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근혜 행정부와 새누리당, 더 정확하게는 서남수 교육부장관과 박승춘 보훈처장, 그리고 뉴라이트교과서포럼에 의해 조직된 한국현대사학회가 찬양·칭송·미화하기 위해 왜곡·날조·은폐시키려 하는 18년 장기집권 박정희 독재권력의 어두운 진실을 적나라하게 ‘까발린’ 김재홍 경기대학교 정치전문대학원 교수의 최신 저서《누가 박정희를 용서했는가?》… 저자의 직접적 경험과 치밀한 취재를 통해 친일파의 후예, 군사정변 세력이 조작한 잘못된 신화와 삐뚤어진 우상을 깨고 우리 스스로 바른 길을 찾아 나서기 위해 뒤틀린 역사를 바로잡는다!
● 국가권력을 사유화한 박정희의 공포통치
새누리당 대선 후보로 제18대 대통령선거에 출마한 박근혜의 지지율이 가장 높게 나타나고 있다는 여론조사는 박정희 군사정권에 대한 왜곡된 인식이 여전히 높다는 사실을 반증하고 있다. 수구정치세력과 편향적인 언론이 여전히 박정희 정권의 1960·70년대 개발독재를 과장·미화하며 국민들의 눈과 귀를 흐리고 있다. 유신독재시대에 국가 권력에 의해 자행된 수많은 범죄는 여전히 묻혀 있고 박정희 정권이 만들어놓은 정치·문화·경제·사회의 여러 제도와 관습들은 수십 년이 지난 지금도 맹위를 떨치고 있다. 사회 지도층에는 박정희식 사고방식과 언행을 보이는 그의 직·간접적 후계자들이 있다. 유신쿠데타가 벌어진 지 40년째가 되었지만 아직도 박정희 독재권력은 청산되지 않았다는 것을 반증한다.
케케묵은 것 같은 박정희 독재권력에 대한 이야기를 지금 다시 쓰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단순히 지나가 버린 과거가 아니라 아직 살아 움직이고 있는 역사 이야기다. 2012년 12월 대선의 키워드가 여기에 들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박정희 독재권력의 후예가 다름 아닌 지금의 새누리당이며 그의 딸인 박근혜가 차기 대권을 노리고 있기 때문이다.
박정희 군사정권의 후예들이 저지른 정치적 죄과와 비자금 도적질 또한 심각하다. 전두환·노태우 정권만 되돌아봐도 그렇다. 그들에게 최소한의 사죄를 통한 ‘역사적 세례’ 절차가 이행돼야 할 것이다.
박정희 정권의 야만적 고문악행은 비단 야당 국회의원들만 당한 게 아니었다. 어린 대학생들을 잡아다 몽둥이 구타와 물고문을 자행한 것은 그때부터 시작됐다. 1987년 6월 민중대항쟁의 도화선이 됐던 박종철 군의 고문치사도 바로 박정희 정권의 후예들이 저지른 ‘계승 사건’이다.
⑴ “죽여서 저 산에 던지고 투신자살했다고 하면 그만이야!”
1971년 10월 15일 대학가 위수령 때 교정에서 체포돼 동대문경찰서를 거쳐 중앙정보부로 압송된 필자는 처음부터 넋이 나가 있는 상태였다. 박정희 공포통치의 본산에 끌려왔다는 생각에 혼비백산이었다. 압송조 2명이 나를 데리고 들어가자 책상에 발을 걸치고 앉아 있던 사내가 일어섰다. 그다지 크지 않은 방이 아무런 비품도 없이 삭막했다. 그들은 나를 벽 앞 가까이에 무릎을 꿇려 앉히고는 앞만 바라보라고 명령했다. 그렇게 두어 시간이 지났을까, 다른 3인조가 교대됐다. 이들이 나를 다룰 맹수들이었다.
엎드려뻗쳐를 시키더니 몽둥이로 두들겨 패기 시작했다. 뭘 묻기도 전에 매질부터 하는 것은 기를 빼놓고 신문을 쉽게 하기 위해서였다. 나는 공포감과 함께 매질에 못 이겨 바닥에 나뒹굴었다.
“이 새끼, 엄살이 심하구먼.”
그들은 나를 붙잡아 앉히더니 정강이에 두꺼운 장작 같은 것을 넣고는 무릎 위를 구둣발로 밟아댔다. 무릎 관절이 으스러지는 고문이었다. 후에 고문의 후유증으로 나는 무릎 위쪽 대퇴부 뼈를 3분의 1가량이나 깎아내는 대수술을 해야 했다. 군에 강제로 입영된 뒤 관절통에 시달렸지만 군사병원에도 후송이 허가되지 않았다. 야전의무대에서 받은 소염진통제로 때우며 그럭저럭 지내야 했다.
고문은 육체적 고통 자체 못지않게 공포심이 사람을 항복시켜 버린다. 나는 모진 고통에 눈물범벅이 되어 두 손으로 빌었다. 평생에 잊지 못할 가장 처참하고 굴욕적인 몰골이었다.
나는 1993년 이른바 문민정부로 정권교체가 이루어진 뒤 중앙정보부의 후신인 안기부의 수장이 된 권영해와 독대한 적이 있다. 그는 내가 국방부 출입기자 시절 취재원이었다. 그는 나에게 어려운 일이 있으면 도와주겠다면서 원하는 것을 물었다. 나는 내가 고문 받던 방을 한번 보고 싶다고 말했다. 그는 빙긋이 웃더니 “무슨, 쓸데없이…” 하면서 넘기고 말았다.
1971년 10월 당시 중앙정보부는 무언가를 짜고 있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이른바 ‘서울대생 내란예비음모 사건’이라는 해괴한 각본이었다.
“김대중과 김상현을 만난 게 언제, 어디서지?”
정말이지 이들과 만난 사실이 있다면 불지 않고서 견디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학생운동을 하면서 학교 바깥의 정치인이나 종교계를 접촉한 일이 없다. 일종의 역할 분담으로 대외접촉은 주로 선배 복학생들이 맡았으며 나는 학교 내부 장악이 주 임무였다.
그들의 다른 또 하나의 요구는 돈줄을 대라는 것. 포괄적으로 배후세력을 캐기 위한 고문이었다. 위수령 직전 나는 이른바 지하신문이라 불리는 미등록 간행물을 두 번 발행했으며 좋은 반응을 보고는 세 번째를 준비하고 있었다.『의단(議壇)』이라는 제호의 이 지하신문은 서울대학 문리대 대의원회의 기관지 격이었다. 대의원회 의장이던 내가 발행인으로 유일하게 이름을 내걸었고 편집진은 모두 비밀이었다. 편집위원으로는 홍세화(《한겨레신문》기획위원), 임진택(마당극 연출자), 이동진(가야대학 교수) 등 9명이 활동했다.
그런데 고문자들은 지하신문의 편집진에 대해선 묻지 않았다. 오로지 돈을 댄 배후를 불라는 거였다. 이 문제도 사실 투명하게 입증되는 내용이었다. 법적으로 등록만 안 했을 뿐 문리대 대의원회 기관지이기 때문에 당연히 예산은 학생 자치경비 중에서 사용했다. 이런 번연한 사실을 입증하는 데만도 험한 고문악행에 시달려야 했다.
“너, 이 방이 어떤 곳인지 알아? 여기서 죽어도 저 산에 던지고 투신자살했다고 하면 그만이야 임마.”
그해 대통령선거가 있던 4월 직전 육군 대령 한 사람이 김대중 신민당 후보에 대해 지지하는 말을 했다가 중앙정보부에 잡혀가 의문사한 사건으로 잠시 떠들썩한 일이 떠올랐다. 나는 머릿속이 하얗게 백지상태가 되는 듯했다.
책상 앞에 앉아 신문하는 동안 옆방에서 처절한 비명소리가 계속 들려왔다. 고문하는 자의 저주하는 욕설에다 바닥에 나뒹굴면서 쿵쾅거리며 절규하는 목소리가 뒤엉켜 정녕 인간 이하 짐승의 울부짖음이었다. 사람이 저렇게 당하고는 생명을 부지하기 어려울 것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나중에 동료들과 얘기해보니 대개 비슷한 경험이었고 공포감을 주기 위해 녹음소리인 것 같았다.
⑵ 측근 실세들의 항명과 박정희의 잔인한 보복 테러
박정희는 자신의 측근 실세들 중에서도 시키는 대로 하지 않으면 항명자로 몰아 중앙정보부를 시켜 고문폭행했다.
1971년 10월 2일 위수령 직전, 국회에서는 당시 오치성 내무장관(육사 8기, 5·16쿠데타 가담)에 대한 신민당의 해임결의안이 상정됐다. 박정희는 일사불란하게 반대표를 던져 이를 부결시키라고 공화당 지도부에 지시했다. 그런데 표결 결과는 공화당 국회의원들 중에 상당한 반란표가 생겨 해임안이 통과되고 말았다. 박정희는 불같이 진노했다.
반란 주동자들을 색출해 징벌하라는 엄명이 중앙정보부에 떨어졌다. 이른바 10·2항명파동의 시작이다. 그날로 공화당의 거물급 의원인 김성곤 재정위원장(쌍용그룹 창업자)과 길재호 사무총장(육사 8기, 5·16쿠데타 가담) 등이 중정에 잡혀 들어갔다. 집권세력의 중심 역할을 하던 이들도 하루아침에 고문을 당하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김성곤은 중정 고문자들에게 온갖 수모를 겪었다. 그는 카이젤 수염을 기르는 정치인으로 유명했고 그것이 그의 트레이드마크였다.
“야, 네가 카이젤이야? 콧수염이 근사한데 그래. 이게 네 위신이냐?”
고문자들은 그의 카이젤 콧수염을 뽑기 시작했다. 그렇게 자존심과 인격을 짓밟았다. 말하기 더 민망한 것은 카이젤 콧수염의 절반만 뽑고 한쪽은 일부러 남겨 놓았다는 것이다. 어디 이게 미치지 않고서는 사람의 이성으로 할 짓인가? 김성곤은 그 후 일절 바깥출입을 금하다가 1975년 조용히 세상을 떠났다. 고문 후유증과 화병으로 병사한 것이다. 동양통신을 창간한 언론인으로, 쌍용양회를 창업한 기업인으로, 집권여당의 중진 실세로 남부러울 것 없던 거물이 불시에 박정희의 ‘역린’에 걸려 몰락한 것이다.
김성곤과 함께 중정에 연행된 길재호도 몽둥이찜질을 당했다. 5·16쿠데타 주체세력 중 한 사람이던 그는 여생을 지팡이 짚는 몸으로 지내야 했다.
박정희의 측근 실세에 대한 징벌로 1973년 4월 터진 윤필용 사건을 빼놓을 수 없다. 윤필용은 육사 8기로 박정희의 오랜 측근이었다. 군 시절 부관으로 인연을 맺은 뒤 계속 함께해왔으며 5·16쿠데타 후 최고회의 의장 비서실장과 육군 방첩대장 등을 거쳐 1970년 수경사령관이 된 오른팔이었다. 그런 그도 말 한마디 잘못했다가 하루아침에 몰락하고 말았다. 윤필용 사건은 직계 부하였던 전두환의 밀고를 비롯해서 박정희 정권 내부에 얽힌 많은 이야기들을 남겨놓고 있어서 따로 6장에서 자세히 다뤘다.
10·2항명파동과 윤필용 사건에서 박정희 정권이 측근에게까지 보인 악행은 또 다른 측근의 ‘배신’을 낳았다. 박정희의 측근들 중에 일반인이 납득하기 어려운 배신이 많았던 것은 언젠가 당한다는 불안감과 두려움 때문이었다. 그러나 측근 실세들이 박정희에게 등을 돌리는 것을 배신이라고만 하는 것은 옳지 않다. 박정희 정권이 워낙 1인 독재로 공포정치를 일삼아서 기본적 정당성에 문제가 있었기 때문이다. 박정희 아래서는 집권세력의 중심인물조차 말 한마디 실수로도 희생되기 일쑤여서 파리 목숨이나 다름없었다.
박정희 정권 아래서 공식적으로 권력의 5대 기둥은 국무총리, 국회의장, 공화당 의장, 청와대 비서실장, 중앙정보부장이었다. 그러나 박정희 다음의 실세 권려은 언제나 중앙정보부와 청와대 경호실 그리고 보안사에 있었다. 다른 공식적 자리는 그저 ‘대독 총리’로 희화되듯 힘없는 얼굴마담에 불과했다.
그래서 박정희 정권 18년 동안 권력실세를 꼽으라면 중앙정보부장으로 김형욱·이후락·김재규와 청와대 경호실장으로 박종규·차지철이었다. 군부에서는 단연 수경사령관 윤필용이었다.
이중 맨 먼저 박정희에 등을 돌린 사람은 김형욱이었고 그 다음에 이후락은 외국에 도피했다가 박정희의 신변보장 언질을 받은 뒤 귀국했다. 박정희의 측근 중에서 결정적으로 등을 돌린 사람은 말할 것 없이 김재규였으며 그것은 역사적 대의명분을 갖추었다고 보아야 한다.
▶ 김재홍 著,『누가 박정희를 용서했는가?』,「‘동굴’ 속의 권력 ‘더러운 전쟁’」, (株)책으로보는세상 編, 2012년 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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