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말을 알고 읽는 책은 재미가 없죠.
새드엔딩인걸 알고 보는 영화는 그다지 보고 싶지 않을거예요.
끝이 났다는 걸 알고 쓰는 글도 사실은 마찬가지예요.
아마 읽는 사람이 있다면, 읽는 사람들도 그다지 유쾌하고 즐거운 내용은 아니겠죠.
현실적으로 잘 되기가 힘들기 때문에
동성애라는 토픽이 절절하고 더 애틋하게 느껴질 수도 있겠지만,
현실은 영화가 아니잖아요.
드라마틱하지도 않고, 반전이 있는 것도 아니죠.
네. 결말은 났고 저의 이야기는 새드엔딩입니다.
댓글을 봤어요.
붙잡으라는 말도요.
그리고 결혼할 여자 놔두고 무슨 짓이냐는 글도 읽었어요. 동감합니다.
못할 짓 하는 거죠.
결혼은 아직 날을 잡은 건 아닌 것 같았어요. 서로 결혼 얘기가 오가고 있고, 상견례를 앞두고 있다고 그때 여자분이 말씀하시더라고요. 그리고 추석 연휴에 고등학생 때 친구들을 다 같이 만날 예정인데, 그 때 아마 W에게서 결혼에 관한 얘기를 다시 듣게 되겠죠.
다시 만나고 싶은 마음은 그다지 없고, 사실 붙잡을 생각도 없지만, 마주치는 걸 피할 생각도 없기 때문에 그 날 보게 되겠네요.
걱정하시는 일은 없을 거예요.
W가 결혼하고 나면, 저는 절대로 W를 둘이서 만나지 않을 겁니다.
모르는 척 했었지만, 사실 W의 마음도 저와 크게 다르지 않다는 거 알고 있어요.
그래서 더더욱 W를 흔들고 싶지 않아요.
정상이라는 범주에서 평범하게 살아가겠다고 내린 결정을 방해하진 않을 거예요.
험난한 길을 나와 함께 하자고 발목잡고 싶지는 않아요. 저는 응원해주고 싶어요.
제가 사랑하는 친구이기 때문에.
행복한 이야기를 들려드렸으면 좋았을텐데, 미안합니다.
응원도 해주셨는데.
좋은 후기를 남겨드리면 좋았겠지만, 그럴 수가 없네요.
예쁘고 달달한 사랑이야기였으면 좋았겠지만,
이런 이야기도 있다는 거, 그냥 그 정도로만 생각해주세요.
아마 실제로는 저처럼 해보지도 못하고 끝내는 사람들이 훨씬 많지 않을까,
전 그렇게 생각합니다.
W에게서 받은 상처가 많아서 글을 적다보면 W가 미워질 줄 알았어요. 그래서 마음을 정리하고 싶어서 주절주절 늘어놓게 됐어요. 둘만의 알콩달콩한 얘기 같은 건 전혀 없어요. 오히려 쓰면 쓸수록 W는 참 가학적인 성향이라고까지 느껴요. 그럼에도 도저히 미워지지는 않지만, 마음 한 켠이 정리는 되네요.
잊고 싶어서 적는 글이니까, 새드엔딩인 걸 미리 알려드립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봐주시는 분들이 있다면 감사합니다.
위로도 감사합니다.
***
우리 학교는 격주에 한번 씩 부활동을 했는데
저는 전학 와서 남아있는 부가 몇 개 없었어요.
그래서 문예부를 들어갔는데, 에세이 같은 거 써서 학교신문에 싣거나 시 짓고 축제 때 게시하는 그런 부였죠. 인기없는 부였어요.
아, 부 활동은 남녀 같이 하는데 문예부는 여자가 대다수였죠.
2학기 때 문예부에서 여자친구를 사귄 적이 있어요.
이 여자친구가 W가 뺏아간 첫 여자였죠.
격주로 부 활동하고, 가끔씩 주말에 부원들끼리 만나서 놀러도 가고 그러면서 가까워졌죠.
제가 여자한테는 부끄러움도 많이 타고 숙맥이었는데 여자애가 엄청 상냥하고 친절하더라고요.
저는 열심히 공부하는 학생이어서, 학생 때 연애할 마음은 전혀 없었는데
여자애가 먼저 다가오니까 싫지 않았어요.
뭣 때문인지는 기억안나지만 2학기 때 한창 부활동을 열심히 하던 때가 있었어요.
뭘 앞두고 있었는데, 축제는 아니었는데 뭐 엿튼.
그 시기에 한동안 학교에 일찍 와서 0교시 시작 전까지 모여서 부활동 하면서 여자애랑 부쩍 친해졌는데 전 딱히 그 애를 좋아했던 건 아니었어요. 다만 이성친구가 하나 생겼네, 하는 반가운 마음이 있는 정도?
한 날은
이른 아침에 부실에 갔는데 그 애만 와 있더라고요.
걔가 저한테 집에서 만들었다고 과자를 주더라고요. 다른 부원들거는 아직 다 못 만들었다고 오늘은 너 먼저 줄게, 라길래 그런가보다 하고 고맙다며 받았죠.
그러고 쉬는 시간에 친구들하고 과자 나눠먹는데 어디서 난거냐 뭐 이런 얘기를 하다가 그 여자애 얘기가 나왔어요. 생각보다 인기가 제법 있는 애라서 친구들도 누군지 알고 있더라고요. 막 좋겠다면서 잘 해보라면서 놀리고 막 그랬죠.
그러고 한 몇 주 뒤엔가 고백을 받았어요. 저를 좋아한다고는 전혀 생각 못해서 깜짝 놀랐는데 제 친구들은 다 대충 그럴 거 같았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난 아직 연애할 마음이 없다고, 성적 잘 받아서 좋은 대학 가고 싶다고 했죠.
근데 그 여자애가
자기도 방해할 마음 없다고, 자기도 제법 공부 잘 한다면서 웃더라고요.
그러면서 서로 도와주고 그러면 되지 않겠느냐고 요새 나 때문에 공부가 안된다고, 그래서 고민하다가 용기를 냈다고 하더라고요.
(대충 그런 내용이었어요)
예쁘게 생긴 애가 그렇게 말하니까 딱히 더 거절하지를 못하겠더라고요.
연애해본적도 없는데, 궁금하기도 하고...
사실 그런 마음으로 사귀면 안 됐었는데,
호기심 반으로 사귀기 시작했죠.
진짜 건전하게 사겼었어요. 처음에는 손은 당연히 못 잡고 그냥 하교해서 약간 바래다주거나, 새벽에 등교해서 우리 교실에서 나란히 앉아서 같이 공부하는 정도?
호기심으로 시작했지만 그 애가 저한테 워낙 잘해줘서
저도 점점 걔가 좋아지고 있었죠.
그러다가 중간고사가 끝났을 무렵에, 친구들이 여자친구 한번 보여달라고 하더라고요.
미팅도 좀 주선해라, 뭐 그랬어요.
남녀공학이긴 했지만 수업도 따로 듣고 건물도 떨어져있어서 교류가 거의 없었거든요.
부활동하면서 만날 수는 있지만 남자부, 여자부가 거의 정해져있었어요.
그래서 주말에 친구들한테 처음으로 여자친구를 소개한 적이 있는데 그 날 W는 안 나왔었어요. 왜 안 오냐고 연락했더니, 자긴 그런 자리 불편하다고 했던 거 같아요. 그냥 그런가보다 했죠.
여자친구가 사근사근한 편이라 제 친구들하고도 빨리 친해졌어요.
그러다가 여자친구의 친구들도 데리고 나오게 되고 그렇게 다 같이 어울리던 시기가 있었어요. (건전했어요)
그러니까 W랑도 자연스럽게 어울릴 기회가 왔던 거죠.
언젠가,
처음 W가 나온 날이었는데
우리끼리 먼저 카페에 있었고 W가 좀 늦게 왔어요.
와서 목례를 하고 자리에 앉더라고요.
다 동갑인데 목례를 하는 게
딱 선 긋는 느낌?
이 자리 불편하다고 티내는 것 같더라고요.
W는 제 여자친구를 처음 본거니까
내 여자친구 OO라고 소개해줬죠.
그래서 여자친구가 안녕, 하고 인사했는데
W가,
아, 네.
그러더라고요. 엄청 싸했어요. 여자친구도 민망해하고.
그래도 뭐 다른 친구놈 하나가 분위기 금방 띄워서 다시 또 웃고 떠들고 그랬는데 여자애들이 W가 유명하다고 그런 얘기가 나왔던 것 같아요. 잘 생겼는데 공부도 잘한다고.
W 얘기를 하는데도 W는 남 얘기 듣는 것처럼 엄청 재수 없게 굴었어요.
별 대꾸도 안하고 반응도 없고.
워낙에 원래 그런 성격이라서, 그러려니 했지만.
그러다가 자리 옮겨서 밥을 먹는데
내 앞에 여자친구가 앉고 내 오른쪽에 W가 앉은 그런 구도였어요.
남자 vs 여자 이렇게 소개팅 분위기? 물론 남자가 많았지만.
그 때는 매너 이런것도 몰라서 여자친구 챙겨주고 그런것도 할 줄 몰랐어요.
그냥 다 같이 웃고 떠들고 하다가
문득 앞에 앉은 여자친구를 봤는데 뭔가 어쩔 줄 몰라하는 표정을 짓고 있더라고요.
반사적으로 W를 홱 쳐다봤는데
W가 여자친구를 뚫어지게 보고 있더라고요.
수업시간에 날 봤던 그런 표정으로.
기분이 진짜 더러웠어요.
내가 당해봤기 때문에 그 느낌을 너무 잘 알죠.
근데 제가 딱히 뭘 어떻게 할 수 있는 게 아니라서
그냥 분위기 전환하면서 W한테 말 걸고 뭐 그 정도가 다였죠.
음식점 나와서 다 같이 걷고 있었는데
손잡고 걷다가 여자친구를 보면
여자친구가 은연중에 앞에 걷는 W를 보더라고요.
신경은 좀 쓰였지만
여자친구가 날 워낙 좋아하기도 했고,
그냥 W가 잘생겨서 눈이 가는 거겠지, 생각했어요.
그리곤 노래방엘 갔는데 의자가 ㄷ자 모양으로 되어있었어요.
W는 제 맞은편에 앉아 있었고 여자친구는 제 옆에 앉아 있었죠.
저는 여자친구랑 같이 나가서 듀엣도 부르고
친구들이랑 신나서 노래 부르면서 놀았죠.
W는 노래방을 싫어해서 평소처럼 폰만 만지고 앉아있었겠죠, 아마.
한창 분위기 무르익을 때쯤, 친구들이랑 앞에서 노래를 부르다가
문득 뒤돌아 여자친구를 보는데
여자친구가 제가 아닌 W를 보고 있더라고요.
참. 그때의 감정이란.
여자친구를 미친듯이 좋아했던 것도 아닌데 갑자기 불안해지더라고요.
오늘 처음 만났는데 여자친구는 W한테 반한건지 뭔지.
속으로 욕도 막 나오고 기분 잡치더군요.
그때부터 김새서 나도 그냥 자리로 들아와 앉아있었는데
앞에 친구들 보는 척 하면서 여자친구를 봤죠.
제 옆에 앉아서 힐끔힐끔 W를 보고 있는 여자친구를
제가 보고 있었던거죠.
저도 눈치가 빠른 편은 아닌데 그냥 느낄 수 있었어요.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는거.
노래방이 어둡고 미러볼(?) 같은 조명 돌아가고 하느라
여자친구는 내가 자기를 보고 있단 걸 눈치 못 챘는데
갑자기 고개를 숙이면서 딴 짓을 하더군요.
고개를 돌려 W를 쳐다보니
W가 이쪽을 보고 있더라고요.
순간 호러영화인 줄 알았어요. 소름끼쳐서.
여자친구를 보고 있었는지 어쨌는지
저랑 눈이 마주쳤는데
W가 또 웃더라고요.
사람 빡치게 하는 그 비웃음 같은거. 깔보는 듯한 그 표정.
W가 승자였고
저는 패자였어요.
저랑 W 사이에서 이미 그 순간에 결정이 났던거죠.
아니, 그 전에 났었을 수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