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책갈피

축하한다는 말 대신 글로 전하는 이야기

스푸트니크 |2015.12.21 19:51
조회 9,559 |추천 52


아마 11월쯤? 교복 위에 아우터를 입지는 않았지만 재킷 안에 집업후드나 가디건 같은 걸 입고 다녔던 시기였죠. 늦가을에서 초겨울 넘어가던 시기?

 


5교시가 체육시간이었던 요일이 있었는데, 그 날은 보통 급식실 가기 전에 체육복으로 갈아입고 가곤 했었죠. 다시 교실로 돌아오는 게 귀찮아서 운동장에서 놀다가 바로 수업 들어가려고.

 

날이 쌀쌀한 때라서, 교복 와이셔츠 위에 그대로 체육복 상의를 입는 애들도 많았는데 저는 그게 불편하기도 하고 추위를 많이 안 타기도 해서, 체육복 상의 안에는 그냥 반팔만 입었었죠. 좀 춥긴 한데, 또 몸 움직이다보면 금방 덥더라고요.

 


그 날도 5교시가 체육시간이어서 체육복 갈아입고 밥 먹으러 가려는데, W는 상의는 갈아입지 않았더라고요. 그래서 친구 한명이 넌 왜 안 갈아 입냐고 물었는데, 자긴 나중에 갈아입겠다고 했었죠. 그런가보다 하고 점심 먹고 운동장에서 놀다가 예비종이 치더라고요.

 

야, 하고 W가 절 부르더군요. W를 쳐다보니, 나 체육복 안 가져왔는데. 라고 말하더라고요.
전 교실에 두고 왔다는 말인 줄 알았죠. 그래서

 

갖다줄까? 물으니,
오늘 안 가져왔다고. 라고 대답하더라고요.

 


저는 듣자마자 그 말이 거짓말인 걸 알고 있었어요. W의 성격상 준비물을 놓고 올 타입도 아니지만, 남의 체육복을 빌려 입을 성격도 전혀 아니거든요. 더군다나 진짜 체육복을 안 가져왔던 거면 진작 다른 반 애한테 빌리러 가야 했는데, 그러지 않았으니까.

 

예전에도 언급한 적 있지만 W가 결벽증이 좀 있어서 자기 물건 빌려주는 것도 싫어하고 남의 물건을 빌리지도 않거든요. 게다가 체육복 같은 건 보통 몇달씩 사물함에 처박아두는 애들도 태반이고, 전 그 정돈 아니었지만 W에 비하면 깔끔한 편도 아니었죠.  반면에 W는 꼭 체육하고 나면 바로 집에 들고 가서 빨더라고요.

 


눈에 뻔히 보이는 거짓말이었지만 전 그 자리에서 바로 제 체육복 상의를 벗어줬죠.

 

진짜 빌려주게?
라고 되묻는데, 그 표정이 고마움이나 미안함이 아니라 절 떠보는 듯한 표정이더라고요.

 

 

시키는 건 뭐든 하겠다더니, 뭘 어떻게 할건데, 뭐 그런 느낌이라고 해야 하나.
바로 전 글에 썼었던, 제가 W에게 뭐든 하겠다-고 말했던 게 그 며칠 전이었거든요.


그냥 표정을 보니까 알겠더라고요. 무슨 의도로 하는 말인지. 그래서 저도 순순히 따라주기로 했었죠.

 


그리고 그날 전, 뭐 반팔만 입고 체육수업을 들었었죠. 딱히 선생님한테 혼나진 않았지만 춥긴 춥더라고요. 체육시간 마치고 교실에 돌아와서 교복을 다시 입는데, 그래도 궁금하더라고요, W가 진짜 체육복을 안 가져왔는지.

 

그래서 W 없을 때 가방을 열어봤죠. 버젓이 있더라고요. W가 자리로 돌아오길래 W한테 말했죠.

 

니 체육복 니 가방 안에 잘 있던데.

 

그러니까 W 한다는 말이,
아, 그래? 몰랐는데.

 

약간은 몰랐다는 연기라도 해주면 좋았겠지만, W의 말투는 이미 알고 있었다는 말투더라고요. 뭐, 저 역시도 알고 있었지만.

 


그 뒤로도 그런 일이 몇 번 더 있었고 우리 관계는 좀 정상적이진 않았죠. 전 알면서도 당해주고, 제가 담담하게 굴수록 W는 더 심해졌고.

 

 

 

그리고, 12월 24일이 다가왔는데 그 때가 주말이었어요. W가 저한테 못되게 굴었지만 생일은 챙겨주고 싶더라고요. 키스한 이후부터 다시 정상적인 친구사이가 될 때까지의 그 괴롭던 기간들이, 괴롭힘을 당해서 느끼는 괴로움이 아니었거든요.

 

그냥 친구를 잃었다는 괴로움? 변해버린 친구를 지켜보는 괴로움 뭐 그런 거였어요. 물론 W가 하라는 대로 해주던 나날들이 끔찍했던 것도 사실이지만.

 

 

 

24일날 선물이랑 케익 하나 사들고 무작정 W집으로 찾아갔죠. 집은 불도 꺼져있고 아무도 없더라고요. 그래서 W에게 전화를 걸었죠. 안 받을 줄 알았는데 의외로 바로 받더군요. 그 땐 좀 놀랐었죠.

 


뭐하냐고 물으니, 왜. 라고 대답 하길래,
다시, 어디냐고 물으니 또 왜, 라고 되묻더군요.


그래서
나 지금 너네 집 앞인데, 라고 했죠.


W가 다시,
왜?
라고 묻는데
이번의 왜는 앞의 왜,랑은 다르게 진짜 의아해하는, 약간 놀란 말투더라고요.


그래서 전,
니 생일이라서. 라고 대답했죠.

 

 

W가 아무 말이 없길래 저도 조용히 폰만 들고 있었죠. 아무래도 괜히 말도 없이 불쑥 온 건가 싶어서, 그냥 갈까?, 하고 다시 물었죠. 그러니까 W가, 기다려 집 근처야. 라고 하더니 전화를 뚝 끊더라고요.

 


전 W가 근처라길래 금방 올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늦더라고요. 그렇게 늦을 줄 알았으면 어디 들어가 있었을텐데. 그냥 선물만 주고 갈 생각이라서 옷도 얇게 입고 왔던 터라 그 날 엄청 추위에 떨었던 것 같아요.

 

움직이면 안 추운데 한 자리에서 멍하니 서있으니까 진짜 춥더라고요. 한 시간 안 되게 기다리고 있으니 W가 오더라고요. W가 오면, 근처라더니 왜 이렇게 늦게 왔냐고 한 소리 하려 했는데, 대체 얼마나 뛰어온건지 헉헉 거리면서 숨을 고르는 모습을 보니까 그냥 웃음밖에 안 나오더라고요.

 

 

옷차림을 보니, 집 근처에 있던 차림새가 아니더라고요. 한 손에는 쇼핑백 같은 걸 들고 있었는데, 선물 같더군요.

 

여자친구랑 있었던 것 같더라고요.

 


나만 W의 생일을 아는 줄 알았는데 그게 내 착각이라는 생각이 드니까 갑자기 좀 쪽팔리더라고요.

 

그래서 생일축하한다, 하고 케익이랑 선물을 거의 던지다시피 W한테 건네줬죠. W가, 기억력 좋네, 라고 하길래 제가 약속했잖아, 라고 대꾸했죠.

 

제 말이 무슨 뜻인지 W는 모를 수도 있었겠지만, 어쨌든 생일을 챙겨주겠다고 약속 아닌 약속을 했었다고 전 생각하고 있었거든요.

 


W가
좀 바보같다 너.
(좀 병신 같다? 이런 비슷한 말이었지만 정확히 기억나지 않으니..)
라고 하길래

이제 알았냐, 라고 대꾸하고는 그럼 나 간다, 하고는 걸음을 뗐죠.

 


등 뒤에서 W가
그냥 가게? 라고 물었는데,
그때는 그냥 자존심이 상했다고 해야 하나. 혼자 오바했던 게 창피해서 더 있기 싫더라고요.

 


저 혼자 W의 생일을 아는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라고 생각하니까, 웃기지만 배신감 같은 게 들더라고요. 생일 가르쳐 달라 할 땐 그렇게 튕겨대더니, 아무한테도 말한 적 없는 척 하더니 여자친구한테는 잘도 말했네, 뭐 이런 기분이랄까.

 

W의 열여덟 인생에서 내가 처음으로 (처음인지 아닌지 사실 모르지만) 생일을 축하해주고 싶었는데, 이미 그 자리를 뺏겼다고 생각하니까 나 혼자 너무 진지했던 것 같더라고요. W는 이렇게 축하받으면서 잘만 살고 있는데, 괜히 나 혼자 측은하게 여겼다, 싶었죠.

 


W의 생일날은 그게 다였어요. 진짜 별거 없죠.

 

사실은 그 날 W가 받은 선물이 생일선물이 아니었다는 것과, 그 때 그 여자친구에게도 생일이 언제인지 말해주지 않았었다는 건 한참 후에 알게 됐지만.

 

 


2016년이 다가오기 전에 제가 글을 다시 쓸 수 있을지 없을지 잘 모르겠어요. 아무래도 연말이다 보니까 약속도 많고 바빠져서.


그래서 미리 인사드릴게요. 즐거운 크리스마스 되시고 미리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이래놓고 다시 오면 좀 민망하겠죠?)


항상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름다운 연말 보내시고 한해 마무리 잘 하시길.

 

 

추천수52
반대수0
베플|2015.12.22 01:15
제목보고 W님 결혼 얘기인 줄 알고 허겁지겁 와서 밑부분 내용부터 확인했어요...ㅋㅋㅋㅋ 오늘도 잘 읽다가요 좋은 연말 보내시고요!

공감많은 뉴스 시사

더보기

뉴스 플러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