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품이 큐티 ^ ^
{마가복음 4:10~12}
[받은 복은 전해야만 합니다]
예수께서 홀로 계실 때에 함께 한 사람들이 열두 제자와 더불어 그 비유들에 대하여 물으니
이르시되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너희에게는 주었으나 외인에게는 모든 것을 비유로 하나니
이는 그들로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며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게 하여 돌이켜 죄 사함을 얻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 하시고
@원어해석:
하나님 God, 신 god.주qeov"(2316, 데오스)
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
데오스는 기본어이며, '하나님' God, '신' god를 의미한다.
(a) 헬라의 신개념.
일반 용법에서 데오스는 단수형과 복수형으로 사용되며, 명확하게도 사용되고 막연하게도 사용되어 신들, 신, 그 신, 신성(godhead) 사이에 의미상의 구별이 거의 없는 경우가 종종 있다.
2. 구약 및 70인역본의 용법.
데오스는 70인역본에서 약 4,000회 나오며, 거의 대부분 엘로힘의 역어로 사용되었으며, 그밖에 15개 이상의 단어들의 역어로도 사용되었다
그리고 이 복수형이 사용된 이유의 또 하나는 성경 자체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즉 창세기 1장에서 한 분이신 하나님의 단일성을 나타내면서도 위격의 복수성(삼위일체)을 허용해 줄 수 있는 용어의 필요성을 찾아보게 된다(창1:2, 26). 엘로힘이란 어형이 히브리어에서만 나올 뿐, 다른 셈어에서는 나오지 않으며, 심지어 성경 아람어에서도 나오지 않는다는 사실은 엘로힘이 삼위일체되신 유일무이하신 하나님이심을 지칭하는 이스라엘의 독특한 신명임을 확증해 준다.
비유:
parabolhv(3850, 파라볼레(b))
곁에 둠, 비교,
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
명사 파라볼레(플라톤, 이소크라테스 이래)는 파라발로(parabavllw, 3846), 즉 `옆에 두다, 옆에서 잡다, 옆에 던지다'라는 의미
# 유대인들에게 주님은 비유로서 그 복음을 전파하고 계시는 것을 봅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대에게는 왜 주님께서 유대인에게 깨닫게 하지 못하게 하실까 생각할지 모르겠습니다. 우리같이 정립되어진 성경을 통해 예수님을 깊이 있게 묵상되어진 것도 아니고 그들은 가끔 동네에 와서 선포하시는 말씀이나 가까이서 들을 수 있어야 들을 수 있는 말씀입니다. 거기다 비유까지 하시니 유대인이 예수님을 깨닫기는 매우 힘들어 보입니다. 거기다 이 말씀 저 말씀이 돌다가 와전 될 수 있게 구전되어 예수님에 대해 집권자들은 어렵게 듣기도 합니다.
거기에다가 유대인은 자신들은 다 알고 다 깨끗하다는 교만의식과 선민의식 때문에 자신들과 택함 받은 자라 다른 사람과 민족을 무시하고 구약성경도 전도하지 않는 특별구원 의식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구약에 예언된 복음이라면 이 귀한 것을 자세히 알고 나도 구원 받고 이웃과 다른 민족에게도 전해야 한다는 의의 믿음이 그들에게는 없었던 것입니다. 우리 민족만이 받은 은혜 나누지 말자 빼앗기지 말자 또 유대인의 특권도 빼앗기지 말자라는 이기적인 의식이 있었던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선민의식이란 자기민족만이 택함을 받았고 구원을 얻었으며 타민족은 극도의 비하의식을 말합니다.
그런 유대인에게 하나님은 어떠한 계획을 가지고 계시었을까요 바로 이사야의 예언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교만한 유대인에게는 복음을 주지 않는 것이지요 그것도 완전히 망할 때 까지요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가서 이 백성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하여
이 백성의 마음으로 둔하게 하며 그 귀가 막히고 눈이 감기게 하라 염려컨대 그들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닫고 다시 돌아와서 고침을 받을까 하노라
내가 가로되 주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대답하시되 성읍들은 황폐하여 거민이 없으며 가옥들에는 사람이 없고 이 토지가 전폐하게 되며
사람들이 여호와께 멀리 옮기워서 이 땅 가운데 폐한 곳이 많을 때까지니라
[이사야 6:9~10]
지독한 독단 독선의식 자기만 택함 받았고 자기만 구원 받았고 남은 개처럼 여기는 선민의식은 호세아나 각종 구약의 이방에게도 구원이 전해진다는 예언과 달리 유대인은 이에 전혀 부흥하지 않고 하나님을 전하지 않았습니다. 그러기에 강제로 라도 바벨론에 가서 느브갓네살 왕 고레스 왕들에게 하나님을 전하게 되었습니다. 놀라운 사실은 아브라함 이후 오직 홀로 이스라엘만이 하나님을 믿는 민족이라는 것입니다. BC 2000년 동안을 선민의식 속에 살아 자기만 구원 받았고 자기만 착한 민족이라는 사상 속에 타민족에게 제대로 전달하지 않은 것입니다.
구약속에는 자신의 민족이 선택을 받은것과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라는 두가지 내용이 있으나 그들은 오직 자신의 민족이 선택 받은 거만을 확대하여 가르치고 자만하였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축복을 주신 것은 자신과 이웃을 위한 것이지만 마치 썩은 사해와 같이 하나님의 사랑을 받기만하고 전하지 않았기에 망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너무 중한 사실입니다. 우리 크리스찬도 하나님께 맡은 복은 많은데 이웃에게 전달하여 주지는 않나요 그것은 받은 복을 빼앗길 징조입니다. 깨어 있으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이 이제는 이스라엘을 포기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복음을 주지 않으려고 작정하신거 같습니다. 일부 유대인이 예수님을 믿는 거 외에는 그들은 깨닫지 못하고 제대로 전달 받지 못합니다. 복음서는 유대인 자신에 의해 철저히 통제되고 예수님을 믿는 자는 처형까지 시켰습니다. 그 귀한 예수님 복음을 유대인이 또 소유한다면 또 AD 2000년 동안 복음은 이스라엘 선민의식 속에 쌓여 또 전달되지 못할 수도 있을 거 같습니다. 그 얼음짱 같은 선민의식은 또 이스라엘 안에 수천년 동안 하나님의 방법을 가두며 냉혹히 얼어 붙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방인에게 전달된 복음은 예수님 이후 AD2000년 동안 어떻게 되었나요 놀랍게도 거의 땅끝까지 복음이 전달 되어지는 것을 봅니다. 유대인은 하나님의 복음을 불순종하여 BC 2000년 동안 가두어 두었고 이방인은 AD 2000년 동안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땅끝까지 복음을 전달하는 것을 봅니다. 사해같이 썩은 고인물인 이스라엘은 남에게 하나도 나누어 주지 않은 이스라엘 이리저리 쫓겨다니며 단 하나의 생명체도 살 수 없는 황폐하여 버린 바가 되어 왔습니다. 그러나 갈릴리 호수 같이 열정을 다해 복음을 전한 이방인은 생명력이 풍성하고 나날이 발전되어지는 것을 봅니다.
현대를 사는 우리는 어떠해야 할까요 우리 믿음의 선배들이 그러하였던 거처럼 열방에 복음 전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가 이 땅에 사는 이유입니다. 믿고 그냥 천국 가면되지 왜 우리가 이 땅에 삽니까 사명이 있기에 하나님은 우리를 여전히 이곳에 남겨두는 것입니다. 삶에서 그리스도인의 모본을 보이고 복음을 전하고 교회를 지어가고 그리스도의 공동체를 이루고 그 강력한 성 안에서 복음으로 세상을 점령하는 데에 우리의 살아가는 궁극적인 이유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구함은 먹든지 마시든지 직장을 얻듣지 결혼을 하든지 뭘하든지 복음 전파에서 그 이유를 찾아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살아가며 이 전파의식을 상실하지 않았으면 합니다. 하나님을 성령과 진리인 말씀 안에서 깨달아 의식이 살아 있으며 고난 속에 우리 살아갈 이유를 알고 하나님을 부인하지 않고 인내하며 세상 일에 마음을 빼앗겨 정작 중요한 주님의 일을 잊지 않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저녁 예배를 드리며 세상을 향해 기도하며 외치며 복음으로 점령하고자 담대하였던 우리 교회들 이제는 저녁 예배가 사라지고 낮에 드린 예배는 저녁 TV앞에 마음을 빼앗기고 사명의식을 상실하는 일들이 있을 것입니다. 우리의 전도의식은 침몰해져 가고 있지는 않는지 점검해야 할 것입니다.
배가 침몰해져 가듯 기독인의 사명은 침몰해져 가고 있지는 않는 지요 사라져 버린 저녁예배 속에 할 수 있는 대안은 저녁예배 시간에 예배 드리던 것을 이제는 사라졌으니 이와같이 온라인에서 또는 다양한 세상의 매체에서 복음을 전할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설교를 온라인에 여러 세상매체 속에 비방을 받더라도 전해야 할 것입니다. 왠수 같은 지인이라도 왠수 같은 비방하는 온라인의 안티 기독인이라도 욕을 먹어가며 복음을 전해야 겠습니다.
어느 지역 사람은 누구는 악질이다 비방하는 마음으로 세상과 함께 세상을 정죄하는 나의 악한 마음을 보았습니다. 또는 누구는 악질이다 다른 사람을 비방하는 저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나의 교만한 선민의식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오래전 아침 무언가 깨달은 일이 벌어졌습니다. 집에 승용차도 있지만 오토바이를 타고 빗길을 내려 오고 있을 때였습니다. 비도 오고 지하철 공사장의 윗판에다 내려오는 길이라 오토바이는 멈추지 못하고 저는 실수로 앞차로 박고 말았습니다. 차를 자세히 보니 외제차 였습니다. 큰일 났다 내가 한달 번돈 다 날라 가겠구나 아찔한 마음이 들더라구요
나는 다친데가 없지만 차 뒤 범퍼가 오토바이 페인트로 발려 있었습니다. 차 주인이 어느 지역 사투리로 부드럽게 뭐라하시며 오토바이 노란 페인트를 벗겨 내시며 그양 갈께요 라고 하시더라구요 그 지역의 사람들을 혐오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 지역의 어느 한 인물을 혐오하던 시기였습니다. 내가 얼마나 선입견과 교만한 사람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사람에게는 누구에게나 다른 사람이 이해 못할 약한 부분이 있는데 나는 다른 사람을 정죄하기에 너무 바빳구나 나는 하나님을 믿는 의인인데 남은 죄인이라는 교만한 선민의식에 빠져 있는 나 자신을 발견하였습니다.
남을 함부로 정죄하거나 비방해서는 안되며 선입견도 가져서는 안된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오직 심판자는 우리 모든 인간의 내외부 행동들을 아시는 하나님 밖에는 없습니다. 어느 시대 어느 사람이든 남을 잘 이해하지 못하고 함부로 정죄하는 것은 내가 심판자이신 하나님과 동등이라는 교만한 마음에서 나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전혀 예상하지 못햇던 사람에게 너무나도 따뜻한 인자함을 느끼는 경우를 오늘 본거 같습니다. 또 모든 사람에게 인자하신 하나님을 보았습니다. 나는 사랑 받으나 남을 사람하지 못하는 나 자신을 보았습니다. 비오는 날 돌이킬 수 없는 작은 실수라도 큰손해를 볼 것을 내가 잘 이해하지 못했던 사람에게 이해를 받게되는 순간이 된 것입니다.
내가 그 부류의 사람보다 더 인정이 메마르고 강퍅한 현실을 발견 했을 때 나의 교만한 자아가 깨지는 것입니다. 사람은 사람에게 오직 인자함을 심판은 오직 하나님께 맡겨야 겠습니다. 내가 하나님의 위치에는 이를 수 없습니다. 다만 하나님께서 선악간에 상급을 줄자에게는 상급을 주실 것입니다. 남을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순간 나의 행동도 그렇게 행동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 사람이 부정적 행동을 하기 이전 나의 생각이 바뀌어야 합니다.
나의 겸손이 그의 겸손으로 이어질 수 있는 것입니다.
나의 교만한 선입견이 그의 교만한 행동으로 보이게 됩니다.
나는 오직 사람에게 인자함을 판단은 하나님께 모두 맡깁시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고 하나님은 세상 모든 사람을 사랑하십니다.
하나님 아버지, 유대인의 교만한 선민의식이 우리에게도 있지는 않는지요 그 선민의식이 보이지 않는 벽이 되어 남을 정죄하고 판단하다 복음의 문을 가리운 적이 얼마나 많은 지요 나의 교만한 선민의식을 용서하여 주옵소서 우리는 고인물이 되지 않고 오직 복음의 인자함과 겸손함으로 복음의 길을 열어 이 땅에 우리가 사는 이유를 온전히 충족하여 주옵소서 온오프라인을 통해 말씀이면 말씀 물질이며 물질 봉사면 봉사 교회를 세워나가 많은 이웃주민들의 거대한 구원의 방주 역활을 감당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또 극동방송등 전파 매체등 이용하고 각종 매체를 이용하고 그리스도인의 사랑의 향기를 내어 전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늘 성령님의 단비로 우리 삶의 주위를 복음으로 적셔 주옵시며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