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끝까지 진실을 은폐하려는 일본인들의 태도
'일본군 강제 종군위안부(日本軍强制從軍慰安婦)' 출신으로 '빼앗긴 순정', '분함' 등의 그림으로 일본군 위안부의 참상을 고발했던 강경덕 할머니가 1997년 2월 2일 서울에서 사망했다. 그녀의 영안실에는 강 할머니와 함께 일제(日帝)의 강압에 의해 군대위안소로 끌려갔던 강제 종군위안부 피해자 할머니 20여명이 찾아와 고인의 명복을 빌었다.
같은 날 도쿄에서는 한 무리의 일본 극우파가 '역사교과서에서 위안부 관련 내용을 삭제하라!'는 내용의 플래카드와 피켓을 들고 시위를 벌였다. 1997년 4월 신학기부터 일본 중학생들은 처음으로 새 역사교과서에 불충분하나마 선대(先代)에서 저질렀던 만행에 대해 배우게 되어 있었던 것이다. 강제 종군위안부 문제에 관해 새 교과서에는 "국내의 노동력 부족을 충당하기 위해 다수의 조선인과 중국인들이 강제적으로 일본에 끌려와 공장 등에서 가혹한 노동에 종사했다. 종군위안부로서 강제로 전장에 송출된 여성도 다수 있다."는 내용이 고작이다.
일본 우익세력은 이 정도의 교과서 기술조차 심한 거부 자세를 보이면서 교과서를 펴낸 출판사와 필자들을 협박하고, 공공연히 대한(對韓) 망언을 되풀이하였다. 이들은 "종군위안부가 거짓말이라는 것은 많은 한국의 정치인들이나 일본의 위안부 문제 연구자들도 알고 있는 사실이다."라며 사실을 왜곡하면서 교과서를 집필한 필자에 대해 테러와 협박을 가해 왔다.
이같은 현상은 "지금 종군위안부 문제를 거론하는 사람들은 당시 공창제도(公娼制度)를 모르고 하는 말이다. 그때는 취미나 가난 때문에 돈을 받고 성교(性交)를 하는 사람이 많았다."라는 궤변을 서슴지 않은 카지야마 세이로쿠 관방장관의 망언(1월 24일)과 이를 인정한 하시모토 료타로 수상의 발언에 대한 연장선상에서 나타난 것이다. 하시모토 수상은 "나는 벳푸 정상회담에서 카지야마 장관의 발언 자체를 사죄한 것은 아니다. 초청한 손님에게 보도 내용이 불쾌감을 주었을지 몰라 손님에 대한 예의로써 사과했을 뿐이다."라고, 김영삼 한국 대통령과의 정상회담에서 행한 관방장관의 망언 사과를 스스로 취소하였다. 일본 정부 수뇌뿐만 아니라 정치인들도 여야를 가리지 않고 강제 종군위안부 문제를 은폐, 왜곡하는 한편, 몇푼의 돈으로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을 '개인보상'으로 회유하려는 파렴치한 작태를 벌였다. 일본 정부는 1993년 8월 4일 고노 요헤이 당시 관방장관의 이름으로 "과거의 위안부 이송에는 일본군이 직, 간접적으로 관여했고, 감언, 강압 등 본인의 의사에 반하는 사례가 많았는데, 관헌들이 직접 가담한 경우도 있었다. 피해자들에게 마음으로부터 사과와 반성을 전한다."라는 내용의 담화를 발표했다.
일본 정부는 이로부터 불과 3년만에 역사를 거꾸로 돌리면서 과거의 만행을 은폐, 왜곡하였다. 뉴른베르크 재판에서 나치 전범들은 '전쟁 전후를 막론하고 일반 주민에게 저지른 비인도적인 행위 또는 정치적, 인종적, 종교적 이유에 의한 박해 행위'에 대해 국제 관습법상 '인도에 관한 죄'의 법규정을 적용받아 모두 심판대에 올랐다.
그러나 일본의 경우 대부분의 전범은 물론, 세계 역사상 일찍이 유례가 없이 강제 위안부를 기획하고 일본 군인들의 성욕 처리의 도구로 삼고 학살했는데도 연합군 최고 사령부에서는 그들을 하나도 처벌하지 않았다. 처벌되기는 커녕 사실 자체를 은폐, 왜곡시키고 있는 것이다. UN 인권위원회는 1996년 2월 6일 공식적으로 펴낸 일본 군대 위안부 관련 보고서에서 일본 정부에 대해 위안소 체제가 국제법상 의무 위반이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이에 대한 법적인 책임을 수락할 것을 촉구했었다. UN 인권위원회는 피해자에 대한 개별적 보상과 함께 이를 위한 특별행정재판소의 설치가 필요하다고 권고했다. 이 문제는 1995년 8월 UN 인권소위원회에서도 결의되었으나 일본은 파렴치하게도 이를 계속해서 무시해 왔다.
UN 인권위원회는 일본 정부에 대해 위안소 및 일본군의 성폭력(性暴力) 행위와 관련한 모든 문서 및 사료의 공개, 역사적 진실을 반영하도록 교과 과정을 개정, 군대 위안부 관련 범법자들의 확인과 처벌 등을 일본 정부에 권고하였다. 이와 같은 UN의 권고를 받은 일본 정부는 철저하게 외면하면서 '교과서 개정' 작업을 벌여 왔는데, 이마저도 일본 국회의원들의 반대와 우익세력의 테러 협박에 놓이게 된 것이다.
◆ 민족사의 비극적인 한 페이지
일제(日帝)는 세계적으로 유례가 없는 종군위안부를 만들어 조선 여성들을 강제로 끌어다 일본 군인들의 성욕 처리를 위한 도구로 삼았다. 이들은 민족차별과 성폭력이라는 이중의 학대를 받아야 했다. 일본군 위안소는 조선 반도뿐 아니라 일본 열도, 만주, 중국 본토, 동남아시아 지역, 태평양 여러 섬에 이르기까지 일본군이 주둔한 곳이면 어디든 설치되었다. 북한에서는 강제 위안부에 대해서 "일본이 15년 전쟁시대(戰爭時代, 1931~1945년) 전과 그 기간에 전쟁의 수행과 관련하여 일본 정부와 군부의 정책에 따라 감행된 조직적인 집단 强姦과 輪姦 관리 제도하에서 피해를 당한 여자"라고 정의했다. 일제의 조선강점 피해 조사위원회가 편찬한 '일제가 감행한 종군위안부 범죄 사건에 대한 진상 조사 중간보고서'에는 1929년 또는 그 이전부터 군대 안에 위안소가 있었으며 군수공장에도 위안부 제도가 실시되었다고 밝히고 있다.
일본군이 위안소를 만들기 시작한 것은 1932년 1월의 상하이사변(上海事變)과 37년 난징대학살(南京大虐殺)이 직접적인 계기가 된 것으로 알려진다. 당시 일본군은 수많은 중국인을 학살하고 약탈과 방화를 일삼았으며 특히 점령지 여성들을 무차별 强姦했다. 일본군의 짐승과 같은 强姦 행위는 중국인들의 심한 반일 감정을 불러일으켜 점령지를 다스리는데 적지 않은 어려움을 주었다. 이런 연유로 일본군은 군대가 주둔하는 모든 지역에 성적(性的) 위안시설을 정비하도록 지시했다.
법률적으로는 중일전쟁이 한창인 1937년 8월 24일에 고노에 내각을 통해 '국민정신총동원 실시요강'이 결정되었다. 이 국민정신총동원운동에 따라 소위 여성의 '보국활동'이 장려되고 38년 4월 '국가총동원법'의 공포로 여성의 동원이 강제되었다. 41년 11월에는 '국민근로보국협회령'이 나와 14세 이상 25세 미만의 여자를 1년에 30일 이내의 국민근로보국대(國民勤勞報國隊)에 협력시킬 수 있도록 만들었다. 다시 43년 6월에는 '30일'을 '60일'로 44년 11월에는 '25세 미만'을 '40세 미만'으로 개정하였다.
1941년 8월에는 국민징용령의 개정으로 여성의 징용을 법적으로 규정하고, 다시 43년 9월에는 '여자근로동원의 촉진에 관한 건'을 결정하고, 여자근로정신대(女子勤勞挺身隊)를 편성시켜 강제로 여성들을 동원하였다. 44년 8월에는 '여자정신근로령'이 공포되어 정신대가 법률적으로 의무화하였다.
1910년대부터 일제(日帝)에 의해 조선 여성을 일본에 팔아 넘기고 매춘(賣春)을 시키는 것이 일상적으로 행해지고 있었다. 종군위안부는 이를 배경으로 국가와 군대의 관여 아래 조직적으로 강제 모집되고 관리되었다. 그 숫자는 10만명에서 20만명으로 추정되고 있으며, 그 8할이 조선인 여성이었다. 1941년 전반기까지는 대체로 어용 뚜쟁이들이 행정관청이나 경찰 주재소 순사들을 대동하고 다니면서 가난한 조선 여성들을 일본 내 공장이나 군대에서 세탁일을 시킨다는 속임수로 끌어갔다. 당시 먹고살기 어려운 농촌 처녀들이 자의반 타의반으로 이들에게 속아서 끌려갔다. 그러나 그해 후반부터는 읍, 면사무소나 주재소와 같은 일선 행정기관이 보다 체계적으로 배당된 인원수를 '지원'시키는 형태로 전환되었다. 이때부터 관헌이 직접 모집에 나선 것이다. 이렇게 하여 삼천리 방방곡곡에서 수많은 젊은 여성이 강제로 끌려가서 일본군의 성적 노리개가 되고, 전방 부대에서는 탄약 운반이나 환자간호역까지 맡으면서 참혹한 '성노예(性奴隸)'가 되어야 했다. 그러나 일본군은 전투에서 패주할 때면 어김없이 이들을 학살하거나 전장에 방치하여 굶어 죽고 얼어 죽게 만들었다.
◆ 나이 어린 소녀까지 데려간 '인간 사냥꾼'
1943년부터 1945년 8월 8일 패전(敗戰)까지 일본 야마구치 노무보국회 동원부장으로 일했던 요시다 세이지는 1991년 11월 21일 훗카이도 신문과의 회견에서 '유언하는 심정'으로 조선 여성들을 일본군 위안소로 강제 연행한 자신의 체험을 털어놓았다. 요시다는 국내 언론과의 인터뷰에서도 자신이 조선 여성들을 강제 연행하여 종군위안부로 보낸 사실을 생생하게 밝혔다. 요시다는 '인간 사냥꾼'이 되어 부녀자 6천명을 연행한 자신의 비인도적 행위는 뒤늦게나마 눈물로써 참회했다.
요시다의 증언을 중심으로 일제(日帝)의 위안부 강제동원 실태와 그녀들이 겪었던 비인간적인 참상의 일부를 살펴보자.
당시 조선인 강제 징용은 '대일본제국 노무보국회(大日本帝國勞務報國會)'가 담당하고 있었다. 요시다가 책임자였던 일본 야마구치현 노무보국회는 경남, 전남, 제주도 등지에서 남녀 3만여명을 끌어갔다. 태평양전쟁(太平洋戰爭)이 일어나자 처음에는 건설 노무자를 각지에서 끌어 모으는 일이 노무보국회의 임무였다. 그러다가 전쟁이 치열해진 1943년경부터 조선인 위안부를 끌어오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노무보국회는 경찰 조직의 외곽 단체였는데 야마구치현 경찰국을 통해 '황군위문(皇軍慰問) 조선인 여자정신대(女子挺身隊) 동원에 관한 건'이라는 군사명령이 하달되었던 것이다. 군부가 규정한 정신대원의 연령은 초기에는 20세~30세 정도까지였다. 기혼자도 가능하나 임신부는 제외하고 성병 검사를 실시하며 근무 기간은 2년으로 한다고 명시되어 있었다. 그러나 조선의 젊은 여성을 여기저기서 마구잡이로 끌어가니 해당되는 부녀자가 없게 되자 13,4세의 나이 어린 소녀나 기혼자도 가리지 않고 끌어갔다.
요시다가 받은 명령서는 후쿠오카에 주둔하고 있는 서부군 제74연대에 50명 정도의 조선 여성을 20일 이내에 끌어오라는 내용이었다. 요시다는 관부연락선을 타고 시모노세키에서 부산을 왕래하여 조선 여성을 끌어 모으로, 시간이 촉박할 때는 조선 내의 도경찰국에 전화로 미리 통지했다. 요시다가 2~3일 후 부하 10여명을 데리고 현지에 도착하면 이미 예정표가 작성되어 있었다. 현지 경찰이 마을의 인구수를 감안하여 몇 사람씩 할당을 해 놓고 있었던 것이다. 요시다 일행은 경찰 30~50명을 대동하고 경찰용 호송 트럭으로 예정된 마을을 급습한다. 우선 경찰 병력을 절반으로 나누어 마을 전채를 포위하여 도망가는 사람을 막고 나머지는 마을 사람을 한 곳으로 모이게 한다. 마을 사람이 전부 모여도 정신대로 끌어갈 만한 여자는 3~4명에 불과했다. 도망가는 사람들은 경찰이 사정없이 목검(木劍)으로 내리치고, 울부짖는 여자들을 후려갈기며 젖먹이 아이를 팔에서 잡아떼며 억지로 트럭에 실었다. 아이를 업고 나온 여자들은 반광란상태였다. 아기를 여자로부터 떼어내 노인에게 던져 주고 머리채를 질질 끌어 무조건 호송차에 실었다. 서너살쯤 되어 보이는 어린 아이가 울면서 호송차를 뒤쫓아왔다. 그 아이를 팽개쳐 밀어내고 애원하는 노인은 발길질로 넘어뜨렸다. 온 마을이 공포의 도가니로 변했다. 마을에서 반항할 만한 젊은이들은 이미 군대나 모누자로 끌려가고 없었기 때문에 크게 반항하지 못했다. 더구나 무장한 경찰관들이 철저히 감시하고 있었기 때문에 항거할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요시다는 주로 경상도, 전라도, 제주도를 뒤지면서 이러한 방법으로 '인간 사냥'을 저질렀다. 이렇게 끌어 모은 여자들은 수백 수천명에 이르렀는데 화물열차에 실려 부산으로 이송되어 관부연락선에 태워졌다. 시모노세키를 거쳐 서부군사령부에 인계하는 것까지가 요시다의 임무였다. 끌려온 조선 여성들은 대부분 중국이나 남방의 일본군 위안소로 보내졌다.
요시다와 같은 임무를 가진 수만명의 사람들은 아무런 망설임도 없이 군부의 명령을 착착 실행했다. 조선인을 인간으로 취급하지 않았다고 밝혔다. 일본을 위하는 일이라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조선인 강제 종군위안부를 포함한 강제 연행 관련의 공식 기록이나 관계 문서는 패전 직후 일본 내무성 사무차관의 통첩에 의해 모두 소각 처분되었다. 그래서 일본 정부는 종군위안부 문제에 대해 관여한 바 없다고 우겨 온 것이다. 이에 대해 요시다는 "자신의 체험에서도 알 수 있듯이 군과 경찰 및 행정기관이 일체가 되어서 한 일이었다."고 증언했다.
◆ 일본 황제가 서명한 종군위안부 계획
요시다의 증언에서처럼 조선 여성을 끌어다 일본군 위안부로 삼은 정신대는 일본의 군사, 경찰, 행정기관이 총동원되고 종국적으로는 일본 황제가 서명한 법령에 의해 자행된 만행이었다. 일본 제국주의 세력이 국가 시책으로 자행한 비인도적인 범죄 행각인 것이다. 얼마 전까지도 일본 정부는 "종군위안부는 민간업자가 데려온 것으로 정부는 전혀 관여하지 않았다."고 발뺌을 해 왔다. 심지어 "조선 여성들이 돈을 벌기 위해서 위안소 입소를 자청했다.", "娼女들이 육체적 쾌락을 즐기기 위해 군인들을 상대한 곳이 위안소였다."라는 천인공노(天人共怒)할 망언도 서슴지 않았다.
그러나 최근 일본군 사령부에서 위안소 설치와 위안부 모집 등을 지시, 감독했다는 자료가 일본 방위청도서관에서 발견됨으로써 일본 정부와 관련 단체들에게 큰 타격을 주었다. 이 자료를 발견한 요시미 요시아키 일본 쥬오대학교 교수는 "당시 군부대나 지대 단위로 위안부가 얼마나 있었는지도 알 수 있는 자료이고 군이 관여했다는 것은 명명백백하다."면서 "관여를 부정하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라고 질책했다. 요시미 교수는 특히 "1965년 한일협정으로 청구권은 없어졌다고 정부는 주장하지만 국가 대 국가의 보상과 국가 대 개인의 보상은 별개 문제"라면서 "정부는 사죄는 물론 보상도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요시미 교수가 찾아 낸 일본군 위안소 관련 자료 중에는 '전시순보(후방관계) 피잡단 사령부 위안소의 상황'이라는 다음의 내용도 포함되었다.
'위안소는 소관 경비대장 및 헌병대 감독 아래 경비지구내 장교 이하를 위해 개업했음. 군대 각종 위안설비의 증가와 함께 군위안소는 차츰 쇠미의 징후임. 현재 종업부녀의 수는 대략 1천명 내외이며 군이 통제하는 약 850명, 각부대 향토에서 호출한 약 150명으로 추정함. 이밖에 제1선에서 위안소 설치가 곤란한 경우 현지인을 사용하는 일이 간혹 있음.'
'최근에 이르러 군인 및 군대의 주민에 대한 불법행위가 주민의 원성을 사서 반항 의식을 부채질, 공산당 항일계 분자의 민중 선동의 구실이 되고 있으며 치안 공작에 중대한 악영향을 주고 있음. 군인 개인의 행위를 엄중 단속함과 동시에 되도록 신속히 성적(性的) 위안의 설비를 갖추어 설비가 없어 본의 아니게 금(禁)을 범하는 자가 없도록 할 것임.'
일본군이 조직적으로 위안부 문제에 관여한 결정적인 증거가 발견된 것이다. 그러나 더욱 놀라운 것은 정신대 모집에 일본 황제가 직접 서명했다는 사실이다. 1944년 8월 23일자로 공고된 일본 법령 제519호의 정신대 모집 관련 법률은 일본 황제와 내각의 총리, 군수, 내무, 후생성의 고위급 관리가 서명, 날인하고 있다. "여자정신근로령을 재가하여 이를 공고함"으로 시작된 이 법령은 전문 23조로 구성, 정신대의 선발 방법, 기간 등이 상세히 명시돼 있다. 각 조항마다 '명령에 따라', '명령이 정하는 바에 따라'로 규정되어 있는 이 법령은 정신대 동원이 강제적이었으며 일본 정부의 시책이었음을 입증한다.
일본 정부가 정신대를 강제 동원한 구체적인 입증 자료는 미국의 공식 문서에서도 공개된 바 있다. 1991년 12월 20일 미국 주재 한국 대사관이 미국 국립문서국에서 지난 1944년 8~9월, 당시 미국군심리전팀이 정신대에 강제 동원되었던 조선 여성 위안부들과 일본인 위안소 운영 담당자들을 대상으로 실시한 심문을 토대로 작성된 보고서에서 밝혀진 것이다.
제2차 세계대전 동남아 지역(심리전 심문 종보) 제2권에 수록된 이 보고서는 1944년 당시 버마전선에 투입되었던 20명의 조선 여성 정신대와 2명의 일본인 운영 담당자의 진술을 토대로 이들의 충원 방식과 운영 현황, 그리고 이 과정을 공식 주도한 일본군의 개입을 상세히 기록, 일본 정부가 공식 관련됐음을 밝히고 있다. 이 보고서에 따르면 조선 내에서 정신대 모집 과정에는 일본의 허가가 필요했고, 일본군은 정신대의 통행 편의를 위해 선박을 제공한 사실 등을 처음으로 밝히고 있다.
정신대들이 합동 투숙한 위안소의 운영은 일본군이 부대별, 계급별로 자체 작성한 시간표에 따라 운영되었고, 질서 유지를 위해 일본 헌병들이 배치됐으며, 매주 수요일마다 일본 군의관들이 위안부의 성병(性病) 등을 검진하는 등 일본군의 엄격한 감독 하에 운영됐음도 공식 확인되었다. 이토록 근거 자료가 명백히 밝혀지고 있는데도 지금의 일본 정부와 우익세력은 "종군위안부는 娼女 출신이다." "돈을 벌기 위해 자발적으로 매음(賣淫)을 했다."는 따위의 망언을 늘어놓으면서 참회와 반성의 빛을 철저히 거부하고 있다.
출처; 사람과 지식 版 '日帝는 식민통치를 하면서 조선을 얼마나 망쳤을까?'
해설; 김삼웅(金三雄) 친일 반민족행위 문제 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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