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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호에 부는 바람, 천무 / 天武 [11]

은하철도 |2004.02.07 15:36
조회 585 |추천 0

 

 

천봉자와 신오무교



11.


흑선비곡은 석대인이 혀를 깨물고 자결하지 못하게 입속의 단기혈(斷基穴)을 눌렀다.  석대인은 신음소리를 내었다.  흑선비곡의 침통한 목소리 들렸다.

“오늘의 일은 그냥 묵과하여 넘어갈 일이 아니다.  모든 것을 실토하지 않으면 내 손이 무척 맵게 움직일 것이다.  부디 원망일랑 말아라.”


흑선비곡은 다시금 신도혈을 찔렀다.  아악, 하는 비명소리가 났다.

“말하라.  일선교에서 훔친 자혈검을 어디로 가져갔는가?  내가 너의 척추 마디에 죽음보다 더한 고통을 심어놓기 전에,”

석대인은 고통스런 눈빛으로 입을 다물고 있었다.  손발이 꽁꽁 묶이고 단기혈마저 제압당했으니, 자살할 수도 없는 형편이었다.


“맛을 제대로 보여 줘야겠군.  너의 입에서 살려달라는 말이 나오게끔 만들어 주겠다.  흐흐,”

흑선비곡은 석대인의 뒤로 돌아가더니 한손으로 옥침혈을 잡고 또 한손으로는 허리를 감아 끙 하고 힘을 주었다.  석대인의 등줄기에서 뼈마디 뒤틀리는 소리가 우두둑 났다. 


어억,

석대인의 비명소리는 처절하게 튀어 나왔다.  이번에는 반대로 석대인의 몸을 뒤틀어버렸다.  흑선비곡의 눈은 갈수록 표독스런 빛을 띠었다.

“자혈검을 훔친 일선교는 어디에 있으며, 교주는 누구인가?  너는 삼대집사를 수하로 둔 우두머리니 모른다는 말은 못할 것이다.  말하지 않으면 너의 몸을 갈가리 찢어서 짐승의 먹이로 던지겠다.”

흑선비곡은 영추관에서 장검을 들고 나왔다.  온 몸으로 살기를 뿜었다.


그때에 동굴을 들어서며 읍하는 그림자가 있었다.

“교주님, 독대마(禿大魔)입니다.  비명소리에 놀라서 뛰어왔습니다.  무슨 일입니까?”

독대마는 신오무교 무도관에서 최고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고수였다.  살벌한 흑선비곡의 표정을 본 독대마는 뒤로 물러서 입을 다물었다. 


흑선비곡은 검의 날카로운 끝으로 석대인의 허벅지를 살짝 찌르고는 아래로 천천히 그어 내렸다.  찢어지는 살갗에서는 방울방울 피가 흘렀다. 

“흐흐, 너의 몸에서 피를 몽땅 빼어 하얀 얼굴로 저승으로 보낼 수도 있다.  그러나 쉽사리 죽지는 못할 것이다.  천천히 너의 살을 도려내어 겨우 숨결만 지켜주겠다.  어서 말하라.  자혈검을 어디로 가져갔는가?”


“으......나를 죽여라,  흐흑,” 신음소리가 흘러나왔다.

“흥, 내 말을 알아듣지 못하는구나.  나는 자혈검을 찾아야 한다는 말이다.”  장검은 다시 허벅지를 거슬러 올라 또 내려 긋기 시작했다.  흑선비곡은 격한 말투로 말했다.

“자혈검은 하늘같은 은혜를 오추을님께 내린 경혜선사의 유물과 같은 것이다.  불길한 검을 목숨을 걸고 잘 보관하라는 부탁이었다.  감히 자혈검을 탈취하다니, 실로 하늘이 통탄할 일이다.”


석대인은 눈을 부릅뜨고 고개를 저었다. 

“네가 아직도 고통을 견딜 만 하다는 말이겠지, 흐흐,”

흑선비곡은 다시 석대인의 옥침혈과 허리를 잡더니 힘을 주었다.  이번에는 아까보다도 더욱 커다란 소리가 우두둑 들렸다.  등줄기의 척추마디마다 모두 어긋나는 소리였다. 


“어억, 으흑...... 나를 죽여 달라.” 처참한 비명이 석대인의 깨문 입술에서 흘러나왔다. 

“내 뜻을 모르는가?  너의 목숨을 탐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자혈검을 찾으려는 것뿐이다.”

“정말 모른다.  다만...... 만불동의 관음사에 자혈검을 가져가기로 했을 뿐이다.”

“일선교 교주가 있는 본당은 어디인가?”

“그것은 비밀이다.  죽어도 알려 줄 수 없다.  더 이상 묻지 말라.”


그 순간에 석대인이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고개를 푹 떨어뜨렸다.  그의 목에는 날아온 단검이 깊게 꽂혀 있었다.  흑선비곡은 펄쩍 뛰었다.  천봉자가 몸을 날려 단검을 던진 사람을 가로막았다.  바로 독대마였다.  천봉자가 독대마를 금나수법으로 낚으려 하자, 별안간 목을 퍽 꺾으며 독대마는 앞으로 꼬꾸라졌다.  스스로 목을 찔러 자살한 것이었다.


“으흠......”

신음소리 같은 흑선비곡의 탄식이 들렸다.  천봉자는 단호한 표정으로 말했다. 

“교주님, 예삿일이 아닙니다.  교주님은 이곳을 수습하여 평온을 찾으십시오.  제가 관음사로 출발하여 자혈검을 찾아오겠습니다.”

고개를 끄덕인 흑선비곡은 입술을 깨물고 있었다.  천봉자는 읍하여 돌아서더니 관음사를 향하여 달리기 시작했다. 


천봉자는 일선교의 세력이 광범위하게 강호에 침투되어 있음을 느꼈다.  강호에 알려지지 않은 생소한 인물과 고강한 무공을 지닌 자가 일선교의 중심을 이루었고, 그 외에 강호의 쟁쟁한 오대문파의 고수들이 그들에게 포섭되어 주변에 포진하고 있었다.  신오무교에서 손꼽는 고수인 삼대집사와 독대마도 그들의 하수인이 아니었던가,  


며칠을 걸려 천봉자는 관음사 입구에 도달했다.  혹시 여기까지 오는 길에 일선교의 눈에 뛸까봐 변장하고 지름길을 달려왔다.  멀리서 관음사를 주시하며 하루 종일 있었다.  아무런 인적도 없는 절은 폐허가 된지 오래였다.  옆으로 쓰러진 탑이 마당 한가운데 있고 대웅전과 부속건물은 문짝이 다 달아난 채로 을씨년스런 모습으로 서 있다. 


어둠이 깔리자 천봉자는 소리 없이 관음사로 잠입하였다.  대웅전에 들어서니 아무도 다녀간 흔적은 없었다.  천봉자는 가볍게 몸을 날려 천정위로 올라섰다.  사방에 귀 기울이며 조용히 운기조식에 들어갔다.  이대로 기다리면 누군가 올 것만 같았다.

(관음사로 자혈검을 가져가기로 했다는 석대인이 실토한 말이 맞을 것이다.  석대인이 고문에 못 이겨 비밀을 누설할까봐 일선교는 독대마를 보내어 석대인을 살해하고 자신도 자결하도록 했을 것이다.)


천봉자는 관음사에서 끈질기게 그들을 기다렸다.  삼일 간을 대웅전 천정에서 먼지 하나도 날리지 않으며 숨어있었다.  가끔 그림자처럼 밖을 나와서 주변을 정찰하고 돌아가는 일이 전부였다. 


드디어 사흘째 되는 날,

천정에 숨어있던 천봉자의 귀에 인기척이 멀리서 들려왔다.  삼경을 넘은 새벽이었다.  천봉자는 대웅전을 가로지른 굵은 나무위에 엎드려 안광을 번쩍였다.  관음사 마당을 날아든 자가 자혈검을 탈취한 자라는 것을 단박에 알아챘다.  그의 손에는 자혈검이 들려 있었다.  그는 대웅전 앞으로 천천히 다가서더니 잠시 서성거렸다.  누군가를 기다리는 모습이었다.


옷자락이 펄럭이는 소리가 들리며 다섯 명의 그림자가 또 관음사로 날아들었다.  그 중에서 한명이 유일하게 백의를 입었으며, 모두가 흑의를 입은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자혈검을 가지고 있는 흑의인에게 손짓하며 대웅전으로 들어섰다.  천봉자는 흠칫 놀랬다.  하얀 옷을 입고 앞장 선 백의인의 몸에서 뿐만이 아니라, 다른 흑의인에게도 무시무시한 내공의 힘이 느껴졌다. 


얼른 숨을 멈춘 천봉자는 몸에서 기와 혈의 흐름을 느리게 하는 신여시뇌잠술(身如屍腦潛術)을 펼쳤다.  강호에서도 잘 알려지지 않은 서역의 무공으로서 묘연존자에게 전수받은 잠행술이었다.  단전에서 오르는 내공의 힘을 흩어지게 하여 흡사 시체처럼 기와 혈을 식힌다.  높은 무공을 지닌 사람은 주변의 인기척에도 무척 민감하기 마련이다.  숨어있어도 맥박의 흐름을 눈치 챌 수 있다.  천봉자는 재빠르게 펼친 신여시뇌잠술 덕분에 대웅전 구석구석을 넘나드는 백의인과 다른 흑의인의 촉각을 피할 수 있었다.


천봉자는 별안간 의문에 사로잡혔다.

(백의를 입은 사람이 일선교 교주임이 틀림없다.  그런데 그의 몸에서 흘러나오는 기력에서 여자의 빠른 맥박과 호흡이 느껴지는 것은 어인 일인가,  혹시 일선교 교주는 여자가 아닐까?)


백의인이 가운데 서 있고 그 양쪽으로는 두 명의 흑의인이 정중한 자세로 서 있었다.  그리고 앞에는 자혈검을 탈취한 사람이 무릎을 꿇고 있었다. 

“흐흑,  정말로 오라버니인 석대인께서 죽었단 말인가,”

천봉자는 여자의 음성에 놀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예상대로 여자가 분명했다.  자혈검을 받든 흑의인이 말했다.


“교주님, 면목이 없습니다.  신오전을 빠져 나오는 순간에 천봉자에게 혈도를 제압당한 석대인께서는 흑선비곡에게 참혹한 고문을 당했습니다.  그래서 본교의 비밀유지와 석대인의 고통을 덜어주려고 독대마에게 명령하여 석대인을 살해하였습니다.  저의 판단과 행동에 잘못이 있다면 마땅히 처벌 받겠습니다.”

백의인은 몸을 부르르 떨었다.  구슬픈 울음소리를 내었다.

“아니다, 너에게는 아무런 잘못도 없다.  흑흑,  참으로 애석한 일이지만 석대인의 죽음은 헛되지 않을 것이다. 흑흑,”


밖에서 또 다른 인기척이 들리더니 세 명이 흑의인이 나타났다.  그들은 대웅전을 들어서더니 무릎을 꿇고 백의인에게 읍하며 말했다.

“교주님의 명령대로 신오무교의 무도관을 모두 불태우고 반항하는 자를 모두 베었습니다.  다만 흑선비곡이 거처하는 신오전은 불태우지 못했으니, 흑선비곡이 봉쇄한 협소한 동굴을 들어갈 수가 없어서 그랬습니다.”


천봉자는 깜짝 놀랐다.  신오무교가 이들에게 습격당하여 무도관마저 불탔으며 흑선비곡은 신오전으로 통하는 통로를 봉쇄했다는 말이었다.  흑의인은 말을 계속이었다.

“천봉자가 기거하는 죽림장에는 황궁일의 무서운 화살 때문에 좁은 다리를 건너지 못했습니다.  또한 신오무교를 토벌하는 과정에서 우리가 동원한 고수들이 많이 죽었습니다.  그래서 지금 다시 동원령을 내려서 죽림장을 초토화 시키려고 준비하는 중입니다.”


일선교 교주의 웃음소리가 앙칼지게 들려왔다.

“호호호,  잘 했다.  우리에게 대항하는 자에게는 오로지 죽음만이 있을 뿐이다.  천봉자는 흑선비곡 못지않은 대단한 무공을 가진 자다.  준비를 단단히 하여야 할 것이다.  나도 죽림장의 마지막 날을 구경할 것이다.”


천봉자는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다행히 황궁일의 신궁이 있었기에 이들의 습격을 호수의 좁은 다리에서 차단한 것이었다.  천봉자를 주인으로 모시는 황궁일의 활솜씨는 강호에서 필적할 자가 없었다.  한꺼번에 세 개씩의 화살을 날리면 여지없이 세 명의 가슴을 꿰뚫는 신궁이었다.


일선교 교주는 자혈검을 들고 있는 흑의인을 보며 말했다.

“흠, 자혈검은 겉으로 보기에도 예사로운 검은 아니로다.”  흑의인은 두 손으로 자혈검을 받쳐 들고 천천히 일선교 교주에게 내밀었다.  교주는 매우 흡족한 웃음을 터뜨렸다.

“호호, 원혼이 서린 천하의 명검이 내 수중으로 들어왔구나.  내가 이 검의 주인만 찾으면 강호를 싹 쓸어버리려는 내 뜻이 관철될 것이리라.”


문득 천정에서 어둠이 꿈틀거리듯 하였다.  인기척을 전혀 내지 않는 그림자가 스르르 내려오면서 순간적으로 탁 하는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대웅전 밖으로 튕겨 나갔다.

“앗, 누가 감히......”


안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입을 벌렸다.  흑의인이 받쳐 들었던 자혈검은 어느새 밖으로 빠져 나가는 그림자의 손에 들려 있었다.  천봉자의 번개 같은 신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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