뿌리와 잎새의 터키 자유 여행기 3
마주 선 두 제국의 심장
330년 비잔티온의 황제 콘스탄티노스는 수도를 옮긴다. 도시 이름은 자신의 이름을 딴 콘스탄티누폴리스.
지금의 이스탄불이다. 오스만에 멸망될 때까지 1,123년 간 번성했다.
이후 오스만의 수도로서 500년 가까이 빛났으니 이스탄불은 두 제국의 심장, 그 자체였다.
이스탄불이라는 이름은 '콘스탄티누폴리스를 향하여'라는 뜻이었다고.
당대 세계 최고의 도시였던 만큼 이민자, 호시탐탐 제국을 노리던 야망가들에게
이스탄불이라는 구호는 얼마나 매력적이었을까? (유재원 교수, 터키 1만년의 시간여행 참조)
히포드롬이 있었던 곳, 지금의 술탄 아흐메드 광장에 서면 놀라운 풍경에 입을 다물기 어려워진다.
비잔티온의 영광 아야 소피아와 오스만의 자존심 블루 모스크, 두 제국의 심장이 서로를 마주하고 있다.
빼닮은 모습으로 서로를 마주하고 있는 이 두 상징물은 2,000년 이스탄불의 역사를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비잔티온의 영광 아야 소피아
콘스탄티노스의 아들 콘스탄티오스 때 처음 건립된 아야 소피아 성당(320년).
역사적으로 이 성당은 성난 시민들에 의해 두 차례 파괴됐다.
404년 황제가 총대주교를 추방했을 때 처음 파괴됐고 532년 니카 반란 때 다시 소실됐다.
니카 반란 때 황제였던 유스티니아노스는 반란군을 무자비하게 제압하고
무너진 아야 소피아를 재건하기로 마음 먹었다.
역사 대대로 위기를 딛고 건재를 과시하기 가장 좋은 수단은 건축물이었다.
황제는 제국의 권위를 상징할 새 성당 건축에 나선다.
가장 웅장하고 화려하며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나다'라는 기독교적 우주관을 반영하려고 했다.(유재원 교수 책 참조)
또 통일된 교회의 세를 과시하기 위해 건물 내 기둥이 없어야 한다고 명령했다.
예나 지금이나 클라이언트가 갑이긴 하나 이쯤 되면 도가 지나친 갑질이기도 할터.
이 난제를 안테미오스와 이시도로스가 달라 붙어 5년10개월 만에 뚝딱 해결한 것이 지금의 아야 소피아다.
537년 12월27일 준공 후 첫 예배에 참석한 황제는 그 아름다움에 취해
"솔로몬이여, 내가 그대를 이겼도다"라고 했다고 전해진다.
연말 시즌이라 그런지 추운 날씨에도 관람객이 가득했다.
한참을 줄서 기다리다 오디오 가이드를 빌려 박물관으로 입장했다.
(터키 여행 내내 한국어 오디오 가이드를 빌릴 수 있었던 유일한 곳이었다.)
성당 초입에 있는 성화가 눈길을 끈다.
엎드려 절하고 있는 이는 레온6세로 추정되는데 그는 4번이나 결혼했다.
당시 정교회 교리상 결혼은 3번 이상 할 수 없었다. 하지만 연이은 부인과 아들의 죽음으로
후대 계승 의지가 커진 황제는 로마교황의 지원을 받아 총대주교를 해임하면서까지 자신의 뜻을 관철시킨다.
스토리상 레온6세가 속죄하기 위해 엎드려 빌고 있다고 이해하면 되겠다.
내부에 들어서면 보이는 대리석 항아리.
은화가 가득 들어있는 채로 한 페르가몬의 농부에게 발견됐다고.
더 안 쪽으로 들어가면 제국 곳곳에서 공수한 대리석 원판이 보인다.
성당 건축을 위해 제국은 고대 신전에서 기둥을 빼오고 각지에서
최고의 자재를 끌어 썼다.
내부 끝쪽으로 가면 천장 쪽 성모마리아 성화와 방패모양의 칼리프 이름이 쓰여진 원판, 미흐랍이 함께 보인다.
교회와 이슬람이 한데 어우러진 가장 이색적인 장소인 셈이다.
미흐랍은 메카의 방향을 가리키는 곳으로 메카는 무슬림이 엎드려 기도할 때 기준이 되는 곳으로
성당의 정면에서 약간 오른쪽으로 틀어져 있다.
입구 쪽엔 청동판이 부착된 기둥이 있고 수많은 사람들이 줄지어 서 있다.
꽃누나에서도 나왔던 것으로 청동판에 엄지 손가락을 넣고 손을 한 바퀴 돌리면
병이 낳거나 소원이 이뤄진다는 소문이 있다.
어려울 줄 알았는데 대부분 성공한다. 요령을 몰라도 줄서 기다리면서
성공한 사람들 따라하면 어렵지 않게 성공할 수 있다.
문제는 성공에 집중하느라 소원은 깜빡했다는 것...
이곳을 지나 2층으로 가는데 계단이 아닌 경사로를 빙빙 돌아 올라간다.
2층에 서면 왕비가 예배를 보던 곳이 보인다.
2층에선 이슬람 문자 원판을 더욱 가까이서 볼 수 있고 데이시스 등의
다양한 성화를 접할 수 있다.
먼저 접하는 성화는 유명한 '데이시스'다.
이 작품은 4차 십자군 원정대에게 빼앗긴 도시를 탈환한 1621년 그려진 것으로 추정된다.
교황의 명에 따라 이집트를 공략하기로 했던 십자군 원정대는 이익에 눈 멀어
콘스탄티누폴리스를 점령하는 말도 안 되는 짓을 벌인다.
이 성화는 도시를 탈환한 미하일 8세를 기리는 의도가 담긴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세 인물의 표정이 지극히 우울하다.
수도는 탈환했지만 십자군 원정대에 의해 폐허가 되다시피한 현실이 반영된 것은 아닐까?
데이시스의 우리 말 뜻은 간청, 탄원이다.
자리를 옮기면 재미있는 스토리가 담긴 성화를 마주한다.
11세기 작품인데 이렇게 성화에 황제나 황후가 등장하는 것은
성당에 많은 돈을 기증했다는 걸 의미한다.
교회 측은 이들의 공로를 인정해 황제 전용구역에 부부의 모자이크를 허용했다.
오른쪽 여자는 조이라는 황후인데 3차례나 결혼한데다 결혼한 남편 셋 모두 황제로 즉위했다.
쉰살이라는 늦은 나이에 결혼해 첫 남편과 함께 모델로 성화에 등장했는데
첫 남편, 두 번째 남편이 모두 죽고 세 번째 남편인 콘스탄티노스 9세와 결혼했다.
결혼을 새로 할 때마다 기존의 성화가 골치였다. 결혼할 때마다 뜯어고칠 필요가 있었던 것.
황제의 얼굴을 바꿀 때 황후의 얼굴도 조금 수정을 봤다는데
당시 황후의 나이가 예순 네살이었음을 감안하면 성화를 수정한 사람이
지나치게 갑을 배려한 것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든다.
2층을 둘러보고 내려오다 보면 출구쪽 천장에도 성화를 볼 수 있다.
머리 뒤쪽에 그려져 있어 놓치기 쉬운데 이를 대비해 맞은 편에 큼직한
거울을 걸어두었다.
우리 시선으로 왼 편, 예수 기준으로 오른 편이 성당을 봉헌한 유스티니아노스고
반대편이 수도 콘스탄티노플을 봉헌한 콘스탄티노스다.
성화에선 예수의 오른 편을 더 높은 위치로 여긴다는 점을 감안할 때
도시를 만든 황제보다 성당을 세운 황제를 더 가치있게 여기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오스만의 자존심 블루 모스크
아야 소피아를 다 둘러보고 오디오가이드를 반납한 뒤
정면으로 나오면 블루모스크가 한눈에 들어온다.
정식 명칭은 술탄 아흐메드 모스크로 1619년 최종 완공됐다.
술탄 아흐메드 1세는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제국과 13년간 전쟁을 벌였다.
확실한 승기를 잡지 못한채 지지부진하던 전쟁은 1606년 지트바토로크 협정을 계기로 종지부를 찍는다.
오스만 제국 역사상 유럽대륙에서 실패한 첫 전쟁으로 기록에 남을만큼 이 전쟁은 수치 그 자체였다.
술탄은 이 치욕을 성대한 사원 건설을 통해 치유받길 원했던 모양이다.
술탄은 아야 소피아 맞은 편에 아야 소피아를 능가하는 사원으로, 미나레를 황금으로 만들 것을 지시했다.
하지만 오랜 전쟁의 여파에 제국의 주머니는 얄팍했다.
당시 사원 건설을 맡았던 메흐메드 아가는 꾀를 써냈는데 훗날 이 때문에 큰 논란을 불러일으키게 된다.
황금은 터키어로 알튼(ALTlN)인데 숫자 6 알트(ALTl)와 발음이 비슷하다.
상처난 자존심을 갈래고 싶었던 술탄 아흐메드와 황금-6의 교묘한 만남
술탄의 명령은 지켜야겠고 현실도 반영하려 했던 메흐메드 아가는 미나레를 황금으로 짓는 대신
6개를 세워 버렸다.
잘못 들었다고 하는데 뭐라 할 수도 없는 상황인데 이 6개라는 상징성이 문제가 됐다.
뾰족 솟은 모스크의 미나레는 사원을 쉽게 확인할 수 있도록 길잡이 노릇을 하고
하루 5번 울리는 울리는 아잔이 멀리까지 잘 들리게끔 한다.
미나레의 개수는 건물 크기와는 별도로 권력을 상징한다.
1개는 개인이 2개는 재상이, 3~4개는 국가와 술탄에 의해 세워진 것을 의미한다.
당시 미나레가 6개인 곳은 이슬람 성지인 사우디 메카 카바의 모스크(뿐이었다고.
이렇다보니 메카와 이슬람 세계의 반발이 어느 정도였을지는.....
사태가 커지자 술탄은 자비로 메카 모스크에 7번 째 미나레를 지어주며 급한 불을 꺼야 했다.
카바의 모스크는 현재 9개의 미나레를 가지고 있다.
◇블루모스크의 첨탑(미나레)은 모두 6개로 현재 우측 첫 번째(정면 기준) 첨탑은 보수 공사 중이다.
블루모스크라는 별명이 붙게 된 것은 이즈니크산 타일로 장식된 내부의 푸른 빛 때문이었다.
현재는 모조품으로 대체돼(기존 것은 박물관에서 보관) 예전만큼 은흔한 푸른 빛을 내지는 않는다고
하나, 비교를 해보지 못한 관계로 알 수는 없는 노릇.
어쨌든 여러 사연을 담고 있는 것뿐 아니라 아직까지도 모스크로 쓰이고 있어 하루 5번 입장 시간에 맞춰
들어가야만 한다.
제국의 골칫거리 물
블루모스크를 다 보고 나니 오후 4시가 가까워졌다. 아직은 시간 여유가 있었다.
인근에 있는 우리에겐 바실리카 지하궁전으로 잘 알려져 있는 예레바탄 지하수조로 향했다.
이스탄불은 전략적 이점 때문에 세계적 도시로 성장했지만 바다를 면하고 있을 뿐
수량이 풍부한 강이 인근에 있지 않아 대대로 물이 부족했다.
때문에 적에게 포위될 경우 가장 심각한 위협은 물 부족이었다. 또 여름만 되면 고질적 식수난에 시달렸다.
비잔티온 제국은 이를 해결하기 위해 치수사업, 특히 저수시설 확보에 사활을 걸었다.
지하수조는 이런 고민에서 비롯됐다. 예레바탄 수조는 원래 재판, 법률 심의가 열리던 곳이었는데
단단한 암반층으로 이뤄져있어 지하수조로 쓰이기 적절한 곳이었다.
유스티니아노스 황제는 이곳을 8m 깊이로 파고 336개의 기둥을 세우고 지붕을 얹어 지금의 지하수조로 만들었다.
최대 저수용량은 8만톤에 달했다고 한다.(이는 국내 소규모 저수지 저수용량과 비슷한 수준)
이 지하수조가 본래의 용도와 달리 지하궁전으로 불리게 된 까닭이 있다.
바로 제국 곳곳의 고대 유적지에서 공수해온 기둥때문이다.
마치 궁전처럼 기둥들이 줄지어 있는데다 그 기둥들의 모양이 문화재급이다 보니
바실리카 양식의 궁전을 닮아 바실리카 지하궁전 또는 예레바탄 사라이(물에 잠긴 궁전을 뜻하는 터키어)로 불렸다.
특히 옹이 박힌 기둥이 인기다. 나무의 옹이와 닮았는데 실제로 보면 정교함에 놀랄 정도다.
여기에도 아야소피아 박물관처럼 손가락을 넣어 돌릴 수 있는 구멍이 있다.
끄트머리에 가면 방문객들의 이목을 끄는 조각 2점을 볼 수 있다.
메두사의 머리인데 하나는 얼굴이 아래로 향해 있고 하나는 옆으로 뉘어 있다.
이를 두고 일부 기독교인들은 이교도의 신인 메두사를 물리치는 예수의 위대함을 상징한다고 하는데 실제로는 기둥의 높이 차를 맞추기 위한 것이었다고....
지하수조 안에는 어마어마한 크기의 잉어들이 떼를 지어 살고 있었다.
여러모로 놀라움이 많았으나 비싼 입장료만큼은 아니었다.
게다가 아직 시차 적응이 되지 않아 졸음이 밀려오기 시작했다.
둘째날 이스탄불의 밤은 생각보다 일찍 찾아왔다. 그게 문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