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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경은님 말이 맞다. 안티는 불교다.

ㅋㅋㅋ |2012.12.27 01:19
조회 119 |추천 0

이집트 창조신화와 그리스로마신화와 유사한 바이블이라는 것은
명동교자와 명동칼국수를 생각해보면 답이 나오는 것을 너무 어렵게 생각하는 분들...
아무 생각 없이 유사한 칼국수..
그렇다면 교자가 명동칼국수를 베꼈다는 논리.. 문제가 있습니다.

붓다의 행적과 예수의 행적이 같다는 것...
붓다의 행적이 유사한 것이 있는지..
오히려 오병이어는 구약시대의 기적과 유사함......
붓다는 죽어서 무덤에.. 뭐가 비슷하다는건지..
예전에는 이사전으로 사기치더니..

불경과 코란은 인명과 지명이 거의 없음..
성경의 인명지명은 족보보다 더 철저함..
성경 안읽은 분들이 안티하다니..
나는 불경 코란 다 읽어봄..
세개 펴놓고 인명 지명 조회해보삼..

성경의 역사적 증명이라는 것은 역청뿐 아니라..
노아의 방주. 아브람 시대의 유적. 성경 전체에서 나오는 사건을 지지하는 유적을 총망라..
불경은? 하늘에서 용이 대려와서 대화를 했다고 함..
헐.. 게다가
천상천하 유아독존은 어떻게 처리를 해야 할지.. 원..

내가 추적하고 조회해봐도 불교신자들이 모두 기독교 안티함
의심나면 직접 조회해보시길..
참고로 노무현과 같이 불교신자들은 무교신자로 말하고 다님

전과자가 목사가 되어도 조계종사태처럼 95% 의 전과자가 한기총을 구성하지 않는다.

 

참고블로그 : 비판불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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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 박사님들 다음 내용에 답변을 부탁

 

불교의 타락과 고려의 멸망.


고려말기의 타락한 불교의 사치로 말미암아 국가의 재정은 바닥나고 혼란을 틈타 무신의 난이 일어나 줄줄이 고려가 망해가는 정황에 대해 살펴본다.

현종때의 불교의 타락

현종은 22년동안 재위한 인물인데 당시의 승려들은 불사를 빙자하여 각종 비리를 저질렀는데18년에는 양주 청윤사의 스님이 쌀 360여 석으로 밀주를 만들다 처벌을 받는가 하면, 처자와 함께 사는 승려들도 많아서 이들을 징발하여 중광사에서 노동을 시키기도 하였다.

연세대학교 출판부, 한국종교사상사 1권 불교 도교편, p76

문종때의 불교의 타락

문종은 신하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흥왕사를 창건하였다. 그러나 동 10년에 내린 교서를 보면 노역을 회피할 목적으로 출가해서 금리사업 및 농축업을 하는 승려들은 모두 환속하고, 사원 내에서는 계행이 청정한 자들만이 안주하도록 칙명을 내렸다. 이것은 이미 당시에 불교계의 곳곳에 타락의 징후가 만연되어 있었다는 반증이 될 수 있다. 왕의 칙명은 다음과 같다.

"지금 노역을 피하는 무리들이 사문이라 칭탁하면서 고리대금을 하거나 논밭을 경작하고 가축을 키워서 생계를 꾸리는 자들이 있노라. 긴 소매는 술먹고 벌거진 얼굴을 가리기에 급급하고, 물건을 사고 파는가 하면, 여염집에 출입하면서 민간인과 싸움을 벌여 피를 흘리게 하는 일도 있도다 . "

연세대학교 출판부, 한국종교사상사 1권 불교 도교편, p 78

의종때의 불교의 타락

의종은 기복적 불사를 매우 즐긴 인물이다. 그는 해마다 대규모의 반승법회, 각종 재앙을 물리 치려는 소재도량 등을 개설하였다. 그러나 이와 같은 분위기에 편승하여 거짓 출가하는 이, 또는 불문에 의탁하여 권세와 영화를 누리려는 이들이 많이 생겼다. 각 사찰은 다투어 대형 불사를 일으켰기 때문에 그 폐해는 이루 다 형언할 수 없을 지경이었다.

왕은 즉위 5년(1151) 되던 해 가뭄이 심해서 7일 동안 용왕도랑을 지냈고 보제사에서는 오백나한재를 개최하였다 11년 정원에 나라에 근심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태사의 진언에 따라 영통 경천 등 다섯 개 절에서 항상 불사를 시행토록 명령하였다. 또 국청사 · 경천사 · 관정사 · 총지사 등에 직접 행차하여 재앙을 소멸하는 법회를 열기도 하였다. 왕의 과다한 불사는 결국 재정의 궁핍을 초래 하였고, 불교 의례의 대형화를 만들어 갔다. 그에 관련된 몇 가지 사료를 뽑아 본다.

14년 보현사에 행차하여 스님들에게 골양을 베풀었는데, 그 때 30근의 은병을 만들고, 그 안에 각각 5향과 5약을 담아 절에 헌납하였다. 또 왕은 사찰에서 주연을 베풀기도 하였는데, 어느 때는 만취되어 추태를 부리기도 했다. 18년(1174)에는 예종의 궁녀 소생인 왕자 각예의 주연에 참석하였다. 그는 법천사에 주지로 있었던 사람이다. 왕 자신이 이렇게 황읍무도한 불사를 치루었기 때문에 신하들도 또한 그런 일을 본받기도 하였다. 즉 개국초에는 엄격히 규제했던 원당을 갖는 일이 비일비재해지게 되었다. 내시시랑이었던 길돈중 형제가 관란사를 원당으로 삼은 일, 한정이 인제원을 원당으로 삼은 일 등이 그것이다. 그들은 기암· 기화로 절을 장식하는 등 호화형으로 사찰을 꾸미고, 은밀히 자신들의 주연 장소로 삼는 일이 많았다. 따가서 사찰의 사유화 현상이 생겨나게 되는 등 폐해가 극심해가게 된 것이다.

20년(1166) 불탄일에 왕은 연등회를 베풀었다. 밤에는 앞서 말한 각예가 마련한 주연에 참석하였다. 22년 3월에는 서경 관풍전으로 행차하였는데, 하교를 내려 1교6조를 지키도록 하였다.

무신의 난을 가져온 불교의 타락

그것은 숭중불사 · 봉순음양 · 귀경사문 · 보호삼보 · 준상선풍 · 구휼민물의 6조이다. 즉 불사를 존숭해야 한다는 내용이 담긴 일종의 불교 장려 정책 이었다고 있다. 이와 같은 경향은 만년에 이르러 더욱 심해지는 경향을 띄운다. 24년에는 영통사에 행차하여 화엄회를 개설했을 뿐 아니라, 친히 소를 지어 문신들에게 보였으며, 백관은 이를 칭송하였다. 그의 행각은 많은 백성들의 외면을 당하게 되고, 끝내 무신에 의한 정변으로 최후를 맞게 된다.

원래 무신란은 정중부로부터 비롯된다. 그러나 성품이 원만치 못했기 때문에 이준의 이의방 형제에 의하여 거세된다. 이의방 형제는 어린 명종을 옹립하고 권력을 장악하였 지만, 또 곧 내분에 휩싸이게 된다. 이후 최충헌이 등장하면서 드디어 고려 정부는 무신에 의하여 운영되기에 이른다. 당시의 국교는 불교였기 때문에 무신정권은 불교게의 협력을 필요로 하였다.

불교계의 싸움에 의해 어지러워진 고려

대체로 선종 계통의 교단은 무신정권과 친화적이었으나 교종의 교단은 크게 반발하였다. 그 때문에 무신정권 수립 이후에 불교계와의 마찰은 끊이지 않았다. 어떤 때는 대규모의 병력을 동원하여 쌍방이 내전을 방불케 하는 전쟁을 치룬 적도 한 두 번이 아니었다.

이와 같은 정세는 몽고의 병란으로 고려 조정이 와해될 때까지 지속되었다.

명종 윈년(1171)에는 덕소를 왕사로 삼았다. 4년 정월 승도틀의 반란이 있자, 귀법사의 승려 백여 명은 성의 북문을 공격하며 당시 무신정권을 옹호하는 입장이던 승록 언선을 죽였다. 이의방이 일천여 명의 군대를 이끌고 승려들을 학살하였다. 또 중광 · 홍호 · 귀법 · 홍화사 등지의 승려 이천여 명이 동문에 모였을 때, 이의방은 그들과 싸워 벽여 명의 승려를 참살하였다.

그 때 관군도 다수 희생되었으벼, 이의방은 성문을 굳게 닫고 승려들의 출입을 금지 하기도 하였다. 이와 같은 대규모의 집단적인 항명은 무신정권에 대한 불교계의 반발로 이해할 수 있다. 즉 교종계는 무신정권에 대해 대립된 입장을 갖고 있었다.

5년 4월 칙명으로 사원에서의 주연과 사치를 금하였다. 이 때부터 금과 은 등으로 불상온 조성하는 사치로운 불사는 다소 진정되기 시작한다. 11년에는 사경원이 불탔다. 전왕의 유언에 따라 은자 대 장경을 사경하던 중, 이』재물을 훔치기 위 하여 방화한 자가 생겨났던 것이다.

명종 말기에 이르러 최충헌· 충수의 형제는 무신정권의 대부로 등장히게 된다. 최씨 형제는 집권 초기부터불교에 대한 폐해를 시정하려는 정책을 수립한다. 당시 왕자의 신분으로 승려가 된 이들이 다수 있었는데, 그들이 왕궁에 머물면서 청사에 가담하는 일이 그르다고 하여 모두 본사로 돌려 보낸다. 그 때 강제로 퇴궐을 당한 왕자 승려들은 홍기· 흥추· 흥규 · 홍조· 홍각· 흥태 등 7인이었다 또 왕의 총애를 받던 운미는 강제로 속퇴시켰다. 27년에 최충헌은 흥왕사를 참배하려 했는데, 익명의 투서가 날아들어 요일과 두경승 등이 암살 계획을 꾸민다고 제보하므로 행차를 멈추었다. 그 해에 최충헌은 명종을 폐위시키고 신종을 옹립하였다. 이와같이 권좌가 피로 얼룩지고 끝없는 알력이 되풀이 되는 동안에토 불교계에는 별다른 변혁이 없었다. 임금들은 반승만을 되풀이할 뿐이었고, 불사의 대형화 · 사치화 경향도 좀처럼 수그러들지 않았다. 이와 같은 것들이 원인이 되어서 고려의 중기 이후에는 서서히 배불의 기운이 감돌기 시작한다. 물론 국교로서의 튼튼한 사회 분위기 때문에 본격적인 움직임은 표면에 들어나지 않는다. 다만 승려들의 타락 · 불교 의례의 폐해 등에 관해서 조심스럽게 논의를 진행하고 있었다. 또 신종 이후에는 북방으로 몽고의 침입이 잦아지면서 사회 분위기는 피해의식과 혼란의식이 가중되어 더욱 어수선한 분위기를 만들어 가고 있었다.

연세대학교 출판부, 한국종교사상사 1권 불교 도교편, p 84-87

고려는 고종 이후부터 몽고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국가 재정의 손실을 가져온 불사

충선왕은 불심이 남달랐던 군왕이었는데 그는 상왕이 된 후
연경궁에서 이천 명의 스님들에게 반승을 베풀고 연등
이천개에 불을 밝혀 닷새 동안 연등제를 베풀었다.

그 때 불전에 은병 1백개를 시주하고 선종의 충탄 교종의
효정을 모셔서 설법을 들었다. 왕은 두 스님에게 백금
한 근씩을 각각 하사하고 그 법회에 동참한 이천여 명의
스님들에게 백금 20근을 분배해 주었다. 왕은 또 108만의
연등에 점화하리라는 발원을 하였다. 그래서 하루 이천 명의
중들에게 닷새동안 공양재를 베풀어 1만의 중들을 채우고
또 1만 등을 점화하였다. 이것을 만승회라고 불렀는데 매달 그 만승회를 반복 시행하였다.

그 재정의 손실은 막대한 것이었으며 그에 따른 피해 또한 적지 않았다.

충선왕은 의종 이래 기복적 불사를 다시 일으킨 대표적 임금이라 할 수 있다.

연세대학교 출판부, 한국종교사상사 1권 불교 도교편, pp 102

배불론의 발전 과정

고려 후기의 배불론은 일정한 단계를 가지고 있다고 보여진다.
즉, 고려 초기에는 불교 행사의 과도한 내용을 비판하는 면이 두드러지고 중기에 이르면 불교와 유교의 지향점이 다르기 때문의 세속의 도로는 불교가 적합치 않다는 면 등이 강조된다. 그러다가 후기에 이르면 불교의 교리 자체가 허무적멸이라는 교리 비판의 단계에까지 이르게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은 배불론의 배경에는 과다한 불사가 주인으로 꼽히겠지만 승려들의 타락 등 현실사도 무시 못할 배불의 명분이 된다.

선근 스님의 간통 사건

공민왕 4년에는 선근이라는 스님이 왕의 총애만을 믿고 매력적인 선비의 처와 간통한 사건이 있었다. 이 때 사헌부에서 그의 죄를 논증하자 방자하게 군 기록이 고려사(공민왕조)에 나온다.

연세대학교 출판부, 한국종교사상사 1권 불교 도교편, p105

신돈 승려

14년 노국 공주가 죽자 공민완은 비탄에 잠겨 정사를 신돈이라는 노비출신의 파계승에게 맡겼다.
이 때부터 고려의 국정은 겉잡을 수 없이 피폐에 빠지게 되었으며 불교 또한 사양의 길을 면치 못하였다.

당시 불교를 비판하는 정몽주의 상소문

"유교의 가르침은 모두 하루하루의 평상 일을 바로 하라는 것입니다.
먹고 마시는 모든 일과 남녀의 구분이 없이 일상사가 바르게 되어야 함을 역설할 따름입니다. 그러나 불교는 그렇지 않습니다.
홀로 암혈에 앉아 초식으로 연명하며 공적의 이치를 깨달을 것을 강조하니 어찌 평상의 도라 할 수 있겠습니까?(고려사)

고려의 멸망

고려 최후의 왕 공양왕의 때에 성균관의 유학자들은 격렬한 배불의 상소문을 올렸다.
성균관 대사성 김자수, 정당문학 정도전, 이조판서 정총 등은 장문의 상소를 올렸다. 그 내용은 주로 당나라 한유의 배불론을 인용한 것으로서, 불교가 인륜을 망각한 無父無君의 교라는 것이다.
출가를 하면 부모를 여의어야 하고, 국가에 충성할 수도 없다. 따라서 인륜의 도를 어기고 무위적멸을 일삼는 불교는 백해 무익이라는 주장이다.

덧붙여서 사탑의 건립은 재정의 궁핍을 초래하게 되며 그 폐해가 막심하다는 내용도 포함되어 있다.

4년에는 일본 조정이 대장경을 헌납하도로고 요청하였다. 그해 7월 드디어 공양왕은 이성계에게 왕위를 선양하였다. 이로서 고려 5백년은 막을 내리고 조선 정부가 들어서게 된다.
조선은 국시로 억불숭유를 내세움으로써 전대미문의 불교 탄압이 시작되는 것이다.

위 내용은 연세대학교 출판부, 한국종교사상사 1권 불교 도교편을 그대로 인용한 것

교과서에서 말하는 고려의 멸망 원인

나라 안
㉠ 공민왕의 개혁 실패
고려 말기에 몽고(원나라)의 간섭으로부터 벗어나려는 공민왕의 개혁 정치가 귀족들의 반대로 실패했다.(불교의 타락으로 국가가 힘이 없어서 간섭을 받게 되었다는 사실은 빠져 있음)
㉡ 친원파와 친명파의 대립
옛날 귀족들과 새로 과거에 급제하여 중앙에 진출한 신진 세력 사이에 대립이 생겨 정치가 어지러워졌다.(정치는 예나 지금이나 항상 어렵고 대립 가운대 있으므로 주 원인이 될 수 없음)

나라 밖
㉠ 중국 땅에는 원나라가 쇠퇴하고 새로 명나라가 일어나기 시작하였다.(원이던지 명이던지 나라가 약하면 침략을 받고 나라가 강하면 침략하는 법)
㉡ 북쪽의 오랑캐와 남쪽의 왜구들이 자주 침략하였다.(불교 타락으로 나라가 대항할 힘조차 없었음)

 

불경과 성경은 매우 다릅니다.
성경은 일점일획도 고칠 수 없으나, 불경은 만점 만획도 첨가할 수 있습니다.
누구든지.. 트랜스포머입니다.

 

세르게이 토카레프가 지은 "세계의 종교"라는 책의 내용

[극락은 본래 없던 것]

이 열반이라는 실제적 이상상은 현학적 철학자들과 명철한 지성인들에게는 매력적이었지만, 대중들에게는 그다지 분명한 것이 되지 못했다. 대중들은 보다 심정에 직접 와닿는 무엇인가를 원했다. 따라서 대승불교는 본래 불교에는 전혀 없던 극락이라는 곳에 대한 교설을 전개시켰다.
불교도들은 극락이라는 것에 덧붙여 지옥이라는 관념도 고안해 냈다. 신자들은 불법을 어김으로써 지옥에 떨어진 죄인들이 겪는 무시무시하고 현학적인 고통의 이야기에 완저히 겁에 질려버렸다. 대승불교가 여러 나라로 광범위하게 퍼져나간 것은 이러한 불교의 유연한 형태를 통해서였다.

불경은 성경과 달리 아무나 추가해서 계속 넣을 수가 있다. 그래서 중국을 거치면서 계속해서 불경은 늘어났으며 8만 대장경도 모자랄 정도로 많아지게 된 것이다. 불교는 계속해서 종교화 되었다.

[인간부처가 신으로 대접받게 된 배경]

대중들은 보다 쉽고 넓은 길을 필요로 했다. 신 또는 신들이 없는 종교는 대중들에게 다가갈 수 없었다. 즉 신자들은 신이나 신들을 요구했던 것이다. 그래서 대승불교는 불교의 창시자인 고타마를 지혜의 스승이던 위치에서 하나의 신으로 격상시켰다. 따라서 점차 불타에 대한 숭배가 발전되어갔다.

인도불교의 역사라는 책을 보면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대승불교에는 원시불교에서 볼 수 없었던 협잡물이 포함되어 있다." (17페이지)
"불교는 힌두교화가 끊임없이 이루어졌다." (18페이지)

[불교에 주술이 생긴 이유]

대승불교 속에는 처음부터 주술적인 요소가 많았는데 이것은 민중의 종교적 요구에 부응하기 위해서는 부득이한 것이었다.
여기서는 이미 "반야경을 수지함으로써 위난을 면할 수 있다." 고 강조되고 있으며 관음보살을 신앙함으로써 모든 재해를 면할 수 있다. 고 설해지고 있다. 이러한 주술적인 요소가 우세해서 밀교(주술적인 불교의 일종으로 한국에 뿌리내렸음)가 왕성해 졌다. 한국 불교에서 밀교를 빼놓고는 불교를 이야기할 수 없을 만큼 곳곳에 뿌리내린 것 또한 사실이다 ("인도불교의 역사" 히라가와 아끼라 지음, 민족사, 17)

[불경은 온전한 석가모니의 가르침이 아니다]

불타(부처)가 입멸한 후 가르침이 수집되었다. 이것들은 기억에 의해 전래되었기 때문에, 전승되는 동안에 제자들의 이해나 해석이 부가되고 증보되어 불가피하게 옛 가르침이 변화하게 되었다. .. 가장 변형되지 않은 아함경 조차도 불타의 가르침 그대로가 아니다.
(인도불교의 역사 상, 민족사, P59)

[불경의 과장된 이유]

대승불교 속에는 처음부터 주술적인 요소가 많았는데 이것은 민중의 종교적 요구에 부응하기 위해서는 부득이한 것이었다. 이러한 주술적인 요소가 대승불교속에서 점차 우세해져 AD6세기 경부터 차츰 밀교가 왕성해 지는 것이다. (인도불교의 역사, 민족사, 17)

불타가 살았던 시대와 용수의 시대 사이에는 많은 교리들이 가지를 치면서 발전하였다. 교리들의 일부는 불타의 최초의 설법에 대한 나름대로의 해석에서부터 나타난 것이며(주관적인 1차 변형), 또 그 중 일부는 불타가 걸었던 도정을 힌두교의 여러 형이상학적 교설과 대비하려는 노력에서 비롯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전개는 불타가 본래 의도했던 바를 위기에 빠뜨리는 결과를 초래하였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다. ("불교의 공과", 하나님 한스 발덴펠스, 서울:대원정사, 1993.)

[가공된 불교의 전설]

불교의 기원은 불분명하다.
가장 오래된 불교의 전설(과장되기 전)들은 이 종교의 교조인 불타가 자신의 교리를 가르쳤던 역사적 인물이라고 한다. 후에 순수하게 가공된 전설은 불타를 위대한 신으로 묘사했으며, 그의 탄생과 삶에 관련된 기적들과 그의 전생들에 대해 얘기한다.

세계 최초의 불교서적 "삼장"에 따르면 후대의 전설적인 문학과 같이 초자연적인 내용들을 전혀 담고 있지 않다. (부처의 생애만 있음) 후대에 문학적인 수식이 첨가되었으므로 모든 말을 곧이곧대로 믿는다면 그것은 커다란 오류가 될 것이다. 가장 올바르게 이해하는 방식은 불교의 창시자를 역사적 인물로 인정하면서도 동시에 다음의 사실을 받아들이는 학자들의 태도일 것이다. 즉 그의 삶에 관해서는 거의 알려진 것이 없고, 그에 관한 수많은 전설도 믿을 만한 것이 못되며, 오히려 그 전설들은 부분적으로 어떤 일정한 모양에 맞추어 구성된 것이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태도이다. (세계의 종교, 세르게이 토카레프 지음, 한국 종교연구회 옮김, 사상사, 1991)

[고승들이 인정]

김모씨의 고승과의 대화에서 질문은 다음과 같습니다. 타 종교의식을 모방하면서 왜 불교를 옛날처럼 변질시키고 있습니까? 고승의 대답을 들어 봅니다.

1. 불교와 타 종교와 핵심사상(무신론사상, 유일신사앙)이 완전히 다른 종교이지만 급성장하고 있는 타 종교를 견제하기 위해서 종교는 어느 종교든지 다 똑 같다라는 의식을 국민들에게 시어주기 위한 방편으로 기독교 의식을 모방할 수밖에 없었다고 고승들이 실토했습니다.

2. 미신불교 이대로 이끌어 가게 되면 30~40년안에 불자들이 타 종교로 개종되어 70%의 많은 불자들을 잃을 수밖에 없는 큰 위기를 맞게 될 불교가 크게 염려되어 또 다시 불교를 변질시키는 한이 있어도 타종교 의식을 모방할 수 밖에 없었다고 고승들이 실토했습니다.


관세음보살은 짬뽕신?

한국 불교에서 제일 유명한 보살이 바로 관세음보살이다
그런데 이 관세음보살은 힌두교의 여러 신들의 특징을 한데 합쳐서 만들어진 것이다
그 대표적인 이름들은 다음과 같은데시바,비슈누,인드라 등이 바로 그러한 신들이다

관세음보살의 눈이 천개인 것은 인드라신에게서 영향을 받았고
이마에 눈이 있는 것은 시바신에게서 영향을 받았으며
팔이 천개인 것은
팔이 여러개 되는 힌두교 신들에게서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관세음보살의 정체

한국의 관세음 보살은 흰두교의 흑모(검은 어머니)가 변신한 것이다.
흑모란?
힌두교 사원의 동굴에 있는 검은 어머니 여신상으로 눈은 붉게 충혈되어 있고 입은 피가 뚝뚝 떨어지면서 잔인하게 벌리고 있고 머리는 삭발하였고 손은 4개인데 두 개는 남자의 몸이 잘려져서 피가 뚝뚝 흐르는 목을 쥐고 있고 나머지 두 손은 금방 잘라져서 피가 흐르는 남근(男根)을 쥐고 있으며, 몸에는 구렁이가 칭칭 감겨 있으며, 발은 문어발처럼 무수히 많은데 그 발 하나하나가 다음 희생의 제물이 될 남자를 밟고 서 있는 끔찍한 모습니다. 예식에서는 사미승들이 창녀의 음부를 손 바닥으로 수없이 치고 후에는 혼음을 하는 것이다.

힌두교 사원에는 춤을 추는 여자들과 창녀들을 양성한다. 평소에는 승려들과 관계하다가 관람객이 적당한 돈만 집어 주면 몸을 판다는 것이다. 오전 10시에 사원에서 종이 울리면서 승려들이 거리에 쏟아져 나오면 이때 아이 못 낳는 여자는 그 중에 아무 승려나 자기 집에 데리고 가서 동침한다는 것이다.

극락의 불나비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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