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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년 연애후 헤어진 남자친구에게

열아 |2017.11.26 22:54
조회 1,333 |추천 7
안녕, 잘 지내지?

나랑 헤어지고 삼주도 안되어 사귄 너의 여자친구랑 함께 찍은 사진 봤어. 너는 여전히 웃는 모습이 매력적이고, 네 여자친구는 여전히 그렇게 귀엽더라. 몇달 전, 밤 열두시에 그 아이와 연락하며 즐거워 하던 네 모습에 누구냐고 질투 섞인 마음으로 궁금해하던 내게 너가 그냥 친구가 소개시켜준 '여사친'이라며 보여줬던 그 사진 속 모습 그대로더라. 같은 이십대 후반인데, 나랑은 다르게 참 청량하고, 풋풋하고, 귀엽고, 그렇더라.

나는 아직도 눈을 감으면, 그때의 우리가 기억나.
중학교 3학년 햇빛이 쏟아지던 그 어느 여름날, 우리 반에 새로 온 키가 크고 깡마른 전학생, 조금은 긴장한듯한 표정, 버릇처럼 목 주변을 쓸어내리는 너의 하얀 손가락들. 열 여섯, 소녀에게 너라는 첫사랑이 찾아온 순간이였어.

중학교 졸업식에서 너는 내게 고백을 했어, 빨간 목도리를 한 내 모습이 예쁘다는 너의 말에 그 겨울 내내 그 목도리만 하고 다녔던 기억이 나.

우리 첫 뽀뽀는 기억나니? 우리 100일 넘어서야 첫뽀뽀를 했었는데, 참 귀엽고 풋풋했다, 그치? 우리는 하교를 함께 했었고, 나는 매일 집까지 데려다줘서 고맙다고 선물을 주겠다며 네게 뽀뽀를 했었잖아. 그때 네 얼굴에 띤 홍조가 귀엽다고 생각했었는데, 지금 생각해보니 내 얼굴이 더 빨개졌을 것 같다. 근데 그때 내가 먼저 뽀뽀를 안했으면 우린 언제쯤 첫 뽀뽀를 했을까? 이런거 생각해보면 넌 참 소심했어.

열아홉, 너는 대학에 붙고, 나는 재수를 결정하고. 펑펑 울던 내 옆에서 나를 달래주던 네 모습도 기억난다. 넌 항상 나 달래주다가 너도 따라 울었었지, 하하 진짜 웃겼어 그때, 지금 생각해도 웃음이 나네. 왜 내가 울면 너도 따라 우는거야? 라고 묻던 내 말에 사랑하니까! 라고 대답하던 너도 기억난다. 사실 이건 비밀이였는데, 나는 너가 우는 모습이 섹시하다고 생각했어.

성인이 되고, 너가 6월 모의고사를 망쳐 우울해 하던 나를 데리고 동해에 간 것도 기억나. 사람 적은 한산한 밤바다에서 나는 네 품에 안겨 울었었어. 그때 참 절망적이었는데, 네 품은 포근하고 다정하더라. 사실 요즘 너랑 헤어지고 나 참 많이 힘든데, 그때마다 네 품에서 느끼던 그 따스한 향기가 떠올라 눈물짓곤 한해. 너는 잘 웃고, 잘 지내는데, 우리의 11년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 처럼, 그렇게 아무렇지 않은데 나는....

스물 하나, 너가 군대에 가고. 고약하고 지독했던 기다림, 너 상병 달때즈음 권씨 선배가 들이댔을때 조금은 흔들렸던거 지금에서야 사과할게. 정말 미안했어, 많이 불안하고 많이 힘들었지? 그래도 나 칭찬은 해줘야해, 나도 조금은 흔들리기도 하고 정말 힘들었는데 그래도 꿋꿋이 너만 보면서 기달렸잖아.

하긴 그때 너는 칭찬은 충분히 해줬었지, 어디서 사온건지 예쁜 보라색 한복이랑 세트로 맞춰온 비단 꽃신을 신겨주면서. 그날 우리 둘이 정말 많이 울었다. 서로 힘든 시간을 잘 버텨낸 우리가 참 기특했어.

너와 안 가본곳이 없고, 너와 해보지 않은 것이 없고, 너와 느껴보지 못한 감정이 없고, 내 일상 그 어떤 곳에도 너의 흔적이 남지 않은 곳이 없어.

우리 9주년 기념일에 정말 살벌하게 싸웠었잖아. 커플링도 갖다 버리고, 서로 소리지르면서.. 지금 생각해보면 정말 별거 아닌 이유였는데 왜 그렇게 싸웠는지 모르겠어. 그날 이후로 우린 절대 오지 않을줄 알았던 권태기를 맞게되고, 나를 향한 너의 열정도 급속도로 식어가는게 느껴지더라. 내 앞에서는 절대 담배를 물지 않던 너의 입에서 괴담처럼 흩어지던 회색 담배연기와 줄어드는 우리의 연락. 별것도 아닌일에 서로 기분나빠하며 잦아지던 싸움, 언젠가부터는 꽃과 편지대신 격한 잠자리가 우리의 화해를 대신하게 되었지.

하긴 근데 그렇게 싸우는 것도 반년이더라, 그 기간이 지나고 우리는 싸우는것 조차 하지 않았어. 나도 네게 섭섭한게 있어도 말하지 않게 되고, 하루도 못보면 그렇게 보고싶더니 한달에 한두번만 만나도 그 데이트가 지루했었지. 그래도 있잖아, 나는 너가 웃는 모습을 보는게 참 좋았어. 뜨거운 열정은 없었지만 너를 향한 나의 감정은 때때로 아지랑이처럼 은은하게 나를 자극했어.

아, 이때쯤이였지? 너가 10주년 편지에 그 말을 써줬잖아. "우리는 예전의 그 불꽃처럼 뜨거운 사랑은 어쩌면 다시 못할지도 몰라. 하지만 난 너를 세상 누구보다 잘 알고 너는 날 세상 누구보다 잘 알아. 너를 죽도록, 미치도록 뜨겁게 원하지는 않지만 너가 없다면 나는 죽거나 미칠 것 같아. 어쩌면 뜨거운 불꽃이 지나가고 지금처럼 잔잔하게 가라앉은 우리의 감정은 더 성숙해진 사랑이 아닐까. 그렇다면 나는 널 정말 많이 사랑한다." 이 구절을 보고 네게 참 고마웠어. 너는 나를 사랑해주는구나, 그리고 내가 사랑하는 너라는 남자는 참 마음이 깊고 고운 남자구나..하고.

그래도 우리 참 함께여서 행복했는데, 내가 갑자기 좋아하는 다른 남자가 생겼다며 결혼준비까지 다 때려치우고 이별을 통보해서 놀랐지? 내가 참 나쁜년이라고 소문도 내고 다니더라 너.

너는 내가 왜 헤어지자고 했는지 전혀 모르겠지, 아니 너는 내가 모른다고 생각하고 있겠지.

나, 너가 바람피는거 알고 있었어. 나한테 더 다정하게 대해주고 더 따듯하게 대해주는데 뭔가 모르게 거리감이 느껴지더라. 네 말대로 내가 너를 너무 잘 알아서 그랬나봐. 나 내 눈으로 똑똑히 봤어, 너가 정류장에서 니 코트 안으로 그 여자애 안아주는거. 너의 그 따듯하고 다정한 품만은 오롯이 내것이기를 바랬었는데, 그게 아니더라.

한명이랑만 바람핀것도 아니잖아, 너 원나잇도 하고 다녔었잖아. 세상은 생각보다 좁더라, 나 대학 동아리함께 하고 친했던 동기가 소개시켜준 친구가 내 핸드폰 배경화면에 있는 너를 알아보더라. 나 그날 그 친구랑 초면이였는데, 너랑 10년째 연애중이라는 말 듣고 그 애가 진지하게 말해주더라. 너랑 잤다고. 여자친구 있는거 몰랐다고. 너랑 원나잇 했던 걔가 나한테 조언해주더라, 너 쓰레기라고, 너랑 헤어지라고.

그리고 지금 만나는 여자친구도, 나한테는 그냥 아무 감정도 없는 여사친이라며 내 앞에서 당당하게 전화까지 했던 친구잖아.

그래서 나는 너가 참 밉다. 너와 함께했던 그 행복하고 아련했던 추억들을 회상하던 나의 행복을 역겨움으로 깨뜨려버린 너가 참 밉다. 아직도 그렇게 찬란하게 나의 가장 아름답던 시간을 장식하고 있는 너가 너무, 너무 밉다.

근데 더 웃긴건, 나는 아직 너를 사랑하더라. 정말 너무 미운데, 너의 이미지에 피해가 갈까봐 아무에게도 너가 바람폈다는 사실을 말하지 못하는 모습이 참 내가 봐도 우습더라. 내 인생에서 너를 도려내고 나니 남는건 슬픔이고, 내 인생에서 너를 비우고 나니 남는건 눈물이더라. 너라는 사람에서 미움을 조금만 걷어내면 그곳은 너를 향한 사랑으로 뿌리박혔는데, 어쩌면 나라는 사람의 자아는 너에대한 사랑으로 형성되어왔는데, 나는 이 사랑을 어떻게 비워야 할까.

나는 너가 정말 밉다.
나는 너를 증오한다.
하지만 나는 아직도, 너를 사랑한다.

부탁 하나만 할게,
절대 우리 다시는 마주치지 말자.
그리고, 너무 행복하게 잘 살지는 말아줘.
나보다 더 좋은 여자 만나지도 말아줘.

사랑해,
그동안 고마웠어, 이 나쁜새끼야.
추천수7
반대수1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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