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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역사로 보는 왕자&공주의 사랑이야기 -마리아 테레지아& 프란츠 슈테판-

콜로라도 |2013.07.24 12:08
조회 54,554 |추천 107

1730년대 오스트리아의 수도 빈의 어느 무도회장에서 소녀는 청년을 만났다. 그리고 단번에 사랑에 빠지고 말았다.

  1717년 황궁에서는 황제를 비롯한 온 백성이 바라던 힘찬 아기울음소리가 들려왔다. 황제는 기뿐마음에 아기를 안고 무언가를 확인한 후 실망한 표정을 감추지 않았다. "딸인가...."

 

  1701년 에스파냐의 카를로스 2세가 죽은 후 유럽은 격동의 시대가 열렸다. 본래 스페인과 오스트리아는 같은 합스부르크 가문이었다.(전편에 언급했던 마리의 아들 필립이 후아나와 결혼한 후 스페인 이사벨라 여왕의 가문이 끊어지자 필립과 후아나의 아들인 카를로스 1세(카를 5세)가 스페인, 신대륙, 독일, 이탈리아 일대를 지배한다. 그러나 그는 신교도를 제압하지 못해서 생긴 신에 대한 죄책감에 수도원에 들어가는데 스페인과, 신대륙,네덜란드, 이탈리아는 아들 펠리페 2세에게 오스트리아와 신성로마제국 황제자리는 동생 페르디난트에게 주었다.)

  이후 펠리페 2세가 오스트리아의 공주(그의 조카)와 결혼하는 등 원만한 관계를 이어가지만 유독 카를로스 2세는 오스트리아를 싫어하고 프랑스를 좋아해서 유언장에 루이 14세의 손자에게 왕위를 물려준다고 하였다.  하지만 오스트리아에서는 큰 아들인 요제프가 신성로마제국을 받고 둘쩨인 카를이 스페인을 통치하려는 (우리가 남이가?) 교통정리를 해 둔 상태였기 때문에 프랑스와 오스트리아는 대규모 전쟁을 벌인다.(에스파냐 왕위계승 전쟁:1701~1714) 그러나 전쟁의 종결을 엉뚱한데서 찿아왔다. 당시 오스트리아의 왕인 요제프가 딸만 둘을 남긴체 갑자기 죽어버려 동생인 카를이 급하게 왕위를 물려받게 된것이다. 본래 게르만족의 풍습상 여성의 계승권은 인정하지 못했기에 카를 6세는 이를 최대한 활용해 자신의 조카들이 왕위계승권을 주장하지 못하도록 하고 자신의 자손들이 왕위에 오를 수 있도록 독일 각국에 공작을 벌인다. 그리고 이를 성공시킨다.

 마리아 테레지아의 아버지인 칼 6세(역사책에서 오해하고 있는것이 하나 있다. 그것은 바로 칼 6세가 자신의 딸인 마리아 테레지아의 왕위계승을 승인받기 위해 독일 각국에 양해를 구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진실은 자신의 자손이 형의 자손들을 제치고 왕위계승권을 독점받는다는 것이었다.)

 

카를 6세는 자신의 자손들이 왕위를 독점받는다는 사실에 안도하였다. 그러나 .... "딸딸딸딸~"

정작 자신이 아들을 두지 못하는 참변이 벌어진 것이다. 이후 황후도 더이상 아들을 낳을 수 없게되는 상황이 되자 그는 골치가 아파왔다.

 

 마리아 테레지아의 젊은시절 모습(그녀는 아들을 낳을 수 있다는 아버지의 집착에 의해 왕위계승 수업을 일찍 받지 못하고 당시 여성들이 배우는 자수넣기 등 여성교양만을 배웠다. 그리고 시집가기 직전에야 왕실업무에 참석할 수 있었지만 정치적 발언은 제한받았다.)

 

1730년대 초 그는 장녀 마리아 테레지아의 신랑감을 고르는 파티를 연다. 독일 각국의 왕자들이 미녀공주의 환심을 사고자 노력했다. 파티에 참석한 공주는 여러왕자들과 춤을 추며 자신의 신랑감을 골랐다. 그리고 그 때 한 남자가 눈에 들어왔다.

 로트링겐 공작이자 후일 신성로마제국 황제 겸 토스카나 대공이 된 프란츠 슈테판의 젊은시절

 

그는 피부가 하얀 아름다운 청년에게 한 순간에 반해버렸고 가슴이 두근거렸다고 한다. 그리고 그 청년에게 다가가 함께 춤을 추자고 하였다. 그녀는 이미 자신의 낭군감을 골랐던 것이다.

 

"로트링겐의 왕자와 결혼하겠습니다."

 

그녀는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부모에게 고백했다.

 

황제로서도 딸이 얼른 결혼해 아들을 낳아주기를 원했기 때문에 이 결혼을 승인했다. 카를은 내심 당시 강국으로 떠 오른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왕자와 혼담을 원한듯 했지만 한쪽이 일방적으로 강하기를 원치 않는 유럽 각국의 압력으로 일찍 이를 포기했다. 그렇지만 로트링겐도 카를 입장에서는 나쁘지 않았다. 그러나 당시 둘째왕자였던 프란츠 대신 그의 형을 신랑감으로 정해 공주의 애를 태웠다. 공주는 상사병 까지 나며 프란츠를 사랑했지만.. 자칫 엉뚱한 결혼을 할 뻔 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 형이 곧 죽고 프란츠가 대타로 그녀와 결혼했다. 프란츠 역시 이 사실을 듣고 안도했다고 한다.

이후 두 사람은 결혼을 앞두고 있었지만 프랑스가 이를 가만히 보고 있지 않았다. 로트링겐은 당시 프랑스의 국경지대로서 프랑스의 입장에서도 독일로 갈 수 있는 길이었기 때문이다. 결국 로트링겐은 프랑스령으로 흡수 되 프랑스령 로렌이 되고만다.

  이렇게 결혼한 두 사람은 서로를 신뢰하고 사랑하며 알콩달콩한 결혼생활을 보낸다. 마리아 테레지아는 남편을 토스카나(이탈리아 북부) 대공으로 삼아 자존심을 세워주었다.

  마침내 아버지인 칼 6세가 숨을 거두고 그녀가 군주가 되었다. 하지만 신성로마의 황제는 자신의 남편인 프란츠에게 주었다. 이를 위해 마리아 테레지아는  독일 각국에 양해를 구해야만 했지만 기꺼이 이를 감수했다. 하지만 문제는 엉뚱한데서 터저나왔다.

 마리아 테레지아의 사촌언니인 아밀리아  바이에른의 선제후에게 시집갔다. 그녀는 사촌의 집권을 인정하지 않고 자신과 남편이 후계자에 올라야 한다고 주장했다.

 

당시 프랑크푸르트를 수도로 둔 바이에른의 왕후였던 아밀리아는 자신의 아버지가 죽은 후 삼촌인 칼 6세가 황위에 올라야 했을 때는 침묵할 수 밖에 없었지만 사촌인 마리아가 자신의 남편을 황제에 앉히려 하자 마음이 달라졌다. 당연히 자신의 남편이 황제가 되고 자신이 오스트리아를 받아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는 얼른 독일제후들에게 가서 이럴 수가 있느냐며 도움을 요청했다. 그리고 한 지원군을 얻는다.

 아밀리아의 남편인 바이에른 선제후 카를(왼쪽)과 그의 든든한 지원군(?)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당시 프로이센은 군사강국으로 급부상하고 있었지만 좋은땅을 못가져 항상 땅을 확장한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아밀리아와 카를은 늑대가 눈앞에 있는 줄도 모르고 냉큼 동맹을 맺었고 프로이센은 당시 알짜땅이던 오스트리아의 술레지엔 처묵한다. 그러나 정작 카를의 군사요청은 거부했고 마리아 테레지아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프랑크푸르트를 점령해 황제를 자칭한 카를을 가둬버린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마리아 테레지아와 슈테판 부부는 열심히 사랑해 전쟁기간 중 열명에 가까운 자녀를 낳는다. 그 둘은 항상 같이 식사를 하고 차를 마시며 여러 이야기를 나누었다고 한다. 특히 국민교육에 둘 다 관심을 기울였으며 프란츠는 당시 유행하던 과학발전과 계몽사상에 대해 이야기를 했다고 하며 어디로 나들이를 갈까도 이야기 하였다고 전한다.

열심히 사랑하고 자녀농사를 짓다보니 두 남녀도 세월을 거스르지는 못했다.(중년이 된 두 부부)

 

 당시 남편인 프란츠는 군사적 재능이 없고(그의 할아버지인 샤를은 돌격대를 조직해 빈을 포위한 오스만의 군대에 돌진하여 술탄의 본진까지 육박한 무공을 자랑했다.)  그다지 똑똑하지는 못했지만 돈에 대해서는 밝아 전쟁으로 흐트러진 재정을 안정시켰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입장을 잘 알아 허수아비 바지사장 노릇에 만족하며 살았다. 그것이 사랑하는 아내의 정치적 부담을 덜어주는 일이라고 여겼던 것이다. 그는 과학과 예술에 많은 관심을 기울였고 오스트리아의 과학발전에도 나름 기여를 했다고 한다. 그라나 힘없는 가장이었기에 그다지 당당하지는 못했다고 한다.

  아내인 마리아 테레지아도 이 사실을 잘 알아 남편의 기를 살려주는 것을 중요하게 여겼다. 중요한 공문서에는 남편의 이름을 먼저 썻고 자신은 황후라고 칭했다. 그리고 자녀들의 성씨에 있어 남편성을 앞에 쓰고 합스부르크는 뒤에 썼다. 그리고 궁정에서 가정으로 돌아온 후에는 남편의 차를 끓이고 자녀를 따스하게 돌보는 등 아내와 어머니의 업무에 충실했다. 그는 남편에게 항상 존칭을 쓰며 다정하게 대했고 항상 미소를 잃지 않았다고 한다.

  두 부부는 자녀들을 비교적 왕실에 속박당하지 않게 키웠다. 덕분에 장남인 요제프는 계몽사상에 입각한 국민복지와 개혁을 실시할 수 있었고 둘째딸은 사랑만으로 무일푼인 하급귀족과 연애결혼을 할 수 있었다. 특히 막내딸인 마리 앙뚜아네뜨는 자녀중에 가장 유명한 인물일 것이다.

 

 

마침내 남편인 프란츠가 숨을 거두었다. 마리아 테레지아는 통곡하며 남편을 따라 죽어야 하지만 자신에게는 지켜야할 나라와 백성이 있다며 미안하다고 하였다고 전한다. 이후 그녀는 화려한 복장을 버리고 항상 검은 상복을 입으며 평생 남편을 그리워 하며 살았다.(프란츠 또한 마리아 테레지아를 사랑했지만 말년에는 자신의 딸뻘인 한 아가씨를 정부로 두기도 하였다. 이 소식은 마리아에게 전해졌지만 마리아는 이를 이해하고 그냥 넘어갔다고 한다.)

 남편이 죽은 후 여생을 그리움 속에 보낸 마리아 테레지아

추천수107
반대수15
베플신화발이|2013.07.25 00:37
마리아테레지아 사진에서 멈칫함... 너무이쁘다..
베플작은소녀|2013.07.24 14:18
마리 앙투아네트가 이 부부 딸이엿구나. 몰랏던 사실도 알고가게되네요! 진짜 재밋어요 올려주셔서 감사합니다^^
베플ㅋㅋ|2013.07.24 13:38
서로를 존중하고 아끼고 존경해주면 서로의 약점도 다 덮고 행복할수있는 실제 경험인듯. 말도 높이고..남편기세워주고.. 남편은 아내의 말존중해주고.. 요새는 서로 기싸움에서 이기려고.. 정말 예전에 비해 세상이 너무 끔찍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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