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수(隨) 문제(文帝)의 등극과 남북조시대(南北朝時代)의 통일
6세기말 중원 대륙은 여전히 남북조(南北朝)로 갈라져 있었는데, 북쪽에서는 유목민족인 돌궐(突厥)과 거란(契丹)이 세력을 떨치고 있었다. 고구려는 남북조의 국가들과 등거리 외교를 벌이고 유목민족들과 힘을 겨루며 옆구리에 붙어 있는 말갈(靺鞨)을 거느렸다. 동북아시아는 이때 팽팽한 세력 균형을 이루고 있었다. 이런 가운데 북주(北周)가 575년 북제(北齊)를 아우르고 중국의 북쪽지역을 거의 통일하였다.
북주의 개국공신(開國功臣)인 양충(楊忠)은 문제(文帝) 우문태(宇文泰)에게 공로를 인정받아 수국공(隨國公)이라는 공신 칭호를 받았고, 양충이 죽자 그의 첫째 아들인 양견(楊堅)이 작위를 이어받았다. 양견은 무장(武將)으로서 북주의 기반을 다지는 데에 수훈(殊勳)을 세우고 무제(武帝) 우문옹(宇文邕) 재위기에 자기 딸을 태자비(太子妃)로 들여앉혔다. 무제의 뒤를 이어 즉위한 양견의 사위인 선제(宣帝) 우문윤(宇文贇)은 용렬하고 어리석은 황제였기에 폭정을 일삼고 주지육림(酒池肉林)에 빠져 백성들의 원성을 샀다. 양견은 선제를 끼고 모든 권력을 휘어잡아 정사(政事)을 제멋대로 처리했다.
선제가 죽자 양견의 외손자인 정제(靜帝) 우문연(宇文衍)이 제위에 올랐다. 양견은 한점 꺼릴 것 없이 국정을 장악하고 세력을 키워나갔다. 581년 2월 양견은 어린 정제를 협박하여 제위에서 물러나게 하고 스스로 황제가 되어 국호를 수(隨)로 정했다. 그가 제위에 오를 때 일부 반대세력이 없었던 것은 아니나 큰 어려움은 없었다. 그만큼 북주가 나약하였고, 양견이 오랫동안 자기 세력을 키우며 신망을 얻었기 때문이다.
수황(隨皇) 문제(文帝) 양견(楊堅)은 북주(北周)의 흔적을 싫어하여 북주의 수도(首都)였던 장안(長安)을 파괴해버렸다. 그리고 원래 위치를 약간 틀어서 새 수도를 건설한 뒤 이름도 장안에서 대흥(大興)으로 바꾸었다. 문제는 부역을 감면하고 법령을 간소하게 만들었으며, 제도를 정비하는 등 선정을 베풀어 민심이 상당히 안정되었다. 그는 삼국시대(三國時代) 이후 약 400년 동안 온갖 부역과 형벌에 시달려온 사람들에게 새로운 희망을 안겨주었다.
문제는 또 돌궐의 침략에 대비하여 북쪽의 장성을 수리하였다. 돌궐에서 내분이 일어나 585년에 동돌궐(東突厥)과 서돌궐(西突厥)로 분열되자 수는 서돌궐이 동돌궐을 공격하도록 부추겨 동돌궐을 굴복시켰다. 이제 강남에서 수(隨)와 대적할 수 있는 유일한 왕조는 진(陳)뿐이었다.
문제가 대신들을 불러모아 진국(陳國)을 칠 대계를 의논하였다. 이에 상서좌복야(尙書左僕射) 고경(高熲)이 이렇게 말했다.
“진국(陳國)을 치려면 먼저 진국이 저장해두고 있는 식량부터 없애버려야 합니다. 강남의 집과 식량창고들은 거의 참대나 볏짚으로 되어 있기에 불만 놓으면 잿더미가 될 것입니다. 식량이 떨어지면 그들이 어찌 싸울 수 있겠습니까? 그들이 벼 수확을 할 때 우리는 군사를 풀어 그들을 교란하고, 그들이 병력을 집중시키면 우리는 군사를 거두어들입니다. 몇 번만 이렇게 거듭한다면 그들은 우리가 진짜로 싸우려 하지 않는 것으로 알고 방비를 늦추게 될 것입니다. 그때에 우리가 기회를 봐서 장강(長江)을 돌파한다면 강남 땅의 절반은 우리 것이 될 것입니다.”
문제는 이 말을 듣고 몹시 기뻐하며 군사를 풀어 강남을 교란하도록 하는 한편, 개봉자사(開封刺史) 양소(楊素)에게 전쟁에 쓸 배를 정비하여 강을 건널 준비를 하라고 명령하였다.
이때 진국(陳國)의 군주인 후주(後主) 진숙보(陳叔寶)는 대대적으로 공사를 벌여 정자와 누각을 건축하고, 옥석으로 깐 층계와 황금으로 된 벽으로 궁전을 치장하고는 온종일 자기가 사랑하는 장귀비(張貴妃)·공귀빈(孔貴嬪)에게 파묻혀 지냈다. 그는 누런색 옷을 입은 사람들이 담벼락을 둘러싸고 있는 꿈을 꾸었다. 그러자 사람들을 시켜 담벼락 부근의 귤나무들을 베어내게 하였다. 꿈에 여우를 보고는 요귀의 작당이 틀림없다고 하면서 자기가 절간의 노예로 팔려가는 광대극을 벌이고는 겨우 재앙을 면했다고 좋아했다.
588년 10월에 문제는 후주의 죄악을 낱낱이 폭로하는 조서(詔書)를 내리고 그것을 30만부나 베끼게 한 다음 강남의 여러 지방에 살포했다. 그리고 둘째 아들인 진왕(晋王) 양광(楊廣)을 대원수(大元帥)로 임명해 50만 대군을 거느리고 진국(陳國)을 정벌하게 했다.
급보를 알리는 글이 눈송이처럼 건강(建康)에 날아들자 당황한 후주는 대신들을 모아놓고 대책을 의논했다. 도관상서(都官尙書) 공범(共犯)이 짐짓 아무렇지 않다는 듯 말했다.
“장강은 예로부터 천연요새로 알려져 있으므로 날개가 돋치지 않는 한 수나라의 군사들이 이 강을 건널 수는 없을 것입니다. 이것은 변방을 지키고 있는 장령들이 상금을 타먹기 위해서 적국의 정세를 거짓으로 보고한 것이니, 그 몇 놈의 목을 잘라 버린다면 다시는 거짓말을 꾸며대지 못할 것입니다!”
미련한 후주는 공범의 말에 기가 살아나서 가슴을 쭉 내밀며 머리를 쳐들고 이렇게 말했다.
“그 말에 일리가 있구나! 건강은 자고로 제왕의 도읍이었으니 하늘의 명을 받고 황제가 된 짐(朕)은 두려울 게 없다. 이전에 북제(北齊)가 세 번이나 쳐들어왔으나 매번 패배했고 북주(北周)도 두 번이나 침입했으나 두 번 모두 실패했거늘 오늘 하잘것없는 양견이 다 무엇이냐!”
589년 정월이 되자 하약필(賀若弼)과 한금호(韓擒虎)가 인솔하는 수군(隨軍)의 선봉부대가 빠른 속도로 장강을 건너 건강성을 포위했다. 그 때 건강성에는 전투가 가능한 진국(陳國)의 병력이 10만명이나 있었다. 게다가 성의 지세가 험준하여 조직력을 잘 정비하고 적극적으로 수비만 했다면 건강성은 적군에게 쉽사리 함락되지 않을 수 있었다. 그러나 적병들이 성 밑에 들이닥치자 후주는 눈물만 흘릴 뿐 아무런 대책도 세우지 못했다. 이 때 표기장군(驃騎將軍) 소마가(蕭摩訶)가 수나라의 군사들이 발을 튼튼히 붙이기 전에 즉시 군대를 출동시켜 격퇴시켜야 한다고 제의했다. 공범도 후주에게 “신(臣)은 군대를 출동시켜 결전을 벌이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합니다. 싸움에서 죽는다 하더라도 청사(靑史)에 이름을 남길 수 있지 않겠습니까?”하고 말했다.
후주는 마침내 출전을 허락했고, 소마가는 중랑장(中郎將) 임충(任忠)과 함께 진군(陳軍)을 이끌고 성 밖에 나가 결전을 벌였다. 그러나 훈련이 제대로 안 된 진군(陳軍)의 병사들은 싸움이 시작되자마자 수군(隨軍)의 한 번 공격에 대열이 무너지며 꽁무니를 뺐다. 임충은 수장(隨將) 한금호에게 투항하여 건강성의 정문인 주작문을 통과하는데 도움을 주었다. 진국(陳國)의 문무백관들은 저마다 꽁무니를 빼고 후주만은 여전히 궁전에 앉아 승리의 소식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수군(隨軍)이 성 안으로 쳐들어온 것을 뒤늦게 알고 겁에 질려 보좌에서 뛰어내려 후당에 달려가 장귀비와 공귀빈의 손을 잡고 궁전에서 빠져 나가려고 했다. 그들이 경양전에 있는 말라빠진 한 우물가에 이르렀을 때 앞에서 함성이 울려왔다. 더는 빠져나갈 길이 없다고 생각한 후주는 두 명의 첩과 함께 우물 속으로 뛰어들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정월 스무 이튿날에 진왕 양광이 건강에 입성함으로써 진국(陳國)은 수국(隨國)의 침략을 받은 지 넉달만에 멸망하게 되었다.
문제(文帝) 양견(楊堅)은 검소한 인물로 알려져 있다. 그는 관중(關中)에 흉년이 들어 백성들이 겨에 콩가루를 섞어 먹는 것을 알고 황족들 뿐만 아니라 대신들까지 재해가 끝날 때까지 술과 고기를 먹지 못하도록 엄명을 내렸다. 또 셋째 아들인 진왕(秦王) 양준(楊俊)이 수하의 사람을 사주하여 고리대를 놓게 하고 협잡을 일삼게 하여 많은 하급관리와 백성들의 재산을 탕진시키고, 궁전을 화려하게 지어 외국에서 공물로 바친 향료를 벽에 바르는가 하면 황금으로 층계를 장식하고 궁전의 벽마다 체경(體鏡)을 걸었으며, 수많은 미녀들을 불러모아 황음무도(荒淫無道)한 생활을 즐기는 등 국법을 어기기를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사치스러운 행동을 일삼자 문제는 양준을 파직하고 감옥에 가두게 하여 음식도 대주지 못하게 했다. 대장군(大將軍) 유승(劉昇)과 상서우복야(尙書右僕射) 양소(楊素)가 양준의 죄를 사면해줄 것을 권유했으나 문제는 듣지 않았고 결국 양준은 병을 얻어 죽고 말았다. 문제는 진국(陳國)을 정벌할 때 얻은 전리품을 공로가 있는 신하들에게 나누어주지 않았고 진국(陳國)의 영토를 떼어 신하들에게 식읍(食邑)으로 주지도 않았으며 약탈도 금지시켰다.
진국(陳國)의 멸망으로 중원 천하는 이제 수국(隨國)의 것이 되었다. 백제(百濟)의 위덕왕(威德王)은 이 사실을 알게 되자 수국(隨國)에 사신(使臣)을 보내 중원 통일을 축하하고 고구려(高句麗)가 차지하고 있는 요동(遼東) 지역을 정벌해달라고 요청했다. 이 사실에 대해 단재(丹齋) 신채호(申采浩) 선생은『을지문덕전(乙支文德傳)』제3장에서 “저 신라와 백제는 순망치한(脣亡齒寒)의 이치를 생각지도 않고 수국(隨國)에 고구려 침벌(侵伐)하기를 청하러 가는 사자(使者)가 길 위에 연속하였으며, 고구려의 동정을 염탐하는 간첩들이 사방에 늘어섰다…… 아, 슬프다. 형제가 집안에서 다투다가 감정이 상하여 밖의 도적을 청해 와서 보복하려는 것은 진실로 더할 수 없이 애석한 일이다”고 비판하였다.
그 무렵에 동돌궐의 한 세력인 계민가한(啓民可汗)이 수국(隨國)에 투항하여 문제(文帝)는 중국 북방의 초원지대도 자국의 세력권에 거의 편입시켰다. 이제 남은 것은 고구려였다. 문제는 동방의 맹주를 자처하고 있는 고구려를 복속시키지 않고서는 수국이 진정한 ‘천하의 중심’으로 인정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고구려를 상대로 전쟁을 일으킬 명분을 만들려고 골몰했다.
● 영주(營州) 공격
홍양호(洪良浩:1724년~1802년)의『해동명장전(海東名將傳)』에는 저자가 평양에서 전해지는 전설(傳說)을 통해 을지문덕이 석다산(石多山)에서 수련했다는 이야기가 실려 있다. 석다산에는 태학(太學)의 교수를 지내다가 은퇴하고 산 속에서 초막 한 채를 짓고 살아가던 나이 1백세가 넘은 학자이며 도인(道人)인 고박아당(高朴兒堂)이 있었다고 한다. 을지문덕은 고박아당을 찾아가 자신을 제자로 거두어주기를 간청했다. 그러나 고박아당은 자신이 곧 선계(仙界)로 들어가야 할 몸이기 때문에 속세(俗世)의 사람과 인연을 맺을 수 없다면서 거절했다.
그런데 어느 날, 좌정(坐定)한 채로 참선(參禪)에 들어간 고박아당은 자신도 모르게 속세의 경계를 넘어 선계의 아름다운 풍광을 보고 있었다. 뭉실하게 말린 잎들이 달린 가지를 사방으로 내뻗은 나무들이 숲을 이루고 있었는데, 그 가운데 오색구름이 피어오르고 만 가지 꽃잎이 바람을 타고 흩날렸다. 어느새 은은한 달빛이 하늘을 가득 메우고 있고, 그 틈에서 별들이 속삭이고 있었다. 서늘하면서도 따뜻한 기운이 좋아서 두 팔을 벌리고 있는데, 갑자기 사방이 깜깜해지더니 날개가 달린 커다란 말이 하늘을 유영해 갔다. 그 때 천마(天馬)의 뒤를 따라 오른손에는 깃발을 들고 왼손에는 화반(花盤)을 든 옥녀(玉女)들이 헤엄쳐 가는데, 그 모습을 보고 기분이 좋아진 고박아당은 바람을 타고 그녀들의 뒤를 따랐다. 그러나 갑자기 섭선(葉扇)을 든 선인(仙人) 하나가 나타나 그의 앞을 가로막으며, “그대는 아직 속세에 있으니 이곳으로 들어올 수는 없으므로 어서 돌아가시오!”라고 소리치며 섭선으로 고박아당을 내리쳤다. 고박아당은 크게 놀라 참선에서 깨어났는데 정신을 차려보니 자신이 꿈을 꾼 것을 깨달았다.
고박아당은 초막 밖에서 무릎을 꿇고 앉아 있던 을지문덕을 바라보며, “내가 선계(仙界)에서 거부당한 이유는 아직 속세에서 할 일이 남았기 때문이로구나” 하고 중얼거리고는 을지문덕에게 자신이 알고 있는 모든 것을 가르쳐 주기로 하였다. 을지문덕은 꼬박 삼년 동안 석다산에서 고박아당으로부터 천문·지리·병법을 비롯한 학문과 무예를 배웠다. 고박아당의 해박한 지식과 깊이 있는 식견, 그리고 진리를 추구하는 열정은 을지문덕의 내면에 잠재되어 있던 능력이 향상될 수 있도록 도움을 주었다. 유능한 길잡이는 어떤 방향으로든 목적지를 찾아낼 수 있고, 어떤 상황에서도 당황하지 않고 대처할 수 있는 순발력과 담력이 있었다. 을지문덕은 놀라울 정도로 빠르게 스승의 가르침을 흡수해서 자신의 내면을 채웠다. 제자의 일취월장(日就月將)하는 모습은 어느새 스승의 삶에 활력소가 되고 있었다.
고박아당이 자신이 알고 있는 모든 것을 가르쳐 주었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 을지문덕은 어느새 약관의 청년이 되어 있었다. 그의 맑고 총기가 흐르는 눈에는 나이답지 않은 진중함이 서렸고, 행동거지에 기품(氣品)과 절도(節度)가 풍겼다. 고박아당은 을지문덕에게 “이제 네가 세상으로 나갈 때가 된 듯하구나. 이제 당대에 너를 능가할 자는 없도다. 네가 칼을 들면 군사들이 힘을 얻을 테고, 네가 붓을 들면 온 백성이 편안해지리라”면서 자신이 태학에서 가르침을 주었던 국내성주(國內城主) 환당(桓堂)에게 을지문덕을 천거하는 서찰을 써 주었다.
고박아당이 홀연히 사라진 뒤 을지문덕은 스승의 명을 받들어 국내성으로 갔다. 국내성주 환당은 을지문덕을 보자 한눈에 반해 버렸다. 환당은 을지문덕을 파격적으로 자신의 부관으로 삼았다. 을지문덕은 환당의 휘하에서 국내성의 치안을 유지하고 민생을 살피는 일을 맡았다. 을지문덕은 모든 일들을 추호도 사심없이 공명정대(公明正大)하고 합리적으로 처리했다. 이로 인해 백성들의 칭송이 자자해지자, 환당은 태왕에게 품의(稟議)하여 그에게 소형(小兄)의 관급(官級)을 받게 했다. 이로써 을지문덕은 본격적으로 관로에 발을 들여 놓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태왕명을 받고 변경 순시에 나선 병마원수(兵馬元帥) 강이식(姜以式)이 잠시 국내성에 들렀다. 환당은 강이식이 국내성에 머무는 동안 을지문덕으로 하여금 그를 보좌하게 하였다. 강이식은 을지문덕과 대화를 나누면서 그가 병법과 전략에 능통한 인재라는 것을 한 눈에 알아보았다. 강이식은 을지문덕을 자신의 후계자로 삼기로 결심했다.
590년 수황(隨皇) 문제(文帝) 양견(楊堅)은 문하성(門下省) 판관(判官) 소적기(邵積基)를 고구려의 평양성(平壤城)으로 보내 영양태왕(嬰陽太王)에게 다음과 같은 내용의 국서(國書)를 전하게 했다.
‘짐(朕)이 천명(天命)을 받아 온 천하를 사랑하고 기르는 가운데, 고구려왕(高句麗王)에게는 바다 한편 구석을 맡겨서 조정의 교화를 선양하여 백성들로 하여금 저마다의 뜻을 이루게 하였다. …… 태부(太府)의 공인(工人)은 그 수가 적지 않으니, 고구려왕이 정녕 필요하다면 짐에게 요구하면 될 일이다. 그런데 지난해에는 몰래 재물을 가지고 와서 이익으로 노수(弩手)를 움직여 사사로이 데리고 달아났다. 이 어찌 병기(兵器)를 수리하려는 의욕이 밖으로 소문이 날까 두려워하였기 때문에 훔친 것이 아니라 하겠는가?
때때로 사자(使者)를 보내어 번국(蕃國)을 위무한 것은 본래 그대들의 인정(人情)을 살펴 정치하는 방법을 가르쳐 주고자 함이었다. 그런데 왕(王)은 사자를 텅 빈 빈관(賓館)에 앉혀 두고는 삼엄한 경계를 통해 눈과 귀를 막아 듣고 보지 못하게 했다. 무슨 음흉한 계획이 있기에 남에게 알리기를 꺼리고 관리를 막으면서까지 그 살핌을 두려워 하는가?
또한 자주 기마병(騎馬兵)을 보내 변경 사람을 살해하고, 여러 차례 간계를 부려 사설(邪說)을 지어 냈으니, 애초부터 사신을 영접할 마음이 없었도다. …… 왕은 요수(遼水)의 폭이 장강(長江)과 견줘 어떠하며, 고구려(高句麗)의 인구가 진(陳)과 비교하여 어떠하다고 생각하는가? 짐이 만약 품어 기르려 하지 않고 왕의 지난 허물을 문책하려 했다면 한 명의 장수(將帥)에게 명하면 그만이지, 어찌 많은 힘이 필요하겠는가? 다만 고구려왕이 스스로 깨우쳐 새로워지길 간절히 바랄 뿐이니, 마땅히 짐의 뜻을 알아서 스스로 많은 복을 구하라.”
이 국서에는 문제의 자기 과신과 공갈과 회유가 어우러져 있다. 문제는 이 글에서 고구려(高句麗)가 수국(隨國)에게 저지른 죄를 몇 가지로 나누어 질책하고 있다. 첫째는 고구려가 말갈(靺鞨)과 거란(契丹) 등 여러 부족을 핍박하여 그들이 수국에 귀복하는 것을 방해하고 있다는 것이다. 둘째는 고구려에서 말과 수레를 준비하는 데에 많은 기술자를 투입하고 있는데 왜 실정을 보고하지 않느냐는 것이다. 셋째는 지난날 몰래 재물을 풀어서 쇠뇌를 제작하는 전문가를 데리고 간 일을 꾸짖었다. 넷째는 수국에서 온 사신을 빈 관사에 앉혀놓고 꼼짝도 못하게 하여 아무런 사정도 살피지 못하게 하였다는 것이다. 다섯째는 군사를 풀어서 수국 변방의 사람들을 죽이고 외국인을 고용하여 유언비어(流言蜚語)를 퍼뜨렸다는 것이다. 여섯째는 첩자를 수국에 보내 몰래 정보를 수집했다는 것이다.
문제가 고구려 측에 보낸 국서를 보면 고구려는 겉으로는 사신를 보내 수국과 우호관계를 맺으려 했으면서도 끊임없이 전쟁준비를 서둘렀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수국의 사신이 왔을 때 고구려의 실정을 하나도 알아내지 못하게 통제하였고, 또 수국에 첩자를 보내 사정을 알아보고 그 쪽의 무기 기술자를 빼내오기도 하면서 때로는 변방지대에 들어가서 교란작전을 폈다는 사실도 드러난다. 고구려는 결코 만만하게 심복하지 않으면서 수국을 상대로 일전을 벌일 작정이었다. 고구려는 단독으로 일을 추진한 것이 아니라 말갈·거란과의 연합전선을 형성하여 진행시키려 하였고 돌궐까지 끌어들이려는 계획을 세웠다.
수국에서 안하무인(眼下無人)격으로 오만방자한 태도를 보이자 영양태왕은 분노가 머리 끝까지 치밀어올랐다. 당장 무례한 국서를 가지고 온 수국의 사신을 끌고 나가 목을 베라는 명령이 떨어질 듯했지만 영왕태왕은 일단 문하성 판관 소적기를 객관으로 안내하라는 지시를 내리고 곧바로 편전(便殿)에서 어전회의(御前會議)를 열었다.
“수주(隨主) 양견(楊堅)이 이렇게 불손한 내용의 국서를 보낸 것은 아국(我國)에 대한 선전포고(宣戰布告)라고 생각하오. 짐은 서토(西土)와의 전쟁이 곧 임박하였다고 생각하는데 경들은 이것을 어떻게 대처해야 좋을지 의견을 개진하도록 하시오.”
그러자 영양태왕의 아우이자 수군원수(水軍元帥)를 역임하고 있는 태제(太弟) 고건무(高建武)가 반열에서 나와 태왕에게 읍하며 아뢰었다.
“수국(隨國)은 진국(陳國)을 멸망시키고 중원을 통일했을 뿐 아니라, 돌궐(突厥)까지 굴복시켜 자못 기세가 대단합니다. 정면으로 부딪친다면 이긴다고 장담할 수 없습니다. 안국병법(安國兵法)에 이르기를, 승리에 대한 확신이 없다면 전쟁을 일으켜서는 안 된다고 하였습니다. 비록 수주의 국서가 모욕적이긴 하지만 사직과 백성의 안위를 생각한다면 그들을 달래어 화평을 유지해야 합니다. 저들도 오랜 전쟁으로 인해 지쳤을 터이니, 섣불리 새로운 전쟁을 일으키지는 못할 것입니다. 일단 수국의 사신을 돌려보내어 저들이 쳐들어 올 빌미를 없애십시오. 다만 용간(用間)의 죄는 그냥 넘어갈 수 없으니 수사(隨使)의 수행원 한두명을 참수(斬首)하는 선에서 마무리 지으면 될 것입니다.”
병마원수(兵馬元帥) 강이식(姜以式)은 태제의 소심한 의견을 반박하고 나섰다.
“추모성왕(鄒牟聖王)께서 나라를 세우신 이래로, 우리 고구려의 무사들은 적을 앞에 두고 물러난 일이 없습니다. 또한 광개토태왕(廣開土太王)께서 사방의 못된 무리들을 물리치신 이후로 고구려라는 이름은 천하 만백성들에게 존경과 두려움의 대상으로 통하고 있습니다. 헌데 이제 와서 무엇을 두려워한단 말입니까? 이런 오만무례한 글은 붓으로 화답할 것이 아니라 칼로 화답해야 할 것입니다.”
강이식의 불꽃 같은 기상이 편전 안을 압도하고 있었다. 영양태왕은 강이식의 주장에 공감하며 이렇게 말했다.
“짐의 생각 또한 강 원수와 다르지 않소. 짐은 이 자리에서 수국과의 전쟁을 선포하겠소.”
영양태왕이 단호히 결단을 내리자 그 누구도 이에 이의를 제기하지 못했다.
어전회의가 끝난 뒤에 영양태왕은 강이식을 따로 불러 독대했다.
“수국과의 전쟁을 수행하는 데 있어 강 원수의 구상은 무엇입니까?”
태왕의 질문에 강이식은 주저하지 않고 대답했다. 그는 이미 전쟁에 대비해 여러 계책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저들에게 우리 고구려가 결코 만만한 상대가 아니라는 것을 보여 주어야 합니다. 먼저 객관에 머물고 있는 수국의 사신을 곧바로 본국으로 돌려보내십시오. 그러면 저들은 분명 우리를 얕잡아보고 방비를 소흘히 할 것입니다. 그때 폐하께서 직접 군사를 거느리고 요서의 영주를 공격하십시오. 이는 바로 오만한 국서에 대한 화답(和答)이자 선전포고가 될 것입니다. 이로써 우리는 기선을 제압할 수 있습니다.”
강이식은 개전(開戰) 이후의 계책까지 상세히 아뢰었다. 이를 들은 영양태왕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띠었다.
“강 원수의 말씀대로만 된다면 수국은 결코 우리 군대를 당해낼 수 없을 것이오.”
영양태왕은 강이식을 믿었다.
병마원수(兵馬元帥) 강이식(姜以式)은 국내성(國內城)에 있던 을지문덕(乙支文德)을 불러 함께 서북변의 방비태세를 살펴본 뒤 그를 데리고 궁궐에 들어갔다. 편전(便殿)에 들어가 영양태왕(嬰陽太王)을 알현한 강이식은 태왕에게 을지문덕을 소개했다.
“폐하, 여기 이 청년은 국내성에서 소형으로 재직하는 을지문덕이라고 합니다. 아직 젊은 나이지만 폭넓은 시야와 사물을 궤뚫어 보는 통찰력을 갖춘 사람입니다. 폐하께서 곁에 두시고 중용하신다면 나라를 위해 큰 공을 세울 만한 인재입니다.”
영양태왕이 을지문덕을 유심히 살펴보니 훤칠한 키에 번뜩이는 까만 눈이 인상적이었고, 긴 눈썹이 학자와 같은 인상을 풍기게 하는 훤칠한 미장부(美丈夫)였다. 태왕은 을지문덕을 시험해 보고 싶었다. 그래서 그를 그윽히 바라보며 이렇게 물었다.
“많은 대신들이 여전히 수나라와 전쟁을 피해야 한다고 주장하는데, 너의 생각은 어떠하냐?”
이에 을지문덕은 조금도 주저함이 없이 자신의 의견을 개진했다.
“소신이 이미 접수한 정보에 의하면 수국(隨國)은 이번에 우리 나라에 사신을 보내기 전에 이미 전쟁을 준비하고 있다고 합니다. 산동(山東)의 내주(來州)에서는 병선(兵船)의 건조가 마무리되었고, 장안(長安)과 탁현(琢縣)의 군기고(軍器庫)에는 신병기들이 가득 쌓여 있다고 합니다. 아무리 우리가 사신을 보내어 화친을 청한다 한들, 저들은 무슨 꼬투리를 잡아서라도 쳐들어올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도 이에 대한 대비를 소흘히 해서는 아니 될 것입니다. 어차피 피할 수 없는 전쟁이라면 반드시 싸워 이겨야하지 않겠습니까?”
그러자 영양태왕의 곁에서 시립하고 있던 고건무(高建武)가 서슬 푸르게 을지문덕을 꾸짖었다.
“감히 어느 안전이라고 얕은 생각을 떠벌린단 말이냐? 아직 백제와 신라의 위협이 가시지 않은 마당에 수나라의 대군을 상대할 수는 없다. 먼저 수나라와 화친을 하여 서변을 안정시킨 다음에 남방을 제압하는 것이 상책이다.”
고건무는 태왕이 자신보다 강이식을 신임하는 것이 못마땅한 참이었기에 이름도 들어 보지 못한 애송이가 나서서 잘난 체하는 꼴을 두고 보지 못했다.
하지만 고건무의 꾸지람을 듣고도 을지문덕은 미동조차 하지 않고 대담하게 자신의 생각을 이야기했다.
“나제동맹(羅濟同盟)이 깨진 이후로 신라와 백제는 서로 반목하느라 미처 북방으로 눈을 돌릴 겨를이 없습니다. 신라는 예전 진흥왕(眞興王)이 통치하던 시절이나 흥(興)하였지, 지금은 간신히 명맥이나 유지하는 정도가 아닙니까? 백제도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더구나 이들은 한쪽이 올라서려 하면 다른 쪽에서 다리를 잡아끌어 주저앉히고 있습니다. 사신을 보내어 경쟁을 부추긴다면 서로 견제하느라 우리 국경을 침입해 오지 못할 것입니다. 또한 수나라의 군사들은 여러 차례의 전쟁으로 지친 상태이며 주변 이민족들의 침입에도 대항해야 하므로 실제로 가용(可用)할 수 있는 병력은 그리 많지 않으니 우리가 정예병으로 적의 전진기지를 공격하여 기선을 제압하고, 서변의 굳건한 성에 의지하여 승부를 겨룬다면 우리가 승리하지 못할 이유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고건무는 을지문덕의 명철한 안목에 말문이 막혔다.
영양태왕은 이를 지켜보다가 유쾌하게 웃음을 터뜨리고는 을지문덕을 가리키며 “마치 을파소(乙巴素)가 환생한 것 같구나” 하고 칭찬하였다.
서력 598년 정월(正月) 고구려(高句麗) 영양태왕(嬰陽太王)은 어영전대장(御營全隊長) 모달(模達) 유여(柳呂)와 소형(小兄) 을지문덕(乙支文德)을 대동하여 휘하에 근위병 삼백명만을 거느리고 요동 순행(巡幸)에 나섰다. 이때, 주위에는 변방 지역의 민심을 둘러보고 백성들을 위무하기 위한 출행이라 밝혔지만 실은 수국(隨國)이 은근슬쩍 차지하고 있는 영주(營州)를 공격하기 위해서였다.
영양태왕은 수군(隨軍)의 경계심을 누그러뜨리기 위해 오골성(烏骨城)·건안성(建安城)·안시성(安市城)·요동성(遼東城)·백암성(白巖城) 등을 차례로 방문하여 군민(軍民)들을 격려하고 변경 방비의 상황을 직접 점검하였다. 태왕을 친견(親見)할 기회를 갖게 된 성민(城民)들은 영양태왕의 관심과 격려에 감복하여 태왕의 은덕을 찬양하고 충성을 맹세하였다.
태왕의 행차는 평양성(平壤城)을 출발한 지 한 달이 넘어서야 개모성(蓋牟城)에 도달할 수 있었다. 개모성에는 말갈(靺鞨) 경기병을 거느린 막리지(莫離支) 연자유(淵子遊)와 평원태왕(平原太王) 재위기에 고구려 최고의 용장(勇將)으로 이름을 날렸던 온달(溫達)의 아들인 북군총병관(北軍總兵管) 대모달(大模達) 온준(溫俊), 그리고 모달(模達) 재증협무(再曾協武)와 말객(末客) 어사곤(於使困) 등 여러 장수들이 이미 도착해서 태왕의 행차를 기다리고 있었다.
개모성주(蓋牟城主) 모달(模達) 손자연(孫子然)의 영접을 받고 성 안으로 들어선 영양태왕은 성청(城廳)에 들어가자마자 자신의 충직한 심복인 연자유를 먼저 찾았다. 연자유는 그동안 태왕의 밀명을 받고 신성(新城)에서 말갈인(靺鞨人)들을 끌어모아 최강의 경기병으로 조련시키고 있었다. 말갈 경기병의 전력이 만족할 만한 수준에 올랐다는 보고를 전해들은 영양태왕은 연자유의 노고를 크게 치하하였다.
이튿날에 국조(國祖)인 추모성왕(鄒牟聖王)에게 출정을 알리고 승리를 기원하는 천제(天祭)를 올린 영양태왕은 군사들을 사열한 후에 결의를 다졌다.
“이번 영주부에 대한 선제공격을 시작으로 우리는 수국과 전면전을 펼치게 된다. 저들의 오만한 태도를 그대로 방치하는 것은 우리 조상들의 위업(偉業)에 누를 끼치는 부끄러운 일이다. 이번에야말로 고구려의 기상과 용맹을 드러내 하늘에 두 개의 태양이 있을 수 없다는 진리를 알게 해주리라. 자랑스러운 용사들이여! 그대들에게 추모성왕의 가호가 있을지어다.”
군사들의 함성소리와 발 구르는 소리에 개모성이 들썩거렸다.
영양태왕은 연자유가 인솔하는 말갈 기병들을 선봉으로 삼아 영주부로 호호탕탕 쳐들어갔다. 본디 요하(遼河) 서쪽 일대는 고구려와 중원 왕조들 사이에 충돌이 잦았던 곳이었다. 광개토태왕(廣開土太王)대에 와서 고구려가 이곳을 평정했지만 북연(北燕)의 멸망 이후에는 중원 왕조가 잠시 대릉하(大陵河) 인근까지 세력을 뻗치기도 했다.
그 후, 고구려는 지속적인 서진정책(西進政策)을 펼침으로써 이들을 몰아냈다. 그런데 북주(北周)의 뒤를 이어 수국(隨國)이 들어서자 요서(遼西) 지역은 다시 양대 세력간 분쟁의 중심에 놓이게 되었다. 문제(文帝)는 용성에 영주부(營州府)를 두고 군대를 주둔시켜 틈틈이 거란족을 포섭하려고 하였다. 영양태왕 입장에서는 요서 지역에서의 힘의 우위를 되찾기 위해서라도 수국이 점령하고 있는 용성을 제압해야 했다.
영주도독(營州都督) 위충(韋沖)은 고구려군이 쳐들어오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크게 놀랐다. 고구려의 선제공격은 그가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었다. 영주부의 군사들은 수국의 동북방 진출을 위한 교두보를 마련하기 위해 군량창고를 건설하는 일을 담당했기에 제대로 전투 훈련을 받지 못했다. 게다가 오랫동안 전쟁을 치르지 않았기에 군기가 흐트러져 있었다. 그로므로 병력은 7만여명 정도 되었지만 오합지졸(烏合之卒)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군인으로서 자국의 영토에 외국의 군대가 침범하는 것을 그대로 방관할 수는 없는 일이었기에 위충은 부하들에게 출병을 명했다. 고구려군은 북소리에 맞추어 성(城)을 향해 조금씩 다가서고 있었다. 고구려의 선두에 선 장수가 앞으로 나서며 외쳤다.
“나는 대고구려의 막리지 연자유다! 이곳은 본디 우리의 땅이거늘, 어찌 무단으로 들어와 점거하였는가? 폐하께서 직접 이를 심문하고자 오셨으니 어서 성문을 열고 영접하도록 하라.”
고구려의 국왕이 친히 왕림(枉臨)했다는 말에 위충은 기겁을 했다. 고구려왕이 나섰다는 것은 최소한 오만 이상의 정예군이 움직였다는 의미였다. 예상했던 일 가운데 최악이었다. 그러나 영주부의 군사들도 만만치 않은 수효였기에 전의(戰意)만 상실하지 않는다면 해 볼 만한 싸움이라고 생각되었다. 위충은 부하들에게 명령을 내려 군사들을 인솔하여 성문을 열고 달려나갔다. 이제는 고구려 장수의 말이 허풍이기를 바랄 뿐이었다.
이때 고구려군 진영에서 다시 북소리가 울리며 오색의 깃발이 펄럭였다. 그러자 방진(方陳)을 취하고 있던 고구려의 군진이 다섯 대로 나누어 지더니 순식간에 다섯 개의 대열로 변했다. 성 밖으로 나가 군사들을 도열시킨 위충은 고구려군의 일사분란한 움직임을 보고 정신이 아득해졌다. 정신을 가다듬고 자세히 살피니 고구려군은 대별로 각기 다른 색의 천을 허리에 두르고 있었다.
고구려군 진영의 중앙에서 흑색 깃발이 나부끼자 흑색 띠를 두른 선봉군이 일제히 말을 제쳐 수군의 진영으로 내달렸다. 연자유가 지휘하는 흑기군(黑旗軍)이 수군의 진영을 돌파하니, 순식간에 수군의 대열이 둘로 쪼개졌다. 다시 고구려군의 진영에서 백색 깃발과 청색 깃발이 동시에 흔들리자 좌군과 우군이 일시에 양쪽 측면에서 수군을 공격해 들어갔다. 고구려군의 빠른 공격이 계속되자 위충의 군사들은 아무런 대응조차 못하고 갈팡질팡했다. 비록 수효는 수군이 월등히 많았지만 이미 사분오열(四分五裂)한 상태에서는 수적 우위가 힘을 발휘할 수 없었다.
뒤이어 홍색 깃발과 황색 깃발이 동시에 흔들리니 영양태왕이 직접 지휘하는 중군으 마치 태풍과 같은 기세로 돌격해왔다. 고구려의 기병들이 진영을 종횡무진(縱橫無盡) 누비는 가운데 수군(隨軍) 병사들은 점점 싸움에 자신감을 잃었다. 북소리가 그치고 겨우 정신을 수습한 위충은 자신이 이미 고구려의 군사들에게 포위되었음을 깨달았다. 마상(馬上)에서 궁시(弓矢)를 들고 수군(隨軍)을 에워싸고 있는 고구려의 군사들 사이로 영양태왕이 모습을 나타냈다.
“너희 수주(隨主)가 보낸 국서에 대한 우리의 답이다. 목숨은 살려 줄 테니 장안으로 돌아가 양견(楊堅)에게 ‘사직(社稷)을 보전하려거든 경거망동(輕擧妄動)하지 말라’고 전하라.”
위충은 오금이 저려서 간신히 고개만 숙였을 뿐 입 밖으로는 아무런 소리도 내지 못했다.
다시 북소리가 울리며 고구려 군사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가자 위충은 마침내 큰 한숨을 토해 냈다. 사상자를 살펴보니 겨우 1백여명에 지나지 않았다. 철저히 농락당한 것이었다. 고구려군은 영주부를 함락시키러 온 것이 아니었다. 힘의 차이를 확인시켜 영주를 지키고 있는 수군들에게 고구려에 대한 두려움을 심어주기 위해 왔을 뿐이었다. 전쟁에서는 공포심을 갖게 하는 것이 적군을 죽이는 것보다 효과적일 수 있었다.
영주에서 한바탕 무력시위(武力示威)가 끝난 후, 군사를 수습하여 도성으로 귀환길에 오른 영양태왕은 본격적인 전쟁에 앞서 을지문덕에게 북방의 동요에 대비하도록 하는 임무를 맡겼다. 태왕은 주변정세를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기에 을지문덕의 역할이 전쟁에서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믿었다.
“을지문덕을 제형(諸兄)의 관등으로 승급(昇級)시키고 부여성(扶餘城)의 성주로 임명할 것이니 수주가 말갈이나 실위(室韋)를 부추겨 우리의 후방을 교란하지 못하도록 하라.”
을지문덕은 태왕의 명령을 받고 편전을 물러나와 그 즉시 부임지로 떠나려고 길을 재촉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