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머리말
1961년 박정희·김종필·이낙선·박종규 등 일부 군인들이 일으킨 5·16 군사 쿠데타의 성공으로 시작된 박정희 장기집권시대는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가 김재규의 저격으로 비명에 쓰러질 때까지 20여년 동안 지속되었다. ‘개발독재’라는 말로 상징되는 박정희 장기집권시대가 군사정부 탄생 직후부터 시작된 민중의 끊임없는 저항에도 불구하고 오랫동안 지속될 수 있었던 데는 군대·경찰·정보기관·사법기관 등의 억압적 국가기구가 크게 작용하고 있었다. 박정희 장기집권시대가 쿠데타와 동시에 선포된 비상계엄 및 쿠데타 직후의 반공법 제정과 중앙정보부 창설로 시작된 것이야말로 박정희 장기집권시대의 특징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실제로 박정희가 집권하고 있는 동안 계엄 3회(31개월), 위수령 3회(5개월), 각종 비상조치 9건(69개월)이 실시되었다. 이러한 비정상적 기간을 모두 합하면 105개월인데 이는 집권기간인 220개월의 약 절반에 해당하는 것으로 박정희 독재정권이 억압적 국가기구에 크게 의존해 권력을 유지할 수 있었음을 잘 보여준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박정희 군사정치 지배체제의 유지를 가늠하게 한 또 다른 중요한 기반은 언론·학교 등의 이데올로기적 국가기구이고 그러한 기구를 통해 유포된 지배 이데올로기였다. 부정선거·관건선거라는 논란에도 불구하고 형식적으로는 민주적 절차에 의해 이루어진 대통령 직접선거와 국회의원 선거, 그리고 개헌안 국민투표에서 박정희를 정점으로 한 군사정치 지배세력은 늘 승리했다. 이는 박정희 장기집권시대에 지배 이데올로기가 상당부분 효율적으로 작용하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특히 최근 들어 논란이 되고 있는 ‘박정희 정권에 대한 재평가’ 내지는 ‘5·16혁명 다시 보기’도 박정희 장기집권시대의 지배 이데올로기가 우리 나라 사회의 일각에서 면면히 이어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 글은 장기간에 걸친 박정희 독재정권의 유지를 가능하게 한 요인 가운데 지배 이데올로기라는 측면에 초점을 맞추어 박정희 장기집권시대를 검토하려는 것이다. 지배 이데올로기란 엄연히 존재하는 현실, 특히 지배·피지배 관계를 잘못 이해하도록 만드는 사회의식의 체계를 가리킨다. 따라서 지배 이데올로기는 지배관계를 은폐하고 정당화함으로써 지배를 유지·강화하려는 지배세력에 의해 의도적으로 만들어지고 발전되는 속성을 갖는다. 한국 근·현대사에서 지배 이데올로기는 여러 가지 외형을 띠고 다양하게 표출되었지만 크게 보면 두 가지 이데올로기를 축으로 하고 있다. 그 하나는 19세기 말 이래 제국주의 이데올로기로서 위력을 떨쳐온 근대화 지상주의 이데올로기이고, 다른 하나는 반공주의 이데올로기이다. 박정희 군사정치 지배체제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러나 이 글의 일차적 관심은 지배 이데올로기 자체에 있지 않다. 사실 그 동안 많은 연구자들이 박정희 독재정권의 지배 이데올로기 문제에 주목해 그 실체를 밝히는 데 기여했다. 보기를 들어 이우영 서울대 교수는 민족주의·성장주의·집권주의를, 임현진·송호근 서울대 교수는 성장주의·권위주의·반공주의를, 김정훈 조선대 교수는 동도서기론(東道西器論)과 유기체적 민족주의를 주요 내용으로 하는 민족주의를 각각 박정희 독재정권의 지배 이데올로기로 규정한 바 있다. 전재호 성균관대 교수도 국가주의·군사주의·반공 이념·경제발전을 주요 내용으로 하는 민족주의 담론이 결국에는 반동적 근대주의의 속성을 지닌 데 불과했음을 밝혔다. 이들의 연구에서 지적된 각각의 이데올로기적 요소가 박정희 독재정권에서 나타나고 있었다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기존 연구에서 부분적으로는 언급되면서도 본격적으로 논의되지 않은 문제는 박정희 장기집권시대 지배 이데올로기의 역사적 배경과 형성 과정에 관한 문제이다. 이 글에서 밝히려는 것은 박정희 장기집권시대의 지배 이데올로기가 어떤 역사적 기원을 통해 형성되었으며, 그것이 군사 쿠데타 직후의 독재정권 초기에 어떤 과정을 통해 발현될 수 있었는가 하느 문제이다. 특히 박정희 군사정치 지배체제의 주역인 박정희에 초점을 맞추어 박정희 장기집권시대의 이데올로기가 형성되는 과정에서 큰 영향을 미친 일본 제국주의 시대의 이데올로기적 요소에 주목하려고 한다.
그런데 박정희 장기집권시대 이데올로기의 역사적 배경과 형성 과정이라는 주제에 접근해 가는 데는 몇 가지 자료상의 어려움이 있다. 가장 큰 어려움은 군사 쿠데타 이전에 박정희가 쓴 글이 별로 없다는 것이다. 이와 관련해 이 글은 박정희 자신이 어렸을 때를 회상하며 남겨 놓은 짧은 글과 최근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는 ‘박정희 정권에 대한 재평가’ 작업의 일환으로 몇몇 신문에 의해 수집된 증언자료(가장 대표적인 것으로 조갑제 전 조선일보 출판국 부국장이 저술한『박정희, 불만과 불운의 세월;1917년~1960년』·『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실록 박정희』등이 있음)를 활용함으로써 이러한 어려움을 극복하려고 한다. 다음의 어려움은 국가원수로서 박정희의 이름으로 발표된 엄청난 분량의 연설문·담화문 안에는 공식적이고도 수사적인 언급이 너무 많아 박정희 정권의 지배 이데올로기를 제대로 분석할 수 있는 자료로서는 한계를 갖고 있다는 것이다. 한편 쿠데타 이후 박정희의 이름으로 나온 책(『국가와 혁명과 나』·『민족중흥의 길』등)도 상당한 분량에 이른다. 물론 그것이 모두 박정희 자신에 의해 쓰여졌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러나 박정희는 대필된 것이라 하더라도 모든 글을 직접 꼼꼼하게 수정하는 습관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그의 이름으로 된 모든 저술은 그의 생각을 이해하는 일차사료로서 중요성을 갖는다고 여겨진다. 특히 1963년에 처음 발간된『국가와 혁명과 나』는 대리저자 박상길이 밝히고 있듯이 박정희와 20여 차례에 걸린 토론 과정을 거쳐 서술되었으므로 박정희의 정치적 철학과 이념을 가장 정확하게 드러내고 있으며, 따라서 박정희 독재정권 초기의 이데올로기를 이해하는 데 특별히 중요하다고 생각된다. 이 글에서는 박정희의 이름으로 발표된 여러 글 가운데서도 특히『국가와 혁명과 나』를 통해 박정희 장기집권시대 이데올로기의 문제에 접근하려고 한다.
이하 제2장에서는 일본 제국주의 시대의 천황제 파시즘 이데올로기가 갖고 있던 특징을 검토하고, 제3장에서는 일제강점기에 박정희가 그러한 파시즘 이데올로기의 영향 아래 어떤 세계관·사회관·역사관을 갖게 되었는지 검토할 것이다. 그리고 제4장에서는 일본 제국주의 시대의 파시즘 이데올로기가 군사 쿠데타를 전후해 박정희 정권의 지배 이데올로기 형성과정에 어떻게 작용하고 있었는지 검토할 것이다.
2. 일본 제국주의 시대의 파시즘 이데올로기
일본은 메이지유신[明治維新] 이후 전근대적·봉건적 요소를 제대로 청산하지 못한 채 곧바로 ‘천황(天皇)’을 정점으로 한 가족국가관 이데올로기를 바탕으로 군국주의와 제국주의의 길로 나아갔다. 일본의 근대화과정에서 제기된 ‘국권론’과 ‘민권론’이라는 두 가지 사상적 전통 가운데 19세기 말 이후 주류를 이룬 것은 국권론이었다. 일본에서 근대국가 건설의 중심구호는 부국강병이었다. 1945년 이전의 일본에서 민주주의가 가장 활발하게 논의되었다고 하는 다이쇼[大正] 데모크라시만 하더라도 서구 제국주의 국가의 자유민주주의와는 본질적으로 다른 것이었다.
20세기 이후 자유민주주의의 일반적 지표로는 언론·출판·집회·결사의 자유 및 표현·사상·양심의 자유와 같은 시민적 권리의 보장, 보통선거·의회민주주의·정당제도 등을 통한 모든 국민의 자유로운 정치활동의 보장, 노동조합과 복지제도 등을 통한 사회적 권리로서 노동자 생존권의 보장 등이 거론된다. 그러나 이러한 자유민주주의는 일본 안에서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었다.
메이지유신 이후 일본 제국주의 세력이 추구한 조선·만주·중국·태평양으로의 군사적 팽창은 1931년 만주사변을 계기로 파시즘으로 귀결되었다. 일반적으로 이 시기 이탈리아·독일·일본 등에서 등장한 파시즘은 공통적으로 유기체론적 국가관을 바탕으로 한 국가주의의 성격을 갖고 있었다. 파시즘의 국가주의에는 국민들은 국가라는 유기체의 한 부분을 이루기 때문에 전체인 국가의 번영과 발전을 위해 개인의 이익추구를 양보해야 할 뿐 아니라 개인이 희생해야 한다는 논리가 내포돼 있었다. 그러면서도 일본 제국주의 시대의 파시즘은 유럽의 파시즘과는 다른 독특한 양상으로 전개되었다.
마루야마 마사오[丸山眞男] 전 도쿄대학 교수에 따르면 일본의 천황제 파시즘은 개인주의적·자유주의적 세계관의 배격, 그러한 세계관의 정치적 표현인 의회정치의 반대, 대외팽창과 군비확충의 추구, 민족적 신화와 국수주의의 강조라는 측면에서는 파시즘의 일반적 특징을 공유하면서도 다른 나라의 파시즘과는 다른 두 가지 고유한 특징을 갖고 있는데, 그 가운데 하나는 바로 유난히 가족과 공동체를 강조하는 가족주의적 성격이었다. 먼저 천황제 파시즘은 국가구성의 원리로 가족주의를 강조했는데 그것은 이른바 가족국가관으로 집약되었다.
‘천황을 받들어 모신 한 가족’ 또는 ‘군민 일체의 가족국가’라고 보는 이러한 국가관에 따르면 가(家)의 확대가 국가이며 국가의 축소가 ‘가’라는 것이다. 그리고 ‘내’가 속해 있는 ‘우리’의 정점은 국가의 원수이자 민족의 대가장인 ‘천황’이라는 것이다. 이때 대가장인 천황이야말로 일시동인(一視同仁)이라는 이름 아래 형식적으로 ‘갓난아이[赤子]’인 모든 국민의 평등을 보장하는 ‘절대적 주체’였고, 역으로 국민은 국가(곧 천황)에 대한 ‘충성의 의무’를 부여받은 ‘통치의 객체’였다. 이러한 가족국가관 아래에서는 서구 근대 국민국가에서 이루어졌던 개인의 해방은 원천적으로 불가능한 것이었다. 가족국가관에 의해 배태된 충효일치·충군애국의 사상은 메이지유신 이후 형성된 절대국가에서 끊임없이 강조되던 이데올로기였고, 그것은 1930년대 전시 동원체제에서 극에 달하게 되었다. 천황제 파시즘에서 인정된 최고의 사회 구성 원리는 국가(곧 ‘천황’), 가족, 개인의 일체화였다.
바로 이러한 전근대성 때문에 일본에서는 서구식 자유민주주의가 전면적으로 부정되었다. 개인의 자유·평등·행복은 모두 극복돼야 할 대상으로 간주되었다. 만세일계(萬世一系)를 내세운 천황제 아래 일본사회 전체가 하나의 병영이 되었다. 집단주의·획일주의·군사주의의 논리는 군대뿐만 아니라 사회의 모든 영역을 지배했다. 국체(國體), 국민의 군대화, 군대의 사회화, 총력전이라는 이름 아래 사회의 병영화, 군사화가 진행되었다. 1930년대 말 이후 일본사회를 지배한 ‘국민총동원’의 구호는 병영국가의 정점을 보여준다. 천황제 파시즘은 자율적이고도 자유로운 개인을 바탕으로 한 근대사회의 원리와 정면으로 배치되는 것이었다.
천황제 파시즘은 식민지 조선에서 더욱 극단적인 형태로 나타났다. 일제의 식민지 지배정책은 자국에서의 어떠한 민주주의적 변화도 없는 상태에서 진행된 군국주의적 침략정책의 산물일 뿐이었다. 일본 제국주의는 관료조직·경찰·법원·학교 등의 지배기구를 통해 식민지 조선을 병영화했다. 여기에 1930년대 이후에는 농촌진흥운동을 통해, 그리고 일제강점기 말기에는 청년단체나 청년훈련소 등의 이름 아래 대규모 관제 청년집단을 만들어 천황제 파시즘 이데올로기를 주입했다. 일제강점기 동안 내선일체와 황민화라는 이름 아래 일본 제국주의 세력에 의해 자행된 일련의 민족말살정책, 곧 민족언어의 근절·창씨개명·민족역사의 왜곡·민족의식의 폄하 등의 이면에는 일체의 다름[異]을 용납하지 않는 천황제 파시즘의 논리가 도사리고 있었던 것이다.
3. 일제강점기 박정희의 세계관 형성
앞에서 언급한 일본 제국주의 시대의 천황제 파시즘 이데올로기는 식민지 지배 아래 놓여 있던 조선 민중에게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일부는 끝까지 파시즘 이데올로기에 맞서 민족의 해방을 위한 싸움을 계속했지만, 일부는 일본 제국주의 세력의 침략전쟁과 천황제 파시즘 이데올로기를 내면화하고 천황의 충성스런 신민(臣民)이 되는 것을 조선이 제국주의 또는 아(亞)제국주의의 주체가 될 수 있는 유일한 길로 받아들였다. 그렇다면 일제강점기 말기에 청년기를 보낸 박정희는 어디에 해당할까?
먼저 박정희가 일제강점기에 어떤 경력을 쌓았는지 간단히 정리해 보기로 하자. 박정희는 1917년 경상북도 선산에서 태어났다. 1926년 구미공립보통학교에 입학했고 1932년에는 대구사범학교에 입학했다. 1937년 대구사범학교를 졸업한 뒤에는 1939년까지 문경공립보통학교 교사를 지내다가 1939년 ‘군인’이 되기 위해 만주로 갔고 1940년 만주국군관학교 2기생으로 입교했다. 1942년 졸업할 때는 만계(滿系) 수석 졸업생 자격으로 만주국 황제 푸이[溥義]로부터 금시계를 받았다. 만주국군 장교로 복무하던 중 1944년 도쿄[東京]의 육군사관학교 57기 생도로 편입한 뒤 전체 3등의 석차로 졸업했고, 다시 만주국군 장교로 일본이 패전할 때까지 복무했다.
이상에서 알 수 있듯이 박정희는 일본 제국주의 세력의 식민지 지배 아래서 감수성이 가장 예민한 청소년기를 보냈다. 당시 일본 제국주의 세력은 만주사변(1931년), 중일전쟁(1937년), 태평양전쟁(1941년)으로 이어지는 전시동원체제에서 식민지 조선의 민중을 억압하고, 나아가 전쟁에 동원하기 위해 이데올로기적 공세를 강화하고 있었다. 그 단적인 보기가 이른바 황민화교육이라는 이름 아래 조선의 청소년들이 일본 천황제를 받아들이도록 강요한 것이다. 학교에서 조선어 사용을 금지하는가 하면, 역사를 비롯해 조선의 고유한 문화적 전통을 가르치는 것을 배제했다. 조선의 청소년들은 궁극적으로는 일본의 언어로 일본과 관련된 것, 일본 제국주의 세력의 식민지 지배에 유리하게 작용하는 것, 그리고 식민지 지배를 받는 조선의 민중이 조선을 부정적으로 인식하도록 만드는 것만을 배워야 했다. 이러한 식민지적 상황이 박정희에게는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었을까? 박정희 본인이 남긴 글을 인용해 보자.
“소년시절에는 군인을 무척 동경했음. 그 시절 대구에 있던 일본군 보병 제80연대가 가끔 구미지방에 와서 야외 훈련하는 것을 구경하고는 군인이 되었으면 하는 생각을 했음. 보통학교 시절에는 일본인 교육으로 일본 역사에 나오는 위인들을 좋아하다가, 5학년 때 춘원 이광수가 쓴『성웅 이순신』을 읽고 이순신 장군을 숭배하게 되고, 6학년 때『나폴레옹 전기』를 읽고 나폴레옹을 숭배하였음.”
이 짧은 글은 소년 박정희가 일본 제국주의 지배체제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갖고 있었으며 그러한 생각이 집권 이후의 지배 이데올로기에 어떻게 작용했는지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몇 가지 시사점을 제공한다.
첫째, 당시 일본 제국주의가 식민지를 지배하는 데 주축이던 군대와 교육을 통해 일본 군대와 일본 위인을 동경하게 되었다는 것이 주목된다. 일본 군대는 국망(國亡) 이전에 조선민중이 일으킨 1894년 농민항쟁과 의병항쟁을 탄압한 주체이자, 국망 이후에는 무력에 의한 식민지 지배의 상징으로 조선 민중을 공포의 도가니로 몰아넣은 실체였다. 그런데 박정희는 그러한 일본 군대를 동경하고 일본 군인이 되었으면 하는 꿈을 가지게 되었다고 거짓 없이 적고 있는 것이다. 아울러 ‘일본 역사에 나오는 위인들’을 좋아하게 되었다고도 하는데, 구체적인 인물은 지적되지 않았지만 일본 역사 교과서에서 전국시대를 마감하고 일본을 통일한 인물이 거론되는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나 일본이 근대화되고 제국주의로 나아가는 데 결정적인 계기가 된 메이지유신의 주역들 정도였을 것이다.
둘째, 일본 위인 외에 좋아한 것이 군인인 이순신과 나폴레옹이었다는 것도 주목된다. 특히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박정희가 이순신을 ‘숭배’하게 된 계기가 이광수에 의해 주어졌다는 점을 스스로 밝히고 있다는 사실이다.《동아일보》에『성웅 이순신』을 연재하고 잇던 1932년 무렵의 이광수는 ‘허위, 나태, 비사회성’ 등 잘못된 민족성 때문에 조선민족이 쇠퇴하게 되었다고 주장하는가 하면, 집단의 이익을 위해 개인의 이익을 희생하는 인간관이 바람직한 것으로 여기고, 그러한 맥락에서 열등한 대중을 올바로 이끄는 지도자로서 영웅을 숭배하는 한편 일본의 국가주의와 천황제를 일본 국력의 원천으로 찬양하고 있었다. 이러한 이광수의 생각은 무솔리니와 히틀러를 지지하고 독일·이탈리아·일본의 대외 침략전쟁을 칭송하는 데까지 나아가고 있었다. 특히 이광수가 ‘동광총서’라는 시리즈의 첫번째 권으로 자신이 쓴『조선민족론』을 히틀러의『나의 투쟁』번역본과 함께 묶어 간 행했다는 것은 이 시기 이광수의 파시즘 인식을 이해하는 데 시사적이다. 이광수는 만주사변을 계기로 본격화된 일제의 대륙침략정책을 조선민족의 활로로 인식하면서 적극적인 만주진출을 고취하기도 했다. 박정희는 이와 같이 조선민족을 부정적으로 인식하고 일본 제국주의 파시즘에 적극적으로 동참함으로써 민족의 새로운 활로를 열 수 있을 것이라고 믿고 있던 이광수의 소설을 통해 일본 제국주의의 식민사관이 조선민족의 고질적 병폐라고 누누이 강조하던 당파권력투쟁에 희생된 비운의 군인으로서의 이순신, 일제의 강점이라는 민족 비극의 상황에서 민족 저항의 힘을 결집하는 영웅이 아니라, 자신의 인격적 힘으로 열등한 민족을 개조하는 영웅으로서 이순신을 인식하게 된 것이다.
→ 5·16쿠데타 이후 박정희의 각종 저술·연설문·담화문을 보면 무능하고 게으른 국민과 이와는 대조적으로 국가와 민족의 개조에 대한 사명감에 불타는 지도자라는 이분법적 상이 자주 등장한다. 보기를 들어 쿠데타 직후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자격으로 발표한『지도자의 길;혁명과정에 처하여』라는 글에서 혁명기에는 영웅적 지도자가 필요하다는 점을 강조하는 가운데 ‘자율정신과 자각과 책임감’을 결여한 한국 국민을 ‘피지도자’로 규정한 바 있다. 한편『국가와 혁명과 나』에서는 전후 독일의 경제부흥을 높게 평가하면서 라인강의 기적이 지도자 때문이었다는 점을 강조한다. 곧 “비스마르크나 히틀러에 이르러서도 그들의 정치인은 국민을 위하여 일할 수 있는 인물이었던 것이 사실이다. 전후 그 같은 기적이 일어난 것도 결국은 지도자의 힘이라 하여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아무리 우수한 민족성을 지닌 국민이라 하여도, 이를 지도하고 운용한다는 것은, 지도자 여하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는 것이다. 여기서 박정희가 지도자의 역할을 강조하는 가운데 히틀러를 들고 있다는 점은 매우 흥미롭다. 왜냐하면 1930년대 이광수도 박정희와 같은 이유에서 히틀러를 지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상에서 언급한 두 가지 사실을 연결시키면 영웅(지도자)·군인(또는 군대), 일본 제국주의에 대한 숭배가 박정희가 어렸을 때부터 갖고 있던 사회관, 역사관의 근저에 깔려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박정희가 대구사범학교 재학시절에 검도, 군대 나팔, 교련에 심취하고 총검술에서 발군의 실력을 발휘했다든지 문경공립보통학교 교사시절에 아침만 되면 나팔을 불어 마을 사람들을 깨우는 나팔수 역할을 자임한 것은 영웅·군인숭배와 무관한 것이 아니었다. 특히 문경공립보통학교 운동회에서 직접 학생들에게 전쟁놀이를 지도했다는 사실이 주목된다. 그 방식은 재빠른 아이들을 일본군으로 편성하고 대신에 동작이 굼뜬 아이들을 중국군으로 편성해 고지전을 벌이는 것이었다고 한다. 물론 이 놀이는 중국군의 패전으로 끝났다고도 한다. 박정희가 문경공립보통학교에 교사로 재직하고 있던 시기는 일제가 중일전쟁을 일으켜 중국을 침략하고 있던 시기와 일치한다. 조선의 농촌 벽지에서 어린 아이들을 가르치던 교사 박정희는 일본제국 군대의 승전을 고취하는 놀이를 직접 연출할 정도로 일본 제국주의의 침략전쟁에 매료돼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나아가 박정희가 담임을 맡고 있던 학급에서는 학예외 때 박정희가 직접 쓴 ‘지원병 출정’이란 제목의 연극을 공연했다고 하는데, 물론 그 내용은 일본 제국주의 침략전쟁을 적극적으로 성원하는 내용이었을 것이다.
따라서 그가 1939년 비교적 안정된 교사직을 그만두고 만주행을 결행한 것은 결코 돌발적인 일이 아니었다. 그것은 박정희 스스로 밝힌 것처럼 “긴 칼 차고 싶어서”, 즉 만주국에서 세운 만주국군관학교를 졸업한 뒤 군인이 되기 위해서였다. 이 과정에서 연령초과로 입학자격이 없다는 사실을 안 박정희는 “진충보국(盡忠報國) 멸사봉공(滅私奉公)”이라는 혈서를 대구사범학교의 교련 교관으로 있을 때 자신을 아껴 주었고 당시에는 만주국군관학교의 교관으로 있던 아리카와[有川主一] 대좌(大佐)에 보냈고, 이 사실이 현지 신문에 대서특필된 것이 계기가 되어 예외적으로 입학자격을 얻게 되었다.
박정희의 만주행과 관련해서 일각에서는 일본인 시학(視學) 및 교장이 조선인을 차별하는 데 분연히 맞서 싸운 것이 교직을 그만두게 된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다는 점을 들어 박정희가 민족의식에 충일했던 것으로 보는 경향도 있다. 그러나 당시 제자의 증언에 따르면 일본인 교장과 충돌하는 과정에서 박정희는 “내선일체(內鮮一體)의 정신은 조선인과 일본인이 하나가 되어 미영귀축(米英鬼畜)을 몰아내자는 것이 아닌가? 그런데 당신들은 조선인을 차별함으로써 천황의 뜻을 어기고 있는 것이 아닌가”라고 반박했다고 한다. 곧 박정희는 일본인에 의한 조선인 차별 그 자체를 문제삼은 것이 아니라 일제의 말단관료들이 ‘일시동인’이라는 천황의 뜻에 어긋나는 민족차별을 하고 있는 것을 문제삼고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인식에 따르면 천황제 파시즘이야말로 조선인이 일본인의 차별에서 벗어나 평등을 누릴 수 있는 가장 확실한 통로였다. 이러한 생각이 있었기에 박정희는 천황의 군대에 들어가 장교가 되기로 결정했을 것이다. 그러나 당시로서는 식민지 조선인인 박정희가 바로 일본의 군인이 될 수 없엇으므로 먼저 만주국의 군인이 되는 우회로를 택한 것이다.
주지하듯이 박정희가 ‘보국’의 대상으로 여긴 만주국은 일본 제국주의가 만주사변에서 승리한 뒤 세운 ‘괴뢰국가’였다. 만주국은 형식적으로 오족협화(五族協和)라는 구호 아래 민족간 평등을 지향하고 있었으나, 사실상 만주국을 지배한 것은 만주족이 아니라 일본이었다. 만주국 정부에서 실권을 장악하고 있던 것은 일본인 관리였으며 만주국의 군사권, 나아가서는 권력 자체를 장악하고 잇던 것도 만주사변을 일으킨 일본의 관동군이었다. 실제로 당시 만주국은 일본 관동군이 독자적으로 만들어 낸 ‘군대의 나라’였다. 군대가 국민통치의 주체라는 것이 가장 먼저 그리고 가장 극명하게 이루어진 것은 일본이 아니라 만주국이었던 것이다. 관동군이야말로 박정희가 꿈꾼 군대의 전형이었으며, 만주국은 박정희가 바란 국가의 모범이었다. 따라서 만주국군관학교란 표면상으로는 만주국 군대의 장교를 육성하는 기관이었지만, 실제로는 일본 제국주의가 벌이고 있던 대륙침략전쟁의 첨병을 양성하는 어용적 사관학교의 성격을 갖고 있었다.
이와 관련해 만주국군관학교의 교관 가운데는 일본군 장교가 여럿 있었는데, 그 가운데는 1936년에 일어난 군사쿠데타, 곧 이른바 2·26반란 관련자였지만 초급장교라는 이유로 처형을 면하고 만주로 추방된 간노[管野弘] 대위(大尉) 등 황도파(皇道派) 출신 교관들도 포함돼 있었다는 점이 주목된다. 간노 대위 등과 박정희의 관계를 보여주는 공식자료는 없지만 여러 증언에 따르면 박정희는 촉탁 자격으로 만주국군관학교 생도대 제2연대를 지휘하고 있던 간노 대위로부터 많은 지도와 격려를 받았다고 한다. 2·26반란이 일어났을 때 박정희는 대구사범학교에 재학하고 있었는데, 만주국군관학교에서 황도파 출신의 장교들을 만남으로써 비로소 군사쿠데타를 통한 국가개조라는 생각에 본격적으로 눈을 뜨게 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이러한 생각은 일본육군사관학교 입교를 통해 더욱 구체화되었다. 만주국군관학교와 일본육군사관학교의 동기생인 이섭준이나 일본육군사관학교 동기생인 오리구치[折口龍三] 중위(中尉) 등의 증언에 따르면 박정희는 일본육군사관학교 재학시절 2·26반란과 같은 청년장교들의 국가개조 운동에 깊은 관심을 보였다고 한다. 곧 구(舊)정치인들의 부정부패 일소, 재벌의 횡포 방지, 빈부격차의 해소 등을 표방한 청년장교들의 쿠데타에 대해 동감을 표시했다는 것이다.
2·26반란의 주역인 청년장교들에게 가장 사상적으로 큰 영향을 미친 것은 천황제 파시즘 이데올로그이던 기타 잇키[北一輝]였다. 기타가 작성한 ‘일본개조법안대강(1919년)’은 군사쿠데타를 통해 이루려고 한 국가개조가 구체적으로 무엇이었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기타가 국가개조의 내용으로 거론한 것은 ‘① 계엄령을 선포해 의회를 해산하고 천황에게 실권을 넘길 것, ② 한 가족이 취득할 수 있는 재산을 1백만엔, 개인기업의 자본총액을 1천만엔으로 한정하고 그 한도를 넘는 기업은 국가에 귀속시킬 것 ③ 부당하게 억압받는 다른 민족을 구원하기 위해 전쟁을 개시할 것’ 등이었다. 곧 의회민주주의에 대한 부정과 일인지배체제의 확립, 국가의 적극적인 개입에 의한 통제경제의 실시, 아시아주의를 바탕으로 한 ‘대동아전쟁’의 전개가 기타가 표방한 천황제 파시즘 이데올로기의 핵심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기타는 이러한 이상을 실현하기 위한 구체적인 방법으로 귀족·자본가·엘리트적 관료집단에 대한 단호한 행동, 곧 폭력적 테러와 쿠데타를 제기하고 있었는데, 당시 일본에서 기타의 주장을 가장 적극적으로 지지한 것은 황도파의 하급 청년장교들이었다.
1930년대 초부터 일본에서 일어난 일련의 군사쿠데타는 명목상으로는 모두 기타가 주장한 것과 같은 국가개조 운동을 표방하고 있었다. 그러나 여기서 한 가지 유의할 것이 있다. 그것은 실제의 군사쿠데타에서 국가개조와 관련해 구체적인 대안이 제시된 경우는 거의 없다는 사실이다. 특히 2·26반란이 그러했다. 2·26반란은 겉으로는 국가개조를 표방하면서도 천황의 친정(親政) 외에는 그에 대한 어떠한 구체안도 제시하지 않은 채 정계와 재계의 지도자를 암살하는 데 그쳤다.
그런데도 박정희가 2·26반란에 깊은 관심을 갖고 있었던 것은 무슨 이유 때문이었을까? 먼저 국가개조의 일환으로 가난한 농민과 노동자를 착취하는 일본경제의 혁신을 표방하며 이 사건을 일으킨 청년장교들과 스스로 빈농 출신임을 자랑스러워하던 박정희의 정신구조가 유사하다는 데서 그 답을 찾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 2·26반란을 비롯해 1930년대에 군사쿠데타를 일으킨 청년장교들은 대부분 박정희와 같은 농촌 출신이 아니라 군인가문 출신이었다. 따라서 사회·경제적 배경이라는 측면에서 볼 때 박정희가 2·26반란 관련자들과 동질감을 느낄 이유는 거의 없었다. 아마 더 큰 이유는 이 사건은 물론이고 이 사건 이후 일본 안에서 전개된 일련의 정치적 흐름이 모두 “권력은 총구에서 나온다는 것”을 입증하는 것임을 인식하는 계기가 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결국 만주국군관학교와 일본육군사관학교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박정희는 그가 꿈꾸던 대로 ‘천황군대’의 장교가 되었다. 이후 박정희의 의식과 행동을 결정적으로 규정한 것은 천황군대의 장교라는 현실적 지위였다. 여러 가지 특권과 공고한 반봉건적 신분제가 준수되는 군대 안에서 장교라는 지위는 박정희로 하여금 천황제 파시즘 이데올로기를 더욱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고 천황제의 충실한 파수꾼이라는 자각을 갖도록 만들었다. 식민지 조선인인 자신의 운명이 천황제에 직접 결부돼 있다는 객관적 현실을 자각함으로써 박정희는 의식상으로는 역으로 자신의 운명을 국가의 운명으로 생각하게 되었다. 비합법적 쿠데타라도 국가를 위해 정당하다는 사고방식은 이러한 과정을 통해 형성되었을 것이다.
4. 박정희 독재정권 초기 지배 이데올로기와 일본
박정희는 5·16군사쿠데타를 앞둔 자신의 심정을 “일편단심 굳은 결의 소원 성취 못하오면 쾌도할복 맹세하고 일거귀향 못하리라”고 피력한 바 있다. 여기서 ‘할복’이라는 표현은 보통의 한국인에게는 생소한 것이다. 그러나 천황군대의 장교이던 박정희에게 그것은 조금도 낯설지 않은 것이었다. 어떤 의미에서는 자신의 세계관을 가장 함축적으로 드러낸 것이었다고도 할 수 있다. 사실 박정희가 쿠데타를 준비하는 과정에서부터 ‘2·26반란’을 비롯한 1930년대 일본군부의 쿠데타를 모델로 삼거나 일본 군국주의와 국수주의에 경도되고 있었다는 데서도 알 수 있듯이(박정희는 쿠데타 직전에 지인들과 가진 술자리에서 “2·26반란 때 일본의 젊은 우국군인들이 나라를 바로잡기 위해 궐기했던 것처럼 우리도 일어나 확 뒤집어엎어야 할 것이 아닌가?”라고 기염을 토했다고 한다. 대구사범학교 동창으로 박정희와의 술자리에 대개 동석했던『부산일보』주필 황용주가 박정희의 이러한 생각에 대해 “그 놈들은 천황 절대주의자들이고 따라서 일본이라는 국가 중심주의자들이고 퀘퀘묵은 국수주의자들이다. 그 놈들이 일본을 망쳤다는 사실을 모르고 하는 소린가, 알고 하는 소린가?”라고 하며 제지를 해도, 박정희는 “일본의 군인 천황 절대주의 하는 게 왜 나쁜가? 그리고 국수주의가 어째서 나쁜가? ……일본의 국수주의 장교들이 일본을 망쳤다고 했는데 일본이 망한 게 뭐꼬? 지금 잘해 나가고 있지 않나? ……국수주의자들의 기백이 일본 국민의 저변에 흐르고 있어. 그 기백이 오늘의 일본을 만든 거야. ……우리는 그 기백을 배워야 하네”라며 흥분했다고 한다) 일제강점기에 천황제 파시즘의 영향 아래 형성된 세계관은 쿠데타의 성격과 이후 형성된 지배 이데올로기의 문제를 밝히는 바탕이 되는 것이다.
박정희는 5·16쿠데타 이전인 1960년 4월에도 쿠데타를 모의한 바 있는데, 이 과정에서 박정희가 5·16쿠데타 이후 감사원장을 역임했던 이석제에게 한 다음과 같은 말은 이후 박정희 장기집권시대의 이데올로기 문제를 이해하는 데 많은 시사점을 제공한다.
˝박정희:“국가를 지도하려고 마음먹은 사람들은 우선 두 가지 문제에 근본적인 대안을 가져야 합니다. 우선 국민들이 배고프지 않게 밥을 먹이고 그 다음에 나라를 자기네 힘으로 지키게 하는 것이 통치의 근본입니다.”
이석제:“국가 근대화란 뭐를 어떻게 한다는 말입니까?”
박정희:“이론상으로는 복잡하고 나도 잘 모릅니다. 하지만 쉽게 해석하자면 농업사회를 뜯어 고쳐서 공업화를 추진한다는 정도로 생각하면 이해가 쉬울 거요. 우리나라 인구가 대략 3천만인데 언제 농사를 지어서 국민들의 배를 불리겠소? 농토에 매달리는 농민들을 공장으로 끌어내서 소득을 높여 주는 국가기스템을 잘 연구해 봅시다.”
이석제:“공장을 지을 돈은 어디서 조달합니까?”
박정희:“가진 게 없다고 굶어죽을 수는 없으니까 우선 급한 대로 돈 있는 집에 가서 돈을 좀 빌려다가 장사를 해서 갚으면 될 게 아니오? ……너무 걱정하지 맙시다. 미국 문제도 잘 해결될 거요. 앞으로는 일본이 있잖소?”˝
이 대화에서는 지도자의 문제를 강조한 것이라든지 농업을 희생하는 공업화전략을 고려하고 있었다는 것도 흥미롭지만, 가장 흥미로운 자본주의 세계경제 안에서 한국의 경제적 파트너로 미국 대신 일본을 적극 고려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실제로 당시 미국이 한국에 대해 갖는 영향력을 고려할 때 노골적인 반미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면서도 일본과 적극적으로 관계를 맺음으로써 일방적인 친미 반공국가에서 탈피하려는 인식을 갖고 있었다는 것이 주목된다. 따라서 일본은 쿠데타의 기획단계에서 가장 핵심적으로 고려되던 요소였다. 그러나 일본이 중요한 것은 단지 돈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일본은 한국의 근대화가 지향해야 할 하나의 모델로 설정되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쿠데타 직후에 발표된 혁명공약을 통해 쿠데타가 무엇을 지향했는지 살펴보기로 하자. 혁명공약은 다음의 6항으로 구성돼 있다.
˝1. 반공을 국시의 제일의(第一義)로 삼고 지금까지 형식적으로 구호에만 그친 반공태세를 재정비 강화한다.
2. 유엔헌장을 준수하고 국제협약을 충실히 이행할 것이며 미국을 위시한 자유우방과의 유대를 더욱 공고히 한다.
3. 이 나라 사회의 모든 부패와 구악을 일소하고 퇴폐한 국민도의와 민족정기를 다시 바로잡기 위하여 청신한 기풍을 진작시킨다.
4. 절망과 기아선상에서 허덕이는 민생고를 시급히 해결하고 국가 자주경제 재건에 총력을 기울인다.
5. 민족적 숙원인 국토통일을 위하여 공산주의와 대결할 수 있는 실력배양에 전력을 집중한다.
6. (군인) 이와 같은 우리의 과업이 성취되면 참신하고도 양심적인 정치인들에게 언제든지 정권을 이양하고 우리의 본연의 임무에 복귀할 준비를 갖춘다.
(인간) 이와 같은 우리의 과업을 조속히 성취하고 새로운 민주공화국의 토대를 이룩하기 위하여 우리는 몸과 마음을 바쳐 최선의 노력을 경주한다.˝
이상의 혁명공약을 놓고 볼 때 박정희를 비롯한 군사쿠데타 세력의 이념적 지향은 이승만 정권이나 장면 정권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이를테면 혁명공약의 1항과 2항은 이승만 정권 이래의 친미반공주의를 답습하는 것이었고, 4항과 5항도 기존의 경제제일주의와 신건설 후통일론과 차이를 보이지 않는 것이었다. 따라서 쿠데타라는 비정상적인 방법을 동원해 권력을 장악한 군부세력의 독자적인 이념적 지향성은 정권획득의 혁명성에 비해 겉으로는 크게 드러나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이 혁명공약에는 겉으로 드러나지 않으면서도 중대한 의미를 가진 부분이 숨어 있다. 그것은 바로 이승만 정권 시절만 해도 반공주의 이데올로기와 함께 지배 이데올로기의 가장 중요한 구성요소이던 반일주의가 사라졌다는 것이다.
군사쿠데타에 의해 무너진 장면 정권 자체도 한일관계 개선에 적극적으로 나서는 등 이승만 정권의 반일주의와는 다른 모습을 보이고 있었지만, 구호 내지는 상징으로서의 반일이 전면적으로 철회된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 군사쿠데타 세력은 혁명공약에서 반일구호를 과감하게 제외시킨 것이다. 박정희 장기집권시대에 국가와 민족이라는 언술이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자주 등장한 것과 연결지어 볼 때 한국민족주의의 구성요소 가운데 핵심을 차지하던 반일이라는 부분이 빠져나간 것은 일견 역설적인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사실은 바로 여기에 박정희 장기집권시대 초기 지배 이데올로기의 증요한 측면이 있다. 물론 아직 대중적으로 반일정서가 강한 상황에서 노골적으로 반일 대신에 친일을 표방하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박정희가『국가와 혁명과 나』에서 일본의 메이지유신에 대해 길게 쓰는 가운데 “국민 제위는 이러한 일본역사의 기술에 불쾌해 하실 것이지만, 조금만 참아 주기 바란다. 이 불쾌를 맛보지 않으면 안 되는 우리의 처지가 더욱 딱하다”고 적고 있듯이 박정희 독재정권은 국민들의 반일정서가 아직 강하게 남아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굴욕적인 자세로 한·일 국교정상화에 임하는 등 사실상 변화된 일본관이 박정희 장기집권시대 초기부터 드러나고 있었다. 여기에 일본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 박정희의 발언을 몇 회 인용해 보기로 하자.
“과거 우리와 일본간의 관계로 말한다면, 그것은 분명히 구적(仇敵)관계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과거다. 그것은 우리의 현재가 아니다. 또 미래가 그럴 수 없다는 것은 다시 말할 필요조차 없는 것이다.”(1865년 12월 8일 한일협정비준서 교환에 즈음한 담화문)
“과거 우리 민족의 수난사를 들추어보면 일본 사람에 대한 민족의 감정과 원한이 일조일석에 가셔지기에는 너무나 상처가 크다고 아니할 수 없다. 그러나 과거의 상처도 상처려니와, 보다 심각한 문제는 국토가 분단되고 공산주의의 위협으로 둘러싸인 오늘의 조국의 현실과 그 입장인 것이다. 우리의 입장으로서는 과거에만 집착한 나머지 현재의 미래마저 그르칠 수가 없는 것이다.”(1966년 1월 18일 연두교서)
“우리 한국민족이 동남아시아로, 전세계로 뻗어 나가고 약진하는 새로운 한국을 건설하기 위해서, 일본 사람에 대한 원한이 일조일석에 해소될 수 없는 문제지만, 우선 이 이웃사람들하고 손을 잡아야 되는 것이다.”(1967년 4월 17일 대전 유세연설)
곧 일본은 우리의 이웃이지 과거의 적이 아니라는 것이며 일본 제국주의 식민지 지배는 현재도 미래도 아닌 과거일 뿐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반일주의란 국가재건을 위해 아무런 필요가 없는 것, 더 정확하게는 장애가 되는 것으로 간주될 수 밖에 없었다.
나아가 위의 마지막 인용문에서 반일을 청산하기 위한 이유로 들고 있는 것이 아시아와 세계로의 진출이라는 사실에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실제로 박정희는 5·16쿠데타 직후에 이미 “양국간은 자유 태평양을 보전하기 위하여서도, 아시아 10억인의 유색인종의 명목을 위한 공동관심으로서도, 피차에 등을 지고 살 수 없는 일이다”고 주장한 바 있다. 곧 박정희는 만주사변·중일전쟁·태평양전쟁으로 이어지는 전시체제에서 일제가 내건 ‘아시아 인종’ 담론으로부터 결코 자유롭지 못했던 것이다.
이는 결국 한국의 근대화를 전망하는 박정희의 시각이 일제강점기에 일본 제국주의의 천황제 파시즘 이데올로기에 의해 일제를 모델로 형성된 것이었음을 보여준다. 실제로 5·16군사쿠데타 자체도 일본의 2·26군사쿠데타를 모델로 한 것이었지만, 쿠데타가 성공한 이후 꿈꾼 국가재건도 일본의 메이지유신과 아시아주의를 모델로 한 것이었다. 곧 일본 제국주의는 한국이 근대화되기 위해 따라가야 할 모델이었다.
이와 관련해『국가와 혁명과 나』에서 박정희는 주목할 만한 언급을 하고 있다. 먼저 “세계사에 부각된 혁명의 각 태상(態像)”이라는 제목의 장에서 한국이 본받아야 할 혁명의 모델로 산업혁명, 프랑스의 민권혁명, 중국의 삼민주의혁명, 일본의 메이지유신, 터키의 앙카라혁명, 이집트의 7·23쿠데타 등을 꼽고 있는데 이 가운데 제3세계의 혁명 가운데 메이지유신 외에 국가와 민족을 위한 성공적인 혁명이었다고 평가된 앙카라혁명과 7·23쿠데타가 모두 군사력에 의한 정변이었다는 것이 눈길을 끈다. 그러나 이 책에서 표방된 박정희의 혁명론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메이지유신에 대한 평가다.
박정희는 “일본이 메이지유신이란 혁명과정을 겪고 난 지 10년 내외에는 일약 극동의 강국으로 등장하지 않았던가? 실로 아시아의 경이요, 기적이 아닐 수 없다”고 감탄했다. 그렇다면 박정희가 본 메이지유신의 특징은 무엇인가?
˝첫째, 메이지유신은 그 사상적 기저를 천황 절대제도의 국수주의적인 애국에 두었다. 둘째, 이리하여 이들은 밖애서 밀려오는 외국의 사상을 일본화하는 데 성공하고, 또한 국내적으로 진통을 거듭하는 유신과업에의 외세침입을 방어할 수 있었다. 셋째, 번주(藩主) 세력을 제거하고, 천황과 에네르기슈한 사회 중견층을 직접 연결함으로써 봉건상 탈피와 신진기운을 조성하였다. 넷째, 유신대업에 앞장섰던 대정인을 정치·경제의 중심무대에 등장하게 하여 국가자본주의를 육성하고, 이 정치·경제 양 세력이 천황을 정점으로, 귀족을 국가의 원로로 하는 제국주의적 체제를 확립하였다.
이와 같이 이들은 자신의 확고한 주체성 위에 정치적인 개혁과 경제적인 향상, 사회적인 개혁을 수행하여 왔기 때문에, 구미체제에의 편중을 극복할 수 있었고, 서서히 여유 있는 진행을 보게 된 것이다.˝
박정희는 천황제, 국수주의적 애국, 외래사상의 일본화, 국가 자본주의, 제국주의를 주요 내용으로 하는 메이지유신이 “금후 우리의 혁명수행에 많은 참고가 될 것은 부정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에, 본인은 이 방면에 앞으로도 관심을 계속하여 나갈 것이다”는 말로 메이지유신에 대한 서술을 마치고 있다. 곧 한국근대화의 모델을 일본의 메이지유신으로 설정하고 있었던 것이다. 여기에는 메이지유신 결과 등장한 일본 제국주의와 천황제에 대한 부정적 언급은 전혀 포함돼 있지 않다. 메이지유신을 통한 일본의 발전에만 주목했을 뿐, 그것을 통한 일본 제국주의의 성립이 조선의 식민지화로 이어졌다는 역사적 사실에 대한 관심은 전혀 존재하지 않았다. 이는 결국 사범학교와 군관학교·사관학교 시절에 배운 황민화교육이 집권에 성공하고 난 이후 박정희의 세계관을 규정하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실제로 군사쿠데타 직후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이 된 박정희는 비서실장인 박태준을 통해 야스오카[安岡正篤]라는 인물과 접촉을 시도한 바 있다. 야스오카는 양명학(陽明學)에 밝은 동양사상가로 1945년 이전부터 일본을 이끌 지도자의 역할을 강조하는 한편 ‘동양 중심=일본 중심’ 이론을 전파했으며, 전후에도 요시다[吉田茂] 등 일본의 역대 수상이 모두 스승으로 모시면서 가르침을 받을 정도로 일본 정계와 재계의 막후 실력자로 활동함으로써 ‘동양 사상의 일인자’, ‘역대 수상의 지혜 주머니’라는 평가를 받던 인물이었다. 특히 히로히토[裕仁] 일본 황제가 종전칙어(終戰勅語)를 발표하기 전에 가필을 했는가 하면, 히로히토의 죽음과 함께 쇼와시대가 끝나자 새로 헤이세이[平成]라는 연호를 지어 헤이세이시대를 열 정도로 천황제와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었다. 그런데 박정희는 야스오카의 아시아주의를 높게 평가하고 있었다. 실제로 박정희와 야스오카 사이에는 서신을 통한 접촉이 지속되었다. 박정희가 정권을 잡자마자 아시아주의를 거론하면서 일본의 대표적인 천황주의자, 아시아주의자를 떠올렸다는 것은 의미심장한 일이다. 이는 박정희 자신이 일제강점기 일본에서 성행하던 아시아주의에 상당부분 매료된 바 있었음을 시사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메이지유신을 모델로 삼는 근대화노선을 추구하고 아시아주의에 매료돼 있던 박정희로서는 일본과의 관계개선에 적극적으로 나설 수밖에 없었다. 물론 박정희가 한일회담에 적극적이었던 데는 1960년 1월 미일상호안보조약의 갱신을 계기로 동북아에서 미국이 수행하던 군사적 역할을 일본이 대신 맡게 되는 상황과 관련해 일본을 중심으로 동북아지역 통합전략의 일환으로 한국과 일본의 국교정상화를 원한 미국 측의 의도가 강력하게 반영되었다. 게다가 이미 미국의 경제원조에 회의적인 시각을 갖고 있던 박정희는 쿠데타의 정당성을 획득하기 위한 경제 개발의 지원을 일본에게 요구할 수밖에 없었고, 그러기 위해서는 한일회담이 꼭 필요했던 측면도 있다. 그러나 그 바탕에 깔려있던 것은 일본 제국주의를 모델로 삼아 근대화를 이루겠다는 생각이었다.
그것은 1961년 말 최초의 외유지로 일본을 선택해 도쿄를 방문하는 과정에서 드러났다. 박정희는 11월 12일 자민당 간부들과의 모임에서 일본식 예법으로 인사를 한 뒤 “아무 것도 모르고 아무 경험조차 없는 우리는 다만 맨주먹으로 황폐한 조국을 재건하려는 의욕만 왕성합니다. 마치 일본 메이지유신을 성공시킨 일본의 지사들과 같은 의욕과 사명감을 가지고 그 분들을 본받아 우리나라를 가난에서 벗어나 부강한 나라로 만들어 가려 하고 있는 것입니다”라고 하면서 한국에 대한 일본의 경제적 지원을 요구한 것이다. 그것은 단순한 경제적 논리나 정치적 논리를 초월한 것이었다.
5. 맺음말
작년 한 해 일본 역사교과서 왜곡 문제로 온 나라가 시끄러웠다. 이와 관련해서 한국사회에서는 일본의 국가주의를 비판하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그렇다면 역으로 한국은 어떠한가? 내셔널리즘이라는 영어를 한국에서는 민족주의로 번역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내셔널리즘을 국가주의로 번역하는 사람은 거의 없고 국가주의에 대해 언급하는 경우도 거의 없다. 거기에는 민족주의는 바람직한 것이지만 국가주의는 그렇지 않다는 의미가 함축돼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고 해서 한국 근·현대사에서 국가주의의 흐름이 없었던 것은 결코 아니다. 한국의 국가주의에는 두 가지 역사적 기원이 있다. 그 하나는 19세기 말 이후 외세의 침탈을 받고 1910년에는 국망을 당하면서 ‘잃어버린’ 나라를 되찾아야 한다는 의미에서 국가에 절대적인 의미를 부여한 민족해방운동의 전통이다. 다른 하나는 일본 제국주의 세력의 식민지 지배 이데올로기에 의해 각인된 국가주의의 전통이다. 필자가 여기서 주목한 것은 후자의 측면, 곧 일본 제국주의 천황제 파시즘과 연결된 국가주의였다. 국가주의는 해방 이후 남한에 단독정부가 수립하는 과정에서부터 어느 정도 단초가 마련되었지만 그것이 본격화된 것은 박정희 정권 이후였다.
박정희는 황국 신민화를 강조하던 시기에 일본 제국주의 식민지 교육을 받았다. 박정희는 일본 제국주의와 군대를 동경하던, 식민지 교육의 모범생이었다. 사범학교나 사관학교같이 식민지교육의 담당자 및 군간부를 양성하는, 따라서 입학자격도 까다로울 수밖에 없는 기관에 계속 진학했다는 사실은 박정희의 세계관이 무엇을 지향하고 있었는지 단적으로 보여준다. 박정희는 사범학교와 사관학교를 거치면서 교사로서 군인으로서 일제의 식민지 지배를 유지하고 강화하는 데 일익을 담당한 바 있다. 더 중요한 것은 일본 제국주의의 천황제 파시즘 이데올로기를 내면화했다는 것이다. 그 정도는 같은 시대를 살았던 다른 청소년에 비해 더 강했을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볼 때 1961년 5·16군사쿠데타 과정에서 박정희가 일본의 2·26군사쿠데타를 모델로 삼고, 집권 이후에는 일본의 메이지유신을 근대화의 모델로 설정한 것은 일제강점기에 내면화한 이데올로기의 자연적 발현이었다. 물론 1960년대를 전후한 시기의 시대적 상황, 이를테면 동북아를 둘러싼 국제정세의 변화도 박정희 유신독재시대의 지배이데올로기가 형성되는 과정을 규정하는 요인이었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집권하기 이전에 박정희가 내재화한 세계관이 지배 이데올로기의 형성과정에 큰 영향을 미친 것이다. 그것은 구체적으로 이전의 정권이 표방하던 반일주의를 지배 이데올로기에서 배제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그리고 그러한 지배 이데올로기상의 변화는 현실적으로 조속한 동시에 굴욕적인 한·일 국교정상화로 귀결되었다. 박정희는 빠른 기간에 서구와 맞설 정도의 근대화를 이룬 일본의 국력에 압도되어 일본을 따라가는 것만이 한국이 근대화될 수 있는 지름길이라고 인식했다. 필요하다면 이미 근대화를 이룬 일본에도 의존해야 한다는 논리도 갖고 있었다. 심지어 제국주의적 침략마저도 필요한 것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 이준식 전 연세대학교 국학연구원 교수
{이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