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얀 원피스
'이제 며칠 후면 성혁 오빠와 나는 하나가 된다. 얼마나 기다렸던 순간인가? 이제는 누구도 우리 사이를 떼어놓을 수는 없어. 집안의 반대가 심해 일단은 가족과 떨어져 약식으로나마 예식을 올리게 되었지만, 절대 눈물을 흘리거나 힘들어하지 않을 거야. 그리고 훗날 우리 행복하게 잘 살고 있노라고 떳떳하게 말 할 수 있도록 아주 열심히 살아갈 거야. 죽어도 좋아. 그대만 내 곁에 있어 준다면...'
값비싼 웨딩드레스나 턱시도는 아니지만 효정의 눈에는 그것이 성혁과 자신을 아름답게 감싸줄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예복으로 보였다.
효정은 조심스런 손길로 살짝 들린 옷의 구김을 펴면서 행복의 눈물을 흘리고 있었고, 그녀의 사이로 기쁨과 슬픔이 한데 엉킨 사랑의 전주곡이 들리고 있었다.
마치 둘의 영원한 사랑에 시작을 알리는 것처럼...
바로 1년 전...
효정이 동아리 방에 들어서자 한참은 다듬지 않은 것 같은 길쭉한 스포츠머리에 군데군데 자라있는 수염에다가 꽤나 지저분한 옷차림새의 낯선 남자 한명이 멀뚱멀뚱 그녀를 쳐다보았다. 효정은 경계의 눈초리로 그를 쳐다보았다.
"누구세요?"
"전 이 동아리 사람인데요..."
언제나 그랬듯이 나이가 많아 보이는 처음 보는 사람은 선배일 확률이 높았다. 효정은 당황한 표정으로 대답을 이어갔다.
"안녕하세요? 저..저는 24기, 이효정이라고 하는데요."
그는 아무런 대답 없이 그녀를 빤히 쳐다보더니만, 의자에 눕더니 몇 달은 묵은 것 같은 색 바랜 무가지 신문으로 얼굴을 덮으며 퉁명스럽게 한 마디 내뱉었다.
"거기 서 있다가 정확히 40분 후에 깨워줘요."
그러더니 기가 막히게도 이내 잠에 곯아떨어지는 것이었다.
그것이 효정과 성혁의 첫 만남이었다.
당시 효정은 3학년이었고, 성혁은 군대를 막 제대하고 복학을 준비 중이었다. 성혁이 군대를 갈 때 즈음 효정이 학교에 입학했으니, 같은 동아리 회원이라고는 하지만 그 날 처음으로 마주친 것이었다.
첫 만남도 그랬지만 그는 무척이나 엉뚱한 사람이었다.
"음악 좋아하냐?"
그는 도서실에 앉아있던 효정을 다짜고짜 데리고 나가더니 도서관 관장실로 데리고 갔다. 마침 관장실엔 아무도 없었다.
"이런 곳에 막 들어와도 돼요?"
성혁은 아무 말 없이 테이블 위에 놓인 카세트를 틀었다.
"좋은 음악이 흐를 때는 조용히 하는 거야. 잘 들어봐. 내가 좋아하는 노래니까..."
[그대가 멀리 있다고 해도,
나는 좋아요.
같은 하늘 아래 살고 있다는 것만으로,
난 영원히 그대를 사랑할 수 있을 거라고...]
사랑에 관련된 슬픈 가사가 인상적인 노래였다. 성혁은 밑도 끝도 없이 그 노래를 따라 흥얼거리며 싱글벙글 좋아했다. 그의 눈동자에는 알 수 없는 그리움이 묻어있었다.
며칠 전에는 성혁이 매우 들뜬 표정으로 동아리 방에 들어오더니만 효정을 찾았다.
"효정야... 이거 받아라. 내 너 주려고 샀다."
그는 말이 끝남과 동시에 효정의 앞으로 무언가를 아무렇게나 휙 던졌다. 집어보니 지하철 노점상 같은 곳에서나 파는 촌스러운 빨간색의 싸구려 머리띠였다.
"공부하는데 머리 흘러내리면 눈 버린다. 이거 해라. 꼭해! 나중에 검사한다. 그럼, 나 먼저 간다."
또 한 번은 이런 적도 있었다. 수업시간에 핸드폰 벨이 울려 교수님 눈을 피해 몰래 받아보니 바로 그였다.
"지금 수업시간이라, 좀 곤란..."
[효정야! 오빠 시간 없어. 빨리 빨리나와. 바로 앞이야. 빨리...]
효정이 교수님의 눈을 겨우 피해 밖으로 황급히 나가보니 강의실 문 앞에 매우 부스스한 성혁의 모습이 보였다. 그는 효정을 발견하더니, 크게 웃으며 먹다 남은 몇 백 원짜리 초콜릿과 사탕 몇 알을 그녀의 손에 쥐어주면서 말했다.
"누가 먹으라고 나 준건데 난 단 거 싫어하잖아. 몇 조각 먹다가 도저히 못 먹을 것 같아서, 버리기는 아깝잖아. 자고로 음식물이란 버리면 안 되는 법. 서론 본론 빼고 어쨌든 네가 사탕하고 초콜릿을 무척이나 좋아한다는 기억이 갑자기 났지 뭐야. 그래서 달려왔어, 이거 맛있는 거래. 그럼 오빤 간다."
그리고는 그는 '휘릭' 사라져버렸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 날이 바로 화이트 데이었던 것이다.
효정은 그토록 엉뚱한 그를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만나면 만날수록 뭔지 모를 여운이 있는 사람이었다. 확실한 것은 다른 사람들보다 특히 자신에게 더 잘해주고 있다는 느낌이었다. 이상한 사람이었지만, 그것이 그리 나쁜 기분은 아니었다.
그런 둘을 더욱 가깝게 된 사건은 그로부터 며칠이 지난 후에 벌어졌다.
효정이 동아리에 들렸다가 우연히 혼자서 눈물을 흘리고 있는 성혁을 뒷모습을 발견하게 되었던 것이다. 전에 도서관 관장실에서 들었던 그 음악이 은은하게 퍼지고 있었다. 효정은 멋쩍은 듯 살며시 뒤돌아 몰래 그곳에서 빠져나가려고 했다.
"효정이니?"
"어? 네. 아, 선배님께서 무슨 생각하시는 것 같아서 방해가 될까봐..."
"이제 집에 가니?"
"도서관에 갔다가..."
"늘 열심이구나."
형식적인 대화가 끝나자 효정은 애써 그의 얼굴을 피하며 캐비닛 쪽으로 걸어갔다.
"두고 온 것이 있어서..."
"오늘이 딱 일 년째 되는 날이야."
효정은 책을 뒤지다가 뒤를 돌아보았다.
"네?"
성혁은 언제 버려진지 모를 종이컵 속의 누런 담배꽁초를 하나 주워 불을 붙이고는 한 모금 깊게 빨아들였다.
"동생이 부모님 곁으로 떠난 지..."
"동생 요? 동생이 있었어요?"
효정은 그의 표정을 읽고 순간적으로 입을 막았다. 하지 말아야 할 대꾸였다. 역시나 그의 입에서는 우려했던 대답이 흘러나왔다.
"하늘나라로 간지 오늘로 딱 일 년 되었지."
말로는 형용할 수 없을 아픔이 담긴 그의 눈동자가 효정의 가슴을 흔들었다. 순간 효정의 눈에 그의 모습이 흐릿하게 보였다.
"정말 죄송해요. 그런 지도 모르고.."
성혁은 이내 울음을 못 참겠다는 듯 고개를 숙였다. 효정은 아무 말 없이 그에게 손수건을 건네주었다.
"후배 앞에서 이런 모습이나 보이다니... 선배 우습지?"
"아니에요. 누구라도..."
성혁은 다른 쪽으로 고개를 돌리며 이야기를 계속했다.
"제대를 얼마 남기지 않았을 때야. 사고로 부모님께서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지. 슬픔보다는 앞날이 너무나 깜깜하단 생각이 앞섰어. 제대를 한 후, 동생을 위해서 아무 일이나 시작하려고 했지. 그런데 동생은 오빠 뒷바라지는 자기가 하겠다며 매몰차게 복학신청을 하라고 시켰던 거야. 그렇게도 못난 오빠를 챙기려 했던 동생이었는데..."
효정은 측은한 마음에 성혁의 옆에 앉아 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었다.
"정말 착한 동생 분이었군요. 분명 좋은 곳으로 가셨을 거예요."
성혁은 자신의 눈물이 부끄러웠는지 엄지와 검지로 눈 주위를 훔치며 대답했다.
"정말 그...랬을까?"
"그럼요. 당연하죠. 동생은 이렇게 힘 빠진 오빠의 모습을 싫어할 거예요."
성혁은 눈물로 얼룩진 눈망울을 효정에게 돌리더니 금방 웃어 보이며 대답했다.
"덕분에 좀 안정된 것 같다. 고마워. 비슷하다고 생각했는데, 넌 내 동생과 너무 많이 닮았어. 마음씨까지... 그거 아니?"
"네?"
"처음에 동아리 방에서 널 보았을 때, 그 며칠 전에 죽은 동생의 모습을 보는 것 같았어. 내 동생만큼이나 눈이 예쁜 여자가 또 있구나 하며 멍하니 말이야. 눈물이 나오려는 거야. 그걸 감추려고 신문지를 덮었었는데..."
"......"
"미안해, 내가 쓸데없는 소리를 했구나. 여자들은 닮았다고 하면 싫어하는데..."
효정은 그의 표정에서 많은 것을 읽을 수 있었다. 그리고 여러 가지를 느낄 수 있었다.
그 이후로 효정은 그를 볼 때마다 전보다 더욱 반갑게 인사했다. 가끔씩은 그의 뒷모습을 하염없이 바라보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그는 효정에게 작은 미소를 띠어 주었다. 효정은 자기가 그에게 조금이나마 힘이 되어 주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 기뻤고, 자연스럽게 두 사람은 더욱 친해졌다.
* * *
그렇게 효정이 성혁을 사귀게 된 것도 일 년 정도 흘러갔다. 처음에는 단순한 동정심이었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효정의 마음속에 성혁은 매우 중요한 존재로 자리 잡게 되었다. 단 하루라도 성혁을 만나지 않으면 효정의 마음은 많이 허전했고, 불안했다.
어쩌면, 효정이 성혁에게 더욱 집착을 하고 있는 것처럼...
"효정아 나한테 너무 마음 주지 마. 나 그렇게 좋은 사람은 아니야."
"무슨 소리예요. 누가 그래요? 오빠가 뭐라고 해도 난 오빠 곁에 있을 건데..."
"효정아.. 오빤 너와 많이 달라."
"자꾸 그러지 마요. 난 오빠밖에 없어요."
효정은 성혁이 자신에게 조금이라도 멀어지려고 할 때마다 더욱 그에게 매달렸고, 성혁 또한 효정의 그런 마음을 외면하지 못했다. 성혁 또한 효정을 깊이 사랑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조금은 삐거덕거리고 불안했지만, 효정은 둘의 사랑은 끝없이 이어질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어떻게 아셨는지는 모르지만 어느 날 갑자기, 효정의 부모님께서 효정이를 부르더니 성혁과의 관계를 추궁하기 시작했다.
"내가 너 공부하라고 대학에 보냈지. 그 따위 자식이나 만나라고 보냈는지 알아? 4학년이 되었으면 대학원 진학을 하기 위해서.."
"아버지, 그 오빠 어디가 어때서요? 고아라서? 아버지는 사람 차별하는 분이 아니잖아요. 왜 그 오빠한테만 그렇게 인색하세요?"
"다른 사람은 몰라도 어쨌든 그 자식은 절대로 안 돼."
"이유가 뭐예요?"
효정의 아버지는 무슨 말인가를 하려다가 머뭇거리더니 대뜸 소리를 질렀다.
"어쨌든 그 자식은 안 된다고...!!! 알았어?"
효정은 그 후로 거의 매일같이 부모님과 말다툼을 해야만 했다.
대학병원 교수 부모를 둔 효정과는 너무나도 대조적인 환경의 성혁이었다. 아무리 환경이 그렇게 다르다고 하더라도 부모님이 그럴 때마다 효정은 당신들이 너무나도 원망스러워 성혁의 자취방으로 달려가 성혁의 품에 안겨 눈물을 흘렸다. 그것은 태어나 처음으로 겪는 주체할 수 없을 정도의 어려움이었다.
성혁에게 이 모든 사실을 말하고 차라리 임신이나 해버릴까라는 생각까지 해봤다. 하지만 성혁이 그 이야기를 들으면 자기를 멀리 떠나가 버릴 것만 같았다.
효정이가 흘리는 눈물의 의미를 정확히 모르는 성혁은 그럴 때마다 효정의 머리 결을 어루만져 주는 수밖에는 없었다.
"저 오빠 없이는 못 살 거 같아요."
"혹시, 집에서 뭐라고 그러니? "
"아, 아니에요. 집에서는 아무 일도 없어요."
하지만, 결국 그 일은 벌어지고야 말았다.
그 날도 효정은 평소 때처럼 강의가 끝나자마자 성혁의 자취방으로 향했다. 다른 날보다 기분이 더욱 이상했다.
자취방 문은 잠겨있었다. 효정은 성혁이 오기를 기다리며 그 앞에 쪼그리고 앉았다. 그리고 어느새 자신도 모르게 그 자리에서 잠이 들어버렸다.
"학생, 학생.. 여기서 뭐해?"
성혁의 집주인 아주머니인 모양이었다.
"제가 깜박 잠이 들었나 봐요."
"학생 이름이 효정이 맞지?"
"네. 맞는데요."
"이구, 아침나절에 효정학생 아버지께서 다녀가셨어. 얼마나 난리를 치던지..."
"우리 아버지께서요?"
아주머니는 호주머니를 뒤지면서 계속 이야기했다.
"무슨 이유인 줄은 모르지만, 여기 총각이 갑자기 짐을 쌌어. 그 총각이 아가씨 오면 이거 전해주라고 하더군."
그걸 빼앗듯 뜯어서 읽은 효정의 얼굴은 조금씩 일그러졌다.
[ 효정에게
생각할 것도 있고 해서 잠시 고향에 내려가 있을 생각이야. 당분간 오빠를 찾지 말고 공부 열심히 하고 있어. 그렇게 오랜 시간은 걸리지 않을 거야. ]
* * *
몇 달이 지나도록 성혁은 연락도 없이 돌아오지 않았다.
그가 좋아하는 음악을 틀어놓고 참아보려고 애를 써봤지만, 그럴수록 그가 더욱 그리워질 뿐이었다. 효정은 초조한 나머지, 주말이 되기를 기다렸다가 동아리 가입부에 써져있는 확인되지 않는 주소를 토대로 인터넷으로 무작정 표를 끊고 그의 고향집으로 내려가기로 맘을 먹었다.
의외로 성혁의 집은 쉽게 찾을 수 있었다. 그의 집에 들어서자 익숙한 뒷모습이 보였다. 효정은 통곡이 나올 정도로 그 모습이 반가웠다. 잠시 후, 조심스럽게 그를 불렀다. 고개를 돌려 효정을 쳐다보는 사람은 그토록 그리워하던 성혁의 얼굴이 분명했다. 그러나 예전의 그의 모습과는 달랐다. 많이 초췌해져 있었다.
"효, 효정아. 네가... 여, 여긴 어떻게?"
효정은 대답 없이 왈칵 눈물을 흘리며 그에게 뛰어가 안겼다. 그리고 그의 입술에 키스했다. 잠시 후, 성혁은 입술을 살며시 때면서 예전처럼 효정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효정은 한동안 가만히 있더니만, 다시 성혁의 어깨와 목덜미 사이에 자신의 턱을 비벼대고 더욱 파묻었다.
"미안해요. 너무 보고 싶어서... 참을 수가 없어서.. 가입부 보고 찾아왔어요. 그런데 오빠 어디 아파요? 밥 제때 챙겨먹지 못하는 것은 아니에요?"
"아냐, 난 괜찮아. 그, 그런데 하, 학교는?"
효정은 두 손으로 성혁의 등짝을 사정없이 마구 때리며 울먹이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지금 학교가 문제니!! 나 이제 오빠한테서 떨어지지 않을 거야. 계속 이렇게 있을 거야. 오빠 몸도 너무 많이 말랐잖아. 이렇게 말랐잖아. 바보같이, 말랐잖아!!"
효정은 이어 터져 나오는 통곡을 참지 못하고 한동안 울어댔다. 그런 효정을 안고 있던 성혁은 효정이 울음을 멈출 때쯤 갑자기 두 손으로 효정의 어깨를 잡더니 매몰차리만큼 딱딱한 어투로 말했다.
"이러면 안 돼. 빨리 집으로 돌아가."
"오빠, 왜 그래? 나 효정이야. 오빠의 효정이.."
"나는... 나는..."
"네?"
"아니야. 됐어 빨리 돌아가. 나 여기서 잘 지내니까 걱정하지 말고..."
"싫어요."
"오빠 말 들어."
"......"
"처음이자 마지막 부탁이야. 제발!! 우린 아니야."
"무슨 소리야?"
"진작에... 헤어졌어야 했는데.."
“왜 그러는데요? 뭐 때문에 그러냐고요!”
성혁은 효정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그녀의 팔을 강제로 끌고는 버스 정류장으로 향했다. 효정이 울고불고 애원을 해도 막무가내였다. 그렇게 다시 실랑이가 이어지고, 넘어지기를 수차례... 어쩔 수 없이 버스에 탄 효정은 터져 나오는 눈물 때문에 아른거리는 시야로 버스 안에서 성혁을 물끄러미 쳐다볼 수밖에는 없었다. 성혁은 무슨 말인가를 하려다가 쇠기침을 하더니, 뒤돌아서 효정을 데리고 왔던 길로 터벅터벅 걸어갔다. 효정은 눈물을 흘리며 그 모습을 바라볼 수밖에는 없었다.
'그래. 이건 분명 아니야. 다시 올 거야.'
집으로 돌아온 효정은 뭔가를 결심한 듯, 백화점에 들려 성혁이 입을 양복과 자신의 원피스를 하나씩 구입했다. 그리고 부모님 몰래 밤새 짐을 쌌다. 컴퓨터에서 성혁이 들려주었던 노래가 효정의 귓가에 스치고 지나갔다.
[그대가 멀리 있다고 해도,
나는 좋아요.
같은 하늘 아래 살고 있다는 것만으로,
난 영원히 그대를 사랑할 수 있을 거라고...
그대가 떠나갔지만,
그대의 모습이 보여요.
그대는 늘 내 눈동자에 자리 잡고 있으니까...
단 1분밖에 살 수 없다고 해도
내가 죽는 날, 그대를 볼 수 있다면...
난 그대를 기다릴 거예요.]
* * *
일주일이 채 지나지도 않아 또다시 성혁의 고향집에 도착한 효정은 혹시나 성혁이 자신을 다시 집으로 돌려보내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 앞서, 근처에서 차가 완전히 끊길 때까지 한동안 서성이다 어둑해질 무렵 용기를 내 그의 집안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성혁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부엌이며 건너 방 등도 전부 살펴보았으나, 그 어디에도 성혁의 모습은 찾을 수가 없었다.
방바닥에 낯익은 약봉지가 하나 떨어져 있었을 뿐이었다. 효정은 그 약봉지를 집어 들었다. 그 약봉지에는 효정의 아버지가 근무하는 병원의 로고가 찍혀있었다. 효정은 그 약봉지를 뚫어지게 쳐다보다가 바깥화장실이 있는 곳으로 뛰어갔다. 성혁은 그곳에 있었다. 그의 한 손은 바닥을 집고 있었으며, 나머지 한 손은 자신의 가슴을 잡고 있었다. 바닥에는 검붉은 선지피가 쏟아져 있었다. 효정은 매우 놀라 그의 어깨를 부여잡았다.
"오빠! 왜 그래? 지금까지 몸 아프다는 얘기 왜 안 했어요?"
성혁은 힘없이 효정이가 있는 쪽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눈자위가 하얗게 풀려있었다. 효정은 그런 그를 부축해 방으로 데리고 갔다. 성혁은 쿨럭거리며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내, 내가 오지 말라고 했잖아."
효정은 성혁의 말에 아랑곳없이 그에 입술에 묻은 피를 정성스럽게 닦아냈다.
"언제부터 이랬어요?"
"대단한 것.. 아, 아냐. 가, 감기에 걸려서... 쿨럭."
"무슨 감기가 이래요? 이마도 불덩이 같고..."
효정은 다른 수건을 꺼내 물에 적셔 그의 이마에 올려놓았다. 바로 그 순간 쇠기침소리와 함께 성혁의 입에서 또 한 번의 피가 터져 나왔다. 그러더니 성혁의 몸이 바르르 떨렸다. 효정이 비명을 지르듯 그를 불렀다.
"오빠!!!"
순간, 효정의 머리도 어지러워졌다. 효정은 정신을 추스르고는 다시 한 번 그의 입가에 묻은 검붉은 피를 정성껏 닦아냈다.
* * *
지난밤에 효정이 정성스럽게 간호를 한 덕분일까? 그 다음날 효정이 정신을 차리자 말짱한 성혁의 모습이 보였다. 그는 효정을 보고 웃고 있었다.
"오빠 이제 괜찮아요?"
"괜찮고말고... 감기라고 했잖니."
성혁의 입가에는 여전히 따뜻한 미소가 흘렀다. 효정도 그런 그를 향해 웃어주었다.
"오빠, 저기요. 제가 준비한 것이 있는데..."
효정은 성혁에게 백화점에서 사온 양복과 원피스를 꺼내 보여주며 말을 이었다.
"제가 일방적으로... 골라봤어요. 이 옷은 우리 결혼 예복인데... 상의도 안하고 결정해서... 미안해요."
성혁은 효정의 말을 끊더니 대답했다.
"정말 괜찮겠어? 후회하지 않을 거지?"
효정은 성혁이 심하게 반대를 할 줄 알고 맞받아 칠 여러 이야기까지 준비하고 있었는데, 그의 입에서 뜻밖의 말이 나오자 들뜬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 그럼요!!."
"그럼 일주일 후에 할까? 우리 결혼식."
"좋아요."
효정은 오랜만에 성혁이 좋아하던 노래를 흥얼거리며 가지런히 접힌 옷을 조심스럽게 선반 위에 올려놓았다.
[단 1분밖에 살 수 없다고 해도
내가 죽는 날, 그대를 볼 수 있다면...
난 그대를 기다릴 거예요.]
* * *
효정의 아버지가 그곳에 도착했을 때에는 효정의 눈은 반쯤 풀리어있었다.
그녀는 죽은 지 며칠이 지나 보이는 성혁의 시체를 꼭 끌어안고 있었다. 효정의 아버지는 쓰러져있는 효정을 일으켜 세우려 했으나 효정은 그 자리에 무너지듯 다시 쓰러지며 손에 쥐고 있던 조그마한 약 병을 툭 떨어뜨렸다.
며칠 후, 효정까지 그렇게 눈을 감았다. 효정의 어머니는 그녀의 주검 앞에서 바닥을 치며 오열을 터뜨렸다.
"그때 자취방에서 그렇게 매몰차게 말하는 것이 아니었는데, 위급한 상황이기는 했지만, 치료만 계속했다면 충분히 나을 수 있는 환자였는데!! 이런 결과로 돌아올 줄이야."
효정의 아버지는 자신의 부인 쪽으로 힘없이 고개를 돌렸다. 효정 어머니의 한탄이 계속 이어졌다.
"그런 사람에게 넌 불치병이고, 이제 한 달도 못사는 시한부 인생이니 내 딸 앞에서 꺼져버리라고 거짓으로 말해 버렸으니... 몸이 좋지 못한 사람이 딸을 사귀는 것이 못마땅해서 눈이 돌아간 나머지 그랬던 건데... 그 때문에 우리 효정이가 여기까지 따라왔을 거고... 아이고, 내가 미친년이지. 하필이면 우리 병원 환자가 우리 딸이 사랑하는 학교 선배였다니..."
효정의 아버지는 눈물을 흘리며, 이틀 전 성혁의 장례를 치뤄주었을 때처럼, 효정에게도 발견 당시 입고 있던 하얀색의 원피스를 입혔다. 그녀의 그 하얀색 원피스에는 누가 흘렸는지 모를 검붉은 피가 한 송이 장미처럼 아름답게 각인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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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 일이 지난 날, 효정의 장례식.
효정의 아버지는 효정의 영정 자리에 성혁의 사진과 효정의 사진을 함께 놓았다. 많은 사람들이 그들의 죽음을 슬퍼하며 애도를 하는 무렵...
두 사람의 영정 너머...
두 명의 남녀가 손을 꽉 맞잡은 채로 장례식장에 찾아온 사람들을 쳐다보고 있었다.
세상에서 제일 예쁜 장미무늬가 새겨진 하얀 원피스를 입은 여자가 먼저 입을 열었다.
"오빠, 우리 아버지와 어머니도 함께 오셨어요. 우리의 교제를 그렇게 반대하셨는데... 우리 예식장까지 오셨어요. 전 안 오실 줄 알고 많이 서운해 하고 있었는데..."
“그러게, 생각보다 손님들도 많이 오셨어. 저쪽에는 유진선배도 보이는구나.”
“그런데 오빠, 이상하다. 왜 다들 슬픈 표정일까요?”
"그러게 말이야. 그 어느 때보다도 기쁘고 행복한 우리의 결혼식 날인데...."
마침내 장송곡이 울려 퍼졌고, 사람들이 흐느낌 소리도 점차 커졌다. 그들의 슬픔을 적셔주려는 듯 때마침 굵은 빗방울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두 명의 남녀에게는 그것이 다른 소리로 들렸다.
오직 두 사람에게만 들리는 결혼행진곡과 축하소리에 두 사람은 그 누구보다도 행복한 미소를 지으며 공허한 하늘 속으로 퍼져있는 붉은색 카펫을 따라 서서히 행진을 하기 시작했다.
하늘에서 쏟아지는 빗방울은 신랑신부 행진 때 쏟아지는 꽃가루가 되었고, 그들이 사라져가는 곳으로 조용히 흩날려 그들의 앞날을 밝혀주었다.
[단 1분밖에 살 수 없다고 해도
내가 죽는 날, 그대를 볼 수 있다면...
난 그대를 기다릴 거예요.]
- THE END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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