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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콤쌉사름한 30살(18)

리드미온 |2004.01.29 16:24
조회 14,017 |추천 0

나는 잠시 멈추어 서서 그 장미 바구니를 한참 쳐다 보고 있었다.

운전석은 웬지 장미가 놓여질 자리와는 무관해 보인다.

장미 바구니라면 책상위나 식탁위 뭐...그런 우아한 자리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

그러나 지금은 장미가 제자리를 찾은 것처럼 자연스러워 보였다.

방금까지 민준과 함께 있던 패라리의 불편함에서 조금은 벗어날 수 있을 것 같았다.

장미를 치우고 운전석에 앉는 것이 망설여질 정도로 장미가 아름다워 보였다.

패라리에 있는 장미와 내 소형차에 있는 장미....어느 것이 더 아름다울까.....

나름대로 김대리가 기발한 아이디어가 있는 면은 인정해주고 싶었다.

사무실 책상이 아닌 운전석에 장미를 놓아둔 것은 선물 그 자체보다 선물을 주는 방법에서는 잠시의 감동을 선사해주었다.

그런데....장미가 서른 송이라는 것을 발견하고 굳이 이렇게까지 내 나이를 인식시켜주는가 싶어서 90점을 주고 싶은 것을 45점으로 깎아버렸다.

25송이쯤 줬으면 얼마나 좋을까...그냥 보기도 적당하고 나이랑도 무관해보이고...

굳이 30송이를 채운 이유는....뭔지....

꼭 이렇게 나중에 김새게 만드는 김대리....

그래도 혼자 차를 몰고 집에 가는 잠시 동안은 민준과 있었던 우울한 분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집에 돌아와 장미를 책상에 두고 샤워를 하고 핸드폰을 보다가....민준과의 일이 생각나서 바로 우울해져 버렸다. 나는 그 우울함에서 벗어나고 싶어 지선에게 전화를 했다.

 

"그러니까...기다려 달라고 했다고?"

 

"응."

 

"넌 그 말 믿니?"

 

당연히 믿지....그렇게 괴로워하면서 기다려달라는데....

 

"음......간접경험!!!! 그런 말 알지?"

 

"응."

 

"그럼 하나만 묻자...내가 왜 이혼했지?"

 

그렇다...지선이 이혼한 이유는 남편의 바람이었다. 그리고 그 당시 지선은 남편의 기다려 달라는 말에 나한테 울면서 어떻게 하면 좋으냐고 물었었다.

이젠....입장이 바뀐 셈이 되었다.

 

"그래..기억난다. 네가 기다려달라는 말에 나한테 어떻게 해야 하냐고...물었었지..."

 

"네가 뭐랬는지 아니?"

 

"응."

 

"그럼 됐다. 그리고 또 체크해두고 싶은 게 있어. 임신테스트는 해봤어? 너 나중에 그런 문제 생기면 어떻게 하려고 해?"

 

어떻게 보면 지선과 나의 성격은 반대이기도 했다. 나는 감성적이면서 과거지향적이라면 지선은 이성적이면서 미래지향적이라고나 할까...이 상황에서 저런 질문은 날 위한 배려일텐데도 내 기분은 한 없이 나락으로 떨어져 버리고 말았다. 전에 지선이 말했던 것처럼 로맨스와 섹스가 어울리지 않는 것처럼 임신테스트와 로맨스도 어울리지 않는다. 그러나....실연과 임신테스트는 웬지 어울려 보인다....

지선의 말대로 당장 임신테스트라도 해봐야 하는 거 아닐까....

불안감...우울함....

민준이란 존재는 내게 있어 '당의정'인 것은 아닐까...

쓴 것을 먹게 하기 위해 겉을 단맛으로 둘렀다는....

이제 달콤함은 끝났고 쓴맛만 남은 것은 아닐까....

아니다...믿고 싶다.

'진정 사랑한다면 떠나게 하라...그래서 돌아오면 영원히 내 것이 되고, 돌아오지 않는다면 처음부터 내 것이 아니리라...'라는 서양 속담이 떠올랐다.

민준은 마치 도박판에 던져진 주사위와 같은 불안과 희망의 양면성을 가진 존재가 되어버린 듯 했다.

어떤 숫자가 나오느냐에 따라 모든 것을 잃느냐...모든 것을 얻느냐...라는

그러면서도 던지고 있는 인간의 어리석음....

 

"현실적인 충고는 좀 눈치보면서 해줌 안되니?"

 

나는 이제 짜증섞인 목소리로 대답했다.

 

"다 널 위해서야. 지금도 온갖 스포츠 신문과 인터넷에 온통 김미나의 결혼에 대해 떠들고 난리다. 너 이 상황에서 버틸 수 있을 것 같아?"

 

원래 연인과 헤어진 후 몇 다리 건너건너 들려오는 상대방의 소식에도 다리가 후들거리고 가슴이 무너지는 법이다. 그런데....지선의 말대로 민준은 이제 공인이 되어버렸다.

버틸 수 있다....버틸 수 있다...난 강하니까...그리고 나에게 돌아오면 영원히 내 것이 될테니까...

그러나 지선이 말대로 그 버팀이 얼마나 힘든 것인지는 다음 날 출근 후부터 느낄 수 있었다.

 

"하연씨, 김미나 결혼한다는 남자 봤어? 탈랜트 같지 않아? 생긴 것도 그렇고 거기다..수재라네..."

 

책상 너머로 너무나 선명하게 들려오는 은수의 목소리......

 

"그러게 말에요. 그런 멋있는 남자들은 다 연예인이 채가면 우리같은 사람은 누구랑 결혼하라는 건지..."

 

거기에 맞장구치는 하연....

 

"결혼은 둘째치고 연애라도 해봤음 좋겠다..."

 

은수의 한숨섞인 마무리.....

 

"어..근데 김미나 프로필 보니까 팀장님하고 고등학교가 같네..?"

 

김대리다. 어떻게 내 고등학교까지 기억하고 있는 걸까...저 쓸데없는 기억력은 때론 공포스럽다.

 

"팀장님. 김미나가 학교 다닐 때도 이뻤어요?"

 

그래...이쁘긴 했지.....이쁘다는 거 하나가 이렇게 사람의 운명을 뒤집어 놓을지는 몰랐지만....

 

"김미나? 아...본명이 김연실이라...난 좀 어색하네..."

 

나는 그렇게 부정도 긍정도 아닌 대답을 해버렸다.

 

"하긴 뭐...여자가 외모가 전부는 아니지..."

 

김대리의 저 착한 발언은 오히려 짜증이 난다.

그럼 넌, 외모하고 성격과 아이큐까지 본다는 얘기지?

 

'요즘 남자들 다 똑같아~애송이야~'

바꾸리라 생각했던 핸드폰의 벨소리는 여전히 바꾸지 못한 채 울려댔다.

나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목소리를 가다듬고 전화를 받는다.

 

"나야..."

 

민준의 목소리다. 반갑다. 눈물이 난다. 이렇게 애절한 반가움....사랑이 맞는 걸거다.

 

"응. 어디야?"

 

"미안. 오래 통화못해. 목소리 듣고 싶어서....시간되면 내 메일로 네 사진 하나 보내줘. 사진이라도 볼 수 있게....잘 지내고...또 전화할게..."

 

"응."

 

나는 더 이상 길게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숨이 막혀왔다.

이건 현상수배자와의 비밀접선같기만 하다. 언제까지 이렇게 숨은 사랑을 키워나가야 하는 걸까...

난 할 수 있다....쉬운 사랑은 세상에 없을 것이다...마음을 다잡아 본다.

 

"한팀장!"

 

통화가 끝나기가 무섭게 이부장이 불러댄다. 그래..그래...일하지..일!!!

난 스스로 의욕을 불태워 보자...주먹까지 불끈 쥐어 본다.

 

"네."

 

나는 웃으며 이부장에게 다가갔다.

 

"이번에 리츠칼튼 호텔에서 홍보대행사를 바꾼다고 여러 회사에 프리젠테이션을 의뢰한 모양인데. 우리도 해보자고. 이번 건 잘 되면....내년에 한팀장도 승진해야지..."

 

다른 단어보다 '리츠칼튼' 호텔이란 말에 귀가 번쩍 뜨인다. 굳이 마음 먹고 일에 의지를 불태우려는데 우연치고는 잔인하다. 하필이면 리츠칼튼 호텔이라니...

 

"리츠칼튼 호텔이면, 전에 김미나가 생일 파티 한 데 아니에요? 연예가중계에 나왔던...."

 

은수가 또 한마디 거든다.

세상에 연예가중계 안보는 사람은 없나보다....

 

"나름대로 시기가 좋네요. 그 로맨틱한 분위기도 살리고..."

 

하연씨도 좋아라 또 한마디.....

 

"그거 한 건하면 일년 동안 우리 팀 먹고 살겠는데요."

 

숫자에 밝은 김대리는 역시 김대리다운 발언으로 내가 거절할 수 없게 만든다.

아니다. 생각은 하기 나름이다. 오히려 리츠칼튼의 추억으로 내가 하면 더 잘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네."

 

라고 대답하고 자리에 앉자마자 뽀로로 튀어오르는 메신저...

 

'팀장님 제가 퀴즈 하나 냅니다.'

 

김대리다. 이 상황에 퀴즈라니? 이건 지구를 몽땅 얼려버릴 냉혹한 썰렁함이다.

 

'한지우는 어제 받은 장미꽃다발을 어디에 두었을까요?

 1) 차에 그대로 2)집 책상에 3)버렸다.'

 

'3번'

 

'으...정말요? 혹시나 다른 데 두면 못볼까 싶어 일부러 운전석에 둔 건데...'

 

'꽃은 재활용이 되는 건가? 쓰레기봉투에 버렸는데...'

 

'설마...카드까지 버리신 건 아니겠지요?'

 

'것두 쓰레기봉투에 넣었어.'

 

'알았습니다. 그럼 다음 퀴즈 낼게요.'

 

'일하자.'

 

김대리의 농담을 더 이상 받아줄 기분이 아니다.

 

'하나만 더요.'

 

난 다시 인내심을 발휘해보리라 결심한다.

 

'어제의 장미송이는 몇 개였을까요?

1)20 2)30 3)40'

 

결국 나의 인내심에 쐐기를 박아버렸다.

 

'20...내 나이에 맞게 사줘서 고마워...'

'하하하....제가 나이에 맞춰 산 걸 아시는군요.'

 

여전히 핵심을 빗나가면서 유쾌해하는 김대리.....

나는 서둘러 김대리와 대화를 마무리하고 민준에게 사진을 보내리라 생각하며 컴퓨터의 사진들을 뒤적거리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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