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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보면 좋을 영화 100선 - 4. 해바라기

COSTA |2013.11.18 21:02
조회 1,191 |추천 1

날씨가 많이 춥네요. 식상한 멘트가 아니라 정말 갑자기 추워졌습니다.

 

다들 꼭 감기 조심하시기 바랍니다. 윗지방은 벌써 영하권이네요..

 

 

오늘은 추운 날씨에 걸맞게 따뜻한 영화 한 편을 들고 왔습니다.

 

진지하게 봐도 좋고 가볍게 봐도 좋을 영화입니다. 액션 좋아하시는 분들에게도 안성맞춤인,

 

"해바라기"

 

이야기를 해볼까 합니다.

 

내용 중에 강력한 스포일러가 있을 수 있으니

 

내가 반드시 이 영화를 보고야 말겠다 하시는 분은 가급적 꼭 영화를 보고 와주세요.

 

리뷰를 보고 영화를 보는 것도 좋지만 이번 작품은 영화를 먼저 보는 편이 좋겠습니다.

 

보잘 것 없는 리뷰를 계속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저 뿐만 아니라 여러분들도

 

자기가 좋아하는 영화를 많이많이 공유하는 그런 공간이 되었으면 좋겠네요.

 

저도 숨어있는 좋은 영화를 보고싶습니다!~

 

그럼 이야기를 시작하겠습니다.

 

 

 

 

 

 

 

 해바라기를 본 사람들이라면 인상깊은 장면으로 최후의 결투씬을 떠올리기 마련이다. "해바라기 명장면"이라는 키워드로 검색을 해보면 그 10분 여의 장면이 늘 올라온다.

 

 그러나 나는 이 영화에서 특별히 주목한 것이 있는 데 그것은 수첩이다. 필자도 요즘 같은 스마트 세상에 작은 갈색 노트를 항상 들고다니며 생각이 나면 쓰고 그리며 기록한다. 바로 이 손으로 적는다는 것은 기억한다는 것 이상의 의미가 있다. 일종의 신념, 그리고 의지같은 것들이 깃들어 있다.

 

 

"다시는 술을 마시지 않겠다. 다시는 싸우지 않겠다. 다시는 울지 않겠다."

 

 포스터에서도 꽃보다 아름다운...한 남자의 희망수첩 이라는 글귀가 있다. 그가 다른 느와르 장르의 인물들과는 차별화가 될 수 있는 것은 바로 이 확고한 신념과 의지 때문이다. 그것이 추구하는 방향이 조금 다르지만, 적어도 그것이 폭력성이나 잔인성보다는 서정적이고 인간적인 가치에 집중되어 있다는 것은 확실하다. 그리고 그 때문에 우리는 이 영화를 아름답게 감상할 수 있다.

 

 추운 겨울이다. 겨울과 같은 삶을 살았지만 내면은 등대같았던 한 남자의 삶을 오늘의 이야기로 삼아볼까 한다.

 

 

 

1. 좋은 인물의 구성

 

 

 

-바보같이 웃고 있는 그의 내면이 그리 고통스러운 것인지 누가 알았겠는가.

 

 

 해바라기가 좋은 영화가 될 수 있었던 것은 무엇보다도 인물을 잘 만들어냈다는 것이 크게 작용한다. 약간은 바보같고 어리숙한 주인공 오태식은 내적으로는 엄청난 아픔과 자괴감, 그리고 죄책감 등에 시달리는 인물이다.

 

 영화에서 인물을 조형할 때는 평면적 인물 보다 입체적 인물이 더욱 끌리기 마련인데, 우리는 대개 의외의 모습에서 호감을 느끼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예를 하나 들어서, 지독한 슬픔을 안고 사는 사람이 한 명 있다고 가정해보자. 그가 영화 내내 질질 짜면서 울고불고 한다면 우리는 그가 영 시덥잖게 느껴질 것이다. 슬픔을 슬픔이라고 말하는 것이 현실에서는 좋은 화법이 될지 모르겠지만 영화에서는 그런 인물은 크게 매력적이지가 않다.

 

 그런데 그 슬픈 인물이 영화 내내 밝고 활기차며 씩씩한 모습으로 살아간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아픔을 감추기 위해 밝은 표정을 짓던 그, 사실은 치명적인 상처를 안고 살아갔다. 위의 인물보다는 무언가 하나라도 더 궁금할 것이다.

 

 악한으로만 묘사되는 다크나이트의 '조커'도 내면의 슬픔이 깃들어 있었다는 것을 보고 나서 우리는 그의 행동이 무작정 사악한 것으로만 보이지 않는다. 그것은 무채색의 동정같은 것을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무언가 동정이 되면서도 전혀 동정하지 못할 인물. 혹은 선과 악이 공존하거나 자신의 신분을 감추는 등의 진부한 설정도 입체적 인물의 기본형이라고 할 수 있겠다.

 

 우리는 있는 그대로의 사실보다는 이야기된 것을 좋아하는 경향이 있고, 이것은 사람도 마찬가지다. 있는 그대로의 사람을 보기 보다는 그 사람의 내면이야기, 혹은 그 사람의 숨겨진 것을 보길 원한다. 해바라기는 이러한 점을 상당히 잘 이용한 사례라고 할 수 있겠는데, 특히 주인공 오태식은 드러날듯 말듯 과거와 현재가 교차하면서도 치명적인 상처는 감춘 채 영화를 이끌어가고 있다. 해바라기라는 영화를 보면서 이 캐릭터에 매력을 느끼고 있다면 바로 이러한 점 때문일 것이다.

 

 

-당신은 살면서 죽음에 비견할 지독한 슬픔에 빠져본 적이 있는가? 그는 두 번 빠졌다.

 

 주인공 오태식은 모든 점이 '의외'다. 지역 일대를 주름잡던 조폭이었다는 것도 그의 행실에 대비해 의외로 다가오고, 그렇게 바보같이 웃던 사람에게 무서운 폭력배들이 꼬리를 내리는 것도 의외이고, 전혀 고민이라고는 없을 것 같던 사람이 지닌 고민도 의외이고, 그의 가족도 의외다.

 

 한 마디로 그가 제대로 정의된 것은 단 하나도 없다. 그저 그의 밝혀지지 않은 것들을 양파 껍질을 까듯 하나, 하나 벗기기만 해도 영화의 런타임을 다 채울 만큼 그의 입체성은 상당히 크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즐겨보는 장르 영화의 인물들이 숨겨놓은 것들을 꺼내보면 몇 가지 되지 않을 것이지만, 오태식은 다까놓고 보면 난장판이 따로 없다.

 

 영화는 그의 정체를 밝히는 데 반, 그가 살아가는 방식을 설명하는 데 반을 쓴다. 그런데 그가 살아가는 방식은 어차피 그의 정체가 원인이 되니 이 영화는 결국 오태식이라는 한 입체적 인물을 파헤치는 데 모든 힘이 깃들어 있는 것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를 그토록 궁금하게 했던 이 바보같은 사람의 삶이란 것은 대체 어떤 것이었을까?

 

 

2. 존재 자체의 아이러니

 

 

-이 영화를 보고 난 뒤, 당신이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가족이라는 개념을 바꾸게 될 것이다

 

  오태식은 원래 지역을 주름잡던 깡패였다. 그것도 보통이 아닌 거의 전설적인 존재였다. 그러나 어떤 계기로 감옥에 가게 되었고, 출소 후에 그는 새 삶을 살기위해 그간 반성한 것들을 적어가며 강박증에 걸린 사람처럼 그것을 지키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

 

 극중에서는 그에게 가족이 등장하고, 적대세력이 등장한다. 사실 이들의 관계는 따분할 정도로 뻔한 이야기다. 적당히 허름한 식당, 그리고 식탁을 뒤집으며 괴롭히는 조폭들, 그 뒤로 얽혀있는 이해관계는 우리가 뻔히 생각할 수 있는 이야기다.

 

 그런데 해바라기에서 이 문제의 '가족'들과 '적대 세력'은 오태식을 기준으로 해서 조금 오묘한 관계에 놓여있다. 그것이 기존의 것과 조금 차별을 두게 만든다. 그의 가족으로 나온 어머니와 동생은 그의 혈연은 커녕 친분도 없는 존재들이고, 적대세력인 두 우두머리는 오태식의 옛친구들이다. 이런 아이러니한 설정 자체가 영화 속에서 진부한 설정의 탁한 공기를 걷어내는 역할을 해내고 있다.

 

 그렇다면 한 가지 의문이 들 것이다. 왜 그는 옛친구들을 적으로 두고, 아무 연결끈도 없는 가족들과 함께했던 것일까?

 

 요즘 소위 개망나니 짓을 일삼던 가족을 살해했거나 끔찍한 범죄를 저지르는 가족에 대한 뉴스를 종종 접하고 있을 것이다. 그들은 분명 혈연으로 이어져있지만 제 3자인 우리가 봤을 때 그들이 진정 가족으로 느껴지는가하는 점은 고개가 기울어질 것이다.

 

 진정한 가족이라는 것은 책임과 의무를 토대로 서로에게 애정을 나누는 존재다. 둘 중 어느 하나라도 없다면 그것을 가족이라고 명명하기는 상당한 어려움이 따를 것이다. 애정은 있지만 책임을 지지 않는 가족은 자격의 문제가 도사리고, 애정이 없지만 책임만 지는 가족은 존재의미에 대한 문제가 도사린다. 일반의 우리들은 이러한 것들이 모두 충족되어있을 것이라 생각하겠지만 당신의 생각보다 당신 주변엔 이 두 가지를 충족한 가족들이 많지 않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극단적인 예로, 가족끼리 장기이식을 한 것 조차 뉴스화 되는 세상이니 만큼, 그것은 어떤 통계적인 수치로 환산하더라도 충분히 우리 주위에는 가족을 가족이라 부르지 못할 이들이 많이 존재하고 있을 것이다. 또 우리 인생은 길고, 이 혈연이라는 것은 쇠사슬 처럼 얽혀있는 것이기 때문에 당장은 그렇지 않을 지라도 미래에 그렇게 될 수도 있다.

 

 자, 그러면 가족이 아니지만 애정과 책임, 의무를 다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가족이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개인의 생각에 따라 다르겠지만 필자는 그런 것도 존재할 수 있다고 믿는다.

 

 '울지마 톤즈'의 주인공, 이름만 들어도 먹먹한 이태석 신부님의 이야기를 알고 있는가? 혈연은 커녕 우리가 늘상 마시는 산소조차 함께하지 않은 이들을 가족처럼 보살핀 사람이다. 그가 세상을 등지자 그의 아이들이 머나먼 이국땅으로 와서 그간 연습한 공연을 선보였다. 조부가 삶을 하직해도 찾아가지 않는 사람도 있는 요즘이다. 이태석 신부와 그들은 가족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해답은 영화를 보면서 좀 더 생각해보기 바란다.

 

 

****이하의 내용은 영화에 지장이 있을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을 수 있으니, ****

****먼저 영화를 보고싶은 분은 뒤로가기를 눌러주세요****

 

 

 

 

 

"어머니, 저왔습니다." "우리 아들 태식이 왔구나"

 

 이 영화, 해바라기에 등장하는 어머니, 양덕자에게는 사실 아들이 있었다. 그러나 그는 패륜아였다. 가족을 괴롭혔고, 삶의 막장가도를 달리던 인물이었다. 극중에서는 등장하지 않지만 최희주의 발언을 통해 알 수 있다. 즉 말해서, 혈연으로는 엮여있지만 애정과 책임, 둘 다를 무시한 가족이라고 생각될 수 없는 존재였다.

 

 오태식은 과거 폭력배들 간의 세력다툼에서 누군가를 죽이게 된다. 그게 바로 양덕자의 아들이었다.

 

 고로 오태식과 그가 어머니라 지칭하는 사람은 사실 원수지간이다. 아니, 원수여야 한다. 이 극한의 아이러니는 이 영화의 서사적 탐닉을 떠나서 도덕적 문제로 귀결된다. 비록 양아치나 다름없는 혈육이지만 그를 죽인 사람을 아들처럼 대할 수 있을까? 이것은 좀 더 많은 이해와 당신의 눈을 넓히는 노력이 필요하다.

 

 

3. 희망을 이루는 방법

 

 

 

"사람이 죄를 지었으면 벌을 받는 게 세상 이치아닌가?"

 

 

-그래서 그는 벌을 주었다.

 

 오태식의 삶이라는 것은 희망과는 거리가 멀다. 사실 속죄의 의미가 더 크다고 할 수 있다. 현재 이룰 수 없는 것에 대한 갈망이 보통의 희망이라고 한다면, 오태식의 것은 과거에 이룰 수 없었던 것에 대한 갈망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두 차이는 엄연히 다르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자신의 추악한 과거와 죄를 씻기 위한 일종의 의식을 치르는 것이기도 하지만, 그가 파괴한 세계를 회복시키기 위해 자신을 변화시키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모두 후회라는 것을 안고 살아간다. 그런데 이 후회의 감정이라는 것은 그저 우리의 감상으로 끝날 뿐이라면 다행이겠으나 언제나 파괴를 동반하는 일이다. 우리가 아무런 해를 입지 않았다면 후회같은 것은 남을 리가 없다. 그것이 감정적이든, 실질적인 것이든, 후회는 언제나 파멸적 결과를 낳는다.

 

 더욱 끔찍한 사실은 이 후회가 아픈 이유가 바로 우리 자신이 저지른 일이기 때문이라는 것을 너무도 잘 알기 때문이다. 타인이 저지른 일에 대한 피해는 고소를 하든 상욕을 퍼붓든 어떻게 해서 될 일이지만 우리가 저지른 일은 우리에게 책임이 있다. 고로, 삶을 제멋대로 사는 사람이 아니고서는 이 책임을 무시할 수가 없다. 그것이 마음의 짐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후회의 결과가 우리 혼자만의 일로 끝날 일이라면 모르겠으되 상대에게 까지 영향을 미쳤다면 그 상황은 또 달라지게 된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 문제를 풀어가야 하겠는가. 오태식은 자신을 버림으로서 그 상황을 타개하기에 이른다. 그가 영화 내내 들고 읽으며 적었던 '해야할 일'들은 사실 자신을 위한 일이 아니라 타인을 위한 것이다.

 

 열심히 살아 기쁨을 어머니께 드리는 것도, 좋은 오빠로서 동생을 지켜주려 했던 것도, 결국 어머니의 복수를 위해 자신의 육신까지 불사르는 것 또한 모두 타인을 위한 일이지, 결코 그의 행복을 위한 일이 아니다.

 

 

"너 진짜 적분 할 수 있어?" "나 수학 잘해 감옥에서 배웠어"

 

 결국 그가 희망을 이루는 방식은 자신이 부숴버린 세계를 다시 일으키는 것으로 마무리되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비록 자신은 사라지겠지만, 그 세계는 다시 일어나 새로운 미래를 열게 된다.

 

 그러니까 이 희망이라는 것은 상당히 긍정적이고 좋은 결과만을 낳는 것으로 보여지지만 꼭 그 과정까지 그러라는 법이 없는 것이다. 우리는 대개 희망을 부르짖을 때 희생도 함께 강요당하는 아이러니를 손쉽게 찾아볼 수 있다. 원래 희망은 희생없이 이루어지지도 않고, 희생이 없다면 존재 이유도 없는 것이다.

 

 희망적인 것들의 반대는 절망적이고 처참한 것들이다. 그러한 것들을 우리의 희망으로 바꾸기 위해서는 어떤 것들이 필요하겠는가? 적어도 살인자를 자신의 아들로 둘 용기와 결단 정도, 혹은 자신의 목숨을 바쳐서까지 신념을 지키는 등의 행위가 필요한 것이다.

 

 영화 속에서는 이 희생이 어머니의 죽음과 오태식의 복수로 나타나고 희망의 결과는 동생 희주로 나타난다.

 

 이 희망의 방법론은 우리의 희생을 요구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판도라가 모든 재앙을 열고 마지막 남은 희망을 보았겠지만, 그것이 공짜로 주어지는 것은 아니다. 그 재앙을 타파할 어떤 무엇을 해야한다.

 

 영화에서 그들 존재의 아이러니를 살펴보았듯이 희망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희망이라고 여기는 것들은 존재 자체가 모순적인 것이다. 희망은 곧 불행을 내포하고 있고, 그것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희생이 반드시 따른다. 그것이 이 영화에서 말하고자하는 희망의 참 된 얼굴인 것이다.

 

 

-둘은 희망을 꿈꾼다. 그러나 그 방식은 다를 것이다. 서로가 생각지도 못할 만큼 다른

 

 우리는 모두 희망을 안고 살아간다.

 그러나 그 희망이라는 존재가 당신이 안고 있는 만큼의 불행을 요구한다면 당신은 어떻게 하겠는가.

 거기에 불복하고 희망을 버릴 것인가,

 혹은 거기에 응낙하고 불행을 개척하면서 희망을 쟁취할 것인가.

 당신이 할 수 있는 것은 두 가지 뿐이다.

 

 영화에서는 한 가지 방법을 보여주었다. 이제 우리가 해야할 차례다. 필자는 제일 서두에 이 영화의 인상 깊은 장면으로 '노트 필기'를 들었다. 타오르는 복수심에 미친 오태식 보다 이 별 것 아닌 장면을 택한 이유는 이 노트 필기의 상징적 의미 때문이다.

 

 그가 노트에 무언가 적은 것은 그의 불행을 일으킨 것들이고, 혹은 불행을 야기할지도 모르는, 아니면 자신의 희망을 저해하는 요소를 제거해나가는 일들이다. 어떻게 보면 우리에게 하나의 방법을 시사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받아들이는 것은 역시 우리의 몫이다.

 

 왜냐하면 자신이 감당할 일은 결국 자신이 결정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방법을 제시 받을 뿐, 결정은 우리가 하는 것이라는 점을 잊지 말자.

 

"술 마셨냐" '아니오 안 마셨습니다'

"그럼 싸웠냐" '아니오 안 싸웠습니다'

"그럼 울 일이 없을 거다 영원히"

 

술을 마시고 싸우며 울어도 사는 것이고

술을 마시지 않고 싸우지 않으며 울지 않아도 사는 것이다.

 

단지 마지막이 어떻게 끝날지 다를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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