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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콤쌉싸름한 30살(17)

리드미온 |2004.01.28 16:20
조회 15,182 |추천 0

"팀장님...저한테 주실 거 있죠?"

 

김대리는 꼭 내가 무슨 돈이라도 꾼 사람처럼 당당하게 말했다.

뭔 소리지?

더구나 민준의 일로 머리가 복잡한 상태에서 내 기억의 출력장치는 제대로 작동할 리가 없지 않은가...

 

"내가 김대리한테 돈이라도 꿨나?"

 

예민한 상태라 가파른 목소리로 물었다.

 

"에이...팀장님은 저의 모든 것을 가지고 계시잖아요..."

 

나의 상태를 아는지 모르는지 김대리는 이젠 느끼함을 처덕처덕 바른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나 느끼함의 충격 때문인지 김대리가 무엇을 말하는지 기억해낼 수 있었다.

 

"아아...지갑...?"

 

"네...거기 제 전재산이 들었다고요."

 

전재산이라니...

내가 보았을 땐 만원짜리 몇 장밖에 없었는데 그걸 전재산이라고 말하는 것은 또 김대리 특유의 과장법이다. 김대리가 저렇게 썰렁하게 농담하는 걸 몇 개 적어서 인터넷에 '김대리 어록'이라도 만들어 돌려 공개적으로 웃음거리를 만들고 싶어졌다.

 

"응..근데..."

 

일단 지갑까지는 기억해냈는데 또 내 기억은 거기서 동작을 멈추어 버렸는지 어디에 두었는지가 기억나지 않았다. 그러나 모든 기억의 출력장치가 멈춘 것은 아니었다. 부분적으로는 너무나 작동상태가 좋았다.

1월 1일 민준을 처음 만난 날부터 오늘아침까지...모든 기억은 너무나 생생하게....팔딱팔딱 뛰는 생선처럼 강한 생명력으로 무장하고 방금 본 연예가중계쯤은 무찔러버릴 것 같았다.

다행히도 민준이 그 지갑을 발견했던 그 날의 기억이 떠올랐다.

그 지갑을 보고도 아무 것도 묻지 않고 날 믿는다고 했었는데....

그래...그럴 리가 없다....무언가 내가 모르는 음모가 있는 걸거야....

그제서야 나는 그 지갑을 콘도에서 가져와 차에 두고 잊어버린 기억이 났다.

 

"아...차에 뒀어."

 

"네. 그럼 키 주세요. 제가 가지고 올게요."

 

그런 김대리의 예의는 지금 상황에선 상당히 마음에 들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또 키를 어디에 두었는지가 기억나지 않았다.

 

"근데...키를...."

 

내가 주머니를 뒤적거리기 시작하자...

 

"보통 가방에 두시잖아요..."

 

나는 김대리의 말대로 가방에서 키를 찾아 건네주었다.

 

"다른 건 모르지만...회사에선 제가 팀장님 보조 기억 장치에요..흐흐.."

 

김대리는 능청스러운 웃음을 남기고 내 키를 갖고 사라졌다.

 

나는 다시 민준 사건이 대처방안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했다.

첫번째, 당장 리츠칼튼 호텔에 전화를 한다. 두번째 메일에 답장을 한다. 세번째 연락이 올 때까지 기다린다.

만약 이 상황에서 세번째를 할 수 있는 여자라면 난 그녀를 '남자를 초연하는 종교'를 만들어 교주로 모시고 교리를 열심히 배울 것이다.

나는 유일하게 내쪽에서 직접 연락할 수 있는 리츠칼튼 호텔...을 선택했다. 선택이라고 할 것도 없었다.

이미 전화기의 버튼을 누르고 있었으니까...손이 먼저 움직이고 있었던 것이다.

 

"지금 안계십니다. 메시지라도 남겨드릴까요?"

 

호텔직원의 대답에 난 실망스러움을 감추려 애쓰면서 필요 없다고 대답해버렸다. 그러나 전화를 끊자마자 후회를 했다. 차라리 메시지라도 남기면 민준이 바로 듣고 연락할 수도 있지 않은가...그럼 다시 전화를 해서 메시지를 남길까? 그러다 또 두번째 방법으로 메일에 회신을 한다...라는 것도 생각했으나...도대체 뭐라고 답장을 써야할지도 떠오르지 않았다.

아무 일 없는 듯, '고마워...나도..너랑 있어서 즐거웠어..'라고 해야할지 아님 '연예가 중계 봤어. 행복해라.'라고 할런지...

아아....이럴 땐 제발 내 대신 결정해줄 사람이 있었으면 좋겠다.

흑기사는 힘든 일 할 때 필요한 게 아니라 '힘든 결정'을 할 때 더 필요한 존재이리라...

이럴 땐 잠시 다른 일을 하면 고민거리를 잊을 수 있을까 싶어 인터넷에서 유머 게시판을 뒤적거리기 시작했다. 그런데 눈은 유머를 보고 있었지만, 마음은 갈등과 비극들로 더욱 커져만 갔다.

퇴근 시간은 아직도 한참 남아 있었다. 어서 사무실이라도 벗어나 자유롭게 된다면 술이라도 마시고 싶었다.

이런 나의 갈등과 고민의 상황을 뚫고 민준은 전화를 걸어왔다.

 

"나야. 언제 퇴근해?"

 

민준의 목소리는 너무 다정하다. 이런 상황에서 '연예가중계 봤어'라고 말하는 건 너무 낯설다.

꾹 참는다.

 

"글세.."

 

"안보고 싶어? 난 보고 싶은데...."

 

'연예가중계'를 묻지 않으면 '낮에 어딜 갔었는지'라도 묻고 싶다. 그러나 나는 호텔에 전화했다는 사실을 알리고 싶지 않았다.

 

"......"

 

민준의 말에 긍정도 부정도 할 수 없다.

 

"오늘 페라리 나왔는데 회사 앞으로 데리러 갈게..."

 

나는 이번엔 '김미나랑 데이트 안해?'라고 묻고 싶은 것을 또 한번 참았다.

대신...

 

"바쁘지 않아?"

 

이렇게 물었다.

 

"바쁘긴...학교 가기 전까지...맘껏 놀고 싶어...오늘 재즈바...가자...너 재즈 좋아하잖아?"

 

여전히 민준은 나에 대해서 기억하고 있다. 그럼 김미나에게도 이렇게 해주고 있나?

이렇게 많은 걸 기억해서 함께 공유하는....아름다운 사랑을 해주고 있는 것일까.....

나는 거절할 수 없다. 아니 거절하고 싶지 않았다.

나를 사랑하고 또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만나자고 하는데....거절하는 건.....신경쇠약증에 걸릴 일이다...

 

"응. 7시에 올래?"

 

"오케이...."

 

민준은 신이 난 목소리로 전화를 끊었다.

아...연예가중계는 진실이 아닐거야...저 동네에 진실은 없다잖아...

나는 조금 마음이 편해졌다....그리고....만약 사실이라고 하더라도 김연실....아니 김미나를 버리고 날 택하겠지...사랑은 믿음이니까....

 

민준은 약속대로 7시에 회사앞에 패라리를 주차하고 있었고 나는 우아하게 그의 옆자리에 앉았다.

 

"지우야. 넌 어떤 자동차가 좋아? 난 말야. 이 패라리 가져보는 게 평생소원이었다."

 

여전히 민준은 유쾌하다.

 

"자동차 하나 사줄까?"

 

저 다정함도 여전하다.....자동차라? 귀가 번쩍 뜨인다....

 

"너 아직도 그 때 그 차니?"

 

"응."

 

그래도 나는 그 차에 애정이 많다. 내가 처음 내 돈으로 산 가장 비싼 물건인데...이제 할부금도 끝나서 완전히 내 차가 되어버린....나의 애마....

 

"나 그 때 한번인가 네 차에 탄 적 있었는데...기분 참 좋았어...."

 

여전히 많은 걸 기억하고 있는 민준....

조금만 더 믿어보자...조금만 더....

 

재즈바에 도착했을 때, 차 때문인지 최고급의 대우를 받는 듯 했다.

이제 막 라이브가 시작되고 있었다....

라이브 재즈도....몇 년만인가....라이브재즈바조차 오지 못했던 건 돈이 없었던 것이 아니라 함께 올 사람이 없었던 것이리라....

물기 하나없이 메말라가는 내 인생을 촉촉하고 풍성하게 만들어주고 있는 민준....

이런 그가 나를 두고 김연실의 애인이라고 세상에 알려지다니....!

민준과 나는 별 대화를 나누지 않고 음악을 들으며 칵테일을 마시고 있었다.

그런데...난 무시할 수 없는 주변 사람들의 수근거림을 듣고 말았다.

 

"저...남자? 어디서 많이 본 거 같지 않아?"

"탈랜튼가?"

"아냐아냐...아...맞다....김미나 애인......"

 

나는 민준을 바라보았다. 더 이상은 참을 수가 없었다. 내가 외면한다고 해도 이미 세상 사람들은 다 알고 있는데....

이젠 용기를 낼 때이다.

 

"나...연예가중계 봤어."

 

짧게 말해놓고 민준의 표정을 살폈다.

 

"......"

 

민준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그리고는 말이 없다.

 

"결혼해?"

 

나는 물었다. 그 김미나랑 결혼하는 거 맞냐고? 더 큰 소리로 더 확실하게 묻고 싶었지만...그렇게만 물었다.

 

"지우야...."

 

민준은 대답대신 그렇게 서두를 꺼낸다.

그래...진실을 말해줘...제발....

 

"그만 가자...."

 

나의 인내심은 바닥에 떨어져 버리고 말았다.

 

"대답해봐!"

 

결국 언성을 높여 그렇게 묻고 말았다.

 

"지우야. 나 지금 사람들이 알아보는 얼굴 되어 버렸어. 여기서 무슨 말을 하겠니..? 더구나 너랑 여기 온 것도 이렇게 불편한 일인 줄 몰랐어."

 

민준의 말대로 이 자리를 피하는 것이 일단 최선이란 생각이 들어 재즈바에서 나와 차로 돌아왔다.

 

"지우야....잭팟이 된 후에 세상이 아주 편해질지 알았어. 그런데...그거 아니더라고..."

 

"여자연예인이랑 결혼하는 거 남자들이 다 꿈꾸는 거 아냐?"

 

난 민준의 말을 차분하게 듣고 있을 여유는 이미 포기한 상태였다.

 

"바보야...날 그런 놈 취급하지 마....너한테 다 설명해줄 날이 곧 올거야...그 때까지만....날 믿어줄래?"

 

난 민준에게 아주 자세한 설명을 듣고 싶었다. 그리고 결론은 그건 '연극'이었다라는 말까지...

그러나 내가 원하는 대답은 들을 수 없었다. 민준은 그렇게 애매하게 말해놓고는 입을 다물어버렸다.

 

"나. 아까 잠시 핸드폰 샀다가 귀신같이 알고 전화하는 기자들 땜에 바로 취소해버렸어. 너 한테 연락받으려고 핸드폰 샀는데 말야..."

 

그럼 그 말은 김미나가 아니라 날 사랑한다는 말인가?

그런데 왜 김미나와 아무 관계 아니라고.....말 못하는 걸까....

 

"네가 연락하면 되잖아..."

 

난 또 누그러져서 말했다.

조금의 갈등이 있고 그리고 날 선택해준다면 그 정도는 참을 수 있는데....

 

"혹시 내가 당분간 연락 못하더라도.....날 기다려줄 수 있어?"

 

이건 또 무슨 말이지?

하루 종일 민준과 대화는 외계인과 대화 같았다. 서로 한국말을 하고 있는게 맞는 건지....

아무런 의사소통도 이루어지고 있지 않는 것 같았다.

 

"......"

 

내가 무슨 대답을 해야할까...

 

"지우야..대답해줘...응? 나 기다려준다고..."

 

민준은 떨리는 목소리로 그렇게 말했다.

 

"응."

 

나는 민준의 부탁때문이 아니라 진심으로 그렇게 대답했다.

그래...기다려줄테니...돌아오기만 해줘....

그래서 민준이 내 사람이 된다면....이건 사랑으로 뛰어넘을 수 있는 '시련'의 하나로 기억할거야.

'배신'이 아니라....

 

나는 민준과 헤어지며 집대신 회사에 내려 달라고 했다. 패라리에 있다보니 오히려 내 차가 그리워졌고 낼 아침에 출근하려면 차를 갖고 퇴근하는 편이 낫겠다 싶어서였다. 그리고 운전하면서 나도 생각을 좀 정리하고 싶었다.

 

지하주차장에 세워놓은 차로 다가가는데 운전석 창쪽으로 무언가 얼핏 보였다.

나는 뭔가 싶어 얼른 차문을 열었다.

빨간 장미가 한바구니 가득 꽂혀서 운전석에 놓여지 않은가....

차안에는 장미 향기가 가득 채워져 있었다.

장미꽃 위에는 카드가 놓여 있었다.

 

'팀장님. 늦었지만 생일 축하해요~ 김정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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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신: 넘 늦었나요??? 중간에 쓰다가 컴터 오류땜에 날렸네요. 저도 억울해서 컴터를 아예 던져버리려다가 그럼 영원히 글을 못쓰게 될 것 같아...꾹 참고 다시 썼습니다. 아직도 최신 컴터를 저에게 버리시려는 분이 없네요....^^ 그럼...내일 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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