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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영화, 한글자막 그까이거 그냥 넣어줘!

비에젖지않... |2012.03.02 11:57
조회 16,178 |추천 213

나는 청각장애인이다. 양쪽 귀가 105데시벨이며, 보청기를 빼면 기차 경적소리를 겨우 듣고,
보청기를 껴도 사람들이 하는 말을 잘 못 알아듣는다.

1대1로 입모양을 보면서 겨우 알아듣는 수준이고, 수화로 대화할때가 가장 편하다.

 

어린 시절, 내게는 세상과 말하는 방법을 터득한 것은 '외국영화'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외화의 한글자막을 보면서 사람들이 어떻게 대화를 하는지 감정표현과 미세한 표정, 제스츄어 등등.
만화책도 정말 많이 보았다. 그냥 심심해서가 아니라, 만화속의 캐릭터들이 나누는 말풍선 속의 대화내용들이 내가 생활에서 대화하는 방법에 어느정도 도움을 주기 때문이다.


가끔 만화에 나오는 대로 말하고 행동하다가 엄마한테 맞을뻔했지만...
뭐. 나름 웃기겠다고 영화에 나온 대사대로 말했다가 아버지한테서 현실과 비현실을 구분하라는 소리도 들었지만...
여튼 좋은 영화와 만화를 더 많이 봐서 지금 건전하게 잘 자랐다.;;

 

70년대 후반에 태어난 나는 TV에서 한국말로 말하는 모든 프로그램은 한번도 보지 않았고,
오직 한글자막이 나오는 외국영화, 외국드라마만 보았다.
뉴스도 보지 않았다. 신문만 보면서 세상의 이야기를 어느정도 파악했다.
조금더 자라서 극장에 갈 나이가 되었을땐, 한국영화는 눈거들떠보지도 않았다.

 

훌륭한 한국영화도 많았을텐데...자막이 나오지 않으니까 돈주고 한국영화를 보기엔 너무 아까웠던 것이다.
일부 극장에서는 복지할인을 해주긴 하지만 그렇다고 고맙다는 생각이 별로 들지 않는다.
그것보다는 한국영화에 한글자막을 넣어주는것이 청각장애인에게 있어서 도움이 되는 복지혜택인거 같다.
한국사람의 정서는 외국영화보다 한국영화에 더 많이 배여있지 않은가?
나는 한국사람이므로 한국정서가 물씬 풍기는 한국영화를 많이 보고 싶다.
사람이 많은 극장에서 모두가 함께 울고 웃고, 파도타기처럼 희노애락을 느껴보고 싶다.

 

20년만에 만난 초등친구와의 데이트(?)날 잊을 수 없다. 8.15광복절특사를 보고싶다는 남자친구.
영화 내내 멀뚱멀뚱...계속 졸았다.
영화 끝나고 나서 같이 식사를 하며 특정장면에 대해 이야기해대는데, 뭔소리하는건지...쩝.

영화볼때 웃어야 할 상황에 혼자 무표정, 다른 사람들이 울때 혼자 무표정.
이건 내가 생각해도 민망하다. 뭐..상황을 알아야 울고 웃지.

 

영화본다는것은 기본적인 문화생활이다. 가장 저렴하고 건전하게 즐길수 있다.
친구들과, 또는 데이트, 또는 가족과 함께 영화본다는 것은 즐거운 문화생활이다.
사람들과 부대끼며 살아갈때 '문화향유'란 사회속에 참여할수있는 첫번째 발걸음이다.
문화를 향유할수 있다는 것은 곧 장애인의 삶의 질 개선과도 일맥상통한다.

 

가끔 디브디로 출시되는 한국영화에 한글자막이 삽입되는 경우가 있는데,
한국영화 개봉될때마다, 내 주변사람들은 '아, 자막없어서 불편하겠다. 디브디 나올때까지 기다려봐.' '한국영화 자막 삽입된거 불법 다운받아서 받아봐봐'

그래도 되는데, 사실 귀찮다. 시도는 해봤는데 진짜 귀찮다.
극장 가서 영화 보는게 제일 좋다. 신상 영화. 나 너무 좋아한다.

 

굳이 음지(?)에서 몰래보듯 혼자 방안에서 디브디로 한국영화보기엔 너무 맛이 없다.
사실 지금까지 한번도 디브디로 영화를 본 적이 없다.
내가 유일하게 극장에서 한글자막으로 본 한국영화는 '왕의 남자', '글러브'이다.


'왕의 남자'의 경우는 자막상영된다는 소식에 서울까지 올라가서 봤다. 와! 그 시원함! 이루 말할수 없다.

극장 내 빼곡하게 앉아서 비장애인과 청각장애인이 동시에 함께 웃으면서 또 함께 눈물 흘리면서 본 '왕의남자'..

그 순간 나는 '장애'가 무엇인가? 우리 모두는 평등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내가 청각장애인이라는 사실을 망각할 정도였다.


청각장애인 야구부를 주제로 만든 실화영화인 '글러브'는 영화주인공이 청각장애인이기에

자막 안 넣으면 청각장애인들에게 욕먹을 상황이니 신경써서 넣어주었는데,

아쉽게도 일부(cgv) 극장에서만 그것도 제한된 시간대(평일 낮)에서 상영됐다.

근무가 끝나는 시간대에 볼 수 없으니 반차 휴가까지 써가면서 극장에 가서 보고왔다.

아! 평일 저녁에 상영못하면 주말에라도 상영해줬으면 좋았을건데.

한국영화 한편 보겠다고 피같은 휴가까지 써가면서 보고왔다는 이 얼마나 어이님이 상실되고 비참님이 와버릴까? 숨차다!

 

그저께도 퇴근후 간만에 영화가 너무 보고싶어서 극장에 후다닥 달려갔다.
내가 좋아하는 엄정화씨가 나오는 '댄싱퀸' 보고 싶었는데, 매표소에서 딱 10분 고민했다.
상영시간대를 보니 80%가 모두 한국영화다.
우왕! 한국영화 짱!....이긴 뭐가 짱이야? 자막도 안 나오니 내겐 그림의 떡인데..ㅠ

 

아아! 한글자막도 없는데 댄싱퀸을 봐도 아무 감흥이 없을거 같아서

돈만 아까울거 같아 미국영화 '세이프하우스'를 보았다.

너무 아쉬워서 엄정화씨 트위터에도 자막없어서 못봤다고 멘션도 날려주었다. 엄느님이 보셨나모르겠다.

 

 

사람들과 부대끼며 함께 영화를 보고 싶다.
혼자 살아가는 내가 아닌, 모두와 함께 살아가고 싶은 소중한 '나'이니까.


유투브가 동영상에 한국어-중국어-영어 자막 캡션기능을 넣어준단다.
아주 쪼그만 땅덩어리를 가진 한국! 전세계에 200여개이상의 나라가 있는데
유독 한국어 자막캡션을 넣어준다는데 오! 유투브! 왠일이야!

한국이 인터넷 강국이라서인가. 스마트한 시대다!


대한민국아! 한글자막 그까이꺼 그냥 넣어줘! 30만여명의 청각장애인들 기뻐한다.
한글 창제한 세종대왕도 흐뭇해 하실거야~ ^^

 

 

 

 

 

추신 : 장애인도 영화 좀 보자! 100일 1인시위가 다음주부터 시작한대요.

 http://www.facebook.com/events/2390347761902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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