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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원 통일왕조의 대규모 침략을 물리친 고구려의 완승, 여수전쟁(麗隨戰爭)!

참의부 |2013.08.17 01:45
조회 132 |추천 0

 

서기 581년에 북주(北周)의 정제(精帝) 우문찬(宇文贊)이 외조부인 양견(楊堅)에게 양위(讓位)함으로써 수(隋) 제국이 건국되었다. 고구려(高句麗) 평원태왕(平原太王)은 그 해 12월에 수나라와 국교를 맺는다는 명목으로 사신을 파견했다. 평원태왕은 그로부터 한달밖에 지나지 않은 이듬해 정월에 또 다시 사신을 수나라에 파견했으며, 그 이듬해인 583년 정월과 4월, 그리고 겨울에도 수나라에 사신을 보내 대륙 정세를 입수하려 애썼다. 고구려는 수의 등장으로 야기된 대륙의 정세 변화가 통일로 치닫는 것인지, 아니면 통상적인 왕조교체인지 예의 주시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 무렵 평원태왕은 수에 사신을 보내는 한편 남진(南陳)에도 사신을 계속 파견하여 이이제이(夷以制夷) 방식의 외교정책을 수행하였다. 그러다가 589년 수나라가 남진을 멸망시키고 중국을 통일하자 평원태왕은 크게 긴장하여 ‘개황(開皇) 초에는 입조(入朝)하는 사신이 자주 있었으나 진(陳)을 평정한 뒤로는 탕(湯)이 크게 두려워하여 군사를 훈련시키고 곡식을 저축하여 방어할 계획을 세웠다’는《수서(隨書)》고구려전(高句麗傳)의 기록처럼 외적의 침략에 대비하는 정책을 취했다. 고구려는 수나라의 중국 통일이 무엇을 예고하는지 직감적으로 알아차린 것이다.

 

590년에 고구려에서 평원태왕이 붕어(崩御)하고 영양태왕(嬰陽太王)이 왕위를 이었다. 영양태왕은 25년간의 태자 경험을 통해 국정의 핵심을 잘 꿰고 있었다. 한마디로 준비된 군주였던 것이다. 그는 591년과 이듬해에 수나라에 사신을 보냈으나 이는 조공(朝貢)이 목적이라기보다는 정보수집의 성격이 강했다.

 

수(隨) 문제(文帝)는 584년만 해도 고구려에서 온 사신을 위해 대흥전(大興殿)에서 잔치를 베풀어줄 정도로 고구려를 회유하려 했다. 그러나 평원태왕의 뒤를 이어 즉위한 영양태왕이 수와 대결 자세를 누그러뜨리지 않자 597년 국서를 보내 불만을 터뜨리게 되었다.

 

“왕이 남의 신하가 되었으면 모름지기 짐(朕)과 덕(德)을 같이 베풀어야 할 터인데, 오히려 말갈(靺鞨)을 못견디게 괴롭히고 거란(契丹)을 금고(禁錮)시켰다. (…) 우리 나라는 공인(工人)이 적지 않으니, 그대가 반드시 필요하다면 나에게 주청하는 것이 마땅한데도 여러 해 전에는 몰래 재물을 뿌려 소인을 움직여 사사로이 노수(弩手)를 빼어갔다. 병기(兵器)를 수리하는 목적이 나쁜 생각에서 나온 까닭에 남이 알까 봐 두려워서 그런 것이 아니겠는가?”

 

‘말갈을 괴롭히고 거란을 금고시켰다’는 표현은 당시 고구려가 말갈과 거란 지역을 장악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고구려는 만주를 중심으로 한 자신의 천하관을 계속 유지하고 있었다. 만주는 여전히 수나라의 천하가 아니라 고구려의 천하였다.

 

‘공인을 몰래 빼갔다’는 말은 영양태왕이 수와의 전쟁에 대비해서 다연발 화살인 쇠뇌를 만들거나 쏠 줄 아는 장인들을 돈으로 매수해 고구려로 데려왔다는 주장이다. 마치 핵미사일이나 첨단무기를 연구하는 적국의 과학자를 포섭해오는 현재의 첩보전(諜報戰)을 연상케 하는 고도의 전략이었다. 문제의 불평은 계속된다.

 

“왕은 짐의 사자(使者)를 빈 객관(客館)에 앉혀놓고 삼엄한 경계를 펴며, 눈과 귀를 막아 끝내 듣고 보지도 못하게 했다. 무슨 흠흉한 계획이 있기에 남에게 알리고 싶지 않아서 관원을 막으며 그 살피는 것을 두려워하는가? 또 종종 기마병을 보내 짐의 변경 사람을 살해하게 하고…” 

 

당시 고구려가 수나라에 보낸 사신이나, 수나라가 고구려에 보낸 사신은 통상적인 외교사절이 아니라 일종의 간자(間者)였다. 따라서 영양태왕은 수나라의 사신이 고구려의 정세를 간파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 빈 객관에 가두어놓았다. 그리고 수나라의 변경지대에 군사를 보내 공략했다. 영양태왕은 수나라의 공격에 대비해 모든 준비를 갖추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놀랍게도 상대방에게 먼저 공격을 개시한 나라는 수가 아니라 고구려였다.『삼국사기(三國史記)』고구려본기(高句麗本紀)의 해당 기사를 보자.

 

‘영양왕(嬰陽王) 재위 9년(서기 598년)에 왕이 말갈(靺鞨) 군사 1만여명을 거느리고 요서(遼西) 지방을 공격하니, 영주(營州) 총관(摠管) 위충(韋沖)이 이를 격퇴하였다. 수황(隨皇)이 이를 듣고 크게 노해 한왕(漢王) 양(諒)과 왕세적(王世績)을 원수(元帥)로 삼아 수륙군(水陸軍) 30만을 거느리고 와서 치게 하였다.’

 

고구려(高句麗) 영양태왕(嬰陽太王)이 수(隨)를 선제공격한 것은 보통 사건이 아니었다. 1만여명의 군사를 동원해, 그것도 국왕이 직접 요서를 공격했다는 사실은 전면전(全面戰)을 각오하지 않으면 할 수 없는 행위였다. 그런데 영양태왕은 이 군사작전에서 고구려의 정예군이 아니라 말갈족(靺鞨族) 병사들을 동원하였다. 영양태왕이 자신의 친위군 대신 말갈족으로 이루어진 군대를 이끌고 요서 지방을 공격했다는 것은 수의 기세를 꺾는다는 대외적 측면만이 아니라 고구려 국내를 겨냥한 대내적 측면도 함께 지닌 행위였다.

 

중원의 통일제국인 수나라를 선제공격할 경우 극도의 긴장이 조성될 것이 분명했다. 이 경우 고구려 국내는 내부 분쟁을 중지한 채 전시체제에 돌입할 수밖에 없었다. 이 전시체제의 정점에는 당연히 영양태왕이 있었다. 중국에 통일왕조가 들어설 경우 고구려와 한판 대결이 불가피하다고 영양태왕은 판단하고 있었다. 이 경우 수나라가 체제를 완전히 정비하기 전에 싸우는 것이 낫다고 판단하여 선제공격을 감행한 것이다. 또한 선제공격을 통해 전시체제를 갖춤으로써 국내의 귀족들을 국왕권 아래 편재하려 한 것이다. 영양태왕의 요서 선제공격은 이런 다각적인 목적을 지닌 의식적인 공세였다.

 

수(隨) 문제(文帝)는 대륙 통일의 위업을 달성한 제왕으로서 자국이 통일을 달성한지 얼마 안 되어 요서 지역을 선제공격함으로써 통일제국 수의 권위를 손상시킨 고구려를 좌시할 수는 없었다. 문제는 넷째 아들 한왕(漢王)과 왕세적(王世績)에게 30만의 대병력를 주어 고구려를 치게 했다. 수나라 군사들은 산해관(山海關) 서북 지역인 임유관(臨渝關)을 지나 공세를 시작했다. 이 지역은 만리장성의 동쪽 끝 지역으로 전략상 요충지였다. 임유관을 기세 좋게 통과해 고구려의 영토로 진격을 개시한 수나라 군사들에게는 가혹한 시련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삼국사기』에는 30만 대군을 동원한 제1차 여수전쟁(麗隨戰爭)에 대해 별다른 기록이 없다. 다만 그 해 9월에 수군(隨軍)이 철수했는데 죽은 자가 열에 여덟, 아홉이나 되었다고 기록했을 뿐이다. 기록상 수나라 군사들의 철수는 기후 때문이라고 되어 있다. 육군은 장마를 만나 군량의 수송이 끊어지고 전염병이 돌았으며, 고구려 수도 평양성으로 향하던 수군도 폭풍을 만나 병선(兵船)을 많이 잃어버렸기 때문에 철수했다는 것이다.

 

『수서(隨書)』는 이런 기후 외에도 수나라의 군사력을 두려워한 영양태왕이 사신을 통해 보낸 표문을 예로 든다.

 

‘원(元)도 두려워하여 사신을 보내어 사죄하고 표문을 올리는데 '요동 분토(糞土)의 신(臣) 원(元) 운운'하여서 고조(高祖)는 이에 군사를 거두어들이고 과거와 같이 대우하였다.’

 

『삼국사기(三國史記)』도 ‘영양태왕이 두려워하여 사신을 보내어 사죄의 글을 전했는데 요동 분토(糞土)의 신(臣) 모(某)라고까지 일컬었다’면서『수서』의 이 기록을 인용했다. 마치 영양태왕이 자세를 낮추고 잘못을 빌어서 철수했다는 식의 내용이다. 그러나 장마나 폭풍, 분토의 신 운운은 수나라의 참패를 감추기 위한 의도적인 기록에 불과하다. 수나라가 철수한 음력 9월이면 장마나 폭풍은 이미 다 지난 때였다. 또한 아직 겨울이 본격적으로 다가오기 전이었다.

 

요동반도에서 평양성으로 가는 뱃길은 황해를 곧장 가로지르는 직항로가 아니라 연안을 따라서 항해하는 우회로였다. 폭풍을 만나면 해안에 정박해 잠시 피한 후 바람이 멎으면 다시 항해하는 식이었다. 이런 식의 항해는 장마와 폭풍으로 인한 피해를 최소화시킬 수 있었다. 따라서 고구려군과 싸우지도 않고 장마와 폭풍 때문에 병력의 8~9할이 죽을 수는 없었다. 물론 장마와 폭풍이 전혀 없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이 경우에도 고구려군이 장마와 폭풍 그리고 지리를 이용해서 수나라 군사들을 기습해 대파했다고 보아야 합리적일 것이다. 이런 참패를 뼈아프게 여긴 문제가 그 내용을 숨기기 위해 자연재해와 영양태왕의 표문을 빌미로 삼은 것이다.

 

영양태왕은 말갈 군사를 동원해 요서를 공격할 때 수나라가 응전하리라는 사실을 충분히 예상하고 있었다. 말갈 군사를 동원한 요서 공격은 사실상 고구려 측의 유인책(誘引策)이었다. 고구려는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다가 반격을 가해 수나라의 침략을 물리쳤던 것이다. 김부식(金富軾)은 중국 측의 기록만을 보고『삼국사기』에 수나라와의 첫번째 전쟁을 기록했기 때문에『수서』와 비슷하게 적은 것이다.

 

단재(丹齋) 신채호(申采浩) 선생은 지금은 전하지 않는『대동운해(大東韻海)』와『서곽잡록(西郭雜錄)』이란 책을 인용해 제1차 여수전쟁 때에 고구려군을 통솔한 장수(將帥)가 강이식(姜以式)이라고 밝혔다. 또한 당시 고구려군은 수나라 군사의 출발지인 임유관 유역에서 교전하여 큰 승리를 거두었는데 수나라 사람들이 자신들의 패배를 감추기 위해 역사를 왜곡했다고 주장했다.『수서』나『삼국사기』의 기록보다는 단재의 이런 주장이 훨씬 설득력이 있다. 강이식이 총지휘하는 고구려군은 수나라 군사들이 고구려 영토 깊숙이 올 때까지 기다리지 않고 접경지대까지 가서 매복하고 있다가 기습공격으로 섬멸했다. 변변히 싸워보지도 못하고 대군을 잃은 수나라는 이 사실을 숨기기 위해 자연재해와 영양태왕의 표문을 빌미로 삼은 것이다.

 

영양태왕은 수나라의 30만 대군을 일거에 격퇴해 대승하자 2년 뒤인 660년에 태학박사 이문진(李文眞)으로 하여금 고구려의 역사서인『신집(新集)』5권을 편찬하도록 했는데, 이는 중원의 통일제국 수(隨)를 완패시킨 자부심의 표현이었다. 이 책은 국초(國初)부터 있던 100권짜리 고구려 역사서『유기(留記)』를 수정한 것인데 이 승전(勝戰)의 내역이 기록되었을 것임에는 틀림없다.

 

수나라가 고구려와의 전쟁에서 패배한 것은 문제(文帝)의 권위에 여러 세력이 도전하는 빌미를 주었다. 문제는 내환(內患)에 시달리던 끝애 604년 7월 태자 광(廣)에게 시해되고 말았다. 그 해 8월에는 고구려를 침공했던 한왕(漢王) 양(諒)이 거병하자 양소(楊素)가 진압하는 등 수나라는 내부 혼란이 계속되었다.

 

아버지를 죽이고 즉위한 수(隨) 양제(煬帝)에게 고구려 정복은 반드시 해결해야 할 과제였다. 만주 벌판을 차지하고 수나라와 당당히 맞서는 고구려를 정복하지 않고서는 진정한 천하 통일을 이룩했다고 말할 수 없었다. 반면 고구려(高句麗) 영양태왕(嬰陽太王)은 이제 수나라를 두려워하지 않았다.『수서(隨書)』는 영양태왕이 전쟁 후에도 “해마다 사신을 보냈다”고 기록했으나 이는 패전(敗戰)의 수모를 감추기 위한 왜곡이고, 실제 영양태왕이 수나라에 사신을 보낸 것은 수나라의 대군을 전멸시키고 2년 후인 600년 단 한번뿐이다.

 

제위(帝位)에 오른 양제는 낙양에 새로운 대궁궐을 짓고 대운하를 만들고 만리장성을 수축하는 등 황제권을 강화하기 위한 각종 조치를 취했으나 고구려를 복종시키지 못하는 한 진정한 황제권 강화는 요원했다. 만주 일대에 독자적인 천하관을 지닌 고구려가 존재하는 한 통일제국 수나라의 황제권은 불완전할 수밖에 없었다. 양제가 만리장성을 수축한 이유는 기세가 오른 고구려가 중원으로 침략해올까봐 우려했기 때문이다. 어차피 두 나라 사이에 동아시아의 패권을 둘러싼 또 한번의 전쟁은 불가피한 것이었다.

 

그런데 고구려의 고민은 세계 최강의 수나라와 싸우면서 남쪽의 백제와 신라도 상대해야 한다는 점이었다.『수서』는 제1차 여수전쟁 때에 백제(百濟) 혜왕(惠王)이 사신을 보내 고구려 침략군의 길잡이가 되겠다고 자청했다고 전한다. 그러나 이때는 수나라의 30만 대군이 강이식 휘하의 고구려군에게 일격을 받고 패퇴해 철수한 뒤였다. 문제는 “고구려왕(高句麗王) 고원(高元)의 군신(君臣)이 두려워하여 죄를 스스로 인정하고 복종하므로, 짐(朕)은 이미 죄를 용서해주었기 때문에 토벌할 수가 없다”면서 백제의 호의를 거절했다. 그러나 문제는 백제의 사신을 후하게 대접해 자신의 씁쓸한 마음을 달랬다. 이 소식을 들은 영양태왕은 수나라의 길잡이가 되겠다고 자청한 데 대한 보복전(報復戰)으로 군사를 내어 백제 땅을 공격하게 했다.

 

영양태왕은 603년에 대모달(大模達) 고승(高勝)을 보내 신라가 장악한 북한산성을 빼앗게 했으나, 신라(新羅) 진평왕(眞平王)이 직접 출전하여 거세게 저항하는 바람에 뜻을 이루지 못했다. 신라는 고구려와의 전쟁에 전력을 투입할 수 있었으나 고구려는 그러지 못했다. 고구려는 전(全) 병력을 백제나 신라와의 싸움에 투입할 수가 없었다.

 

607년 5월 영양태왕은 군대를 파견해 백제의 송산성(松山城)을 치게 했으나 성공하지 못했다. 그러나 석두성(石頭城)을 공격하여 남녀 3천여명을 사로잡아온 데 이어 이듬해 2월에는 다시 군대를 파견해 신라의 북쪽 영역을 공략하게 하여 민간인 8천여명을 포로로 삼았으며, 4월에는 신라의 우명산성(牛鳴山城)을 빼앗았다. 고구려는 서북쪽과 남쪽에서 두개의 전선을 넘어 세개의 전선을 운영해야 했다. 이런 상황에서 제2차 여수전쟁(麗隨戰爭)이 다가오고 있었다.

 

607년에 수(隨) 양제(煬帝)는 지금의 몽골 지역에 있던 돌궐족(突厥族) 지도자 계민가한(啓民可汗)의 장막으로 거동했다. 그만큼 수나라에게 북방 영역은 중요한 곳이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이때 마침 영양태왕도 계민가한에게 사신을 보냈고, 양제는 계민가한의 장막에서 고구려 사신과 만나게 되었다. 영양태왕은 돌궐족과 연합전선을 맺어 수나라를 압박하려 했던 것이다. 이때 양제는 고구려 사신에게 강력하게 경고했다.

 

“고구려왕은 내년에 북경으로 직접 입조(入朝)하라. 안전은 보장하겠다.”

 

그러나 영양태왕은 직접 입조하기는커녕 사신도 보내지 않았다. 사신은커녕 수나라의 사신이 백제나 신라 등으로 가는 길을 막아 양제의 표현대로 “사명을 받든 수레가 해동(海東)에 갔을때 길을 가로막고 왕인(王人)을 거절”했다. 뿐만 아니라 백제나 신라의 사신들이 수나라로 가는 길도 막았다.

 

그러자 611년에 양제(煬帝)는 군사를 일으켜 직접 고구려 침략에 나섰다. 이때 수나라의 침략군 규모는 문제(文帝)가 보냈던 30만 대군과 비교가 되지 않았다. 전투병력만 113만 3천 8백명으로 통칭 2백만 대군이라고 일컫는 역사상 유례없는 대부대였다. 군량과 기타 군수품을 운반하는 보급부대의 숫자는 이것의 배가 되었으니 무려 3백만~4백만의 대부대가 고구려 침략에 나선 것이다.

 

양제는 침략군을 일으키기 전에 만반의 준비를 갖추었다. 그는 이 정벌전(征伐戰)을 하늘에 고했다. 천자(天子)를 자처하는 중원의 황제로서 침략의 명분과 정당성을 하늘에서 찾기 위해 북경에 제단을 만들어 상제(上帝)와 토지의 신 그리고 성신(星神)에게 제사지낸 후 고구려 정벌에 나선 것이다. 좌군과 우군으로 나뉜 수나라의 대군은 좌·우 가기 12군으로 편성되었는데, 각군이 출발 간격을 40리 정도로 유지하여 선두부대에서 마지막 후미부대까지 40일이나 걸리고, 그 대열이 960리가 될 정도로 장대한 규모였다.『삼국사기』의 표현대로 “근고(近古) 이래 보지 못하던 장대한 출진”이었다.

 

그해 백제(百濟) 무왕(武王)은 사신을 보내 출병 시기를 물었다. 수(隨) 양제(煬帝)는 자신이 고구려 북쪽과 서쪽을 공격하는 동안 백제가 남쪽을 공격하면 효과적이라는 생각에 크게 기뻐하면서 상서기부랑(尙書起部浪) 석율(席律)로 하여금 백제 사신을 만나 침략 시기를 알려주게 했다. 자칫하면 고구려는 두개의 전쟁을 동시에 치러야 하는 상황에 빠질 수도 있었다.

 

고구려군의 작전을 총지휘하는 막리지(莫離支) 겸 삼군대장군(三軍大將軍) 을지문덕(乙支文德)은 평원태왕(平原太王)의 사위로 북주(北周)와의 전쟁에서 무공(武功)을 세웠던 온달(溫達)의 외아들인 대모달(大模達) 온준(溫準)에게 2만의 병력을 주어 요하(遼河)에서 적군의 도강(渡江)을 저지하도록 했다. 양제는 온준 휘하의 고구려 군사들과 요하를 마주보고 대치하게 되자 공부상서(工部尙書) 우문개(宇文愷)에게 부교(浮橋)를 만들라고 명해 강을 건너려 했다. 그런데 그만 완성한 부교가 강 건너편 기슭까지 한 발 남짓 짧아 뭍에 닿을 수가 없었다. 다리가 짧아 수나라 군사들이 우왕좌왕하는 틈을 이용해 고구려군이 총공세를 취하자 수나라 군사는 언덕에 이르지 못하고 죽는 자가 매우 많았다. 이때 수나라 군사의 선봉장인 맥철장(麥鐵杖)과 전사웅(錢士雄)도 전사하고 말았다.

 

그러나 양제는 강 서안(西岸)으로 군사를 옮겨 다리를 완성한 다음 요하를 건너 고구려 서북방의 요충지인 요동성(遼東城)을 포위했다.

 

한편, 수나라의 수군(水軍) 총사령관인 좌익위대장군(左翊衛大將軍) 내호아(來護兒)는 군선 3천여척과 15만명의 병졸을 거느리고 뱃길로 대동강 하구에 도착했다. 수나라 수군은 고구려 수도인 평양성에서 60여리 되는 곳까지 진군해 모달(模達) 풍잠(豊岑)이 이끄는 고구려군과 싸워 승리하였다. 내호아는 내친 김에 평양성(平壤城)을 점령해 수도(首都)를 빼앗는 전과를 올리려 했다. 영양태왕(嬰陽太王)의 아우인 대성왕(大成王) 고건무(高建武)는 곧 평양성의 외성에 있는 빈 절에 군사를 숨겨주도 거짓 패배해 내호아의 부대를 유인했다. 내호아 휘하의 수나라 군사들이 나성까지 따라와 약탈을 자행하자 이때를 이용해 빈 절에 숨어 있던 고구려 복병이 휘몰아쳤고 병력의 절반을 잃는 참패를 당한 내호아는 겨우 목숨을 건져 장산군도 방면으로 후퇴하였다.

 

양제는 직접 군사를 지휘하여 요동성을 계속 공격했으나 요동성주(遼東城主) 고연탁(高連卓)이 성민(城民)과 성병(城兵)들을 통솔하여 끈질긴 방어전(防禦戰)을 펼침으로써 함락시키지 못했다. 양제는 요동성을 계속 포위한 가운데 우문술(宇文述)·우중문(于仲文) 두 장수(將帥)에게 30만 5천명의 병사를 주어 평양성으로 직공하도록 했다. 자신이 요동성을 포위한 동안 고구려 수도인 평양성을 함락시킴으로써 고구려의 전열을 흐트러뜨리려 한 것이다.

 

우문술·우중문의 부대는 1백일분의 양식과 장비를 지니고 평양으로 진군했으나 대릉하 하류와 요하 서쪽에서부터 평양성까지는 너무 먼 길이었고 군수품이 너무 무거워 중도에 식량을 버리는 자가 많았다.

 

이들이 압록강 유역에 도착하자 을지문덕은 직접 강을 건너 적정(敵情)을 파악했다. 을지문덕은 수나라 군사들의 주린 기색을 보고 고구려군이 능히 전투에서 승리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었다. 수나라 군사들이 압록강을 건너 한반도내로 들어오자 을지문덕의 군대는 하루 동안에 일곱 차례의 교전을 하고 퇴각하면서 적군을 더욱 피로하게 했다. 그러나 이 유인전술(誘引戰術)에 말려든 수나라 군사들은 거침없이 진군해 살수(薩水)를 건너 평양성에서 북쪽으로 30리 되는 곳에 진영을 설치했다. 식량이 떨어져 굶주리는 부대가 내륙 깊숙이 들어온 것은 무모한 행위였다. 고구려인들은 전쟁이 일어나면 청야전술(淸野戰術)을 즐겨 썼는데 이는 고구려 영토에 침입한 적군이 어떠한 식량도 얻지 못하게 하는 전술로, 모든 식량을 성안으로 옮기고 나머지는 모두 태워버리는 것이다.

 

을지문덕은 수나라 장수인 우중문에게 그 유명한 시(詩)를 지어 보낸다.

 

‘신기한 전략은 하늘의 이치를 궤뚫었고 기묘한 책략은 땅의 이치를 통달했네. 싸움에 이겨 공이 이미 높으니 그만 만족하고 돌아간들 어떠리(神策究天文 妙算窮地理 戰勝功旣高 知足願云止)’

 

중국인들이 좋아하는 도교(道敎)의 경구를 인용한 이 시를 보고 우중문은 자신이 을지문덕의 계략에 빠졌음을 알아차렸다. 일부러 싸움에 져주면서 자신들을 끌어들인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다른 부대와의 연결도 끊어진 상황에서 계속 버티다가는 전멸할 유려가 있음을 깨달은 우중문은 철수하기 위해 살수를 건넌다.

 

고구려군은 이미 이런 상황을 예상하고 살수 상류에 임시 제방을 만들어 물을 저장해두었다. 수나라 군사가 살수를 건널 무렵 제방을 터뜨려 물을 쏟아내자 군중에는 커다란 혼란이 일었다. 이 기회를 이용해 을지문덕의 지시에 따라 적군을 기다리고 있던 모달(模達) 임유(林裕)가 고구려의 궁수부대를 이끌고 총공격을 개시하자 좌응위장군(左應衛將軍) 신세웅(申世雄)을 비롯한 수십만의 수나라 군사들이 몰살당했다. 우중문 휘하의 30만 대군 가운데 불과 2천 7백명만이 살아서 요동성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역사상 가장 대규모 병력을 동원한 수(隨) 양제(煬帝)는 뼈아픈 통한을 남기고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 아버지 문제(文帝)를 죽이고 즉위한 양제 또한 아버지처럼 고구려를 침공했다가 깊은 수렁에 빠진 것이다. 양제는 고구려를 정벌하지 못하면 제위 또한 계속 유지할 수 없었다.

 

제2차 여수전쟁(麗隨戰爭)에서 패배한 이듬해인 613년 4월에도 양제는 다시 군사를 일으켜 직접 고구려를 침공했다. 요하를 건너 또 다시 요동성을 포위했으나 6월에 회군할 수밖에 없었다. 양제가 고구려 친정(親征)에 나선 틈을 이용해 예부상서(禮部尙書) 양현감(楊玄感)이 반란을 일으킨 것이다. 당시 수나라 내부에는 고구려 정벌을 비판하는 소리가 드높았다. 중국인들은 수백만 대군을 물리친 고구려에 근본적인 공포감을 갖게 되었고, 이런 공포감이 정벌에 대한 반발로 이어진 것이다.

 

양현감의 반란을 진압한 양제는 이듬해인 614년 다시 50만 대군을 모아 고구려를 공략했으나 역시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한 채 물러나고 말았다.

 

한마디로 고구려의 완승이었다. 당시 세계 최고의 강대국이었던 수나라의 군사적 공격을 물리치고 중국인들의 대한족주의(大漢族主義)에 타격을 가한 고구려는 문명의 대결이라고도 일컫는 이 대전쟁(大戰爭)에서 승리함으로써 한예족(韓濊族)의 문명을 지켜낸 것이다. 그리고 고구려와의 전쟁에서 패배한 수나라는 점차 멸망의 길로 치달았다.

 

☞ 출처 : 이덕일·김병기 저술「고구려는 천자의 제국이었다」역사의 아침 출판(2007년 편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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