쓰는 건 안 아깝고 우리 부모님한테 쓰는 건 아깝냐?' 손이 부들부들 떨려서 간신히 답장 보냈어요. '그래서 니는 그 애틋한 부모님한테 남의 돈으로 효도하려 드냐? 니 치장에 쓰는 돈 조금만 아꼈어도 될 거다' 며칠 머리 식히고 만나서 얘기를 했는데도 도무지 접점이 없더군요. 어차피 공식화된 건 아무것도 없겠다, 결국 제가 엎었습니다. 그런 결론 이르기까지 참 마음 상하는 말도 많이 주고받았지만 길게 쓰고 싶지도 않아요. 결국 끝난 일이니까.
.......이게 며칠 전까지 제 심정이었습니다. 여기서 끝났다면 좋았을 텐데.
며칠 후에 회사를 가니 사람들 시선이 뭔가 좀 이상하더라고요. 친한 후배 하나가 얘기해 줬습니다. 고양이 때문에 파혼한 거 사실이냐고. 고양이한테 몇십만원씩 돈 쓰고 결혼 후에까지 계속 그럴 거라기에 못 견뎌서 엎었다, 이렇게 전남친이 동네방네 말하고 다녔더군요. 진짜 지금까지도 어이가 없어서 웃음만 나옵니다.
그래서 저도 후배를 비롯한 사람들에게 다 까놓고 얘기해 줬습니다. 실은 이러저러해서 파혼한 거다, 뭐 제 편 들어주는 사람도 있고 그래도 서로 양보하고 살아야지 하시는 선배님들도 있고..... 그리고 전남친은 찌질한 놈이 되었죠. 나이 많은 상사들한테 혼도 났다더군요. 지딴엔 분했는지 욕 담은 문자 폭탄을 선물해 주더군요. 깔끔하게 차단해주고 말았습니다.
며칠 전 일인데...... 미련은 신기하리만큼 별로 없는데, 그냥 씁쓸합니다. 마지막에 꼭 그랬어야 했는지 싶어요. 깨지더라도 좀 깨끗하게, 적어도 4년 기억 더럽히지 않고 끝냈으면 싶었는데. 허탈하기도 하고, 부모님께는 어떻게 말씀드릴 건지 아득하고, 좀 그러네요.
재미도 없는 넋두리 하다 보니 쓸데없이 글이 길어졌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