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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날 연날리기~~ 40방 님들 방패연은 띄어 보셨는지?

외딴집 |2004.01.15 19:45
조회 304 |추천 0

[설날문화] 연날리기                                 

  



 

삼국시대 훨씬 이전의 역사로 시작된 한국의 연은
무수한 세월을 거쳐 수많은 모양과 때로는 활용의 도구로도 발전되어 왔다.

인간이 새처럼 하늘을 날고 싶은 염원은 아주 오래된 꿈이었고 그 꿈을 연에 실어 날렸다.  그래서 대문짝만한 연을 만들어 사람을 태워 높이 날려서 적의 진영을 정찰하는 데 쓰기도 했고,  또한 넘기 힘든 적의 성벽을 넘어가는 데도 쓰였다.  예전엔 겨울철 대표적인 놀이로 썰매타기,  팽이치기,  연날리기 그리고 자치기등이 있었다.

바람이 적은 날은 바람부는 뒷동산에 올라 연을 날리고 추운 날엔 따스한 양지바른 담모퉁이에 모여 연을 날린다.  하늘 높이 날고 있는 연을 우러러 보노라면 눈도 좋아지고 마치 내가 날고 있는 듯 가슴이 뿌듯해진다.  

실을 통해 팽팽히 느껴오는 그 촉감에 바람의 세기를 가늠하면서 연실을 감았다 풀었다 하며 연을 좌우로 움직여 연싸움을 하다가 상대방 연실을 끊어 먹으면 그 짜릿한 스릴에 어느새 손엔 땀이 난다.  

그래서 연날리기는 옆에서 구경하는 사람과 연줄을 쥐고 있는 연 주인과는 그 재미가 사뭇 다르다.  생각하기엔 연줄 하나 쥐고 있는 차이가 별것이겠느냐 싶겠지만,  그 연줄을 통해 전해지는 느낌은 천지차이다.  어쩌면 낚시질할 때 낚싯줄을 통해 전해지는 느낌과 비교될 것이다.  

이렇게 신명나게 날리던 연도 정월대보름이 되면 자기의 생년월일을 적거나 무병의 염원을 적어 연을 최대한 높이 날린 다음 줄을 끊어 날려 보냈다.  이렇게 하면 그 해에 자기에게 다가올 재앙을 멀리멀리 바람에 날려 보냄으로써 일년을 무병하며 잘 지낼 수 있다고 믿었다. 이것을 송액(送厄) 또는 액막이 연이라고 불렀다.

솔개를 본 떠 만들게 된 연

연은 매과에 속하는 솔개를 보고 만들었다고 한다.  매는 공중 높이 날아서 빙빙 돌거나 때로는 정지상태로 땅위를 기어다니는 들쥐나 개구리,  산토끼,  물고기 따위를 발견하면 쏜살같이 낙하하여 낚아채 잡아먹는 날짐승이다.  높은 공중에서 빙빙돌며 정찰하는 모습을 보고 연을 고안하게 되었는데 솔개가 공중에서 돌 땐,  바람을 타고 날개를 움직이지 않고도 꼬리와 날개의 방향만으로도 난다.  연은 그 원리를 보고 만들게 되었고 공중을 세차게 나는 모습이 솔개가 나는 모습과 흡사하다 해서 한자로 연을 솔개 연(鳶)이라 쓰고 있다.

연의 옛 이름에는 풍쟁,  궤 등이 있었으나 삼국사기에는 풍연(風鳶)이라 기록되어 있고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에는 지연(紙鳶)이라고 썼다.  여기서 풍연이란 바람을 타고 나는 솔개 같아서 붙여진 이름이고 지연은 종이로 만든 솔개,  즉 종이연이란 뜻이다.  

그래서 처음엔 연을 질긴 천으로 만들었으나 종이의 발명으로 연을 종이로 만들게 된 것을 알 수 있다.  우리 나라 한지는 질기고 가벼워서 연을 만들기에 가장 좋은 종이이다.  그래서 일찌기 연이 발달한 것 같다.

<삼국사기> 41 권 열전 김유신편에 보면,  선덕여왕을 이어 진덕여왕이 왕으로 즉위하자 대신 비담과 염종이 반란을 일으켰으나 연을 이용하여 그 반란을 진압한 이야기가 있으니 진덕여왕 원년인 서기 647 년 이전부터 연이 있었고 군사 작전에 활용되었음을 짐작케 한다.

이 외에도 홍석모의 <동국세시기>에 보면 고려말의 명장 최영 장군이 탐라 (지금의 제주도)에서 군사용 말을 기르는 몽고인들을 정벌할 때 장군이 군대를 배에 태우고 탐라에 이르니 섬의 사방이 절벽이어서 도저히 상륙할 수가 없어 꾀를 내어 사람을 태울 만한 큰 연을 만들어 군사를 연에 매달아 적의 성안으로 날려 보내 공략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그리고 임진왜란 때 충무공 이순신 장군이 연을 이용하여 섬과 육지를 연락하는 통신 수단으로 이용하였고 또 군사작전 지시의 방편으로도 이용하였다는 이야기는 너무나도 유명하다.

그래서 지금까지도 경남 통영에서는  ‘통영전통비연’,  충무에서는  ‘충무전통비연’ 이라고 해서 방패연에 여러 가지 문양을 그려  ‘이충무공 전술 신호연’을 날리고 있고 연날리기 대회도 열어 그 맥을 이어 오고 있다.

우리나라 전통연은 방패연

우리나라의 전통 연은 장방형의 방패 모양으로 생긴 방패연이다.  세계에서 유일하게 연 가운데 둥근 구멍이 뚫려 있는데, 바람이 새어나가 잘 날지 않을것 같지만 더 높이 날고 줄 하나로도 좌우로 움직일 수도 있는 과학적인 연이다.  다른 나라에서는 연을 좌우로 움직이게 하기 위해 두 줄로 연을 날리는 것도 있어 연줄을 왼손과 오른 손으로 번거롭게 날리는 것도 있다.

다이아몬드 형태에 꼬리를 길게 단 가오리연의 역사는 100 여년 정도이고 줄줄이 날리는 지네연이나 부엉이연,  용연,  선녀연,  팔각연,  거북연,  까치연 등 요즈음엔 별의별 창작연이 많지만,  최근에 만든 것이고 만들 때나 날릴 때 여간 번거로운 것이 아니다. 그러나 방패연은 만들 때도 간편하고 연을 날릴 때도 쉬워서 역시 연날리는 재미는 방패연이 최고다.

연날리기가 민속놀이로 일반인들에게 널리 유행하게 된 것은 조선시대 후기 영조 임금 무렵(1724 년)으로, 음력 정월 보름이 되면 서울의 광교와 수표교 일대에서 연날리기 시합이 벌어졌다고 한다.  이 잔치에서 각 지방에서 올라온 연꾼들이 각자의 재주와 기량을 한껏 겨루었으며 각 지방에서도 마을의 행사처럼 연날리기는 흔히 볼 수 있는 광경이었다고 전한다.  이때 영조 임금은 연날리기를 즐겨 구경하셨고 또 장려하여 상도 내렸다고 한다.

 

연의 역사

어린 시절 연을 띄우며 겨울 찬 바람에 마주서 본 기억 하나씩을 지닌 이 라면 하늘에 꽂힌 그 연이 늘 가슴에 와닿는 것을 느낀다. 하늘은 예로부 터 인간에게는 경외의 대상인 동시에 동경의 대상이었다. ‘날고 싶다’ 는 인간의 욕망은 그 옛날 풍운아 이카루스 이후 후예들에게 면면히 이어 졌고 이를 조금이나마 달래준 것이 바로 연이었다.

 기원전부터 세계 각지에서 성행

연 날리기는 세계 곳곳에서 성별과 신분의 구별 없이 즐겨온 놀이다.  언제 어느 민족이 처음 연을 공중에 띄웠는지 밝히긴 어려우나 여러 나라의 문헌으로 미뤄 고대사회의 제천의식에서 연날리기가 비롯한 것으로 보는 견해가 많다.

연에 관한 기록 및 전설은 고대 중국, 동남아, 인도, 그리 스 등 여러 곳에서 발견돼 오랜 옛날부터 연날리기가 성행한 것으로 추정 된다. 이 때문에 연은 각 나라에서 제각각 만들어졌다는 가설도 상당한 설득력을 지니고 있다. 말레이 반도 인근 섬의 원주민들은 고대로부터 대 형 연을 바람에 날려 그 풍력으로 배를 끌었고 파푸아 뉴기니에서는 연을 이용해 큰 물고기를 잡는 방법이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다.

유럽에서는 기원전 4 백년경 그리스에서 플라톤의 친구, 알타스가 연을 만 들었다고 하는 기록이 가장 오래됐다. 동양에서도 이와 비슷한 시기인 중 국 춘추시대(BC 770~476) 공수반(公輸盤)이라는 사람이 대나무로 까치 모 양의 연을 만들었는데 3일 동안 떨어지지 않고 하늘을 날았다고 한다. < 홍서>(鴻書)에 따르면 춘추시대에 태어나 전국시대까지 활동한 공수반은 직접 연을 타고 송나라의 도시를 염탐하기도 했다고 전해진다(BC 444). 이처럼 옛날의 연은 주로 군사용으로 쓰여졌다. 송(宋)나라의 고승(高承) 이 펴낸 <사물기원>(事物紀原)은 공수반보다 후대 사람인 한(漢)나라의 한신(韓信)이 연을 만들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항우의 초(楚)나라와 유방 의 한(漢)나라가 마지막 싸움을 벌이고 있을 때다.

유방의 10 만 대군이 지금의 서주 남쪽 해하(垓下)에서 항우의 군사를 포위했으나 항우의 역발 산기개세(力拔山氣蓋世)와 그의 삼천 자제가 잘 싸워 어려움을 겪었다. 이때 한신이 항우의 군영 주위에 초(楚)나라의 노래를 부르도록 해 적군 의 사기를 떨어뜨려 궤멸시켰다는 이야기는 유명하다(四面楚歌). 한신은 이때 소가죽으로 만든 큰 연에 바구니를 매달고 거기에 몸이 가볍고 피리 를 잘 불었던 장량을 태워 초나라 군영의 머리 위에서 망향곡(望鄕曲)을 퉁소로 구슬프게 불게 했다.

이외에도 양(梁), 당(唐), 오대시대(五代時代) 등에 연에 관련된 고사가 나온다. 당나라 때 안록산이 겹겹이 싸여 있는 성안의 양귀비에 보내는 연서(戀書)를 연에 매달아 띄웠다는 이야기도 있고 마르코폴로의 <동방견 문록>에도 연에 관한 이야기가 나온다(1282).

반란군을 섬멸한 김유신의 연

우리나라에서 연 기록은 <삼국사기> ‘열전(列傳) 김유신(金庾信) 상조( 上條)’에 처음 나온다. 선덕여왕 16년(647년), 이 해는 선덕여왕이 돌아 가고 진덕여왕이 즉위한 해인데 대신(大臣) 비담과 염종이 “여왕으로서 는 나라를 잘 다스릴 수 없다”고 하여 군사를 일으켜 왕을 폐하려 했다. 반란군과의 전쟁 중 월성에 큰 별똥이 떨어졌는데 여왕이 패망할 징조라 고 해 반란군이 크게 기뻐했다. 이때 관군의 지휘관이었던 김유신 장군이 커다란 연을 만들어 밤중에 연 밑에 인형을 매달아 불을 질러 하늘로 치 솟게 띄워 올리니 먼 곳에서 보기에는 마치 별이 다시 하늘로 올라가는 것같이 보였다. 적군은 기가 꺾여 끝내 패망하고 말았다.

고려 때는 최영 장군이 제주도의 목호(牧胡, 목축하던 몽고인)의 난을 평 정할 때 군사를 연에 매달아 배에서 절벽 위로 띄워 올려 상륙시켰다던가 , 불덩이를 매달은 연을 적의 성안으로 날려보내 공격했다는 등의 이야기 들이 전해 내려온다. 이순신 장군도 임진왜란 때 섬과 육지를 연락하는 통신수단, 또는 작전지시의 방편으로 연을 이용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 외에도 진덕여왕이 정월 보름날 밤 달구경을 나갔다가 그 아름다움에 반해 대신들에게 “일년 내내 보름달을 보았으면 좋겠다”고 하자 다음날 밤 대신들이 연에 달 모양으로 큰 원을 그려 여왕 앞에서 날려보내니 여 왕이 크게 기뻐했다는 아름다운 이야기도 있는데 이것이 방패연의 일종인 꼭지연(또는 달연)의 기원이다.

한국연의 종류는 연의 형태와 문양에 따라 그 종류가 1백여종에 이르고 있으나 크게 한국연의 대표격이라 할 수 있는 사각 장방형의 중앙에 방구 멍이 뚫려 있는 방패연, 어린이들이 날리는 꼬리가 달린 가오리연, 그리 고 제작자의 창의성에 따라 만드는 창작연 등 3종류로 나누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연 날리기가 널리 민중에게 보급돼 일반화된 때는 조선왕조 영조(1725~76) 무렵으로 추정된다. 영조는 연날리기를 장려했고 즐겨 구 경했다. 당시 음력 정월 보름이 되면 서울 광교와 수표교(조선 세종 때 청계천 2가에 놓은 다리, 1958년 복개공사로 장충단 공원으로 옮겨졌다) 일대에서 벌어진 연날리기 잔치에 각 지방의 선비들이 모여들었고 지방의 마을 곳곳에서도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연 날리기에 열중했다고 한다.

조선시대에는 농한기인 음력 12월부터 연을 날리기 시작해 정월 보름날 액막이 연을 날려보냄으로써 연날리기를 끝내고 다시 농사 준비를 시작했 다. 대보름에는 연에 액(厄) 혹은 송액영복(送厄迎福) 등의 글자를 쓴 뒤 자기의 생년월일과 성명을 적어 얼레가 다 풀리도록 날려 올린 다음 실을 끊어버린다(<동국세시기>, <열양세시기>, <경도잡지> 등).

김수장(1690~?)도 사설시조에서 이 액막이연을 읊고 있다

“이 시름 저 시름 여러 가지 시름 방패연의 세서(細書) 성문(成文)하여/ 춘정월(春正月) 상원일(上元日)에 서풍이 고이 불 제 올 백사(白絲) 한 얼레를 끝까지 풀어 띄울 제 큰 잔에 술을 부어 마지막 전송하세 둥게둥 게 높이 떠서 백룡(白龍)의 구비같이 구름 속에 들거고나 동해 바닷가에 가서 외로이 걸녀ㅅ다가/풍소소(風蕭蕭) 우낙락(雨落落)할 제 자연 소멸 하여라”

함남 북청지방에서는 정월 보름날이 되면 그동안 날리던 연에 불을 붙여 날려보내는데 밤하늘에 연불이 불꽃놀이처럼 퍼져 장관을 이뤘다고 한다. 이 지방에서는 연이 다른 마을에 떨어지면 그곳 사람들이 연에 적힌 마을 이름과 연을 날린 사람의 이름을 보고 자기네 마을에 연이 떨어진 사실을 편지로 알려줬다고 한다.

한편 연을 날려보낼 땐 오랫동안 눈을 치뜨고 있어 눈을 상하게 된다. 그 래서 바람개비를 돌려 시선을 낮추게 하여 눈동자를 바로잡았다고 하는 이야기도 전해내려 오고 있다(유만공(1793~1879)의 <세시풍요>(歲時風謠) ).

일제시대 연날리기조차 법으로 금지

중국이나 일본의 연은 주로 높이 날리거나 모양 위주로 연을 만들어 감상 하기 위한 것이었으나 한국연은 자유자재로 움직일 수 있어서 재주를 부 리거나 끊어먹기를 할 수 있다. <동국세시기>에 따르면 정월 대보름에는 서울 수표교 근처 개울(청계천)을 따라 연싸움 구경꾼이 인산인해를 이루 었다고 한다.

구한 말까지 연싸움 대회가 덕수궁 근처나 청계천에서 개최 되어 대신들과 사대부는 물론 국왕도 가끔 나와 구경하며 장려했다. 여기 에는 연싸움을 통해 풍년과 흉년을 점치던 제의(祭儀)의 감정도 있다. 그러기에 연싸움을 잘하기로 이름난 사람은 부귀한 집에 초청되기도 했다.

일제시대에 일본은 우리의 민속놀이를 금지시키기 위해 1911년 ‘범죄즉 결령’을 만들었고 87 개 조항으로 이뤄진 시행세칙인 ‘경찰법 처벌규칙 ’ 49 조에는 “전선 근방에 연을 올려 전신을 방해하는 자는 재판절차 없이 경찰서장, 또는 헌병분대장이 직접 형벌을 가할 수 있다”고 규정하는 등 연날리기를 못하게 막았다.

그러나 시골에서는 연날리기가 계속 이어 졌다. 해방 후 이승만 대통령은 연날리기에 무척 많은 관심을 나타내 55 년 2 월 연날리기 대회를 개최하는 등 연날리기를 적극 장려했다. 하지만 60 ~ 70 년 대 들어 도시화가 진전되면서 전봇대와 고층빌딩이 솟고 아이들도 어른들 도 바쁜 세파에 시달리면서 연날리기는 이제 시골에서도 쉽게 찾아보기 힘든 옛 풍경이 되고 말았다.

연 띄우는 노랫소리가 사라진 곳에 우리의 하늘도 사라져버린 건 아닌지 하는 생각에 한쪽 가슴이 아려온다.

“연띄운다 연띄운다 대보름날 연띄운다/ 아래웃방 아낙들아 몸단장을 채 리고서/ 연걸리는 구경가세 연걸싸움 구경가세/ …(중략)…/ 보소보소 돌 이어멈 우리남편 연띄우는/ 저맵씨를 한번보소 뭘라쿠노 땃줄래야/ 우리 아범 연띄우는 저맵씨를 쳐다바라/ 탱금주는 저기술은 우리아범 제일이다 / …(중략)…/ 지하자하 조을시구 얼씨구라 조을시구/ 지하자하 지하자하 얼씨구나 절시구나”(경남 충무지방 -지연가).

자료출처 : [연의 역사와 민속(전경욱], [조선세시기(이석호 옮김)], [한국의 민속 놀이(심우성],
                    [한국민속사 입문(임재해 등)]

발췌 : 설록차웹진/한겨레21


방패연(防牌鳶)의 각 부분 명칭



 

 

  외딴집이 있는곳 / 싱글들의 모임 http://club.nate.com/jhs8001                       (노래) 라이너스-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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