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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역사로 보는 왕자&공주의 사랑 -샤를 5세와 잔느 드 부르봉-

콜로라도 |2013.08.03 12:56
조회 11,680 |추천 35

14세기 프랑스에 한 왕이 있었다. 그의 아버지는 백성들의 존경을 받고 있었지만 기사도 정신이 뛰어났기 때문에 그만 대군을 처박고 자신이 포로가 되고 말았다. 적국인 잉글랜드는 엄청난 몸값을 요구했으나 전쟁으로 페허가 된 상황에서 돈을 마련할 길이 없었다. 평범한 농민들이 반란을 일으켰고 파리시장인 상인대표는 반란을 꿈꿨다. 이러한 어려운 상황 속에서 그는 한여자를 알게되었고 그녀의 모든것을 사랑했으며 ... 죽는날까지 함께했다. 그리고 그녀의 옆에 나란히 잠들었다.

 젊은시절의 현명왕 샤를 5세(아버지로 인해 즉위 초 부터 난감한 상황이었다.)

 

1350년 왕세자 샤를은 파리의 왕궁에서 자신과 결혼하게 될 12살의 한 소녀를 만났다. 다소곳하고 침착한 성격을 가졌다는 동갑내기인 그녀를 본 샤를은 어쩔 줄 모르며 부왕 뒤에 숨었다고 한다.

그녀의 이름은 잔  부르봉 공작의 둘째딸이었다.(촌수로 따지면 샤를 5세는 그녀의 외종질 뻘이었다.)  그런데 당시 프랑스 왕실은 뭔가 석연치 않아했다고 한다. 그녀가 지나치게 부자연스럽게 행동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당시 장 2세는 잉글랜드와의 결전을 맞아 한 사람의 지원군이라도 필요했기 때문에 부르봉 공작의 힘이 반드시 필요했다. 두 사람은 수년 뒤 결혼식을 올렸고 이에 만족한 아버지 장 2세는 잉글랜드와의 결전을 위해 출발했다. 그러나.....

 2만 VS 5천의 싸움 4배나 많은 병사를 가졌던 장 2세는  장궁병과  여기에 폭우에 따른 뻘밭이라는 좋지않은 상황으로 의해 그의 주력인 중기병이 힘을 쓰지 못함으로서  이 푸아티에 전투에서 전멸에 가까운 패배를 당하고 포로가 되고만다....

 

"니 아비는 포로로 잡혀있다. 아버지를 돌려받고 싶으면 엄청난 돈을 내야될꺼야 준비해..."

 

프랑스 파리로 날아온 이 한통의 편지를 받은 샤를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당장이라도 아버지를 구하고 싶었지만 나라에 돈이 없었다. 그는 임시로 섭정에 자리에 앉아 통치를 대신했다. 그 옆에는 잔이 샤를을 따뜻하게 대해주었다. 파리로 시집온 그녀는 왕실의 의구심에 의해 항상 그 행동 하나하나가 감시의 대상이 되었다. 특히 샤를 5세의 어머니 즉 그의 시어머니가 특히 그녀를 주시하는 상황이었다. 자신도 이렇게 어러운 상황이었지만 잔느는 하루를 바쁘게 보내고 돌아온 샤를에게 따뜻한 안식처가 되어주었다. 샤를과 잔은 어려운 가운데서도 여덞명의 아이를 낳았는데 결국 아들 둘만 살아남게 된다.

 수도사들의 청원을 듣고 있는 샤를 5세와 잔 왕비 샤를은 그녀와 떨어져 있기 싫어

공무 중에도 비교적 같이 있으려 했다.

 

샤를 5세는 아버지의 몸값을 마련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백성들에 세금을 부과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너무 과도한 세금을 거둬 농민들이 마침내 반란을 일으키게 되었다.(자크리의 난:이때 한 연대기 작가(프루아르)는 농민들이 미쳐 날뛰며 귀족부인과 딸을 그 남편과 아버지 앞에서 겁X하고 자신보다 신분이 높은 수도사와 귀족들을 무릎꿇려 욕을하고 침을 뱉었다고 기록했다.)

  샤를 5세는 파리로 진격해오는 이 농민들을 강경하게 진압하기 위해 이번에는 돈줄인 상인들에게 돈을 거두기 시작했다. 그러나 설상가상으로 그는 한 엄청난 강적을 만나게 된다.

 파리상인 대표이자 시장인 에티엔 마르셀은 400년 뒤에 등장했다면 혁명의 주역이 될 인물이었으나 시대는 그를 아직 원하지 않았다. 그는 파리를 거의 장악했지만 농민군과 연합을 꾀하다 다른 부유층들의 반발을 사 살해당한다.

 

에티엔이 죽은 후 귀족들과 상인들의 연합으로 농민군의 반란을 진압하고 이후 어렵게 돈을 마련한 샤를 5세는 먼저 10분의 1에 해당하는 40만 크라운을 잉글랜드에 지불하고 아버지인 장 2세를 데려왔다. 그런데 그 아버지는 돌아오자 마자 선량왕이라는 별명답게 전쟁터에 희생된 자신의 동지들을 위로하고 사치스러운 파티를 즐기기 시작했다. 또한 알고보니 런던에서도 잉글랜드 아가씨와 밤을 즐기고 파티를 여느라 막대한 빚까지 지고 있었다. 결국 여기저기서 돈 나갈때가 투성이다 보니 샤를 5세가 어렵게 모은 돈을 다 탕진하고 말았다. 더 놀라운 것은 갚을 몸값을 다 써버리자... 의리를 지킨다며 다시 런던으로 돌아가버렸다는 것이다 결국 1364년 장 2세는 런던에서 숨을 거두었다.

 비가 오는 뻘밭임에도 "남자는 돌격이지"를 외치며 잉글랜드의 장궁병에 병사를 헌납한 장 2세는

의리를 지킨다며 아들에게 다시 몸값을 마련해 오라는 명령을 남기고 런던으로 돌아가 그곳에서 죽었다.

 

아버지가 죽자 마침내 왕위에 오른 샤를 5세는 본격적인 반격을 준비하였다. 잔느 또한 밤세 작전을 논의하는 샤를 5세와 그의 부하들을 위해 시녀들과 함께 야식을 준비하고 의복을 만들었다고 한다. 그녀는 이때도 샤를과 사랑을 나눠 여러자식을 낳고 있는 상황이었다. 샤를 또한 아내에게 진심으로 감사해 하며 그녀와 최대한 가까이 있으려 노력했으며 어머니를 설득해 그녀를 왕실의 일원으로 인정받게 했다. 이때가 두 부부에게 있어 어려웠지만 가장 행복한 시간이었다.

 

준비를 마친 샤를 5세는 본격적으로 반격을 개시했다. 하지만 샤를은 그의 아버지 처럼 어리석지 않았다. 그는 반격을 함에 있어 전면전 보다는 치고 빠지는 게릴라 전을 우선시 하였고 잉글랜드 군이 없는 지역에 병사를 보내 차근차근 성들을 탈환하기 시작했다. 이 무렵 그는 이러한 작전을 가장 잘 성공시킬 한 명장을 얻었다. 그가 바로 베르트랑 드 케클랭이었다.

 하급귀족 혹은 평민계급이었던 베르트랑 드 캐클랭은 호탕하면서도 전략,전술의 응용에 뛰어난

인물이었다. 그는 특유의 치고 빠지기로 프랑스의 여러지역을 탈환해 점차 잉글랜드의 영토를 프랑스 서부 해안가로 몰아넣었다.

 

잉글랜드는 당황했지만 그래도 한 인물을 믿고 절대적인 충성을 바치고 있었다. 아버지인 에드워드 3세를 대신해 잉글랜드의 총 사령관을 담당하고 여러번의 승리를 통해 군사들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고 있는 그는 바로 에드워드 흑태자였다.

 

아버지인 에드워드 3세의 절대적인 신임을 받으며 전쟁을 성공리에 치르고 있던 에드워드 흑태자

그는 특히 적은병력으로 대군을 상대하기 위해 장궁병을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철저한 약탈과 방화를 통해 프랑스를 파괴하는 작전을 구사해 프랑스를 공포에 떨게했다.(창세기전 팬 여러분 많이 놀라셨죠 저도 흑태자 얼굴보고 많이 놀랬습니다)

 

에드워드 흑태자는 프랑스 남부의 나바르 왕 샤를을 아군으로 끌어들여 샤를 5세 군대의 움직임을 묶은 후 반격을 가해 한 때 캐클랭을 포로로 삼기도 하였다. 그러나 기사도 정신에 투철한 그 역시 몸값을 받고 캐클랭을 풀어주는 실수를 범했다. 풀려난 캐클랭은 언제 그랬냐는 듯이 잉글랜드 군을 괴롭혔다.

 

이렇게 점차 안정을 되찿은 샤를 5세는 자신과 잔 왕비가 함께 원했던 한 계획을 실현시켰다. 그것은 바로 루브르 궁에 엄청난 책들을 보유한 도서관을 설립하는 것이었는데, 이것은 특히 독서를 좋아한 잔의 뜻이 많이 반영된 것이었다고 한다.(실제로 잔은 루브르 궁전에 자주 머물며 혼자 조용히 독서를 즐겼으며 식사를 하는 도중에도 학자들을 불러 옛날 여인들의 고결하고 아름다운 행실을 기록한 책을 읽게 했다고 한다.)

 

샤를 5세는 이 외에도 프랑스에서 최초로 상비군을 도입하고 세금제도를 개혁해 안정적인 전쟁세를 거둘 수 있었으며 많은 우수한 인물들을 곁에 두는 관료제를 정비해 나갔다. 특히 그를 높게 평가하는 것은 아무리 돈 욕심이 나더라도 화폐가치를 떨어뜨리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는 주변의 유혹에도 불구하고  귀금속 함유율이 높은 금화를 일관되게 유통시켜 상업을 활발하게 만들었다. 이것은 후일 프랑스가 전쟁에 승리를 거두는데도 큰 도움이 되었다.

현명왕 샤를 5세의 초상화 그는 이 시기 잉글랜드 군을 몰아낼 수 있었지만 궁지에

몰린 잉글랜드 군이 저항해 백성들과 군인들의 피해가 클 까봐 휴전조약을 맺어 쉴 시간을

벌었다. 이시기 잉글랜드는 엄청난 영토를 상실해 보르도와 그 주변의 해안가 영토밖에 남지

않았다.

 

하지만 호사다마라고 할 까 이 시기 사랑하던 왕비인 잔이 갑자기 정신질환을 일으키기 시작해

사람을 알아보지 못하고 잠깐 전의 일도 기억을 해내지 못하였다.(그녀의 가문인 부르봉 가문은 정신분열증이 유전되고 있었다. 그녀의 이러한 병은 후일 그녀의 아들이자 샤를 5세의 후계자인 샤를 6세에게도 나타나 백년전쟁을 더 가속화시킨다.)

 샤를 5세는 큰 충격을 받았으며 신에게 도와달라고 기도했다. 잔의 정신병은 이전부터 의혹이 있어왔지만 이때서야 실체를 드러내기 시작한 것이다. 왕실에서는 잔과의 관계를 정리할 것을 요구했지만 샤를 5세는 이를 거부했다. 이미 7번째 아이를 가진 그녀를 도저히 버릴 수는 없었다. 샤를은 그럴수록 잔과 더욱 가까이 있으며 그녀의 기억을 되살려주려 노력했다. 특히 그녀가 읽은 책을 곁에서 다시 읽어주었다고 한다.

 

이 시기 기존의 아비뇽에 머물러 있던 교황이 로마로 돌아가자 그는 아비뇽에서 새로운 교황을 세웠다. 이 때문에 교황이 둘이나 나타나게 되는 소위 대분열이 생겨났다(1378년~1417년) 그러나 샤를에게 더욱 슬픈일은 사랑하던 왕비 잔이 그해에 끝내 숨을 거두었다는 것이다. 그는 매우 슬퍼하다가 건강을 크게 해쳤다. 점차 쇠약해지던 샤를 5세는 얼마 후 사랑하는 두 딸이 연달아 죽게되자 그만 삶의 의지를 잃어버렸다. 죽음에 가까워 온 그는 아내의 옆에 자신을 놔둬달라고 유언한 후 1380년 42세의 나이로 숨을 거두었다. 그리고 신하들은 왕의 유언을 받들어 샤를 5세와 쟌느를 함께 두었다.

 프랑스 루브르 성 지하광장에 함께 잠든 샤를 5세와 그의 왕비인 부르봉의 잔

 

 

추천수35
반대수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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