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봉자와 신오무교
8.
설선녀는 제5대 신오무교 교주의 외동딸이었다. 교주인 흑선비곡(黑仙琵 谷)은 오추을로부터 전해 내려오는 강맹한 무공을 정립하여 체계를 세우는데 평생을 바쳤다. 초대교주인 오추을은 소림사방장인 경혜선사에게 너무도 큰 자비를 받았다. 오로지 자신의 무공만 믿고 강호를 어지럽힌 죄가 너무도 컸다.
경혜선사는 내상을 입고 쓰러진 오추을의 목숨을 구하였을 뿐만 아니라 무림의 일파로 공인하여 자혈검까지 내 주었다. 경혜선사가 마지막으로 던진 말은 오추을의 평생을 지배했다.
“일생에 가장 강한 적수를 만나서 평생을 연마한 무공을 원 없이 펼쳤으니, 나의 노력이 헛되지 않았다. 이제는 걸어 다니는 송장이라는 소리를 들어도 섭섭할 것이 하나도 없도다. 어찌 오추을에게 감사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늘에서 떨어진 부처님의 자비와 같은 경혜선사의 말이었다. 경혜선사는 소림사의 영단을 먹여주고는 자신의 진기를 끌어 모아 오추을의 단전에 불어넣었다. 대력금강장에 입은 내상을 치료하기 위해서였다. 깊게 입은 내상이 치료되는 순간에 경혜선사는 진기를 모두 소진하여 버렸다. 평생을 쌓은 무공이 폐하여진 것이다. 그리고 강호에 발을 끊고 산림에 은거했다. 아무도 경혜선사의 마지막 모습을 본 사람은 없었다.
표독한 맹수의 무공을 순화시키려는 노력의 일환으로 오추을은 예악(禮樂)과 풍류(風流)를 표방한다는 교지를 내렸다. 경혜선사의 뜻을 받드는 의미에서였다. 달마조사의 무공에 자비의 혼이 들어있듯, 자신의 무공에 예악과 풍류의 혼을 불어넣으려 했다. 신오산에서 은둔하다가 임종을 맞는 순간에도 오추을은 경혜선사를 그리워했다. 대자비(大慈悲)......
어둠이 내려앉은 신오산 중턱에 중년남자가 앉아있었다.
계곡을 흘러내리는 비파소리에 넋을 놓았다. 소리의 신묘함에 그는 일어설 줄 몰랐다.
(참으로 대단한 힘이다. 연약한 비파소리가 강호를 떠돌던 마음에 연정의 한을 품게 하는구나. 자유자재로 높고 낮음을 넘나들고, 급하게 쏟아져 내리는가 하면, 하늘을 치솟아 구름을 타니 실로 남아의 가슴에 애수를 불러일으키도다.)
중년남자는 자기도 모르게 비파소리를 따라 신오산을 오르고 있었다.
보름달이 둥실 떠올랐다. 가을밤의 적막은 비파소리에 흔들리며 가슴을 파고들었다. 계곡을 돌아서 능선을 넘었다. 오솔길을 따라서 한참을 가니 넓은 터가 나타났고 웅장한 신오무교의 무도관(武道館)이 보였다.
(어디쯤에서 나는 소리인가, 사방에서 들려오는 듯하니 종잡을 수가 없구나.)
비파소리에 취한 중년남자는 무도관을 지나서 한참을 또 올랐다. 멀리서 희미한 불빛이 보였다. 숲으로 둘러싸인 조그만 터에 단아한 자태의 건물이 자리 잡고 있었다.
(누가 이렇듯 영롱한 소리를 자유로이 낼 수 있다는 말인가, 사람의 마음을 마음대로 휘어잡아 끌어당기는구나.)
한점 바람에 낙엽이 우수수 떨어졌다. 중년남자는 서서히 걸어서 건물이 한 눈에 들어오는 마당의 샘터에 앉았다. 한 모금의 청정수를 손으로 떠 마시고 애수에 잠겼다.
잠시 후에 비파소리가 멎더니 방문이 열리며 수려한 미모의 여성이 달을 올려다보았다. 중년남자는 가슴이 뭉클하였다. 백옥의 얼굴에 펼쳐진 눈썹은 학이 날개를 편 모습이었고, 오똑한 코와 그 아래의 입술은 앵두처럼 붉었다. 여인은 몸을 일으켜 문밖을 나서더니 청아한 목소리로 탄식하였다.
“아, 가을은 깊고 달빛은 차가우니 세월은 나를 근심치 않는구나. 청춘은 힘겹게 마지막 고개를 넘는데 허한 가슴은 창공의 바람 같도다.”
여인은 가는 허리를 틀며 긴 머리를 쓸어 올렸다. 수심이 가득한 표정으로 떨어지는 낙엽을 바라보았다.
“인생이란 낙엽으로 변하는 나뭇잎과 같도다. 계절에 순응하여 피고 지며, 비바람을 원망치 않고, 가을에 울지 않는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그렇듯 원망 없이 순응하는 생명이 이렇듯 슬퍼지는 이유는 무엇이란 말인가?”
중년남자는 탄식하는 여인의 자태에 넋을 잃고 말았다. 강호를 떠돌던 가슴에는 지금까지 느껴보지 못했던 연정이 내려앉았다.
(참으로 어여쁘고 가냘픈 모습이다. 저런 미모와 탄식이야말로 아까 들렸던 비파소리의 참 모습이려니, 참으로 안타깝다. 어찌 저런 수심으로 밤을 새우는 것인가,)
별안간 휘익 하는 날카로운 소리가 들렸다.
넋을 잃고 있던 중년남자는 본능적으로 손을 펼쳤다. 허공을 날아온 표창을 손가락 사이로 잡는 순간에 또 한 자루의 표창이 날아왔다. 이번에는 왼손으로 표창을 잡았다. 두 자루의 표창이 중년남자의 요혈을 노리고 날아온 것이었다.
“흥, 제법이군.”
숲 속에서 나타난 그림자는 솔잎을 한줌 따서 중년남자를 향하여 휙 뿌렸다. 내공이 실린 솔잎은 수십 자루의 표창이 날아들 듯 허공을 가르며 날았다. 중년남자는 손바닥을 활짝 펼치더니 장력을 앞으로 뿜었다. 퍽 하는 소리와 함께 솔잎은 힘없이 떨어졌다.
공격을 피하여 훌쩍 뛰면서 마당으로 내려선 중년남자는 두 손을 앞으로 모으며 읍했다.
“어찌하여 이런 암수를 쓰십니까? 모습을 드러내어 통성명이나 먼저 합시다.”
그러자 숲 속에서 나온 그림자는 몸을 드러냈다. 사십 정도의 중년여자였다.
“흥, 통성명이라고? 여기가 어디인 줄 알고 감히 들어왔는가? 응큼한 녀석 같으니,”
말할 틈도 안주고 여인은 허리에서 채대를 쭉 뽑아들어 펼쳤다. 채찍처럼 날아든 채대는 중년남자의 허리를 감아 들었다. 슬쩍 몸을 피하자 이번에는 발목을 향하여 날아왔다. 숨쉴 사이도 없이 연속하여 몇 초의 공격을 하던 여인은 현란하게 채대를 흔들었다. 그러자 채대는 물고기를 낚듯이 허공에서 활짝 펴지면서 중년남자의 몸 전체를 뒤집어씌우듯 떨어져 내렸다.
“매궁, 손을 멈추어라.”
은쟁반에 옥구슬 구르는 소리처럼 젊은 여인의 음성이 들렸다. 흠칫하며 채대를 거두어들인 중년여자는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설선녀님, 어찌하여 야밤에 침입한 치한을 가만두라고 하십니까?”
미모의 여인은 매궁의 말에 대답도 하지 않고 중년남자 앞으로 다소곳이 다가왔다.
“제 시녀의 무례함을 용서해 주십시오. 보아하니 길을 잃은 것은 아니고, 그렇다고 아녀자들만 사는 이곳에 볼 일이 있어서 온 것도 아닌 즉, 어인 연유로 여기에 계십니까?”
중년남자는 두 손을 읍하며 침착하게 말했다.
“그런 줄 몰랐습니다. 신오무교의 교주님을 상면하려고 산길을 들어서니 비파소리가 너무도 애절하여 저도 모르게 여기까지 오게 되었습니다. 저는 천봉자라고 합니다. 모르고 한 일이니 용서하기 바랍니다.”
하얀 손으로 긴 머리를 쓸어 올리며 설선녀는 말했다.
“아하, 그러면 이곳이 금남의 장소라는 것을 모르셨군요. 천봉자님이라...... 익히 그 명성을 들어 알고 있습니다. 강호의 대협객이시며 무공의 깊이는 아무도 짐작조차 할 수 없는 대고수라고 하던데, 이렇게 뵈오니 영광입니다."
천봉자는 설선녀의 고운 자태와 예의바른 태도에 감복하였다.
“너무도 과분한 말씀입니다. 세상 사람들의 헛소문에 불과합니다. 소인은 흑선비곡님을 찾아뵙고 오추을님의 강맹한 무공을 배우려 왔습니다. 그런데 오는 도중에 너무도 신묘한 비파소리가 가슴을 울리게 하였으니, 소저가 비파를 타는 솜씨를 가늠조차 할 수 없군요.”
설선녀는 고개를 들어 구름사이로 얼굴을 숨기는 달을 보며 말했다.
“천봉자님은 호인중의 호인이요, 협객중의 협객이라고 들었습니다. 어찌 하찮은 제 비파소리에 가슴을 설레겠습니까? 강호의 대인물을 이슬 아래 맞이하는 것은 도리가 아닌 줄로 압니다. 누추하나마 저의 방으로 모시어 차를 대접해 올리겠습니다. 감히 무례한 청은 아닌지?”
천봉자는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이렇듯 아름답고 공손한 여인은 처음 대하였다.
“어찌 소저의 청을 감히 거절하겠습니까, 잠시 실례를 무릅쓰고 한 잔의 차를 청하옵니다.”
설선녀는 천봉자를 앞세워 방으로 들어왔다. 붉은색 방석을 아랫목에 내려서 천봉자를 좌정시키더니 윗목에 다소곳이 앉아서 매궁을 불렀다.
“매궁아, 귀한 분이시니 강남에서 가져온 망심일차(忘心佚茶)를 다려야겠다. 깊은 밤에 대협객을 맞이하여 독대하니, 휘영청 뜬 달도 곱게 웃는구나.”
천봉자는 정중한 대접에 다시 한번 감사를 표했다. 그리고 은근한 목소리로 말했다.
“소저, 편한 마음을 갖기에는 너무도 고적한 가을밤입니다. 또한 소저의 아름다운 자태는 평상심을 흩어지게 하는 바가 있습니다. 한 가지 어려운 청이 있으니 비파소리를 다시 듣고 싶습니다. 근심을 잊게 하여 즐거움을 준다는 향기로운 차도 있으니, 여기에 심금을 울리는 천하의 비파소리를 곁들이면 금상첨화라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은은한 차의 향기가 방안을 감돌았다. 설선녀는 고개를 숙이고 있다가 조용히 비파를 잡았다.
“비록 미천한 솜씨에 불과하지만 감히 천봉자님의 청을 거절키 어렵기에 타겠습니다.”
하얀 손이 비파의 현 위에서 움직이기 시작했다. 시선을 멀리 드러난 달빛에 놓으며 비파를 타는 설선녀는 한 폭의 그림 같았다. 눈부신 듯 반쯤 감은 눈으로 비파소리와 설선녀의 자태에 취한 천봉자는 침묵하고 있었다.
길게 이어지는 소리가 끊어질 듯하다가 다시 이어지며 굽이친다. 섬세한 소리는 춤추는 선녀의 옷자락처럼 펄럭였고, 별안간 굵은 음을 내며 아래로 푹 떨어지는 소리는 가슴을 철렁이게 한다. 청춘은 파도처럼 밀려드는데 어이하여 님은 꿈쩍도 안 하는 것인가, 밤하늘을 가르는 기러기는 울음을 토하는데 노송에 걸린 달은 어찌도 저렇게 무심한 빛인가,
돌부처처럼 앉아 눈감은 천봉자와 보일 듯 말 듯한 몸짓으로 비파를 타는 설선녀는 떨고 있었다. 가슴속에 응어리진 그리움이 환한 얼굴을 드러내며 새벽의 이슬을 한 방울 뚝 떨어뜨린다.
이것이 천봉자와 설선녀와의 첫 만남이었다. 피하지 못할 인연을 절감하는 순간이었다.
서산을 넘어가는 달에 비파를 놓은 설선녀는 고개 숙이고 있었다. 천봉자는 다소곳한 그녀의 자태를 응시했다.
(내 혼을 사로잡는 인연이 바로 여기에 있을 줄 어찌 알았는가, 오호라, 하강한 선녀 같도다, 그 이름조차도 순결의 설선녀라 일컬으니 파도처럼 숨쉬는 정감은 감당하기 어렵구나.)
지그시 눈감는 천봉자를 보는 설선녀의 마음은 아득한 나락으로 떨어지는 기분이었다. 준수한 천봉자의 얼굴에는 거역할 수 없는 힘이 있었다. 마주 보기만 하여도 그의 품속으로 끌려 들어가는 것만 같았다.
처음 대하는 순간에 가슴을 타고 흘러내리던 뜨거운 설렘은 무엇이었던가, 설선녀는 조용한 음성으로 말했다.
“밤이 깊었습니다. 교주님을 찾아오신 손님은 곧 저의 손님과 같습니다. 날이 밝으면 제가 흑선비곡님께 안내하여 드리겠습니다.”
천봉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호의를 피할 이유가 없었다. 침상에 같이 들어 만리장성을 쌓는다 하여도 부끄럽지 않은 마음뿐이었다.
“매궁아, 천봉자님을 위하여 따듯한 잠자리를 마련하도록 해라. 너무도 밤이 깊었구나.”
맑은 설선녀의 목소리는 나지막한 음성으로 천봉자의 귓전에서 떨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