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들끼리 막 의리에 죽고사네, 사랑이냐 우정이냐 이런 대화를 한 적이 있었죠. 저만 여자친구가 있던 터라, 친구들이 막 니 여친이냐 우리냐 유치하게 묻고 그랬는데 전 또 분위기에 휩쓸려서 당연히 너네지, 여자친구는 헤어지면 끝이다, 친구는 영원히 가는 거지 막 그랬었죠.
이 얘기를 왜 하냐면
참 그대로 돌려받았거든요. 말한 대로.
노래방 이후로 다 같이 보는 자리를 안 만들게 되더라고요. 저랑 제 여자친구는 빠지고 종종 자기들끼리 모여서 놀고 그랬는데 아마 W는 거의 참여 안하는 모양이더라고요.
웬만하면 W랑 여자친구랑 마주치게 하고 싶지 않았는데 학교가 같은 학교라 그게 뜻대로 되지 않았죠. 야자가 끝나면 보통 남자애들이 먼저 나가고 그 뒤에 여자애들이 나가는데 아마 남자애들이 준비가 빨라서 그랬을거예요. 교문도 더 가까웠고.
근데 가끔씩 여자친구가 먼저 나와서 교문에서 기다리고 있더라고요. 약속이 없으면 하교는 따로 했었는데, 약속도 없이 여자친구가 기다리고 있으면 기쁘기도 하고 껄끄럽기도 했죠. 그래도 친구들이 알아서 먼저 가주고 뭐 그랬었죠.
언젠가 한번, W랑 저랑 둘이서 제일 늦게 교실에 나와서 같이 걷고 있는데 W가 말하더라고요.
니 여자친구, 나한테 문자한다.
대충 이렇게 말했던 것 같아요. 심장이 벌렁거리더라고요. 근데 애써 태연한 척,
아, 그래?
뭐 이랬죠.
지금 생각하면 그게 더 병신 같은데 그 땐 그게 멋있는 줄 알았죠.
보든지, 하면서 자기 폰을 내미는데 자존심이 상해서, 볼 수가 있어야 말이죠. 그래서 진짜 이불킥 할 얘긴데,
내가 번호 가르쳐줬어, 너랑 친해지라고.
이랬어요.
여자친구가 우습게 보이는 건 또 싫어서 괜한 변명을 하게 되더군요.
하지만 아직 모르죠, 제 여친이 어떻게 W 번호는 또 알게 된건지.
그치만 W도 알았을 것 같아요.
제가 아무렇지 않은 척 하는 거.
번호를 가르쳐준 게 아니란 것도.
그 뒤로 무슨 대화가 더 오갔는데 기억은 안나요. 대충 W가,
나는 그다지 친해지고 싶은 맘 없는데,
뭐 이랬던 거 같아요. 말을 참 싸가지 없게 했어요.
그리고 참,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교문에 여자친구랑 제 친구들이 우르르 모여 있더라고요. 친구들은 저한테 뭐, 올~ 좋겠네~ 막 이러는데 정말 하나도 안 좋았죠.
왜 하필 지금.
여자친구가 W를 보고도 못 본 척 저한테만 인사하더라고요. 솔직히 전 그게 더 가증스러웠어요. 이래놓고 뒤에서 연락했냐? 뭐 이런 생각이 들었죠. 사실은 W가 보고 싶어서 나 기다리는 건가, 이런 생각도 하고.
근데 웃긴 게, 그 날 처음으로 W가 여자친구한테 먼저 말을 걸더라고요.
OO이 여자친구 안녕?
뭐 이렇게.
제 여자친구는 어색하게 내 눈치보면서 대답하고..
그거 보고 있는 저는 참...
친구들이 또 먼저 가겠다는데 일부러 잡았어요. 떡볶이나 먹고 가자고. 그 상황이 되게 웃긴데 어쩌는지 지켜보고 싶은 거예요. 그래서 분식집가서 이것저것 시켜먹었는데 뭐 코로 들어가는지 입으로 들어가는지 제가 먹긴 먹었는지 기억도 안 나요.
다만 저는 계속 W랑 여자친구를 번갈아 쳐다봤죠. 아마 표정은 썩어있었을 거예요.
여자친구는 W는 쳐다도 안 보더라고요. 그 불편해하던 기운이 저에게까지 전해지더군요.
W 혼자 태연하더라고요. 태연한 척을 하는 건지, 뭔지.
그날은 그게 다였어요.
***
저번에 W랑 여자친구랑 처음 만나게 된 이야기를 적었는데 W에 대한 욕이 좀 있어서 약간 놀랐어요. 그건 정말 시작단계인데, 아주 일부일 뿐인데 제대로 이야기 해보기도 전에 W는 미친놈이 되어 있더라고요. 제가 글을 잘 못 써서 전달이 이상하게 됐나 싶기도 했어요.
혹시 제가 쓰는 이야기가 흔히들 말하는 암유발 글인가 싶기도 해서 좀 망설여지네요. 이제 막 서론을 끝내고 본론을 시작하려는 건데, 더 답답하고 이상해보일 이야기 투성이라서.
댓글중에, W는 사람의 감정을 가지고 노는 괴물같다는 글을 봤어요. 사실 맞는 말이에요. 고1때부터 지금까지 장장 몇 년인지. 그런 W를 미워하지 못하는 저도 이상하다는 글을 보고, 아 진짜 나도 정상은 아닌가, 싶은 생각도 들었어요. 글 읽으시는 분들에겐 제가 역시 호구같고 병신같나요?
그런 거 있지 않나요.
한 발짝 떨어져서 보면 보이는데, 바로 눈앞에선 보이지 않는거요. 제 3자의 입장에선 알 수 있는데, 정작 당사자가 되면 알 수 없는 것들이요.
친구 여친을 뺏는 W가 미친놈, W에게 여자를 뺏기고도 좋다고 하는 글쓴이는 병신, 남자친구의 친구가 좋다고 가버린 여자들도 제정신은 아닌 여자.
이렇게 보면 그게 맞는데, 실제 맥락은 그렇게 간단하지가 않았던 것 같아요. 긴 기간을 두고 함께 지냈을 때 저는 W가 이상하다고 느끼지 못했고, 제 여자친구를 빼앗았어도 버젓이 옆에 남아있었죠.
더군다나 다들 학생 때 감정들 기억하시나요? 어딘지 모르게 조금 음울하고 폐쇄적이고 그렇지 않나요? 다른 사람들은 모르겠지만 전 조금 그랬어요. 성적도 괜찮았고 부모님도 항상 응원해주시고, 교우 관계도 좋았고 그랬지만 어느 한구석 일그러져 있었어요. 정상과 비정상을 구분하지도 못했고 아름다운 것도 꺼림칙한 것들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했어요. 저도 그 땐 저만의 세계에 빠져 있었기 때문에 W와의 이상한 관계가 싫지 않았던게 아닐까, 싶어요.
주절주절 변명하는 건, 앞으로도 우울하고 비정상적인 이야기뿐이라서, 더 답답하고 화나실 것 같아서. 그럼에도 읽어주시면 감사하겠다,고 전하고 싶어서입니다.
정말 W는 처음부터 끝까지 미친놈이었을까, 생각을 하게 되더군요.
나는 뭐 때문에 종종 W를 의식하고, 혼자 못 헤어 나오고, 농락을 당했을까. W를 미워하지 못하는 나도 역시 이상한 놈인가, 생각하게 됐죠. 다른 사람을 좋아하지 못하는 현재의 모습에 절망감도 느끼면서. 전 꽤 기억력이 좋은 편인데, 생각보다 좋았던 기억은 많이 떠오르지가 않더군요. 그럼에도 남아있는 약간의 좋은 기억들이 있긴 있어요.
물 뒤집어쓰기를 한 이후였던 여름날, 여전히 W랑 짝이었을 때
아마 반장이 아이스크림을 돌렸을거예요. 담임이었나.. 엿튼 누가 아이스크림을 돌린 적이 었었죠. 화장실 갔다가 왔는데 이미 아이스크림을 나눠준 이후였고 제 책상에는 팥맛 아이스크림이 놓여있었죠. 팥맛은 보통 어른들만 좋아하지 않나요. 저희가 맨 뒷줄이라 인기 없는 걸 받은 것 같네요.
어찌됐건, 전 그 아이스크림이 별로 안 땡기더군요. 그치만 남은 것도 없었고 그냥 뜯어서 한 입 베어물었죠. 나도 모르게, 진짜 맛없다, 라고 말했는데 W가 절 보더니, 그럼 이거 먹어, 하면서 자기 아이스크림을 주더군요. 그게 우유맛 나는 아이스크림이었는데, 그거도 팥맛 아이스크림처럼 인기 없는 아이스크림이었지만, 전 팥맛을 싫어하니까 좋다고 바꿔먹었죠.
이게 진짜 별거도 아닌 사소한 이야긴데, 좋은 기억으로 남아있는 건 이유가 있어요.
며칠 뒤에(?) 점심시간에 놀다가 음료수를 사먹은 적이 있죠. 다 각자 하나씩 먹고 있는데, 거기 없었던 친구가, 너네끼리 마시냐면서 W의 음료수를 뺏어 마셨죠. 그러고는 W에게 돌려주니까 W가, 그냥 다 마시라고 하더군요. 그 친구는 좋다고 아마 다 마셨겠죠. 그건 잘 기억 안 나는데 그런 일이 몇 번 반복되고야 W의 결벽성(?)을 눈치 채게 됐었죠.
W가 물을 한번 가져온 적이 있는데 친구가 허락 없이 W의 물을 벌컥벌컥 마신 적이 또 있어요. 저는, W가 싫어할텐데, 속으로 생각만 하고 있었죠. W도 뭐 별말은 안했어요. 그게 얼음물이었는데 (학교에 정수기 있음) 그 물을 입에도 안 대더군요. 그리곤 다음 쉬는 시간에 물을 다 버리고 물통을 씻어서 새로 물을 떠오더군요. 그 때 확신했죠. 얘는 이 정도의 간접터치도 싫은거구나.
그러다가 문득, 아이스크림은 왜 바꿔준거지, 그렇게나 싫어하면서.. 그런 생각이 드니까 감동이라기엔 웃기고, 귀여운 구석이 있네. 이 정도로 생각하게 됐죠.
제가 원래 잘 조는 편은 아니었는데 한 날은, 0교시에 아예 엎드려서 자고 있었어요. 제 뺨에 차가운 물체가 느껴져서 눈을 떴는데 W가 턱을 괸 채로 음료수를 제 뺨에 올려놓고 절 보고 있더라고요. 그 때는 왠지 부담스럽거나 그러지 않아서 저도 W 눈을 피하지 않고 바라봤죠. 그러자 W가 웃더라고요. 사람 기분 좋게 하는 웃음이었어요. 그 자세로 몇 초쯤 보고 있던 기억이 있어요.
두 개 다 먹을 거 얘기네요. 전 먹을 걸 주면 좋은 기억으로 가지고 있나 봅니다...
2학기 얘기 했다가 다시 1학기 얘기 했다가 완전 뒤죽박죽이네요. 제 머리에도 정리가 안 되어있어서 그냥 떠오르는 대로 쓰다 보니 그렇게 됐습니다. 양해 부탁드립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