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부터 날씨도 꾸물거리고 생리도 시작한 탓이라 배도 아프고 머리도 어질어질했다.
다행인 것은 지선이 말했던 '임신테스트'는 안해봐도 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한 달마다 어김없이 찾아오는 이 고통은 어떻게든 견디어 내야만 했다.
휴가를 낼까 하다가 프리젠테이션도 얼마 남지 않았고, 은수도 그만둔다고 한 이 시점에서
하루라도 자리를 비우는 것은 무리한 일이다 싶어 출근하기로 했다.
그리고 저녁 때는 고대하던 민준과의 만남도 있지 않은가....
생리통은 치유가 힘든 것이라고는 하지만 그래도 심리적으로 견디게 만드는 것은 이런 즐거운 기대감일지도 몰랐다.
이부장은 나에게 어떻게든 은수를 잡아보라고 했지만 개인적으로 더 좋은 것으로 옮기는 것에 대해
잡는다는 것은 너무 회사만 생각하는 거 아니냐는 식으로 이부장을 설득했다.
그리고 은수를 대체할 사람으로 이런 이런 이력이 있는 사람이면 좋겠다고 부탁했다.
은수는 프리젠테이션이 결과가 나올 때까지 회사에 나오겠다고 했으니 은수와 이제 함께 일할 날은 이주일 정도가 남아 있었다.
김대리, 은수, 하연과 나는 오전 내내 프리젠테이션 문서에 대해서 수정 회의를 하다가 은수보다는 내가 직접 말하는 게 나을 것 같아서 은수의 퇴직을 공표했다.
"그 동안 함께 했던 은수씨가 이번 프리젠테이션을 마지막으로 회사를 그만둔다고 합니다."
나는 공식적으로 간단 명료하게 얘기했다.
"어머나....진짜에요?"
역시 하연의 반응이 제일 빨랐다.
나는 놓치지 않고 김대리의 반응을 살폈으나 김대리는 이미 알고 있었다는 듯 별로 놀란 기색이 없었다.
"시집가요?"
김대리는 역시 썰렁한 질문으로 분위기를 전환시키려는 노력인 것 같았다.
은수가 얼굴을 찡그리며 김대리를 살짝 노려 보았다.
"더 좋은 데로 옮긴다네요."
이번에도 은수 대신 내가 나섰다.
"네....그 동안 정말 감사했습니다. 이 회사에 들어와서 무엇보다 좋은 사람들을 만나게 되서 즐거웠어요."
은수는 직접 인삿말을 했다.
"너무해요. 어쩜 저한테는 미리 한마디도 안하고, 그럼 그 때 휴가가 면접 보러 갔던 거였군요?"
하연은 섭섭한 말투로 재차 확인했다.
"네. 이제 연봉 조정도 했고요. 그 쪽에 입사 날짜만 얘기하면 돼요."
금방 다들 은수의 사직을 수긍하는 분위기가 되어버렸다.
"은수씨...내가 그 동안 괴롭혀서 도망가는 거죠?"
김대리는 눈치가 있는지 없는지 또 엉뚱한 발언을 하고 있다.
"아니에요. 김대리님의 그 썰렁한 유머도 때론 삶의 활력이 되었어요."
은수는 웃으며 대답했다.
"그렇다면 다행이고요."
김대리도 은수의 진짜 사직 이유를 알고 싶어서 그렇게 썰렁한 반응을 했던 것일까....
"그리고요. 여직원들 그만 둘 때, 결혼하냐고 안물었으면 좋겠어요. 그거 젤 기분 나쁜 거 아세요?"
은수는 타이밍을 놓치지 않고 한 마디했다.
"맞아요. 여자가 회사 그만 두는 이유가 결혼밖에 없나요?"
하연도 김대리의 발언에 못마땅한 모양이다.
"그럼 똑같이 남자들한테도 시집가냐고 물어볼게요. 그럼 남녀 차별은 아닌 거죠? 유머였는데...."
김대리가 대답이라고 한 말은 은수를 비롯한 나머지 사람들에게는 더 김빠지는 유머가 되고 말았다.
"꼭 그렇게 하셔야 돼요. 하연씨 나 대신 남아서 확인해줘....."
은수는 하연을 보며 귀중품을 맡기는 사람처럼 심각하게 말했다.
"그러니까 전 우리가 은수씨에게 우리 프로젝트 성공을 선물로 주고 싶어요."
나는 정말 하고 싶은 말을 꺼냈다.
어제 송별회를 근사하게 해주겠다고 은수와 약속했는데 좋은 곳에서 좋은 술 마시고 비싼 선물이 아닌 프로젝트의 성공을 은수에게 선물로 주고 싶었던 것이다.
"프로젝트의 성공....은수씨에게 값으로 말할 수 없는 선물이다..이거군요."
카드 회사의 선전 카피를 응용한 김대리의 재해석은 그래도 은수에게 동료로서 애정은 있어 보였다.
"와...입사 이래 들어본 김대리님의 최고 명언이네요."
은수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김대리가 비록 은수를 거절했다고 하더라도 동료로서 함께 일한 것에 대한 소중한 추억은 간직할 것이다.
만약 나도 오늘 민준을 만나서 내가 기대한 대답을 듣지 못한다면 그 동안의 소중한 추억이라도 즐겁게 받아들일 수 있을까?
"저요. 이번 주에 로또를 샀거든요. 그거 되면 은수씨 송별회 근사하게 해줍니다!!!"
김대리다. 로또를 샀다고? 그런 거에 별로 관심 갖지 않아 보이더니...웬일로?
"김대리님이 로또를 샀다고요? 그거 확률 엄청 낮은 거라고 바보 같은 일이라고 했잖아요."
늘 김대리의 숫자 감각에 대해 경의를 표하던 하연씨가 놀라서 되물었다.
"그거 아세요? 김미나의 결혼 발표 후, 남자들이 로또를 엄청 샀대요. 그 남자친구가 잭팟에 맞고 결혼 신청했다잖아요. 다들 로또 사면서 여배우들 이름 들먹거리며 결혼할 꿈에...."
김대리도 역시 여자 연예인들에게 관심이 많은 모양이었다. 더구나 여배우들과 결혼까지 꿈꾸는 그런 유치한 생각까지 하고 있다니...하여튼 남자들이란....
"김대리님은 그럼 로또 맞으면 누구랑 결혼할 건데요?"
하연이 다시 물었다.
"내가 굳이 누구랑 결혼하고 싶어서가 아니라 직장인들이 어떤 심리로 로또를 사는지 알려고..."
"우우우우우우우....."
김대리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하연과 은수가 동시에 야유를 퍼붓기 시작했다.
나도 마음속의 야유를 한 껏 보내주고 있었다.
"에이...여배우가 아니라도 여자들 돈 많은 남자 좋아하잖아요."
"에에에에에에......"
이번엔 나까지 합세해서 야유를 보내기 시작했다.
아니다. 여자들이 돈많은 남자를 좋아한다는 건 남자들의 오해다.
여자들은 친절하고 상냥하고 사려심 깊은 남자를 좋아한다.
다만 돈을 가진 남자들이 여자에게 그런 심리적 여유도 있어서 여자들이 마음이 기울어지는 것은 아닐까....
사랑과 돈은 어느 땐 적이면서도 어느 땐 동지로, 앞으로도 둘 중에 하나가 지구상에서 사라지지 않는 한 영원히 함께 혹은 따로 많은 사건을 저지르며 역사에 기록될 것이다.
정말 나도 돈과 무관하게 사랑을 추구한다고 대답할 수 있을까....
내 대답은 그렇다...이다.
절대 민준이 돈이 많아서가 아니라, 3년 전의 만남에서 보여준 변화들 그리고 3년 만에 다시 날 찾아와서 보여준 애정 때문에 그를 사랑하고 있는 것이다. 다만 운이 좋게도 그가 돈이 많은 남자였던 것이다.
회의를 하면서도 점심을 먹으면서도 오후에 자리 앉아서도 도대체 민준이 나에게 어떤 말을 할지가 고민되었고, 그 경우의 수에 따라 나도 어떻게 반응을 할지 백번 천번도 넘게 생각해봤다.
그러나 나에게 이별을 고한다는 것은 도저히 상상이 되지 않았다.
난 꼭 묻고 싶은 게 있었다.
다른 것은 몰라로 민준이 건네준 카드에 왜 민준의 이름이 아닌 '김연실'의 이름이 있었는지...
아마 그 대답 하나만으로도 나는 민준의 진심을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적어도 날 사랑했다면 아무리 주고 싶다고 하더라도 '김연실'의 카드를 건네줄 수 없었으리라....
'팀장님, 안색이 안좋은데 무슨 일 있어요?'
민준의 생각으로 컴퓨터 앞에서 프리젠테이션 원고를 보면서도 멍해져 있는 상태에서 튀어오른 건
김대리의 메신저다.
안색이 안좋을 때 챙겨주느라 묻는 것은 당연히 고마운 일이겠지만 이럴 때 남자 직원이라면 모르는 척 해줬으면 하는 게 솔직한 마음이었다.
'아니. 내가 별 일 있겠어?'
별일 있다고 해도 김대리한테 말 할 기분은 아니다.
'그건 모르는 일이죠. 남자한테 채였을 수도 있고.....'
거기다 덧붙이는 저 발언은 가뜩이나 예민해져 있는 나를 연거퍼 짜증나게 만들었다.
'실연도 아무나 하는 게 아냐. 사랑이 아무나 하는 게 아니듯....'
스스로 말해놓고도 멋있다..생각하며 이쯤에서 김대리를 물리치려고 생각했다.
'아 그럼...그 날인가?'
도대체 눈치가 빠른 건지, 눈치가 없는 건지....점점 할 말이 없어진다.
나는 그냥 무시하고 말았다.
지금은 김대리의 질문에 역공격할 기분도 아니고 또 받아줄 기분도 아니었다.
다만 오늘 민준과의 약속이 취소되거나 변경되지 않을까 노심초사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래서 자꾸만 핸드폰에 시선을 두거나 수시로 메일을 체크하며 나머지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약속 시간이 되어 민준에게 아무런 연락이 없는 것으로 보아 민준을 만날 수 있다는 데 확신이 들어 즐겁고 또 떨리는 마음으로 리츠칼튼 호텔로 향했다.
호텔로 향하는 차 안에서 생리통이 점점 심해져서 진통제라도 먹어둘 걸 그랬다는 생각이 들었으나 이미 나는 리츠칼튼 호텔 1207호 앞에서 벨을 누르고 있었다.
바로 안에서 인기척 소리도 들리지 않았고 벨소리는 너무 작게 울린 것 같아서 내가 제대로 눌렀는지 미심쩍어 하며 문에 귀를 대려는 순간 철커덕 하고 문이 열렸다. 그리고....
"너구나."
나를 반긴 사람은 민준이 아닌, 민준과 결혼 발표를 해서 인기가 더 급상승중이고 또 나와 고등학교 동창인 '김연실'이었다.
"저....."
나는 순간 냉동이라도 당한 사람처럼 몸이 빳빳하게 굳어서 감탄사만 겨우 내뱉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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