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구려군은 어떤 방법으로 전투를 벌였을까?
옛날 전쟁에서 승패를 가늠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는 대형이다. 기원전 6세기에 로마군은 게르만 종족과의 전쟁에서 밀집대형을 펼쳐 승리했다고 전해진다. 전투시 상대방의 대형을 먼저 허물어뜨리거나 허물어지기 직전의 상태를 연출하면 승기(勝氣)를 잡는 것이었다. 상대방 군대가 자군의 대형을 뚫고 들어가 진지의 후면이나 측면을 먼저 포위하면 대개는 전투를 포기하고 도주했다.
이것은 총포와 창검을 병용한 19세기 미국남북전쟁(美國南北戰爭) 같은 근대의 전쟁까지도 변함이 없었다. 이 시기의 군인들은 총탄이 날아오고 포탄이 작렬하는 가운데서도 꼿꼿하게 서서 사각형 대열을 이룬 채 전진했다. 몸을 낮게 숙이고 넓게 산개해서 전진하지 않는 이유는 여전히 전투에서 백병전의 비중이 높았기 때문이었다.
19세기 중반까지만 해도 서양에서 사용되던 총기(銃器)는 사거리도 짧고 총탄과 화약을 따로따로 장전하는 방식이라 사격하는 데 시간이 오래 걸렸다. 그러므로 밀집대형으로 전진해도 집중사격이 날아오는 순간은 한 번 내지 두 번이다. 진짜 승부는 백병전으로 판가름 난다. 그런데 어떤 군대든 촉장(蜀將) 관우(關羽)처럼 혼자 적진으로 뛰어들 수 있는 용사가 과연 몇이나 될까? 그러므로 이때까지만 해도 공격군이든 수비군이든 먼저 대형이 깨지는 편이 지는 것이었다. 이렇게 뻣뻣이 서서 걸어가는 공격형태가 완전히 사라진 것은 대포와 기관총이 맹위를 떨친 제1차 세계대전(1914년~1918년) 때였다.
적군의 대형을 허무는 중요한 임무는 먼저 기병대가 맡게 된다. 기동력이 뛰어난 기병대를 내보내 밀집대형의 측면 또는 약한 부분을 뚫고 들어가는 이 전술은 서양에서는 고대 마케도니아의 제왕인 알렉산드로스 1세[Alexandros Philhellene]가 개발했고, 카르타고의 명장 한니발(Hannibal)이 계승하여 로마의 군인 카이사르(Julius Caesar)에 의해 완성되었다.
그러나 동양에서는 양적으로나 질적으로 훨씬 강력하고 정교한 기병전술이 사용되었다. 중장기병은 고구려에만 있었던 것이 아니고 중국 북방의 유목민족인 흉노족(匈奴族)과 선비족(鮮卑族)도 중장기병대를 운영했으며 중국에서도 당대(唐代)까지는 군대에서 중장기병을 양성했고, 거란족(契丹族)의 요(遼)·여진족(女眞族)의 금(金)과 청(淸)·몽고족(蒙古族)의 원(元)도 모두 중장기병을 중시했다.
중장기병대는 밀집대형을 이루어 천천히 진격하여 적진의 모서리나 측면을 공략한다. 중장기병들이 적진에 충돌할 때에는 방진 또는 쐐기골 대형으로 창을 내밀고 부딪힌다. 고구려의 중장기병대는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군대나 로마의 기병대와는 비교할 수 없는 엄청난 위력을 지녔는데 그 비결은 말안장 밑에 다는 발받침인 등자(鐙子)였다. 서양에서는 8세기부터 보편화된 등자를 동양에서는 이미 오래 전에 사용하고 있었다. 그리고 최초로 중장기병의 장비에 등자를 포함시키기 시작했던 나라 역시 고구려였다.
고구려의 중장기병은 4미터가 넘는 장창을 어깨와 겨드랑이에 밀착시키고, 말과 기사의 갑옷과 체중에 달려오는 탄력까지도 모두 합하여 적진에 부딪혔다. 고구려군은 중국인 군대보다 더 길고 무거운 5·4미터에 9킬로그램까지도 나가는 장창을 내지르며 덤벼든다(다만 모든 창이 이렇게 길지는 않았을 것이다). 권투에서 잽과 페인팅 모션처럼 적군의 눈을 혼란시키는 화려한 창놀림과 함께 말이다. 물론 동양의 기병들도 서양의 기병들처럼 투창술(投槍術)을 전개하기도 하였다. 고구려군을 비롯한 동양의 기병들은 사실 등자를 사용하기 때문에 투창술의 위력도 더욱 강화되었다.
투창 공격은 원거리에서 적군을 제압하는 장점이 있다. 보병의 밀집대형과 충돌할 때도 여러 명의 기병이 빠르게 선회하면서 집중사격을 하고 빈틈을 노려 돌격조가 치고 들어가는 전술도 활용됐을 것이다. 장갑을 높이면 군마의 속도는 떨어지고, 속도를 높이려면 장갑을 가볍게 해야 하기에 장갑과 속도는 상극이다. 당나라의 기병대는 장갑보다는 속도를 선택했고 금나라의 군사들은 반대로 속도를 아예 포기하고 말에 두세벌의 갑옷을 껴입혀 그야말로 화살로는 쓰러뜨릴 수 없는 탱크를 만들었다.
두세벌까지 껴입지는 않았지만, 고구려의 중장기병도 상당한 장갑력을 발휘한다. 그런데 아무리 중장갑을 했어도 말은 속도가 있으므로 적군의 기병이 5미터나 되는 긴 창을 내지르며 50미터 이내로 들어오면 사격할 수 있는 기회는 한두 번밖에 되지 않는다. 비록 중장기병대의 장갑력이 아무리 강하다고 해도 보병에 비해 대형이 쉽게 허물어지는 약점이 있으므로 보병들은 진지 앞에 녹각이나 마름쇠 같은 장애물이나 함정을 설치, 적군의 기병들에게 치명상을 입힐 수 있는 사격지점을 확보하게 된다.
수비군의 대응전술이 만만치 않다고 여겨지면 공격군도 중장기병대가 보병과 충돌하기 이전에 가능한 수비대형을 동요시킬 필요가 있다고 판단하여 경기병대를 함께 출동시킨다. 기마민족의 상징처럼 된 환상의 기마술과 사격솜씨를 자랑하는 부대는 중장기병대가 아니라 이 경기병대다.
말 달리며 활쏘는 기술을 기사(騎射)라고 한다. 무용총(舞踊塚)의 수렵도에는 말을 타고 활로 사냥하는 벽화가 있고, 덕흥리벽화고분(德興里壁畵古墳)에는 표적을 세우고 활쏘기 연습을 하는 그림이 그려져 있다. 이 그림들을 보면 말을 탄 용사는 앞으로 사격을 하기도 하지만, 몸을 뒤로 돌리고 쏘기도 한다. 이 뒤로 돌려 활을 쏘는 방법을 서구 사람들은 파르티아 사법(射法)이라고 불렀다.
이 파르티아 사법 역시 등자 때문에 가능했다. 등자를 몰랐던 서구의 기사들은 말 달리며 활을 쏘는 동양 기병대의 솜씨에 경탄을 금치 못했다. 몸을 뒤로 돌려 쏜다는 것은 더욱이 꿈도 꾸지 못할 일이었다. 몽골군과 싸워 본 유럽의 기사들은 몽골군이 달아날 때 절대로 함부로 쫓지 말라고 신신당부를 했다. 달아나다가 몸을 돌려 날리는 그들의 화살에 엄청나게 당했기 때문이다.
조선왕조를 창업한 태조(太祖) 이성계(李成桂)도 왜구를 토벌하는 전쟁에서 여러 번 이 수법으로 적장을 사살했다. 이동목표를 쏠 때도 그렇고 자신이 이동하면서 쏠 때도 마찬가지지만, 표적이 계속 움직이므로 겨냥을 하거나 사격을 할 때면 조준점을 이동시킬 충분한 공간이 필요하다. 그런데 앞으로 쏘려면 말의 머리 때문에 방해를 받고 사각지대가 생긴다. 그러므로 말을 타고 사격할 때는 목표를 측면에서 뒤로 가도록 하고 쏘는 게 시야도 넓고 효율적이다. 신체 구조상으로도 앞으로 쏘기보다 뒤로 돌아 쏘는 경우가 사격 자세도 안정적이어서 명중률도 높다. 좌우간 이 기술 덕분에 기병들은 말을 타고 달리면서 360도 어느 방향으로든 화살을 날릴 수 있었다.
고구려인을 포함해서 한예족(韓濊族)은 아주 오래 전부터 활 쏘는 솜씨가 매우 뛰어났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한예족의 장기(長技)였던 신기(神技)의 궁술(弓術)은 맥궁(貊弓)이라는 활을 사용했기에 가능했던 측면도 있었다. 물소의 뿔로 만들어졌다는 맥궁의 전통은 조선왕조 시대에도 이어졌다. 당기기가 무척 힘든 이 활은 크기가 작아도 화살을 날리는 힘이 보통 강력한 게 아니다. 조선에서는 서로 상대방의 활시위를 당겨 보면서 누구 활이 더 센가를 가지고 힘자랑을 하는 풍습이 있었고, 명중률이 좋아도 활 힘이 약하면 일류 궁사로 쳐주지 않았다.
신기의 활 쏘는 솜씨와 기마술, 강력한 활로 무장한 경기병대는 적진의 주변을 돌며 화살을 날린다. 밀집대형의 약점은 언제나 측면과 후면이므로 경기병대도 이 곳을 주로 노렸을 것이다. 피로해진 적군의 대형이 빈틈이 생기면 중장기병대가 돌격한다. 경기병대가 비록 갑옷을 입지 않고 활 하나 이외에는 아무런 무기를 지니지 않아서 백병전 능력은 제로라고 해도 기동력은 우수하기 때문에 중장기병대는 경기병대를 쉽게 잡지 못한다. 그리하여 중장기병대는 반드시 경기병대의 엄호를 받아야만 적군의 대형을 부술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고구려의 군대 하면 흔히 기병을 연상하지만, 사실 기병들의 역할은 제한적이며 전투의 일부분만을 담당할 뿐이다. 어느 지역, 어느 민족에게서나 보병이 없는 군대는 없으며 보병의 불행은 흔하고 신분이 낮다는 것이다. 그러나 보병은 기병의 보조부대로만 존재한 것이 아니다. 기병의 전투력이 보병과 비교해 절대우위라는 생각은 상당한 오류이며 기병은 절대 단독으로 전투를 할 수가 없다.
중장갑을 하고 훈련이 잘 된 보병대열은 제 아무리 중장기병대라 하더라도 결코 만만히 볼 수 있는 상대가 아니다. 로마의 카이사르는 숙적 폼페이우스를 패퇴시킨 기원전 48년 파르살루스 전투에서 고참병만으로 구성한 2천여명의 중장보병으로 7천 기병대의 돌격을 가로막게 했다. 고구려군도 무모하게 기병부대만으로 싸우지 않았을 것이다. 기본적으로 기병·보병 혼합전술을 구사했을 것이며, 중장기병대가 단독작전을 구사하는 것은 위험하기에 경기병을 내보내 사격전을 하고 밀집대형을 이룬 중장보병대끼리 접전을 펼치면서 상대방의 빈틈을 노리다가 중장기병대에게 돌격을 감행하도록 하는 것이다.
적진을 돌파한 기병은 적진의 중심부로 진격할 수도 있고, 측면과 후면에서 수비군을 압박할 수도 있다. 하지만 어느 경우든 보병이 그 틈에 진격하여 적군을 완전히 허물어뜨려야 한다. 기병돌격은 일종의 쐐기다. 쐐기를 꽂았다고 벽이 허물어지지는 않는다. 금이 간 벽을 때려 벽을 허무는 최후의 일격은 보병이 담당한다.
기병이 적진을 돌파하고 중장보병이 적군을 밀어붙여 대형이 허물어지면 적군은 전투를 포기하고 달아날 것이다. 전투는 이기는 것 못지않게 적군에게 최대한의 타격을 가해 적군의 전력을 소모시키는 것이 중요하다. 완전히 이기려면 추격해서 적군에게 회복 불능의 타격을 주어야 한다. 도주하는 적군을 추격하여 섬멸하는 것은 기병의 몫이다. 빠른 속도로 뒤에서 쫓아가 헤집고 치는 것이므로 적군은 숨을 돌릴 여유가 없다. 기병이 빠르게 압박할수록 적군의 대형은 더 심하게 흩어진다. 훈련과 경험이 부족한 군대일수록 뒤도 돌아보지 않고 마구 달아나다가 대량살상을 당하는 것이다.
고구려는 풍부한 철광을 보유했던 나라로서 군인들의 무장에 있어서 백제나 신라보다 앞서고 병력이나 전술운영 능력에서 우위를 보였기에 예성강·한강 유역에 오직 공격만을 예상한 소규모 보루만을 설치하였다. 반면 백제나 신라는 고구려의 남침을 방어하기 위해 요새화된 산성과 장성을 많이 쌓았다.
● 군대와 전쟁의 나라 고구려
한국의 역사뿐만 아니라 세계의 전사(戰史)를 살펴봐도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대단한 전공(戰功)을 세웠던 을지문덕(乙支文德)은 명림답부(明臨答夫)·광개토호태왕(廣開土好太王)·장수태왕(長壽太王)·연개소문(淵蓋蘇文) 등과 더불어 후대에 고구려를 우리 민족의 역사에서 가장 막강한 국력을 과시했던 나라로 인식시켰던 인물들이었다.
우리가 로마(Rome) 제국을 통해 알 수 있듯이 고대 국가들 가운데 국력의 막강함을 평가할 수 있는 기준이 되는 것은 바로 군사력이다. 로마 제국은 강한 군사력이 있었기 때문에 괄목할 만한 영토 확장을 이룩할 수 있었고 이는 오랜 세월 로마에 경제적인 이득을 가져다주었다. 고구려 역시 세월이 지나며 잘 단련된 군사력을 바탕으로 영토를 확장해 4세기에는 동아시아 최고의 강대국 지위에 오를 수 있었다.
중국인들이 보기에 고구려 사람들은 어려서부터 기마술(騎馬術)과 궁술(弓術)을 익히고, 의자에 걸터앉아 외국의 사절을 맞이하거나 설 때는 꼭 팔짱을 끼고 턱을 들어 한껏 거드름을 피우고 인사할 때는 한쪽 무릎을 꿇은 채 구령을 붙여 인사하며, 평소에도 천천히 걸어가는 법이 없어서 걸음걸이가 달음박질 치는 것 같다고 하였다. 이런 기록들은 고구려의 사회 분위기가 상무적이며 무사풍에 젖어 있었음을 알려준다.
그렇다면 고구려의 군대는 전쟁이 일어났을 때에 어떻게 구성되었으며, 어떤 방식으로 싸웠을까? 황해도 안악군에 있는 안악 3호분의 행렬도(行列圖)에 그 단서가 남아 있다. 무덤의 주인공은 수레를 타고 어디론가 가고 있는 중인데 그 주위를 고구려의 완전무장한 군인들이 에스코트하고 있는 모습의 그림이다. 벽화는 너무나 사실적이어서 기병·보병·궁수·도부수·군악대·의장대 등 다양한 병사들의 무기와 장비를 그대로 묘사했을 뿐 아니라 이들 간의 수적 비율까지도 맞추어 놓았다. 이 벽화에 등장하는 기병과 보병의 비율은 1대3 정도인데, 이는 사료에 등장하는 기병과 보병의 비율과 일치한다. 그러니 사진이나 다름이 없다.
이 무덤의 주인공은 묵서명(墨書銘)을 통해 중국인 망명객인 동수(冬壽)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자치통감(資治通鑑)에 의하면 동수는 고구려의 숙적이던 전연(前燕)의 고위관료였는데, 서기 336년에 고구려로 망명했다가 357년에 사망했다고 전한다. 그러나 무덤의 주인공을 동수가 아니라 미천왕(美川王) 혹은 고국원왕(故國原王)으로 보는 이론(異論)도 있다. 그 유력한 근거가 벽화에 나타나는 주인공의 복장, 특히 머리에 쓴 관이 고구려 국왕이 썼다는 백라관(白羅冠)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주인공이 누구든 간에 이 무덤의 주인공이 국왕이나 한때 국왕과 거의 동렬에 선 귀족층의 인물임에는 틀림없다. 그리고 국왕이든 고급귀족이든 그들이 거느리는 부대의 구조는 기본적으로 같았던 게 분명하다. 그러니 그림 속의 군대는 고구려가 중원 왕조와 일전을 벌이던 고국원왕에서 장수태왕(長壽太王)대, 즉 4~5세기의 고구려군 편제를 보여준다는 점에는 틀림이 없다.
고구려의 중장기병(重裝騎兵)은 말과 사람이 갑옷으로 중무장을 한다. 갑옷은 미늘갑옷으로 가죽편에 철판을 댄 미늘을 가죽끈으로 이어 붙인 것이다. 투구, 목가리개, 손목과 발목까지 내려덮는 갑옷을 입으면 노출되는 부위는 얼굴과 손뿐이다. 발에도 강철 스파이크가 달린 신발을 신는다. 말에게도 얼굴에는 철판으로 만든 안면갑(顔面甲)을 씌우고, 말갑옷은 거의 발목까지 내려온다. 벽화의 기병은 방패가 없는데, 신라의 중장기병을 형상화한 기마형 토기는 방패도 들고 있다.
최강의 공격력과 장갑을 자랑하는 중장기병의 주 임무는 적진돌파와 대형 파괴다. 중장기병은 밀집대형 혹은 쇄기꼴 대형으로 기마장창(騎馬長槍)을 앞으로 내밀고 돌격하여 적진을 허문다.
기병들의 장창은 보병들의 장창보다 길고 무겁다. 기마장창을 한자로는 삭(槊)이라고 한다. 중국의 삭은 보통 4미터 정도인데, 고구려군은 길이 5·4미터에 무게 6~9킬로그램 정도 되는 삭을 사용하기도 했다.
기병의 또 다른 무기는 칼이다. 고구려군의 칼은 그림으로 보아서는 직도(稙刀)인지 칼날이 약간 휘어진 곡도(曲刀)인지 판별하기가 곤란하다. 유물 중에는 당나라에서 유행하던 곧은 환두대도(環頭大刀)가 많다.
기병들이 쓰는 칼 가운데에는 끝이 약간 넓고 뭉특하게 보이는 것도 있는데, 이것은 끝부분이 무거워져 내려치고 베는 데에 유리하다. 말을 타고 휘두르는 것이므로 찌르기는 포기하고 치고 베는 데에 중점을 둔 무기이다. 이런 칼은 적의 대형을 돌파하고 난 다음의 백병전(白兵戰) 때, 도주하는 적군을 추격하여 뒤에서 내리치면 아주 효과적이다.
중장기병이 활을 사용하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긴 갑옷이 사격할 때는 불편하므로 활은 개인적으로 근접전(近接戰)에서 적군을 쓰러뜨릴 때나 갑옷을 벗고 경기병(輕騎兵) 전술로 전환했을 때, 주로 사용했고 중장기병의 집단전술에서는 사격이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지 않았던 것 같다.
중장기병은 다른 병졸보다 신분이 높다. 말과 갑옷은 매우 비싼 장비였고, 기마술(騎馬術)은 상당히 전문적이고 오랜 훈련을 요구하기 때문에 지배층이 아니면 중장기병이 될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병사 개개인의 전투력도 중장기병이 탁월하게 높았다. 아마도 중장기병이 전장(戰場)에 나갈 때는 최소한 군마(軍馬)에게 먹이를 주고 말발굽을 손질해 주는 사람이 있어야 하기에 종자를 데리고 나갔을 것이다. 쇠의 약점은 녹이므로 갑옷도 매일 닦고 기름치고 조여야 했다. 그런데 철판을 연결한 가죽끈은 기름에 절면 쉽게 약해진다. 그러니 갑옷은 상당히 섬세하게 손질하고 관리해야 했을 텐데, 사람 갑옷의 몇 배가 되는 말갑옷까지 있었다.
중장기병의 단점은 기동력과 고비용이다. 말갑옷의 무게만 40킬로그램이 넘으며, 병사의 무장도 20킬로그램은 족히 된다. 그래서 중장기병은 속도와 이동거리에 제한을 받는다. 특히 도주하는 적군을 추격할 때 낮은 기동력은 안타까운 단점이 된다. 전투에서 적군에게 최대한의 손상을 가할 수 있는 때가 바로 이 때이기 때문이다. 적에게 회복 불가능한 타격을 입히면 전쟁은 그것으로 끝나지만 추격전의 기회를 놓치면 전력을 회복한 적군은 다시 공격해 올 것이다.
고비용과 전문성 때문에 중장기병은 병력 수에 제한을 받는다. 그래도 초원이라는 지리적 여건과 만주 일대의 풍부한 철광 덕분에 고구려를 비롯하여 북방의 기마민족은 중국에 비해 훨씬 많고 우수한 중장기병을 확보할 수 있었다.
기병의 중요한 역할은 수색·정찰·적진교란·적진돌파와 대형파괴, 추격이다. 그런데 중장기병은 느려서 돌파와 대형파괴 이외의 항목에서는 효용성이 떨어진다. 그래서 기병을 사용할 때는 중장기병과 장갑(裝甲)을 가볍게 한 경기병(輕騎兵)을 사용해야 효과적이다. 그런데 고구려군의 병종(兵種)에서 가장 애매모호한 부분이 이 경기병이다.
경기병이 있었던 것은 분명한데, 이들의 실체가 분명하지 않다. 벽화에는 갑옷을 전혀 입지 않고, 말에는 화살만 장착한 기병도 등장하는데, 과연 전투 때에도 이런 무장과 장비로 참전했는지는 의문이다.
장창(長槍)을 든 경기병은 대동강 하구의 남포시에 있는 약수리 벽화에 등장한다. 장창을 든 경기병이 중장기병대의 앞에서 행군하는데, 장창에 군기(軍旗)가 달려 있어 이들의 무장이 일반 무장 상태인지 의장대인지 파악하기가 어렵다.
하지만 정통 기마민족의 후예로 수백년 후에 세계를 정복하는 몽골 제국 군대의 경우도 그들의 자랑인 경기병대는 갑옷을 전혀 입지 않았다. 그 이유는 그들의 주 임무가 사격이었기 때문이다. 최고의 기동력과 놀라운 궁술(弓術) 능력으로 그들은 중장기병의 돌격을 엄호하고, 적진을 초토화했다. 특히 적진의 측면과 후면으로 돌아서 날리는 화살은 적진을 교란하고 대형을 허무는 데에는 가공할 효력이 있었다. 그렇다면 고구려군의 경기병대 역시 갑옷을 입지 않았을 가능성도 높다.
경기병의 약점은 백병전이다. 그러나 이것은 그리 큰 문제가 아니다. 중장기병이든 보병이든 이들을 따라잡을 수가 없고, 괜히 공격하다간 화살세례를 받는다. 이들에 대한 화살 공격도 별로 유용하지는 않다. 장갑은 없지만 대신 피할 수 있는 능력이 극대화되어 있다. 원거리에서 빠르게 움직이는 이들을 화살로 맞추는 일은 결코 쉽지 않다. 더욱이 원거리 사격은 곡사이며, 화살의 위력은 급격히 떨어진다.
경기병의 진정한 약점은 백병전 중에서도 일부 상황 즉 적진돌파와 충격작전을 감행할 수 없다는 사실일 것이다. 그 임무는 중장기병만이 감당할 수 있었다.
안악 3호분 벽화 좌측 상단과 하단에는 중장갑을 한 보병의 행렬이 있다. 갑옷은 기병과 마찬가지로 미늘갑옷인데, 소매가 반팔이고 상의만 입었다. 중장기병의 갑옷은 보병이 입기에는 너무 무겁기 때문이다. 그들은 한 사람의 몸을 겨우 가리는 가늘고 긴 방패와 갈고리 모양의 창인 예과(銳戈)로 무장했다. 보병 개개인의 전투력이 기병보다 떨어지고 기동력이 낮지만, 산악지형에 취약한 기병과는 달리 어떤 지형에서든 위력을 발휘한다.
중장보병(重裝步兵)의 밀집대형은 수비와 공격, 대보병전(對步兵戰)이나 대기병전(對騎兵戰) 어느 경우든 상당한 위력을 발휘한다. 잘 훈련된 밀집보병대는 중장기병도 함부로 돌파할 수 없다. 이들의 예과는 기병을 마상(馬上)에서 떨어뜨리는 데 매우 효과적이다.
기병과 달리 보병은 무장과 무기의 종류가 다양하며 한 사람이 오직 한 가지 무기만 들었다. 그것은 갑옷과 무기가 부족하며, 걸어다녀야 하는 보병의 특성상 한 사람이 여러 가지 무기를 착용하기가 곤란했던 탓도 있겠지만, 그만큼 보병의 역할이 세분화·전문화되었기 때문이라고 볼 수도 있다.
행렬도를 보면 행렬의 바깝 부분은 중장보병과 기병이 서고 안쪽과 후미에는 경보병과 경기병대가 선다. 이를 전투대형으로 즉 횡대로 환원하면 경보병(輕步兵)은 중장보병의 뒷선에 배치한다는 뜻이 되겠다.
경보병대의 주력은 도끼를 멘 도부수(刀斧手)로서 갑옷을 전혀 걸치지 않았는데, 전투력과 신분이 낮다는 증거다. 그들은 길을 내거나 목책 혹은 녹각과 같은 방어기구를 설치할 때, 공성구(攻城具)를 만드는 사역(私役)에 동원된다. 그러나 이들의 무기인 무거운 도끼는 내려치는 힘이 매우 강해 투구를 쪼개고 미늘갑옷을 찢는 데 매우 효과적이다. 이들은 중장보병의 이선에 서 있다가 갈고리 창에 걸려 넘어진 기병이나 부상으로 넘어진 중장보병을 공격했을 것이다.
어깨에 활을 메고, 허리에 전통(箭桶)을 찬 병사들은 바로 궁수(弓手)다. 동양에서 가장 유명했던 활은 동이족(東夷族)의 비멸병기 맥궁(貊弓)이었다. 기병용은 보통 80센티미터, 보병용은 120~127센티미터 정도였는데, 이 활은 작아서 다루기가 편리하며, 크기에 비해서 위력이 대단하다. 위력은 사수(射手)의 힘에 따라 큰 차이가 나지만 가까운 거리에서는 갑옷도 궤뚫는다. 고구려의 용장 고노자(高奴子)가 293년 신성(新城)에서 모용외(慕容廆)의 군대를 격퇴할 때, 화살 한 발로 적병과 군마와 안장을 함께 궤뚫었다고 한다.
궁수는 공격 때는 아군을 엄호하고, 수비 때는 돌격해 오는 적군을 공격한다. 특히 쳐들어오는 적군의 중장기병이나 보병을 저지하는 데는 궁수의 역할이 절대적이다. 적군이 원거리에 있을 때는 진형의 앞에 나가서 혹은 중장보병의 엄호를 받으면서 사격하고 적군이 접근하면 이선으로 후퇴하면서 사격한다.
공격군도 엄호사격을 받으면서 전진해 오므로 사격전에서 궁수를 보호하기 위해 이들에게도 갑옷을 입혔다. 단 사격을 해야 하므로 필을 자유롭게 하기 위해 이들의 갑옷은 반팔인 중장보병과 달리 팔이 아주 없다. 투구도 쓰지 않았는데, 이는 머리를 자유롭게 해서 시야를 넓히기 위해서인 듯하다. 투구는 무거워서 고개를 잘 돌리지 못하게 되고 시야도 가려 좌우의 시야를 좁히는 단점이 있기 때문이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