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참을 어둠속에서 달리고 있었다.
앞도 뒤도 보이지 않는 컴컴한 통로를 쉴 새 없이 달리며 출구를 찾고 있었다.
그러나 점점 지쳐갈 뿐 같은 자리를 맴돌고 있었다.
'한지우~ 지우야~'
어디선가 나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다. 분명히 남자 목소리였는데 처음 듣는 목소리였다.
소리가 들리는 쪽에 희미한 불빛도 보였다.
출구인가보다. 조금만 더 달리자~
그런데 이번에는 다리가 말을 듣지 않는다. 그제서야 내가 전형적인 악몽을 꾸고 있음이 자각된다.
'이건 꿈이야. 난 일어나야 해.'
라고 생각하면서도 눈이 떠지지 않는다. 이젠 나를 뒤쫓는 사람들도 보인다.
한 명, 두 명.....금방 몇 백명이 된다. 아무리 달려도 불빛은 가까워지지 않는다.
제발....
나 여기서 나가게 해주세요.
이제는 주저 앉아 울고 싶다.
눈을 떴을 때 보인 천정은 하얀 벽지로 되어 있는 내 집이 아니었다. 벽지가 붙어 있지 않는 그냥 시멘트 천정이다.
놀라서 주변을 살폈다.
침대 옆에 놓인 링거병 받침대가 보인다. 그리고 링거병의 선은 내 팔목에 꽂혀 있다.
병원이다?
신기하다. 이런 일은 드라마에서만 있는 줄 알았다.
깨어보니 병원 침대에 누워 있었다,는 말도 사람들이 꾸며대는 말인 줄 알았다.
연실과 헤어지고 나서 엘리베이터를 탄 기억은 나는데 그 후부터는 정말 아무 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수많은 상상이 오간다.
혹시 내가 몇 시간이 아니라 몇 년 후에 깨어난 것은 아닐까, 아니면 이미 죽어서 다른 세상에 와 있는 것은 아닐까, 그것도 아니면 이것 또한 아까의 악몽에 이어지는 것은 아닐까.
몸을 움찔거려보니 허리 아래쪽에 무엇인가 물컹한 것이 닿았다.
이건 사람의 살에 닿는 촉감인데...라고 생각하며 고개를 살짝 들어 허리 쪽을 보았을 때 누군가 엎드려 있었다.
민준인가? 그러기엔 헤어 스타일이 너무 평범하다. 거기다 양복까지 입고 있다.
설마.....김대리????
김대리는 내 허리가 위치하는 곳에 엎드려서 잠들어 있었다.
나는 김대리라는 확신이 서자 정신이 확 든다.
병원에 누워 있는 것은 어떻게든 이야기를 맞추어 볼 수 있다.
엘리베이터 안에서 내가 기절을 했고 누군가가 119를 불러 응급실로 보내졌다고 생각하면 이해할 수도 있지만 왜 내 병실에 김대리가 있는지는 납득하기 어렵다.
그러나 김대리를 보는 순간 내가 죽은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김대리와 함께 죽을 일은 없지 않은가?
나는 링거 주사가 꽂혀 있는 팔을 고정시킨채 다른 팔로 김대리를 툭툭 쳤다.
"김대리....김대리...."
아무 반응이 없다. 아..그럼 내가 아니라 김대리가 죽은 건가?
나는 다시 좀 더 세게 흔들어 보았다.
"김대리~"
그제서야 김대리는 얼굴을 들고 눈을 껌벅거린다.
"어. 깨셨네요?"
김대리도 나도 멀쩡하게 살아 있는 것이 틀림 없다.
"근데 왜 내가 여기 있는 거야?"
살아 있는게 틀림 없다면 어떻게 된 일인지 자초지정을 알고 대응할 일이 많아 보인다.
"어떻게 되긴요. 아버님 생신 잔치 한다고 리츠칼튼 호텔 일식집에 갔다가 잠시 화장실 가려고 나왔는데 엘리베이터 앞에 어디서 많이 본 여자가 쓰러져 있더라고요."
그랬군...내가 기억하고 있는 것이 기절하기 전까지 갖고 있는 마지막 기억은 정확한 것 같았다.
그 때 나를 모르는 사람들에 둘러 싸여 있었다는 것보다는 그래도 아는 사람인 김대리가 있었던 것이 다행이지만 하필이면 왜 그 때 김대리가 나를 발견했을까 라는 원망섞인 마음도 있다.
마치 잠자는 공주가 왕자의 키스인 줄 알고 잠이 깨었는데 그냥 입술을 간지럽힌 바람 정도인 것을 깨달았을 때의 마음처럼 실망스럽기도 하다.
"그래서?"
나를 발견하고는 병원에 데리고 왔다...라는 뻔한 얘기겠지만 그래도 그 뒤의 일들을 확인하고 싶었다.
"뭐 119 불러서 여기 온 거죠. 저 고생 좀 했습니다. 입원 수속도 하고 보호자 노릇 좀 했죠."
보호자 노릇? 말을 듣고 보니 이렇게 한 밤중에 단 둘이 있는 게 민망스러워져서 갑자기 어색하게 느껴졌다. 일단 고맙다는 인사는 해두어야 할 것 같았다.
"고마워. 그래도 김대리가 아니었으면 행려병자로 서른 살을 마감했을 것 같군."
"그럼요. 그리고 의사가 얘기하던데...오늘 그 날이 맞으시던데요? 생리 기간에 흔히 올 수 있는 빈혈 증세라고..."
기껏 맘먹고 한 고맙다는 말이 무색하다. 내가 생리중이라는 것을 김대리가 알게 되다니....
여자들은 자신이 좋아하는 남자외에 생리중이라는 것을 알리는 것을 싫어한다.
"매 달 이 때 쯤인 거에요?"
거기다 저 확인하는 짖궂은 질문.
"빠를 때도 있고 늦을 때도 있지. 왜 생리대라도 사다 주게?"
"아뇨. 여자들 생리증후군인가 있다고 하던데 그 때 피해다니려고요."
그러면 그렇지....김대리가 나를 배려해서 물어본 것은 아니다.
"근데 지금 몇 시야?"
김대리는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시간을 본다.
"3시쯤 됐네요. 생각보다 일찍 깨셨네요. 전 한 백년쯤 잠들어 있을 줄 알았는데..."
그래. 나도 백년 쯤 잤으면 좋겠다.
잠을 깬 이상 생각이 많아졌다. 내일은 무슨 일을 해야할까...병원에서 언제 나가야 할까...
"나 그럼 언제 퇴원해?"
"일단 내일 아침에 몇 가지 검사만 더 받고 일단 퇴원하시면 된다고 하더라고요."
하긴 빈혈 증세에 별일이 있을까 싶었다.
"팀장님이 안계신데 저까지 자리 비우긴 그렇고 제가 강팀장님한테 연락해서 아침에 좀 와달라고 했어요. 이 나이에 이런 일로 부모님 부르는 것도 소란스럽잖아요. 그래서 강팀장님한테...."
그건 김대리를 칭찬해주고 싶었다. 지금까지 내가 본 이래 가장 잘 한 일이었다. 괜히 이런 일로 부모님에게 연락해서 소란 피우고 싶지 않다. 이젠 더 이상 어린 애가 아니니까...그래도 아침에 지선이 온다고 하니 한결 마음이 편해졌다.
"그나저나 팀장님 대단해요....우리 몰래 리츠칼튼 호텔 한번 더 보려고 오신 거 아니에요? 전 그 프로젝트 때문에 일부러 리츠칼튼 호텔에서 아버지 생신 잔치 하기로 했거든요."
김대리의 말을 듣자, 내가 왜 리츠칼튼 호텔에서 쓰러졌는지 김대리가 묻지 않았는지가 생각났다.
때론 김대리의 엉뚱한 추측이 도움이 되는 것 같았다.
남자의 약혼자를 만나서 쓰러졌다는 것은 얼마나 초라한 일인가.
"제가 알아낸 정보가 있는데요. 우리 프리젠테이션 하는 날 보통은 임원진만 오는데 사장님이 오신데요. 그리고 그 사장님이 베이지색 정장을 좋아한대요."
김대리는 무언가 큰 비밀을 말해주는 사람처럼 심각하게 말했다. 사장이 베이지색 정장을 좋아하는 거하고 프리젠테이션이 무슨 상관인지...그리고 그 정보는 어디서 들은 건지...
"이왕이면 다홍치마죠."
다홍치마? 그 말에 웃음이 났다. 요즘에 저런 말을 쓰는 사람은 없다. 다홍치마, 다홍치마라...
갑자기 큭큭 웃음이 났다.
"왜요? 뭐가 그렇게 웃겨요?"
"아냐아냐....나 조금 더 잘래...."
역시 몸이 안좋은 상태인 것 같았다. 말 몇 마디 했다고 벌써 기운이 없다.
"네. 그러세요. 프리젠테이션이라고 무리하셨나봐요. 의사가 스트레스...어쩌고 저쩌고...하더라고요."
스트레스라면 일보다는 사람과의 관계에서 받는 것이 치명적일 것이다.
의사의 말대로 나는 서민준과 김마나란 커플에게서 견딜 수 없는 스트레스를 받고 있었을 것이다.
내가 다시 눈을 떴을 때는 김대리 말대로 지선이 보였다.
"일어났니?"
"나 물 좀 줘."
지선은 물을 한잔 떠다 주며 말한다.
"야. 너 무슨 영화 찍니? 코피 한번 안 흘리던 애가 왜 쓰러져서 여러 사람 피곤하게 하니?"
지선의 말이 맞다. 마치 잘 나가다 갑자기 백혈병이 걸려 버린 여주인공처럼 병원에 누워 있다니...
"그러게 말이다. 사람들이 기억을 잃고 깨어보니 병원이었다는 말은 다 거짓말인 줄 알았는데....진짜더라구."
"근데 너 서민준 만난 거지? 왜 리츠칼튼 호텔에서 쓰러졌대?"
나는 그날 약속에 대해 지선에게 말하지 않았었다. 무언가 다 해결되면 말하려고 생각했었다.
"서민준이 아니라 김연실..."
"연실이....걔를???"
지선이 놀라는 통에 나도 연실과 나누었던 얘기 하나하나가 다시 생생하게 떠올랐다.
그리고 두 여자가 민준의 선택에 따르기로 했다는 것까지...
"웃겨. 네가 포기해라. 걔하고 네가 비교된다는 것도 난 싫다."
내가 지선의 입장이라도 그랬을 것 같다. 친한 친구가 누군가와 비교된다는 건 치욕스런 일이다.
그러나 지금 상황에선 그것마저도 다행이다 싶었다. 아직 기회가 남아 있었으니까...
나는 결심한다.
이젠 더 이상 민준의 연락만 기다리지 않겠다고, 내가 먼저 연락해서 만나자고 할 것이다.
나 혼자 상처받고 나 혼자 스트레스 받으며 기절하는 비극의 여주인공처럼 되기는 싫었다.
단도직입적으로 민준에게 묻고 민준이 연실을 선택한다면 난 민준을 포기할 것이다.
결혼이 인생의 전부는 아니다. 남자도 인생의 전부도 아니다.
내 인생의 전부는 나다.
단지 몇 시간 앓느라고 쉬었는데 방금 충전된 밧데리처럼 전류가 온몸을 타고 흐른다.
"야. 그래도 김대리 입원비는 다 계산해놓고 갔네."
지선은 퇴원수속한다고 왔다갔다 하더니 돌아와서 신기하다며 그렇게 말했다.
"후후...회사 가서 돌려주면 되지."
세상은 내가 좋아하지 않는 사람에게도 알게 모르게 마음의 빚을 지고 사는 법이다.
김대리에게 특별한 감정은 없지만 같이 일하는 동료로서 고마움과 미안함은 어느 정도 갖고 있다.
그런게 마음의 빚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언젠가는 갚아야 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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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신1: 많은 분들의 축하에 몸들 바를 모를 정도로 감사합니다.
추신2: 제가 어제부터 필이 꽂힌 게시판이 있는데요.
그건 바로 '부모님얼짱선발대회'라는 게시판입니다.
맨날 사진 게시판에는 엽기적인 것만 올라오는 것 같던데
우리의 '부모님'들 사진이 올라오는 걸 보니 신기하기도 하고 왠지
가슴 한쪽이 저려오는 향수가 느껴지네요.
여러분도 한번 가보세요. 요기 게시판 이름들 있는데 위에
액션게시판 가기...가 있던데...그렇게 찾아가실 수 있을 듯...
그거 보고 울아버지 사진도 올려봤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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