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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워할 수 없었던 이야기

스푸트니크 |2015.09.23 23:40
조회 13,294 |추천 52

글을 적기 시작한 것이 결과적으로 저에게 독이 된 게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뻥 뚫린 것 같던 허전한 마음이 채워지는 것도 아니고 절대 채워질 수도 없을 것 같지만 차분해지고 있는 건 확실해요. 적다보니까 제가 조금 더 객관적인 시선을 가지게 되더라고요. 내 꼴이 얼마나 우스웠던가도 확인하게 됐고, W는 내가 느낀 것보다 조금 더 빨리, 나한테 좋은 감정을 가지고 있었던 건 아닐까 이런 생각도 들게 됐죠. 저 역시도 그랬던 것 같구요. 알면서도 둘 다 외면했던 것 같더군요, 지금 보니까.

 

참 조악한 글도 글이랍시고 읽어주시고 힘을 주셔서, 그를 통해서 제법 위로 받고 있습니다. 남의 일인데도 마음 아프다고 해주시고, 안타깝다고 해주셔서, 정말 세상엔 마음 따뜻하신 분들이 많다는 생각을 새삼 하게 됐습니다. 당연히, 좋은 사람들은 많겠지만 저도 적지 않게 상처를 받은 사람이라서 그렇게 순수한 시선으로 사람을 대하는 편은 아닌 것 같거든요. 어쨌거나 감사합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판 얘기를 하셔서 일단 이어는 놓을게요.

추석 때 만나는 것도 불안하다고 하시는 댓글이 있던데, 무엇이 불안하신걸까요? 다시 W한테 흔들릴까봐 불안하신거겠죠? 글쎄, 그러면 안 되려나요.

 

며칠 지났다고 그새 마음이 흔들리고 있나 봅니다. 제가 느낀 대로 W에 대한 얘기를 적었는데, W를 나쁜 놈이라고 하니 저도 모르게 자꾸 옹호를 해주고 싶더라고요. W와 첫 여자친구 이야기를 적으면서도 느꼈던 건데, 저는 W가 아닌 여자친구에게만 화를 내고 있더군요. 그런 저를 보면서도 스스로한테 혀를 끌끌 찼죠, 진짜 병신이 따로 없네, 싶었어요. 참, 괴롭히기 좋은 스타일 아닌가 싶네요, 저란 인간은.

 

이래서 독이 됐다고 하는거예요. 글을 적을수록 W에 대한 미움이 옅어지고 있거든요. 그리움만 짙어지네요. 아 진짜 나 별로인 사람이네요.

 

 

아, 그리고 말투에 관한 댓글을 보고서, 하고 싶은 이야기가 떠올랐어요, 갑자기. 제 말투가 다른 사람 말투 같다고 하던데, 제 말투든 문체든 워낙 그냥 평범한 일반 남자말투니까 특별할 것도 없지만 W가 말투가 조금 특별했거든요.

 

 

누군가를 기억할 때, 떠오르는 것들이 있지 않나요? 목소리, 숨냄새, 걸음걸이, 특정 행동들, 향기, 제스처, 음악 등등. 개인만의 특징으로 사람을 기억하는 편인데, 아마 다들 그렇겠죠. 말을 시작할 때 꼭 박수를 한번 치고 시작한다든지, 습관적으로 음음, 거린다든지 그런 것들 있잖아요.

 

마지막으로 사귀었던 여자친구를 제가 많이 좋아했었는데, 그 여자애는 부끄러우면 꼭 머리카락으로 자기 눈을 가렸었어요. 아니면 머리카락으로 얼굴을 감싸게 하는? 머리카락을 교차시켜서 턱을 감싼다고 해야 하나. 설명하기가 어려운데 엿튼 그런 것들. 전반적으로 머리카락을 참 자주 만졌어요. 그래서 비슷한 스타일의 살랑거리는 머리카락을 보면 그 여자애 기억이 나고, 뭐 그렇죠. 머리카락에서 좋은 냄새도 나고, 그 여자애 참 귀여웠었는데. 그 애랑은 진짜 처절하게 헤어졌지만.

 

 

그리고 W는 말투가 특이했어요. 습관적으로 말을 도치해서 사용했달까요. 보통 넌 뭐 먹을래, 라고 물어보지 않나요. W는, 뭐 먹을래, 넌. 꼭 이런 식으로 말을 했어요.

안 해, 그럼.

싫은데, 난.

이런 식이었죠. W가 했던 많은 말들이 있겠지만 온전히 기억나는 건 몇 문장 안 되는데 그중에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었죠.

두려워? 내가 무슨 말을 할지?

저건 내기 한번 지고 그 다음 내기 때문에 한 말이긴 한데, 언젠가 글로 적을 기회가 오겠죠. 그 때 실제로 제가 정말 두려워했었기 때문에 기억이 나요.

 

그것 말고도, 꼭 말투를 평서문으로 안 끝냈죠. 말을 하다가 만 느낌으로 끝냈어요.

하기 싫어, 라고 하면 될 것을,

별로 하기 싫은데, 난. 이런 식으로 말을 했죠. 그런 말투 때문에 유독 싸가지 없고 차갑다고 느꼈던 것 같기도 해요. 어쨌거나 그 말투가 사람을 잡아끄는 매력이 있었어요. 저만 그렇게 느꼈을지는 모르겠지만 전 사실 그 말투가 참 좋더라고요. 그런 말투로, 진실된 마음을 터놓고 말했다면 우리가 이렇게까지 꼬일 일은 없었겠죠. 그건 저도 마찬가지지만.

 

 

 

다른 이야기를 엄청 오래도 했네요.

 

다 같이 분식집 갔던 날 이후로도 그런 상태로 몇 주 지냈어요. (날짜는 정확하지 않으니까 그냥 대충 이해해주시면 좋겠습니다. 기억에만 의존해서 쓰는거라 엉망진창이네요)

 

나는 여자친구한테 W 얘기를 꺼내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W한테 여자친구가 뭐라고 연락 왔는지 묻지도 못한 채로 그렇게 지냈죠.

 

그냥 속으로, 둘이 연락 안했으면 좋겠다, 바라기만 했었죠.

 

 

 

딱히 W랑 사이가 멀어지지도 않았어요. 우리 둘 사이는 좋았어요. 다만 여자친구가 끼면 껄끄러운 감은 있었죠. 그저 W와 나 사이에서 내 여자친구 이야기가 금기시 된 정도죠. 친구들이 여자친구얘기를 꺼내면 전 대충 얼버무리면서 화제 전환하고 뭐 그랬었죠.

 

여친이 관심보일 때, W에게서 화가 나지 않냐는 댓글 있었는데, 네. 안 났어요. 제가 또 병신같긴 한데 조금 변명을 해보자면, W는 제가 딱히 화낼만한 대상이 아니었어요.

 

W에게, 내 여자친구에게 집적대지 마라, 라고 하기엔, 집적은커녕 오히려 전혀 관심이 없어보였죠. 연락 왔다고 폰을 보라고 하는 태도들이. (이 때까진 정말 관심이 없었던 것 같은데, 나중에 제 여자친구랑 입을 맞췄었죠...)

아니면, 사람 뚫어지게 보는 그런 시선으로 내 여친 보지마라, 라고 하는 것도 좀 웃기지 않나요. (이건 지금 드는 생각이지만)

 

그렇다고 여자친구에게 W한테 연락하지 마라, 라고 하기엔 꼴에 사내새끼라고 자존심이 상하더라고요. 쿨한(척) 남자친구이고 싶었죠.

 

저는 제가 느꼈던 싫은 감정들이 다 열등감 같았어요. 딱히 무슨 일이 있었던 것도 아닌데, 그저 눈 몇 번 마주치고 친구끼리 문자 좀 주고받았다고 초조해하는 감정이, W가 잘나서 내가 괜히 자격지심에 그런 것 아닌가 싶었거든요.

 

실제로 다른 친구녀석들은 제 여자친구의 번호를 알고 있었고, 제 여자친구도 제 친구들 번호를 알았는데 W에게만 너무 예민하게 구는 건 아닌가 했던거죠. 어쩌면 그냥 모른 척, 외면하고 싶었던 걸지도 모르죠. 맞닥뜨리기 겁이 나서.

 

 

그래도 궁금은 했어서, 한번, 그 때가 점심시간이었는데,

W랑 나란히 앉았을 때, 요새도 XX(여친이름)이 연락 오냐고 물어봤죠.

 

만나자던데.

라고 대답하더군요. 저 그때 진짜 껄껄 웃었어요. 진짜 막나간다 싶어서.

무슨 개막장 싸구려 로맨스냐. 이런 느낌?

 

그래서?, 라고 물었죠.

 

W가 어이없다는 듯이 절 쳐다보더니,

니 여자친구를 왜 만나, 내가.

이러더라고요. 그래놓고 여지껏 연락은 했냐... 싶었죠.

 

 

근데 이런 걸 알면서도 전 그냥 모른 척 했어요. 여자친구가 너무 좋아서는 아니었고,  오히려 미친 듯이 좋았던 것도 아니라서 그랬던 것 같아요.  괜히 감정소모하면서 공부에 방해받고 싶지도 않았어요. 그 뒤로는 여자친구 얘기 한 적 없이 그럭저럭 지냈을 거예요.

 

 

시간이 지날수록 여자친구랑도 둘이서 만나면 설레고 좋아하는 감정이 점점 커지더라고요. 그러다가 겨울, 기말고사를 앞두고 한창 감정이 무르익었을 때, 여자친구랑 학교를 빨리 등교해서 시험공부를 하기로 했었던 때가 있었어요. 거의 6시쯤 등교했던 것 같아요. 꽤 열심히 공부 했고, 또 잘 됐었어요.

 

 

한 날은,

우리 교실에서 공부하는데, 여자친구가 제 자리에 앉고 제가 제 짝 자리에 앉았었죠.

 

여자친구가 갑자기 제 손을 잡더라고요.

그러다가 제 손등에 뽀뽀를 했어요.

심장 터질 뻔했죠.

 

그 때가 사귄지 두 달쯤 됐나. (날짜개념이 없어서 이런 건 아예 기억 안나요) 포옹은 종종 했었는데 뽀뽀는 아직 못 했었거든요.

 

 

여자친구가 먼저 그러니까 갑자기 집중도 안 되고 공부하기 싫어지더라고요. 그래서 여자친구를 끌어당겨서 제 무릎 위에 앉혔죠. 그리고 한 몇분? 여자친구 등에 얼굴을 대고 끌어안고 있었어요. 그런 진한 스킨십은 처음이라서 심장이 엄청 뛰더라고요.

 

 

 

근데 갑자기 여자친구가 제 손을 풀면서 벌떡 일어서더라고요. 앞을 보니,

W 모습이 보이더군요. 앞문이 열려있있던 건지, 누가 들어오는 소리를 못 들었었죠.

 

저도 좀 당황해서,

언제 왔냐고 물으니까,

방금 왔는데 너네 있는 줄 몰랐다면서 가방만 두고 나가더라고요.

 

 

이건 그냥 평범한 얘기고 아무 이야기도 아닌데, 그 때 마침 들어왔던 친구가 W라서 기억이 나는 거겠죠. 괜한 열등감이지만, W가 아닌 다른 사람이 들어왔어도 그렇게 내 손을 떼고는 황급히 일어났을까, 라는 생각까지 하게 되더라고요.

 

누가 들어왔어도 그 상황에선 놀랐겠지만 저 역시도 그게 W여서 더 짜증이 났었어요. 아마.

 

 

 

 

음. 그런 상황들이 마주치면 어색해진 감은 있지만 저랑 여자친구는 꽤나 연인느낌 폴폴 내는 커플이었어요. 여자친구가 W에게 관심이 있나? 하고 의심하면서 신경을 곤두세웠던 것도 있었지만, 박카스며 방석이며 챙겨주길래, 괜한 오해다 싶기도 했죠.

 

 

헤어진 건 기말고사 끝나고, 조금 자유롭다 느꼈을 때, 그래서 여자친구와의 데이트에서 첫 뽀뽀를 했을 때. 그걸 친구들에게 자랑했고 W 역시 그 사실을 알게 됐을 때. 그리곤 W와 여자친구가 둘이 만나게 됐고, 그 다음 날 제가 차였죠.

 

 

이 얘기는 더 짜증나고 답답한 이야기인데, 다음에 좀 상세하게 적어보도록 하겠습니다. 이제 슬슬 잘 시각이네요. 좋은 얘기 해달라는 댓글도 봤는데, 기억을 쥐어짜내보겠습니다. 좋은 밤 되시고, 암유발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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