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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정권 개발독재 경제성장 신화의 허와 실

참의부 |2013.08.28 17:57
조회 400 |추천 1

 

 

박정희 정권의 개발독재식 경제성장은 본질적으로 민주주의와 배치되는 것이며, 진정한 진보를 이룰 수 없는 경제성장이다. 그리고 “경제성장 따로 민주주의 따로”가 아니라 바로 민주주의 발전에 기초한 경제성장을 추구해야 한다. 바로 경제민주화다.

 

☞ 유종일 KDI 국제정책대학원 교수

 

1. 박정희는 과연 성공 신화의 주역인가?

 

조희연 성공회대학 교수는 역저『박정희와 개발독재시대』를 마무리하면서 “1960년대에 ‘민주주의가 밥 먹여주냐’던 대중이 1970년대에는 역설적으로 ‘우리가 밥만 먹고 사냐’라고 말하기 시작했다”고 박정희 장기집권시대를 요약했다. “민주주의라는 빛 좋은 개살구는 기아와 절망에 시달리는 국민대중에게는 너무 무의미한 것이다. 경제개발계획을 어느 정도 성공적으로 달성할 수 있는가는 비단 한국뿐만 아니라 아시아에 있어서 진정한 민주주의의 성패와 장래를 결정하게 될 유일한 관건이 될 것이다”라는 박정희의 주장이 1960년대에는 다수의 공감을 얻었지만 1970년대에는 상황이 바뀐다는 것이다. 다시 조 교수의 말을 빌면 1960년대의 시대정신은 개발주의였으나, 1970년대의 시대정신은 민주주의였다고 한다.

 

이러한 변화의 이면에는 세 가지 정도의 주요한 요인이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첫째, 역설적이게도 1960년대의 경제개발의 결과 절대적 빈곤에서 서서히 탈피하기 시작한 국민들이 인권이나 민주주의와 같은 밥 이외의 다른 것에도 눈을 돌리게 되었다는 점이다. 특히, 노동집약적 수출산업의 고속팽창으로 급격하게 고용확대가 이루어지던 1960년대와 달리 1970년대에는 수혜계층이 제한적일 수밖에 없는 자본집약적인 중화학공업화에 집중적으로 투자하고 부동산 투기가 극성을 부리면서 노동자·농민·서민층이 상대적 박탈감을 느끼게 되었다. 급기야 1972년에 유신체제라는 일인 영구집권 독재체제를 구축하고 정치적 반대자는 무자비하게 탄압하는 폭압정치를 함으로써 국민들이 민주주의의 소중함을 깨닫게 되었다. 셋째, 반독재 민주화 지사들의 숭고한 희생과 끈질긴 투쟁이 있었기 때문에 국민들이 현실에 순응만 하지 않고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을 키워나갈 수 있었다.

 

박정희 장기집권시대의 경제개발을 높게 평가하는 현재의 국민여론에 비추어 국민들이 유신독재체제를 반대하고 민주화를 염원했다는 것은 민주화 세력이나 진보성향 학자들의 편향된 주장일 뿐이라고 치부할 수는 없다. 실제 박정희는 유신체제에 반대하는 사람들을 항상 좌경용공분자라거나 일부 몰지각한 인사라고 폄하했지만, 이는 전혀 사실이 아니었다. 1971년의 대통령선거에서 박정희는 많은 부정선거 행위에도 불구하고 김대중 후보에게 간신히 신승을 거두었으며, 유신체제 암흑기의 엄동설한에 실시된 1978년 국회의원총선거에서는 최초로 야당이 승리하기까지 했다. 민주주의에 대한 국민들의 갈망은 박정희 사후 1980년 봄에 펼쳐진 이른바 ‘서울의 봄’이라는 민주화 열기에서도 나타났고, 이후 전두환 군사독재의 폭압을 뚫고 마침내 1987년 빛나는 6월 민중항쟁으로 이어진 것이다.

 

그런데 2009년 10월 21일에 발간된《한겨레21》제782호가 박정희 사망 30주기를 맞아 게재한 특집기사의 제목이 “민주주의가 밥 먹여주냐”였다. 박정희 생가를 찾아가 “그립습니다”, “고맙습니다”라는 글을 남기고 가는 방문객들에 대한 소개로 시작하는 이 기사는 “독재정치를 좀 했지만 경제를 발전시킨 업적에 비할 바가 아니다”라는 인식이 국민들 사이에 만연한 것으로 보도하고 있다. 실제로 국민들 사이에서 박정희가 대단히 높게 평가되고 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각종 여론조사에서 국민들은 박정희를 역대 대통령 중 가장 뛰어난 대통령으로 꼽을 뿐만 아니라, 일부 조사에서는 역사상 가장 훌륭한 지도자로까지 자리매김한다. 일례로 최근 여론조사기관 리얼미터가 실시한 여론조사에서 역대 대통령 중 국가 발전에 가장 기여한 인물로 박정희를 꼽은 응답자가 무려 53.4%였고, 김대중이 25.4%로 그 뒤를 이었다.

 

어렵게 민주화를 이루어낸 우리 나라 국민들의 의식이 이런 양상을 보이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10여년 전에 소위 ‘박정희 신드롬’이 나타났을 때 이에 관한 논쟁이 있었다. 한편에서는 ‘우리 나라 안의 파시즘’론을 제기하면서 박정희 독재체제가 대중의 자발적인 동의를 기초로 한 측면이 있었다는 주장을 제기했다. 반론을 제기하는 쪽에서도 진중권 전 중앙대학 겸임교수의 표현을 빌자면 ‘생체권력’으로 작용한 박정희가 우리에게 심어놓은 파시스트적 정신상태의 파면들이 남아 있어서 우리 사회의 정치적 소통을 가로막는 장애요인이 되고 있다고 인정한다. 각종 집회현장에 나타나서 행사를 방해하는 극우 노인 단체의 고압적인 행동 같은 것이 한 예가 될 것이다. 우리가 아직 생활 속의 민주화를 제대로 구현하지 못하고 있고, 대중의 정치의식 가운데는 권위주의적이거나 일부 파시스트적인 요소까지도 존재하는 것은 분명 사실이지만, 이것이 ‘박정희 신드롬’의 근거는 되지 못한다. 그러한 요소들은 ‘박정희 신드롬’이 나타나기 이전에 오히려 더욱 강했으면 강했지 약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조선일보》를 중심으로 한 박정희 우상화 작업으로 인해 박정희의 어두운 면들이 가려지고 근거 없는 신화가 창조되어 유포된 것도 박정희에 대한 평가를 높게 만든 한 요인이 될 것이다. 그러나 그 영향은 매우 제한된 것으로 보아야 한다. 우리 국민 대다수는 아무리 ‘땡전뉴스’를 매일 보아도 비판의식을 잃지 않는 의식수준을 보여주고 있다. 18년간을 몸소 체험했던 박정희 군사통치에 대한 인식이 거짓 선전에 의해 영향을 받을 여지는 많지 않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일부 정치인들과 정치세력이 박정희 정권에 대한 향수를 자극해 표 몰이를 하는 것도, ‘박정희 신드롬’을 반영하는 것이지 그 자체가 박정희 신드롬을 생산해내는 주된 요인은 되지 못한다.

 

박정희 정권에 대한 향수가 배가되고 “민주주의가 밥 먹여주냐”는 인식이 재등장한 것은 민주화 세력이 집권간 기간의 민생경제 회생 실패에 따른 반작용이라는 의견이 많다. 예를 들어 2006년《한겨레신문》에서 개최한 ‘선진대안포럼’에서는 이구동성으로 민주화 세력의 정책적 실패와 무능력이 ‘박정희 신드롬’의 바탕이 되고 있음을 지적했다. 특히 양극화 문제가 김대중·노무현 행정부의 정책 실패의 핵심적 문제로 지적되었다. 이러한 관점에서 이병천 전 참여사회연구소장은 “진보세력 전체가 사회경제적 양극화 등을 전향적으로 극복할 ‘실력’이 없다면, 왜곡된 박정희 신화는 계속될 것이다”라고 주장했다. 민주정부의 실패와 무능이 박정희에 대한 평가를 높였다는 주장은 설득력이 높다. 국정수행 지지도가 극도로 하락했던 김영삼 정권 말기 외환위기 당시와 노무현 정권 후반기에 박정희 신드롬이 확산되었다는 것이 이를 뒷받침한다.

 

“역사는 과거와 현재와의 대화”라는 역사학자 카(E.H.Carr)의 말처럼 최근 박정희에 대한 여론의 평가가 높아진 것도 박정희 장기집권시대라는 과거에 대한 평가에 못지않게 현재 일반 국민이 당면한 현실에 대한 평가가 반영된 것이라고 하겠다. 민주화 세력의 집권 기간 벌어진 경제 현실에 대한 불만이 과거를 미화하는 동인이 된 것이다. 이러한 현실에 대한 깊은 자성이 요구됨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그런데 이 와중에 은연중 박정희 신화가 확산되는 것은 위험하기 짝이 없다. 경제정책이나 경제적 리더십에 관해서 매우 그릇된 판단을 초래하기 때문이다. 진보적 성향의 학자들도 근래에는 균형 잡힌 인식을 위한다는 명분 아래 박정희 정권의 경제개발 성과를 인정하는 분위기다. 그것 자체는 문제가 아니다. 오히려 올바른 태도라고 봐야 할 것이다. 하지만, 정확하게 무엇이 고도성장의 요인이었으며, 박정희식 경제개발이 갖는 결함이 무엇이었는지에 대한 정확한 인식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자칫 성장지상주의·수출지상주의·재벌중심주의 등 박정희 장기집권시대에 각인된 경제에 관한 그릇된 인식이 더욱 위세를 떨치게 될지도 모른다. 박정희 독재체제는 국민을 계도하는 ‘훈육국가’의 성격을 지녔고, 의식개조를 도모한 ‘생체권력’의 면모를 지녔지만, 무엇보다도 국민들 마음속에 강하게 남아 있는 것은 경제발전의 성공 신화이기 때문이다.

 

박정희의 경제발전 성공 신화는 단순히 과거의 이야기에 그치지 않고 경제정책에 관한 몇 가지 그릇된 고정관념을 재생산하고 있다. 대표적으로 성장지상주의와 선성장후분배론을 들 수 있다. 경제정책으로 기본적으로 성장위주냐 분배위주냐 하는 이분법적 구도에서 판단하며 더 잘살게 되기까지는 일단 성장을 먼저 해야 한다는 논리가 바로 그것이다. 분배나 복지를 좋아하다가는 성장을 못하게 되어 장기적으로는 모두에게 손해라는 주장이다. 이런 주장은 경제개발 초기에는 타당한 면도 있으나 인적자본과 지식자본이 성장의 주된 동력이 되는 단계에 이르면 전혀 타당하지 않다. 그런데 한국에서 이 선성장후분배 논리는 1인당 국민소득 1천달러까지 기다리자 하는 식으로 한없이 지속되어왔다. 이제는 또 4만 달러까지는 기다려야 한다는 주장이 횡행한다. 소위 ‘움직이는 목표’에 의해 계속 성장만을 쫓게 하는 것이다. 이렇게 되니 ‘무엇을 위한 성장인가?’라는 물음이 제거되고, 경제는 성장하는데 자살률과 빈곤률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최고수준으로 치솟는 역설적인 상황이 전개되고 있다.

 

수출지상주의도 문제다. ‘수출입국’을 내세웠던 박정희 정권의 성장정책은 아직도 위세를 떨치고 있다. 이명박 정권이 들어서면서 추진했던 747고도성장정책의 핵심수단이 바로 고환율정책에 의한 수출드라이브였다. 사실 수출 주도 성장정책은 1997년 외환위기 이후 지속되었다고 보아도 무방하다. 이 시기에 내수의 증가는 경제성장에 크게 못 미쳤으며, 한국 경제의 대외의존도는 급격하게 심화되었다. 한국은 경제규모가 세계 13위권이며 인구규모 면에서도 결코 작은 나라가 아닌데도, “나라가 작으니 수출로 먹고 살 수밖에 없다”는 박정희 장기집권시대 이래의 고정관념이 아직도 팽배해 있다. 하지만 수출지상주의는 심각한 문제를 내포하고 있다. 수출 주도 성장은 곧 내수의 위축, 그리고 소득의 양극화와 맞물려 있다는 점이다. 한국 경제가 해외로부터의 충격에 매우 취약한 것 또한 과도한 대외의존도로 말미암은 것이다.

 

재벌의 폐해도 있지만 성장을 위해서는 재벌체제가 유효하다는 생각 또한 만연해 있다. 따지고 보면 선성장후분배론, 수출지상주의, 재벌중심주의는 논리적으로나 현실적으로 서로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는 것이다. 이러한 박정희식 경제성장모델이 아직도 우리를 지배하고 있고, 무엇보다도 이것이 오늘날 한국 경제의 최대 문제로 대두된 양극화의 연원이다. 그런데도 일각에서는 관치경제(官治經濟)에 입각해서 경제를 통제하던 박정희 장기집권시대에는 양극화가 없었는데 노무현 정권이 신자유주의 정책을 실시하여 양극화가 발생했다고 한다. 본문에서 필자는 박정희 정권의 경제성장과 리더십의 명암과 한계를 조망하고, 특히 양극화의 역사적 연원이 박정희 장기집권시대에 있음을 논증한다.

 

2. 경제성장 신화에 가려진 어두운 이면

 

박정희 장기집권시대 경제성장에 입각해서 박정희가 평가받는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정확하게 어디까지가 박정희의 공로였고, 어디까지가 다른 요인에 의한 것이었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나아가 경제성장을 이루는 데 박정희의 공로란 구체적으로 무엇인지, 박정희가 경제에 끼친 해악은 또 무엇인지를 따져보아야 할 것이다.

 

박정희 장기집권시대에 경제성장 면에서 한국 경제가 빼어난 성적을 보인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하지만 이것이 예외적인 성공만은 아니었다. 동시대의 대만·홍콩·싱가포르 등 소위 아시아의 신흥공업국들이 유사한 성장을 이룩했으며, 조금 앞서서는 일본이, 조금 뒤처져서는 중국이 또한 고도성장을 이룩했다. 이것은 이 나라들에 공통적으로 작용한 역사적·환경적 요인이 있었다는 것을 시사하며, 한 개인의 빼오난 지도력만으로 이루어진 결과가 아니라는 것을 말해준다.

 

이상의 동아시아 나라들에서 공통적으로 작용한 고도성장의 요인으로는 다음의 몇 가지를 들 수 있다. 첫째, 후발국의 이익이다. 후발국은 자본축적의 경제성장 효과가 높을 뿐만 아니라 선진국들의 기술과 경험을 모방하면서 경제성장을 할 수 있어서 잠재적으로 고도성장을 실현할 가능성을 갖게 된다. 이렇게 선진국을 모방하면서 추격하는 성장을 ‘따라잡기(Catching-up)’ 성장이라고 한다.

 

둘째, 역사적으로 축적된 사회문화적 역량이다. 후발국의 이익은 어디까지나 잠재적 가능성일 따름이고 이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제도·문화·교육 등 사회적 역량이 전제되어야 한다. 동아시아 지역은 서세동점(西勢東漸)의 시기에 서구 제국주의의 먹이로 전락하기는 했으나 16세기까지만 하더라도 세계에서 가장 앞서는 문명을 발전시켰던 지역이며, 이후로도 서구에 뒤처지기는 했지만 상업적·기술적으로 꾸준히 발전해왔다.

 

셋째, 조금 더 구체적으로는 높은 교육 수준과 토지 문제 해결이라는 경제발전을 위한 초기 조건을 잘 갖추었던 점이다. 동아시아 나라들은 고도성장의 전 단계에서 경제발전 수준에 비해 훨씬 높은 교육수준을 달성하고 있었으며, 한국·일본·중국·대만 등은 모두 토지개혁으로 지주계급을 타파하고 자산 분배의 형평성을 크게 제고했다. 도시국가인 홍콩이나 싱가포르에 지주계층이란 존재하지 않았으며, 그나마 싱가포르는 토지가 전면적으로 국가 소유로 되었다.

 

넷째, 세계시장의 여건이 수출지향적 성장에 매우 유리한 환경을 제공해주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세계 경제는 빠른 수준의 성장을 지속했으며, 세계무역의 증가는 이보다 훨씬 더 빠르게 진행되었다. 특히 동아시아 국가들의 성장에는 미국 시장의 역할이 중요하게 되었다.

 

다섯째, 초기에는 일본 경제 중심으로, 나중에는 중국 경제의 역할이 부각되면서 진행된 지역경제통합의 흐름이 또한 경제성장에 유리한 여건으로 작용했다.

 

이러한 다섯 가지의 중요한 요인들은 박정희나 다른 어떤 지도자의 역량과는 무관하게 주어진 것이었다. 물론 박정희의 리더십이 경제개발의 성공과 무관한 것은 아니다. 아무리 여건이 갖추어졌어도 그 여건을 얼마나 잘 활용하느냐에 따라 성패가 결정되기 때문이다. 리더십의 역할은 비전 제시, 그리고 전략과 정책의 선택과 추진력에서 찾을 수 있다. 박정희에 대한 평가에 지나치게 인색할 필요도 없지만, 결과가 성공적이었다고 해서 모든 선택이 잘된 것이었다고 판단하는 오류도 경계해야 한다.

 

우선 비전 제시에 관해서는 경제개발에 일로매진함으로써 빈곤퇴치와 조국 근대화를 이루겠다고 한 박정희의 비전은 비교적 올바른 것이었다. 형식적으로 반일을 내세우면서 미국의 원조에 기대 경제를 운용하던 이승만에 비해 박정희 나름의 민족주의가 발현된 것이었다. 이것이 반공주의와 결부되었던 것도 사실이지만 당시의 여건상 반공주의도 불가피한 선택이었다고 봐줄 수도 있겠다. 그러나 이 정도 비전은 제3세계 지도자에게 흔히 있는 평범한 것이며 결코 탁월한 비전이라고 할 수는 없다.

 

비전을 구체화하기 위해 결정적으로 중요한 것이 전략과 정책의 선택이다. 첫째, 내포적 공업화를 포기하고 대외지향적인 발전의 길을 선택했다. 이것은 매우 올바른 선택이었다. 앞에서 살펴본 동아시아 지역 고도성장의 요인들 중 첫째, 넷째, 다섯째는 모두 대외지향적인 성장전략에 유리한 것들이고, 둘째와 셋째는 중립적인 것이다. 여기에 국내 시장의 협소함까지 고려하면 대외지향적인 성장전략의 타당성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단, 대외지향적 경제개발이 자유무역이나 무조건적 개방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며 세계시장을 최대한 적극적으로 활용한다는 것이다. 실제로 박정희는 강력한 수출지원정책과 아울러 선택적인 수입대체산업 육성을 추진했으며 강력한 자본거래 및 외환 통제를 실시하는 등 자유시장정책과는 거리가 먼 정책들을 폈다. 세계경제와의 접합을 적극 추진하되 무조건 개방이 아니라 매우 전략적인 접근을 한 것이다.

 

그런데 박정희가 대외지향적인 공업화를 선택하게 된 것이 그의 혜안에 의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미국에 의해 강요된 것이었고, 박정희는 현실적인 판단으로 이를 수용한 것이다. 박정희의 민족주의적 성향이 빠른 시간에 국내 산업기반을 구축하겠다는 야심으로 나타나는 것은 당연했고, 이는 1970년대의 중화학공업화 정책에서 잘 드러났다. 그러나 미국은 한국 경제가 국제분업체계에 편승하여 보다 효율적으로 성장하기를 원했으며, 특히 한·미·일 삼각동맹 구축 전략에 입각해서 일본 경제권에 편입시키려는 의도를 갖고 있었다.

 

군사 및 경제원조를 지렛대로 미국은 박정희 행정부에 압력을 가했다. 박정희가 처음 추진한 경제개발 5개년 계획에 대해서도 미국이 무리한 계획이라고 수정을 요구하면서, 한일회담의 조속한 타결을 압박했다. 특히 1965년에 단행된 환율일원화·이자율 제고·수입자유화 등 일련의 경제개혁 조치는 미국 주도로 이루어진 것이었다. 박정희가 수출 증대에 사활을 걸고 노력한 것은 사실이나, 이는 대외지향적 발전전략의 산물이라기보다는 미국의 압력을 받으면서 원조경제에서 탈피해야겠다는 강력한 의지를 갖게 된 데다 산업화를 위한 자본재 도입을 위해 외화가 절실했던 현실적 요구 등이 반영된 결과였다.

 

박정희의 전략과 정책 선택에서 두번째 중요한 선택은 국가 주도냐 시장 주도냐 사이의 선택이었는데, 그는 국가 주도를 선택했고 이를 교도자본주의라는 이름으로 정당화했다. 군국주의 일본의 영향을 깊이 받은 그로서는 너무도 자연스러운 선택이었을 것이다. 사실 지나친 국가주도로 경제를 망치는 지름길이고, 지나친 시장만능도 경제의 적이다. 경제발전을 위해서는 국가와 시장의 적절한 결합이 필요하며, 이때 국가가 담당해야 할 역할은 경제사회 발전 단계와 수준에 따라 달라진다. 박정희가 쿠데타 직후에 부정축재자들을 체포한 후 재산의 국가 헌납 및 경제개발 협조를 대가로 선처하게 된 이유는 분명하지 않으나, 이로써 국가 주도라고 해도 국가는 경제계획과 은행 지배를 기초로 자원동원과 투재재원 배분을 주로 하고 생산과 마케팅은 민간기업에게 맡기는 역할분담 체제를 형성하게 되었다. 또한 반공주의의 영향으로 국가가 전면적으로 경제를 지배하는 모델은 생각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경제개발 초기 단계에서 국가가 보다 주도적인 역할을 하는 것은 올바른 선택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경제가 발전할수록 국가의 자원배분 기능은 축소되고 소득재분배 기능은 강화되어야 마땅한데, 박정희 행정부는 이와 반대로 갔다. 1970년대 말에 이르면 국가 주도의 중화학공업화가 낳은 부작용 때문에 경제가 심각한 위기에 빠진다. 또한 국가 주도 경제개발의 핵심적 수단으로 정부의 은행 소유·지배를 통한 이른바 관치금융이 활용됨에 따라 금융시스템의 낙후와 부실의 누적 등 심각한 폐해를 초래하기도 했다.

 

박정희의 전략과 정책 선택에서 세번째 중요한 선택은 기업체제에 관한 것이었다. 박정희가 선택한 것과 같이 재벌 주도의 기업체제도 가능했겠지만, 대만과 같이 공기업 주도일 수도 있고, 중소기업들을 위주로 산업을 육성할 수도 있었다. 왜 박정희가 재벌 주도 체제를 선택했는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일본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는 점에서 전전(前戰) 일본의 재벌 주도 공업화의 사례를 참고했을 가능성이 크다. 그리고 앞서 언급한 쿠데타 초기 부정축재자 처리 과정에서 재벌기업과의 협력관계를 축으로 경제개발계획을 추진하기로 했다. 이후에 정치자금을 모금하는 과정에서도 재벌기업과의 파트너십이 긴요해졌다. 무엇보다 재벌기업이 급성장하게 된 것은 1970년대의 중화학공업화정책을 추진하는 과정에서였다. 처음에는 대규모 투자에 따르는 위험성 때문에 기피하던 재벌들이 정부의 강력한 권유로 중화학공업 프로젝트에 참여하면서 막대한 정부지원 속에 고속성장을 하게 되자, 나중에는 앞 다투어 중화학공업에 참여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렇게 재벌기업은 정부의 개발계획을 이행하는 도구가 되면서 정부의 막대한 자금지원을 받아 성장했기 때문에 준공기업적인 성격을 지닌다고 봐야 할 것이다.

 

재벌 주도형의 선택은 개발 초기에 기업역량 구축과 내부자본시장 활용이라는 면에서 어느 정도 이점이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재벌 주도 체제의 부작용은 너무도 심각했고, 이 문제는 지금까지도 한국 경제의 고질적인 문제로 지목되고 있다. 첫째, 재벌 주도 체제는 정경유착과 밀접하게 연관된 데다, 이는 형태는 달리하면서 지속적으로 문제가 되어 경제민주화의 가장 큰 걸림돌이 되고 있다. 둘째, 중화학공업화 과정에서 정부가 주도한 사업이 망하게 놔둘 수는 없다는 논리에 따라 어려움에 처한 기업들을 지원하는 일이 반복되면서 ‘도덕적 해이’가 확산되었다. 나아가 재벌기업이 국민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커짐에 따라 이른바 ‘대마불사(Too Big To Fail)’라는 도덕적 해이의 구조화를 낳게 되었다. 셋째, 재벌 중심의 산업구조는 중소기업의 성장기반을 취약하게 만들었다. 이에 따라 부품소재산업의 경쟁력이 뒤떨어지게 되었고, 무엇보다 경제 양극화의 구조적 요인이 되었다.

 

마지막으로 박정희의 추진력에 대해서 과연 어떻게 평가해야 할 것인가? 매달 수출진흥회의를 직접 주재하고, 부지런히 현장을 돌아다니고, 서민적 풍모를 과시한 것 등은 긍정적으로 평가해도 좋을 것이다. 문제는 박정희의 추진력이라는 것이 상당 부분 독재에 기반을 둔 것이었다는 점이다. 필요하다면 개인의 인권과 재산권을 침해하면서까지 경제개발을 밀어붙였다. 또한 준전시 동원체제를 구축해 속도전을 펼쳤다. 공기를 1년이나 단축해 개통한 경부고속도로가 그 상징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예를 근거로 민주주의보다 독재가 경제성장에 더욱 유리하다는 주장이 전개되기도 한다. 개인의 권리나 분배에 대한 요구 등을 무시하고 성장목표에 집중할 수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독재적 방식은 일시적으로는 효율적일 수 있지만 장기적으로는 많은 부작용을 낳으며, 민주주의는 단기적으로는 비효율적으로 보일 수 있지만 장기적으로는 훨씬 더 효율적이라는 것이 역사적으로 증명되었다. 독재와 억압으로 경제개발을 추진하면 결국 공정한 룰이 정착되지 못하고 갈등을 조정하는 역량을 키우지 못하기 때문에, 갈수록 갈등비용이 증폭될 수밖에 없다. 적대적 노사관계나 각종 개발을 둘러싼 갈등 및 님비(NIMBY) 현상 등 사회적 갈등이 많은 비용을 유발하고 있는 것이 우리 현실이고, 이는 대부분 박정희식 추진력이 남긴 부정적 유산이다.

 

이상에서 박정희 장기집권시대에 고도성장이 가능했던 요인들과 함께, 그중에서 과연 박정희의 역할을 어떻게 평가해야 할지 살펴보았다. 기본적으로 고도성장의 성과에 대해서는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가운데 그의 공과를 논한 셈이다. 하지만 박정희 장기집권시대 경제 고도성장은 위험한 과속질주와 같은 것이었으며, 지속 가능하지 못한 것이었다는 점이 추가적으로 언급되어야 한다.

 

박정희 유신독재시대의 성장은 기본적으로 자본축적 제고에 기초해서 이루어졌는데, 국내 저축이 부족한 상황에서 이를 무리하게 추진함으로써 만성적인 인플레이션과 국제수지 적자라는 문제를 안고 있었다. 인플레하에서 낮은 금리의 정책자금을 지원받는 기업들은 부채를 최대한 끌어들임으로써 부채비율이 매우 높아졌다. 이로 인해 대내외적 여건이 악화되면 언제라도 경제위기를 불러올 수 있는 위험한 경제가 되었다. 베트남전쟁 참전을 통한 외화 획득이나 1차 석유파동 이후의 중동 특수 등 요행에 가까운 변수들이나 국민의 호주머니를 털어 기업을 지원한 1972년의 8·3조치 등으로 위기를 넘겼다는 사실은 박정희 장기집권시대 고도성장에 대한 평가에서 반드시 감안해야 할 부분이다. 결국 박정희 사후에는 인플레와 외채 문제, 기업부실 등이 겹치면서 심각한 경제위기가 발생했다. 외채망국론이 전혀 근거 없이 제기된 것은 아니었던 것이다.

 

이러한 항상적 위기가 아니더라도 박정희식 성장은 지속 가능하지 못한 것이었다. 억압적 통제시장경제의 모순 때문이다. 시장경제는 원래 개인의 자발성을 기본 동력으로 삼는 것인데, 억압적 통제가 지속되면 이러한 기본 동력이 약화될 수밖에 없다. 기술은 선진국을 모방하면서 최대한 자본축적을 늘림으로써 경제성장을 이루는 ‘따라잡기’ 성장의 단계에서는 그나마 억압적 통제시장경제가 유효할 수 있으나, 그 단계가 지나면 득보다 실이 커진다. 민주화 이후에 IT산업이나 문화산업이 비약적으로 발전한 것도 이러한 까닭이다.

 

억압적 통제경제는 결국 관료에 의한 관치경제가 된다. 그런데 발전국가(Developmental state)론의 시각에서 한국의 경제성장을 바라본 논자들은 관료적 통제의 유효성을 주장했다. 능력 기준으로 선발된 관료기구의 유능함과 수출 성과라는 비교적 투명하고 객관적인 기준에 의해 정부지원을 실행함으로써 부패를 차단하고 지원의 효율성을 확보할 수 있었다는 점 등이 관료적 통제가 잘 작동할 수 있었던 까닭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지적은 개발독재 시기에 관치경제가 비교적 성공적으로 운영된 이유를 설명해준다. 하지만 이러한 장점도 지속될 수는 없었다. 경제가 발전하고 복잡해지면서 경제개발 초기와는 달리 관료의 정보가 시장의 정보를 능가할 수 없게 되었다. 개발 초기에는 가난한 집안에서 열심히 노력하여 관료가 된 사람들이 많아 국가경제 발전에 이바지하겠다는 열정도 상당했지만, 갈수록 부유한 환경에서 자란 사람들의 비중이 높아지면서 이러한 열정이 퇴색되었다. 또한 고위관료들의 정치화는 피할 수 없었으며, 민주화 이후에도 돈 선거가 판을 치면서 정경유착에 의한 정책왜곡이 초래되었다.

 

3. 양극화 거슬러 올라가면, 박정희 장기집권시대의 그림자

 

필자를 포함해서 진보성향의 학자들이 민주화정부의 가장 심각한 정책 실패로 양극화를 꼽는다. 양극화에 관한 대부분의 논의가 양극화가 1997년~98년의 외환위기 이후에 전개된 것으로 보고 있으며, 진보성향의 학자들은 대체로 김대중 정권과 노무현 정권에 의해 실시된 신자유주의적 구조조정과 제도개혁의 결과라고 주장한다. 보수성향의 학자들은 저성장과 경기침체라는 경기적 요인을 강조하여, 양극화의 해법도 성장률 제고에서 찾아야 한다는 이른바 트리클다운(Trickle-down)론[滴下理論]의 근거로 삼는다. 일반적으로는 세계화와 중국의 부상, IT기술의 진보 등 환경 변화, 비정규직 증가와 구조조정에 따른 자영업자 급증 및 연봉제 확산 등 노동시장의 변화, 산업연관관계의 약화와 중소기업 성장기반의 취약이라는 경제구조상의 문제, 대기업과 금융 분야에서의 제도적 변화 등이 양극화의 요인으로 꼽힌다. 그러나 양극화가 나타난 시점과 원인에 관해서 보다 정교한 논의를 하지 않으면 그릇된 결론에 도달하기 십상이다.

 

우선 양극화에 관한 수많은 논의가 외환위기 이후에 양극화가 나타났다는 것을 전제로 진행되고 있다. 극히 예외적으로 유경준 KDI 사회경제연구부장은 외환위기 이전부터 중산층 감소추이가 나타났다고 지적했고, 전병유 한신대학 교수와 김복순 명지대학 교수가 1990년대 이후 고용구조 양극화가 심화되었음을 지적한 정도다. 그런데 관련 통계를 자세히 살펴보면 양극화와 관련된 대부분의 지표들이 1991년~94년 사이에 개선추세에서 약화주세로 전환했음을 알 수 있다.

 

2006년 노동부가 작성한『KLI노동통계』「소득분배 지표의 추이:1982년~2005년」이라는 도표를 보면 1982년~2005년 기간 중 대표적인 소득분배 지표들의 시계열 자료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처음 두 행은 도시근로자가구 소득의 불평등도를 측정한 지니(GINI)계수와 소득양극화 정도를 수치화한 ER지수이고, 다음 두 행은 임금소득분배의 불평등도를 측정한 지니계수와 분위수배율(P9/P1)이다. 이 모든 지표들이 1980년대 초반의 높은 수준에서 1980년대 중반 이후 완만한 하락세를 보이다가 1990년대 초반 하락세가 멈추고 미약하나마 상승세로 반전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지니계수와 ER지수는 1993년에, 그리고 임금지니계수와 분위수배율은 1994년에 각각 최저점을 기록했다. 물론 외환위기 직후에 급격히 상승한 것도 사실이지만, 하락추세의 반전이 그보다도 더욱 중요한 현상임을 강조하고자 한다.

 

역시 2006년 노동부가 작성한『KLI노동통계』「임금격차의 추이:1982년~2005년」이라는 도표에는 학력별, 성별, 기업규모별 임금격차의 추이를 보여주고 있다. 학력별과 성별 격차는 각각 1995년과 2001년에 최저점에 이른다. 역시 격차 완화의 추세가 반전되기는 하지만 추세반전의 시점이 소득분배지표의 추세반전 시점보다 늦고, 그 이후에도 임금격차의 상승이 크지 않아 1980년대 전반에 비해서는 훨씬 양호한 수준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졸자들의 공급이 급격히 확대되는 가운데 이러한 반전이 일어났다는 것은 주목해야 할 일이다. 대기업과 중소기업 간의 임금격차는 양상이 상당히 다르다. 3백인 이하 중소기업 대비 3백인 이상 대기업의 임금 비율은 1980년대 초중반에는 110% 내외에 머물다가 민주화 이후 대기업 중심으로 노동조합이 활성화됨에 따라 1988년부터 120%대로 상승하더니, 1999년에 130%대를 넘어섰고, 2004년에는 140%에 육박했다. 이는 대기업과 중소기업 간의 임금격차가 양극화의 한 주요한 요인임을 시사해준다.

 

2006년 한국은행이 작성한『KLI노동통계』「생산성 격차:1982년~2004년」이라는 도표는 제조업과 서비스업 간의 생산성 격차와 대기업과 중소기업 간의 생산성 격차의 추이를 보여준다. 제조업 대비 서비스업의 노동생산성이 1982년 178.26%에서 지속적으로 감소해 1995년에는 제조업의 노동생산성이 서비스업의 노동생산성을 능가하기 시작했으며, 이후에도 생산성 격차가 확대되어 2004년에는 제조업 대비 서비스업의 노동생산성이 43%에 불과해졌다. 3백인 이상 대기업과 3백인 미만 중소기업 간의 노동생산성 격차는 1980년대 중반까지 감소하다 1988년에 최저점을 기록한 후 상승세로 반전했고, 이후 꾸준히 확대되어 80년대 초반 수준을 크게 웃돌았다.

 

2002년 한국은행이 작성한『외환위기D:1998년~200년』「추세전환 시점 추정 결과」라는 도표는 양극화의 시점에 관한 보다 엄밀한 분석을 위해서 1980년대 초반부터 2000년대 중반 사이에 한 번의 추세변화가 있었고 이전과 이후의 추세는 모두 선형추세로 표시할 수 있다는 가정 아래 추세전환의 시점을 희귀분석을 통해 추정한 결과다. 이 도표에 따르면 1991년에서 1994년 사이에 양극화가 시작된 것으로 나타났다.

 

이제는 상식이 되어버린 외환위기발 양극화론은 양극화의 구조적 원인을 간과하게 했다. 진보파는 외국 자본의 영향력이나 신자유주의 담론을 원흉으로 보고, 보수파는 경기침체를 부각하면서 적하이론을 주장하는 결과를 낳았다. 그러나 양극화의 시발(始發)이 1990년대 초반이었다면 이러한 요인들을 양극화의 주된 원인으로 꼽을 수는 없을 것이다. 필자는 누차 양극화의 구조적 원인과 구조적 해법을 주장한 바 있다. 또한 양극화의 시발점이 1990년대 초반이라면 양극화와 관련한 민주화 세력의 책임이 무엇인지, 정책적으로 잘못한 부분은 무엇인지에 대해 새롭게 규명해야 한다. 예를 들어 구조적 변화에 대한 대응에 실패한 것을 제쳐놓고 일시적 구조조정을 탓한다거나 복지정책의 미흡만을 나무라는 것은 번지수를 잘못 찾는 일이다.

 

양극화의 원인과 관련해서 1990년대에 급진전된 세계화와 정보화라는 거대한 외부적 환경 변화 때문에 양극화가 불가피하게 일어났다는 주장도 있다. 특히 중국 등 값싼 노동력을 구할 수 있는 제3국으로의 아웃소싱(outsourcing)이 증가해 숙련노동과 비숙련노동 간의 임금격차가 확대되고, 빠른 기술 변화에 적응하느냐 못하느냐에 따라 임금격차가 확대됨으로써 임금소득분배가 악화되었다는 것이다. 이는 부분적으로는 타당한 지적이지만 문제는 제도적 여과장치나 보완장치 없이 그런 현상을 방치한 데 있다. 일찍이 애킨슨(Atkinson)은 각국의 제도와 정책의 차이에 따라 양극화 현상이 차별적으로 나타나는 것을 강조한 바 있으며, 폴 크루그먼(P. Krugman)도 미국의 양극화는 세계화나 기술 변화보다는 소수 부유층을 위한 정책에 의해 초래되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렇다면 1990년대 초반에 분배의 개선 추세를 반전시킨 구조적 변화는 무엇인가? 이를 규명하기 위해서는 먼저 그 이전의 동반성장 규모는 어떻게 작동했는지 살펴보아야 한다. 이는 과연 박정희 장기집권시대의 경제성장이 진정한 동반성장인가와도 관련이 있는 문제다. 우선 국제적으로 한국의 소득분배가 비교적 괜찮은 것으로 평가되는 이유는 무엇보다 본격적인 경제개발이 시작되기 전의 역사적 특수상황에 기인한다. 즉, 토지개혁이 단행되었고, 6·25동란과 이에 따른 인플레이션으로 인해 실물자산과 금융자산이 파괴됨으로써 자산의 하향평준화가 이루어졌다. 게다가 극도로 낮은 소득수준에도 불구하고 건국 초기부터 의무교육을 실시해 인적자본의 분배 또한 비교적 고른 편이었으며, 교육시스템이 계층 상승의 주요한 통로가 되었다.

 

이렇게 유리한 초기 조건하에서 1960년대의 고도성장은 실제로 동반성장의 양상을 띠었다. 노동집약적 수출산업을 중심으로 대단히 급속한 고용창출이 이루어짐으로써 성장의 과실이 어느 정도 분배되는 효과를 가져온 것이다. 1960년대 초에 20%에 육박했던 도시 지역의 실업률이 한자릿수로 떨어졌고, 도시 지역 전체 고용의 3분의 2를 상회하던 비공식부문도 반 이하로 축소되었다. 분배와 관련한 박정희 정권의 정책은 전무하다시피 했고, 오히려 급속한 자본축적을 위해 노동자와 농민을 쥐어짜는 저임금-저곡가정책을 폈음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동반성장이 이루어졌다는 사실은 경제의 구조적 특성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반증하는 것이다. 어쨌든 이러한 사정도 1970년대에는 중화학공업화 정책에 의해 변한다. 가용자원을 자본집약적인 중화학공업에 집중 투입하면서 재벌은 고속성장을 했지만 수혜계층의 폭은 한정되었다. 투자재원 확대를 위해 인플레에 의한 강제저축(국민수탈)이 행해짐으로써 성장의 혜택이 반감되었고, 부동산 값이 폭등하면서 자산분배의 불평등이 심화되었다. 1970년대에는 그래서 동반성장이 아니라 고도성장에도 불구하고 분배의 불평등이 확대되는 양극화 성장이 발생한 것이다. 양극화를 비판하는 이들에게 정부는 아예 ‘선성장후분배(先成長後分配)’를 정책방향으로 내세우기까지 했다.

 

1980년대에는 경제가 안정화되고 중화학공업 분야의 수출이 ‘3저호황’에 이르기까지 크게 확대됨으로써 고용확대 효과에 의한 동반성장이 다시 이루어졌으나, 1990년대 초부터 상황이 다시 반전된다. 이는 두가지 핵심적인 구조적 변화에 기인한다. 첫째는 성장과 고용 간의 관계가 변한 것이다. 제조업 부문의 고용비중이 감소하기 시작하고 성장의 고용탄성치가 현저하게 하락하는 등 과거 핵심적인 분배의 메커니즘이었던 고용창출에 문제가 발생했다. 제조업의 고용비중이 감소하는 것은 경제발전단계가 고도화되면 나타나는 탈산업화(de-industrialization) 현상이지만, 한국의 경우에는 선진국들과는 달리 제조업의 생산비중은 줄어들지 않으면서 고용비중만 급격히 감소했다. 이것은 앞에서 살펴본 제조업과 서비스업 간의 생산성 격차 확대와 동전의 양면을 이루는 현상이다. 결국 제조업의 고용비중 축소는 서비스업 분야에 저임금 고용이 확대되는 결과를 낳았다. 1980년대 후반 ‘3저호황’ 시기에 노동조합운동의 활성화로 실질임금이 급상승하고 노사갈등이 증대함에 따라 대기업들이 자동화 설비에 과도하게 투자하거나 아웃소싱을 확대하는 등 고용회피 전략을 구사한 탓이다. 대기업들의 고용회피 전략은 다른 한편 비정규직 고용의 증대를 불러왔다.

 

또 다른 구조변화는 재벌 대기업들에 희한 시장지배력 강화다. 재벌에 의한 경제력 집중과 시장왜곡이 심화되어 고용의 절대다수를 감당하고 있는 중소기업 부문이 갈수록 피폐화됨으로써 기업의 양극화가 심화되고, 이것이 소득의 양극화로 이어진 것이다. 통계개발원의 보고서에 따르면, 1980년~2005년의 26년간 우리나라 광업·제조업의 시장집중도와 산업집중도는 장기적 하락 추세를 보인 반면, 일반집중도는 이재형 통계개발원장이 2008년에 작성한《우리나라 산업집중 및 시장구조 실태분석》〈우리나라 산업의 일반집중도〉라는 도표에 나타난 바와 같이 1980년대 후반 이후 상승하는 양상을 나타냈다. 즉 좁게 정의된 시장 내기 산업을 대상으로 했을 때는 한국 경제의 경쟁력이 제고되었다고 할 수 있으나, 소수 대기업의 국민경제적 영향력(이른바 경제력 집중)은 1980년대 말경부터 증가했다는 것이다. 특히 이 일반집중도가 대기업 각각의 개별재무재표를 기준으로 작성된 것임을 감안할 때, 계열사를 모두 포함한 기업집단 단위로 측정한다면, 경제력 집중의 심화 경향은 더욱 뚜렷하게 나타날 것으로 추정된다.

 

이와 같이 1980년대 후반부터 재벌에 의한 경제력 집중이 강화된 배경으로는 1980년대 초중반에 추진된 금융자유화 정책에 따른 재벌들의 제2금융권 진출, ‘3저호황’기의 중화학공업 수출 증대에 따른 이익 증가, 그리고 1990년대 들어서서 본격적으로 정책금융과 산업정책을 폐기하는 등 시장자유화 정책이 추진된 것을 들 수 있다. 시장자유화로 과거의 통제는 사라지는데, 이미 시장에서 지배적 위치를 구축한 재벌들에 대한 시장규율은 제대로 부과되지 않았기 때문에 이들의 문어발식 확장과 규모 확대 경쟁의 고삐가 풀린 것이다. 이로 인한 과잉투자와 부실이 외환위기의 중요한 배경이 되었고, 위기 이후에 구조조정을 거치면서 일시적으로 경제력 집중이 약화되었지만 다시 개혁이 후퇴하면서 경제력 집중이 재가동되었던 것이다.

 

적대적 노사관계로 인한 대기업의 고용회피 경향으로 가속화된 제조업 고용의 감소와 서비스경제로의 이행 및 재벌에 의한 경제력 집중의 강화와 중소기업의 피폐화라는 두가지 구조적 변화가 양극화 추세의 근본 원인이다. 그리고 이와 관련된 자본시장, 노동시장, 상품시장, 기업지배구조 등 제반 제도와 정책이 또한 양극화의 요인인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양극화 구조의 저변에는 재벌 중심 성장과 적대적 노사관계가 핵심적인 문제로 자리 잡고 있으며, 이는 곧 유신독재체제로부터 물려받은 유산이라는 점에서 양극화의 연원을 박정희 장기집권시대에서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단, 1970년대의 양극화는 국가 주도 관치경제가 강화되는 가운데 정부지원에 의한 재벌 팽창이 이루어지면서 일어난 데 비해, 1990년대 초반 이후의 양극화는 시장자유화에 따라 국가통제가 약화되면서 시장의 실패를 보정하기 위한 제도는 미흡했기 때문에 이미 지배적 지위를 구축한 재벌들이 더욱 자유롭게 확장해나가면서 일어난 것이라는 차이가 있다.

 

‘선성장후분배’로 표현된 성장지상주의와 재벌 중심이라는 박정희 장기집권시대의 유산이 양극화의 뿌리다. 그런 의미에서 국가 주도 경제에는 없었던 양극화가 민주화정부가 신자유주의 정책을 추진해서 발생했다고 보는 것은 잘못된 시각이다. 물론 시장자유화가 재벌의 고삐를 풀어준 것이 양극화의 요인이 된 것도 사실이고, 외환위기를 계기로 노동시장 유연화 등 신자유주의적 경제정책이 많이 도입되면서 양극화가 가속화된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시장자유화를 근본 원인으로 보면 구조적 문제를 보지 못하게 되고, 시장자유화 자체에 반대하는 논리가 된다. 그렇다면 관치경제를 계속했어야 한다는 것인가? 문제는 시장자유화 그 자체가 아니라 그에 따르는 시장의 실패를 보완하는 정책들이 제대로 시행되지 않은 것이며, 거꾸로 시장자유화에 따르는 양극화라는 부작용을 통제할 만한 제도적 장치가 마련되지 않은 상황에서 자유화만 서두른 데에 있다.

 

4. 우리 시대 진보에 관한 성찰

 

박정희식 고도성장도, 박정희식 관치경제도 지속 불가능한 것이었다. 이는 박정희 장기집권시대 말기에 이미 분명해진 것이며, 사실 이미 1979년 봄에 경제안정화 계획이 도입되면서 박정희 스스로 인정한 부분이기도 하다. 박정희 사후 전개된 심각한 경제위기는 전두환 행정부에 개혁을 강요했다.

 

자원배분에 있어서 시장의 기능을 확대하고 관치경제를 청간한다는 것이 반드시 자유방임주의나 시장만능주의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시장경제가 건전하고 효율적으로 작동하도록 하기 위해서는 기회의 평등과 공정한 경쟁을 보장하고 시장의 실패를 보완하기 위한 제도적 장치들이 필요하다. 경제력 집중 억제와 공정경쟁 질서의 확립, 금융건전성을 위한 규제감독, 노동자·소비자·환경(미래 세대)·소액주주 등 경제적 약자의 보호, 사회안전망 등이 필수적인 것이다. 나아가 교육·주거·의료 등 삶의 기본이 되는 서비스의 공공성을 강화하고 사회복지의 수준을 높이는 것도 실질적인 기회균등과 인적자본 향상을 위해 필요한 일들이다. 시장의 자유와 더불어 이러한 제도적 보완정치를 마련하는 것이 경제민주화의 요체다.

 

사실 시장자유화를 처음 추진했던 전두환 정권 시절부터 공정거래법을 제정하고 환경보호와 복지사회를 주장하는 등 보완장치의 필요성에 대한 인식이 어느 정도 존재했고 부분적으로 도입되기도 했다. 그러나 이러한 보완장치를 제도화할 정치적 힘은 미약했고, 자유화를 추동하는 정치적 힘은 상대적으로 강했다. 제도적 보완정치 마련에 대한 일반대중의 민주적 요구를 수렴할 정당과 정치세력은 미약했으며, 자유화는 적극 찬성이지만 보완장치는 반대하는 재계의 이해관계는 정치권에 강력하게 관철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항상 자유화가 앞서 나갔다. 민주화 이후에도 이러한 사정이 본질적으로 바뀌지 않았으며, 재벌에 대한 국가의 통제가 약화되었다는 면에서 오히려 문제가 더욱 악화된 측면도 있다. 민주화정부의 실패는 여기서 비롯된 것이다.

 

민주화정부는 박정희 정권이 남긴 경제통제체제를 해체하고 시장경제를 확산하는 일에는 앞장섰으나, 시장의 실패를 보정하기 위한 보완장치 마련에는 미흡했다. 박정희식 개발경제의 진정한 극복을 위해 필요한 경제민주화를 이루지 못하고 시장화만 추진한 것이다.

 

특히 재벌 중심 경제구조의 문제에 대한 인식이 희박했다. 개혁진보정권이라고 하는 김대중 행정부나 노무현 행정부도 마찬가지였다. 세간에서 김대중 행정부를 현대공화국이라고 부르고 노무현 행정부를 삼성공화국이라고 부른 것은 근거 없는 비아냥이 아니었다. 이미 경제구조가 재벌 중심으로 되어 있는 상황에서 시장자유화만을 추진하는 정책은 결국 양극화 구조를 배태했다. 이에 따라 고용부진과 고용불안, 빈부격차 확대와 중산층 몰락 등의 문제가 등장했고, 민주화 세력에 대한 민심이 이반이 발생한 것이다.

 

외환위기 당시 IMF를 앞세운 국제금융자본이 한국 경제의 신자유주의적 개혁을 강요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며, 이것이 양극화를 심화시킨 요인이 되었다는 것 또한 사실이다. 그러나 이는 일시적인 것이었고, 양극화 추세는 이미 구조적으로 시작된 이후였다. 외환위기를 조기에 극복하면서 IMF와 외국 자본의 영향력은 빠르게 퇴조했다. 하지만 신자유주의라는 미국발 외래 사조는 자유화만 원하고 보완장치는 원치 않는 재계의 이해관계와 딱 들어맞아 계속 강화된 것이다.

 

외환위기는 사실 위기라는 특수상황과 IMF와 외국 자본의 압력 덕분에 재벌개혁의 기회로 작용했다. 재벌 중심 경제구조를 완화하기 위한 절호의 기회였다. 김대중 정권은 단순히 신자유주의적 개혁만 한 것이 아니었다. 재벌개혁과 금융개혁은 바로 보완장치 없이 추진되었던 시장자유화의 문제를 해소하기 위한 노력이었다. 또한 노사정위원회를 통해 개혁에 대한 사회적 합의를 추진했고, 부족하나마 사회안전망을 급속하게 확대해나갔다. 그런데 이 같은 김대중 정권 초기의 개혁노선이 우여곡절 끝에 좌초되었다. 노사정 합의정신은 정리해고를 둘러싼 갈등을 넘지 못하고 일찍이 파기되었으며, 2000년 이후 재벌개혁은 후퇴하기 시작했고, 금융건전성도 규제 완화에 밀려 뒷걸음질을 쳤다. 외환위기 이후 5년여만에 카드채 위기라는 대형 금융위기가 또 터졌고, 노무현 정권에 들어서서도 부동산 버블은 계속 확대일로였다. 2008년 세계금융위기 당시 한국 경제는 대내외적으로 과도한 부채 더미 위에 앉아서 또 한 번의 실질적인 통화위기를 겪었다. 노사관계의 전환에도 실패했고, 재벌개혁의 후퇴는 거듭되었으며, 한편 자유화 노력은 격상되어 한·미FTA로 정점에 이른다.

 

이러한 개혁진보정부의 실패 뒤에는 재벌의 영향력과 성장우선주의 경향이 있었다. 재벌의 경제적 비중 자체가 재벌에게 막강한 구조적 파워를 부여했다. 경제성장에 목을 맨 정부는 재벌의 협조가 필수적이라고 보고, 투자와 고용을 구걸했다. 당연히 반대급부를 주지 않을 수 없었다. 또한 재벌의 영향력은 친재벌적인 고위 경제관료들을 통해서도 관철되었다. 그리고 재벌은 광고시장에 대한 압도적 지배 등을 바탕으로 언론에 대해서도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게다가 비자금 조성과 불법 로비사건이 끊이지 않고 발생했다. 노무현 행정부는 국기를 흔드는 내용이 들어 있는 삼성 X파일을 피상적 법리를 내세워 덮어버리기에 급급했다. 개혁진보정부에서도 말로는 개혁이니 분배니 내세웠지만 성장을 우선시하는 경향 때문에 재벌에 투항하게 되었다. 거꾸로 재벌 세력은 성장우선주의를 활용해 개혁을 방해했다. 노무현 정권 초기에 삼성 측의 영향으로 국민소득 2만달러 달성을 국정 목표로 삼게 된 것이 극적인 사례다. 재벌의 영향력과 성장우선주의 경향은 노사개혁에도 걸림돌이 되었다. 적대적 노사관계를 청산하고 협력적 노사관계를 만들어내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어느 정도 힘의 균형을 이루도록 하고 경영투명성의 바탕 위에서 상호신뢰를 쌓아나가는 과정이 필수적이다. 그런데 재벌 앞에서는 한없이 작아지는 정부가 노동조합에 대해서는 인내심이 오래가지 못하고 이내 공격적인 태도를 취했다.

 

민주화 세력의 집권 후에 박정희식 통제경제는 해체되었지만 성장우선주의, 재벌 중심 구조, 적대적 노사관계 등 박정희식 모델의 핵심적인 유산은 온존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유산은 경제민주화를 가로막는 장애요인이 되고 있다. 우리 안의 박정희는 우리 마음속에 파시스트적 정신상태의 파편들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경제구조에 온존하고 있는 것이다. 사정이 이렇게 된 데는 민주화 과정의 특성에서 비롯된 면에 컸다. 조효래 창원대학 교수는 민주화로의 이행이 구(舊) 권위주의체제가 이행과정에 대한 통제력을 유지하면서 이루어진 ‘거래에 의한 이행’이었다는 점에 주목하고 있으며, 최장집 고려대학 교수는 우리나라 정당들이 이념과 가치, 정책 프로그램의 차이에 기반을 두고 조직되기보다 권력 획득을 위한 정치 엘리트들의 연결망에 기초하고 있기 때문에 기득권에 맞서서 경제민주화를 추동할 동력이 미약하다는 점을 강조한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정권을 잡거나 직간접적으로 참여한 주체들의 책임이 가장 크다고 할 것이다. 이에 대한 철저한 반성이 없이는 박정희의 경제발전 성공신화의 담지자와 박정희의 자손이 양대 정치세력을 대표하는 상황을 변화시키기 어려울 것이다.

 

지난 2007년 대선 당시 국민 여론조사에서 여러모로 박정희를 상기시켰던 한나라당의 이명박 후보가 진보적 정치인으로 인식되었다고 한다. 이는 민주화 세력에게 뼈아픈 비판으로 읽혀져야 함과 동시에 절름발이가 되어버린 우리 시대 진보의 현실을 적나라하게 드러낸 것이다. 사실 박정희도 초기에는 야당 후보와의 경쟁에서 상대적으로 진보적인 정치인으로 인식되었다. 빈곤퇴치와 조국 근대화를 역설하면서 부패한 정치권의 정쟁을 지양하고 경제성장에 국력을 집중하자고 주장했던 박정희가 지주계급에 뿌리를 두고 있었던 당시 야당에 비해 상대적으로 진보적이었다고 평가하는 것도 무방할 것이다. 그러나 이는 결코 진정한 진보는 아니었다. 잘 봐줘서 절름발이 진보에 불과했다. 아마티아 센(Amartya Sen)의 주장처럼 진정한 발전은 ‘자유로서의 발전’인 것이며, 진정한 진보는 경제성장만이 아니라 자유의 신장을 동시에 추구해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박정희를 제대로 평가하고 올바르게 극복하는 데서 우리 시대 진보의 새 출발점을 찾아야 할 것이다.

 

박정희가 독재는 좀 했지만 경제성장만큼은 제대로 했다는 인식은 물론이거니와, 박정희처럼 독재를 하면 안 되고 경제성장과 민주주의를 동시에 추구해야 한다는 인식도 부족하긴 마찬가지다. 박정희식 경제성장은 본질적으로 민주주의와 배치되는 것이며, 진정한 발전이라고 할 수 없다. 그리고 “경제성장 따로 민주주의 따로”가 아니라 민주주의 발전에 기초한 경제성장을 할 때만 진정한 진보를 이룰 수 있다. 바로 경제민주화다. 경제민주화를 이루지 못한 것이 민주화 세력이 실패한 이유이고, 따라서 우리 시대 진보의 핵심적 과제 또한 경제민주화일 수밖에 없다. 

 

【이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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