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구려와의 전쟁 때문에 멸망한 수국
수국(隨國)의 수군총관(水軍總管)인 내호아(來護兒)가 패수구(浿水口)로 진입하여 평양성(平壤城)을 함락시키려 하다가 태제(太弟) 고건무(高建武)에게 완패를 당하고, 30만 대군의 별동대(別動隊)를 이끈 우익위대장군(右翊衛大將軍) 우중문(于仲文)마저 을지문덕(乙支文德)의 유인전술(誘引戰術)에 말려들어 살수대첩(薩水大捷)의 제물이 된 이후 요동성(遼東城)을 공략하던 양제(煬帝)의 어영군(御營軍)은 과연 어떻게 되었을까?
요동성에서 넉 달이 지나도록 교착상태에 빠져 있던 양제의 어영군 오십만 병력이 살수대첩 이후 어떤 반응을 보였는지는 정사(正史)의 기록에는 자세히 전해지지 않는다. 그러나 살수대첩(薩水大捷)이 제2차 여수전쟁(麗隨戰爭)을 개전(開戰) 8개월만에 종결시키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는 것은 결코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양제는 분명 살수대첩의 소식을 들었겠지만 그리 쉽게 군대를 철수시키지는 않았을 것이다. 양제는 평양성 함락에 실패하게 되자 전쟁의 목적을 고구려 정복에서 요동 지역을 석권하는 것으로 수정했을 것이다. 그러나 단재(丹齋) 신채호(申采浩)의『조선상고사(朝鮮上古史)』에 의하면 을지문덕의 군대가 우중문의 별동대를 패주시키고 나서 압록강을 건너 서쪽으로 진격하여 오열홀(烏列忽) 일대에서 수(隨)의 잔여군(殘餘軍)을 소탕했다고 전한다. 여기서 말하는 오열홀이란 지명(地名)은 요동성의 또 다른 이름이거나 요동성 인근의 지역을 지칭하는 단어일 것으로 추정된다.
단재는 이 오열홀전투(烏列忽戰鬪)에 대해 “수국의 24개 군단 수백만명이 전멸당하고 오직 호분랑장(虎賁郞將) 위문승(衛文昇)이 고작 패잔병 수천명을 수습하고 양제를 호위하여 도주하였다”고『조선상고사』에 서술하였다. 또 “『수서(隨書)』에 살수(薩水)에서의 우중문(于仲文)과 우문술(宇文述)의 패전(敗戰)은 기록해 놓고 오열홀(烏列忽)에서의 양제(煬帝)의 패전은 기록해 놓지 않은 것은 이른바 위존자휘(爲尊者諱)의 춘추필법(春秋筆法)에 따른 것이니 춘추필법을 알아야 중국의 역사를 올바로 읽을 수 있다”고 덧붙이기도 했다.
단재의 주장이 사실이라면 오열홀전투는 살수대첩보다 더 대단한 고구려의 승리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도대체 을지문덕이 뛰어난 통솔력과 신통한 지략으로 승전(勝戰)하여 전장의 고혼(孤魂)이 되게 한 수나라 군사들의 목숨은 과연 몇 명이었더란 말인가?
더욱 놀라운 것은 당시 고구려군(高句麗軍)이 수군(隨軍)을 요동지방에서 몰아낸 것에만 그치지 않고 수나라의 내지(內地)를 향한 진공(進攻)작전을 벌였다는 점이다.『태백일사(太白逸史)』「고구려본기(高句麗本紀)」에 따르면 을지문덕은 고구려군을 두 개의 전투제대로 크게 구분하여 재편하였는데, 한 개 부대는 현도도(玄菟道)를 타고 태원(太原)까지 진격하게 하면서 다른 한 개 부대는 낙랑도(樂浪道)를 타고 유주(幽州)까지 진격하게 했다는 것이다.
태백일사에 보이는 고구려군의 원정은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무엇보다 태백일사의 기록 내용이 사실이란 전제하에 풀이해 보면 당시 고구려군은 우선 수나라의 정치·군사적 중심지를 완전히 파탄시킨 셈이다. 더욱이 유주지역을 들이쳤다면 수국의 동북쪽 전진거점을 붕괴시킨 것이다. 당시의 유주지역은 고구려는 물론 돌궐족의 동방한계선의 분쟁지역이었다.
한편 고구려의 태원지역 원정의 의미는 적진 깊숙이 자리한 후방지휘소를 타격한 것으로 이해된다. 결국 고구려의 유주와 태원을 향한 원정은 수나라의 동방한계거점과 후방지휘거점에 대한 파괴에 초점이 있던 것으로 풀이할 수 있겠다. 을지문덕은 아울러 수나라 동북변지역으로의 분산된 진공작전을 직접 추진했는데, 계획된 지역에 이르러서는 수나라의 각 주군(州郡) 지역민들을 불러서 위로까지 했다. 실로 을지문덕의 풍모를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단재는『을지문덕전(乙支文德傳)』을 통해 그의 사람됨을 이렇게 서술하였다.
‘…무릇 전쟁에 임하여 적을 상대함에 있어서 군사를 지휘하기를 마치 정해진 길 가듯이 하고, 편안하고 한가롭게 놀러가는 듯한 마음으로 적진에 들어가서 노련하고 사나운 적장들을 마치 손 안의 장난감 다루듯이 하였으니 침착하고 용맹스러우며 임기응변(臨機應變)과 지략(智略)이 있었다고 말한 것은 이로 말미암아 붙여진 이름일 것이다.
그러나하 내가 을지문덕을 보건대, 을지문덕에게 침착함과 용맹함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침착하고 용맹한 것만으로 을지문덕이 을지문덕으로 되었다고 할 수는 없으며, 을지문덕에게 임기응변과 지략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임기응변과 지략만으로 을지문덕이 을지문덕으로 되었다고 할 수는 없다.
그렇다면 을지문덕은 과연 어떤 사람이었을까? 이르기를, 공(公)은 진실하고 성실한 사람이었고, 강하고 굳센 사람이었으며, 홀로 우뚝 선 사람이었고, 위험한 것을 무릅쓰고 피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진실하고 성실하였기 때문에 임금과 신하 사이에 뜻이 맞아 십여년간 마음이 서로 마치 물과 고기처럼 서로 잘 맞아서 이간질하는 말이 없었고, 장수와 재상이 서로 한 마음이 되어서 내정을 닦고 외적을 물리치는 일을 부지런히 하고 서로 권면(勸勉)한 결과 그 군사는 강국의 군사가 되었고, 그 백성은 강국의 백성이 되어서 사방 천리밖에 되지 않는 작은 나라로써 동쪽과 서쪽의 여러 나라들을 노려볼 수 있었던 것이다.
강하고 굳세었기 때문에 수나라가 중원 천하를 통일한 여세를 몰아 마치 손을 대면 데일 듯한 기염(氣焰)으로 노도(怒濤)와 광란(狂瀾) 같이 무섭게 쏟아져 들어오고, 군함(軍艦)들은 바다 위에 개미떼 같이 모여 있고, 철기(鐵騎)는 요동 벌판에 구름같이 진을 치고 있으면서 사신(使臣)을 보내어 위협하고 공갈치기를 여러 번 하였으나, 여전히 굽히지도 않고 흔들리지도 않는 강하고 굳센 정신으로 조용하고 안온한 얼굴로써 응대하였던 것이다.
그 당시 수나라의 형세와 기세에 두려워서 굴복하지 않는 나라가 없었고, 가깝게는 신라와 백제가 그 앞에서 꼬리를 흔들고 아양을 떠는 모습을 보였고, 멀게는 돌궐(突厥)과 거란(渠丹)도 그 앞에서 무릎을 꿇는 수치를 무릅쓰는 상황이었으나, 불쌍하고 가련한 여러 나라들 중에서는 이를 부끄럽게 여기는 장부(丈夫) 하나 찾아볼 수 없었다. 그러나 홀로 우뚝 서 있었기 때문에, 공(公)은 홀로 참담한 수완을 발휘하여 적이 강해도 그를 밀쳐내고, 적이 약해도 그를 밀쳐내며 둘이 같이 설 수 없음을 맹세하고, 자웅(雌雄)을 겨뤄보려고 유인하였던 것이다.
위험한 것을 무릅쓰고 피하지 않았기 때문에 평탄하고 험한 것도 돌아보지 않고, 죽고 사는 것도 두려워하지 않고 여러 차례 혼자 말 타고 호랑이 굴속으로 들어가서 호랑이 새끼를 얻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제 그의 한쪽 면만 살펴보고 이르기를 침착하고, 용맹스럽고, 임기응변이 있고, 지략이 있는 자였다고 한다면 그게 어찌 옳겠는가? 공 같은 자야말로 진정 우리 선조들 중에서 제일 모범적 인물이고, 제일 모범으로 삼을만한 사람이로다.’
수군이 완전히 물러가자, 을지문덕은 평양성으로 돌아와 영양태왕(嬰陽太王)을 배알하였다. 태왕은 을지문덕에게 친히 어주(御酒)를 따라주며 그의 공로를 치하했다.
“그대가 결국 이 나라를 구했구나.”
“소신이 무슨 공(功)이 있겠사옵니까? 이는 폐하의 성덕과 태제 전하를 비롯한 군민들이 합심하여 이룬 개가이옵니다.”
을지문덕은 겸손하게 주변 사람들에게 공로를 돌렸다.
“막리지가 없었다면 우리는 이번 전쟁에서 이기기 어려웠을 것이오.”
고건무의 입에서 나온 말이었다. 늘 을지문덕을 시기하고 못마땅하게 여기던 고건무조차도 그의 뛰어난 능력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과찬이십니다. 태제 전하께서 평양성을 지켜내지 못하셨다면 오늘날의 승리도 없었을 것입니다.”
을지문덕은 고건무를 추켜세웠다. 그와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일이 조정의 화합과 백성들의 안정을 위하는 길이었다. 을지문덕은 고건무가 야심이 큰 인물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허나 이번 전쟁에서 승리했다고 안심할 수는 없사옵니다. 수주는 호승심이 강한 자이옵니다. 이대로 곱게 물러날 리가 없사옵니다. 반드시 다시 쳐들어올 것이옵니다.”
을지문덕의 단언을 듣고 영양태왕이 웃으며 물었다.
“그렇다면 어찌 대비해야겠는가?”
“먼저 국경의 방비를 강화하고 성들 사이의 협력 체계를 더욱 원활하게 조직해야 합니다. 소신이 요동으로 나가서 변경의 체제를 다시 정비하겠습니다.”
을지문덕은 전쟁이 끝나자마자 새로운 전쟁을 준비하기 위해 길을 떠나려 했다. 그는 승전의 대가로 상급을 바라지도 않았고 안락한 휴식을 원하지도 않았다. 그가 원하는 바는 고구려가 전쟁의 위협으로부터 벗어나 평화로운 나라가 되는데 일조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요동 길을 자원하면서도 희망에 찬 미소를 띨 수 있었다.
영양태왕은 이러한 을지문덕이 믿음직스러웠다.
“짐은 막리지가 항상 옆에 있어 주기를 바라지만 그대의 뜻이 나와 틀린 적이 없음을 알기에 보내겠다.”
을지문덕은 태왕에게서 점점 멀어지더니 어느새 대전문을 빠져나가 모습을 감추었다. 햇볕이 대전 앞마당을 밝게 비추었다.
서력 613년 정월에 수황(隨皇) 양제(煬帝) 양광(楊廣)은 조서(詔書)를 내려 전국의 군사들을 탁군으로 소집하고 요서의 옛 성을 수리하여 군량을 저장하게 하였다.
양제는 신하들을 불러놓고 말했다.
“고구려를 이기지 않고는 천하 제일이라 말할 수 없다. 아직도 우리의 국력은 바닷물을 뽑아내고 산을 옮길 수 있으니 고구려와 전쟁을 벌이는데 아무런 문제가 없다.”
젊은 신하 곽영(郭榮)이 간곡하게 아뢰었다.
“오랑캐가 예의를 잃는 것은 신하의 일입니다. 귀중한 쇠뇌를 새양쥐를 잡으려고 쓰지는 않습니다. 어찌 천자(天子)의 몸으로 욕되게 작은 도둑을 대적하십니까?”
이 말을 귀담아들을 양제가 아니었다. 회의는 하나의 통과 의례였다. 모든 일은 양제의 뜻에 따라 일방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었다. 양제는 3월에 50만의 군사를 모아 요동으로의 원정길에 나섰다. 양제의 첫번째 고구려 침략 때와 비교하면 수국의 병력이 많이 줄어 있었던 것이다.
양제는 요동 일대에 있는 고구려의 성들을 먼저 함락시키고 나서 전진한다는 전술을 쓰기로 했다. 양제가 이끄는 수군(隨軍)의 주력부대가 요동성 앞에 나타난 것은 4월 초였다. 요동성은 또 다시 전쟁의 소용돌이로 빠져들었다. 수국의 재침을 예상하고 있던 요동성주(遼東城主) 고연탁(高連卓)은 부하 장수들과 함께 병력을 정돈하여 신속하게 방어태세에 들어갔다. 이미 제2차 여수전쟁(麗隨戰爭)에서 파괴된 성벽의 수리도 끝났고, 군량이나 군수장비 등도 충분히 비축해 놓은 요동성은 더욱 강력해진 방어력을 자랑했다.
수군은 비루(飛樓)·당거(撞車)·운제(雲梯) 등을 이용해 사면에서 동시에 요동성을 공격하였다. 하지만 고연탁 휘하 요동성의 고구려 군사들은 아무리 많은 대군이 모질게 공격해 와도 수성전(守城戰)을 성공적으로 벌일 수 있다는 자신감이 넘쳤다. 오랫동안 요동성을 공격했지만 효과를 얻지 못하자 양제는 군사들을 동원해 백만개의 흙 포대를 만들어 성과 높이가 동일한 거대한 토산을 쌓았다. 수군은 그 위에 어량대도(魚粱大道)라 불리는 넓이가 30보나 되는 큰 길을 만들어 성 안으로 포노(砲弩)를 쏘아댔다. 또 팔륜루거(八輪樓車)를 만들어서 성루의 고구려 군사들을 공격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요동성의 고구려군도 더 적극적으로 항전하였다. 이렇게 20여일 동안 밤낮을 가리지 않고 싸워 양군의 희생자가 속출하였다.
양제(煬帝)의 어영군(御營軍)이 요동성을 공략하는 동안 우후위장군(右侯衛將軍) 왕인공(王仁恭)은 7만의 보기군(步騎軍)을 거느리고 신성(新城)을 에워쌌다. 그러나 이미 신성에는 막리지(莫離支) 겸 병마원수(兵馬元帥) 을지문덕(乙支文德)이 고이중(高利重)·재증협무(再曾協武)·임유(林裕) 등 부하 장수들을 데리고 3만의 정예군을 인솔하여 입성(入城), 수성전(守城戰)을 준비하고 있었다. 을지문덕이 직접 신성에 왔다는 소식을 들은 수군 병사들의 사기는 극도로 저하되었다. 을지문덕은 왕인공이 군사를 몰아 성을 공격하면 노련하게 이를 막아내다가 적군이 지쳐 잠시 물러가 쉬면 기병대를 보내 뛰어난 기동력으로 급습하고 빠지는 유격전(遊擊戰)을 전개했으며, 적군이 성문 가까이에 오면 쇠뇌와 포차를 발사하여 저지하도록 했다. 이렇게 해서 수군의 신성 공략도 요동성에서처럼 별다른 성과를 올리지 못한 채 피해만 늘어갔다.
그런데 양제에게 치명적인 타격을 입히는 급보가 전해졌다. 예부상서(禮部尙書) 양현감(楊玄感)이 반란을 일으켰던 것이다. 이에 양현감의 친구였던 병부시랑(兵部侍郞) 곡사정(斛斯政)은 자신에게 화가 미칠까 두려워 고구려로 귀순해왔다. 신성에서 왕인공과 전투를 벌이고 있던 을지문덕은 수(隨)의 국내에서 반란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접하자 곧 고구려군이 대대적인 반격에 나설 것이며 선발대를 임유관(臨渝關)으로 보내 수군의 퇴로를 차단할 것이라는 소문을 일부러 수군 진영에 흘려 보냈다. 이 첩보를 받은 양제는 크게 겁을 먹고 서둘러 퇴각을 지시했다. 수군은 진영과 보루, 장막, 공성용 무기 등 수많은 물자들을 놓아둔 채 밤을 틈타 황급히 도주했다.
“원수님은 어째서 아군이 반격한다는 사실을 적군에게 알렸습니까?”
부관인 고이중이 묻자 을지문덕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싸움에서 이기는 가장 좋은 방법은 싸우지 않고 이기는 것이라 했다. 이는 그만큼 군사들의 생명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는 뜻이다. 저들은 내란으로 인해 마음이 불안한 상태이기에 우리가 대군을 일으켰다는 소식을 접하면 겁이 나서 도망갈 수밖에 없다. 전쟁은 사기의 싸움이다. 전의를 상실하고 황급히 물러나는 적을 추격하는 일처럼 쉬운 일이 어디 있겠느냐? 이제 우리는 도망치는 적을 쫓아가서 무찌르면 된다.”
장수들은 을지문덕의 심계에 혀룰 내둘렀다.
을지문덕은 요동성으로 전령을 보내 퇴각하는 수군을 추격하여 섬멸하라는 명령을 전했다. 이에 요동성주 고연탁은 성문을 열고 군사를 풀어 도망치는 수군을 들이쳐 십여만에 이르는 적병을 죽이거나 포로로 잡았다.
고구려와의 전쟁에서 거듭 참혹한 패배를 당했으면서도 양제는 양현감의 반란을 진압하자, 다시금 백성들을 동원하여 고구려 정벌을 준비했다. 양제는 오직 복수심에 가득차서 나라의 형편은 돌보지도 않았다. 해가 바뀌자, 양제는 고구려 침략에 참전할 군사들을 회원진(懷遠鎭)에 집결하도록 했다. 그러나 이때에는 민란이 전국 곳곳에서 일어나 수국은 걷잡을 수 없는 혼란에 빠져 있어 군사들이 제때에 도착할 수가 없었다. 회원진에 모여든 군사는 그전에 비하여 초라하기 짝이 없었다.
그렇지만 내호아(來護兒)의 함대가 평양성을 향해 항진하는 척 하다가 느닷없이 비사성(卑蓑城)을 습격하여 함락시키자 고구려 측은 크게 당황하였다. 여수전쟁 최초로 수나라가 고구려의 성 하나를 무너뜨린 것이었다. 사실 고구려도 끈질긴 양제의 침략에 지칠 대로 지쳐 있었다. 더 이상 버텨내기가 버거웠다. 일단 끝없는 소모전(消耗戰)을 중단하고 남쪽의 대비도 세워야 했다. 영양태왕은 사신을 보내 곧 수나라로 입조(入朝)할 것이니 철군시켜 달라는 청을 하면서 곡사정을 묶어 보냈다.
양제는 고구려와의 전쟁에서 패배하여 중원제국의 황제로서 자신의 위신이 땅에 떨어졌다는 생각에 괴로워하고 있었지만, 곡사정이 소환되자 일단 자신의 체면이 세워졌다는 위안을 받고 이 거짓 항복을 순순히 받아들였다. 그는 자신이 거느린 수군은 물론 비사성을 함락시킨 내호아의 군대에게도 철군 명령을 내렸다. 이렇게 두 나라 사이에 강화(講和)가 맺어졌다. 내호아는 이 조칙을 받고 거의 손안에 들어오게 된 승리를 놓쳤다고 통분해했다. 곡사정은 양제가 회원진에서 군사를 돌려 장안으로 돌아온 뒤 끓는 가마솥 안에 넣어져 잔인하게 죽임을 당했다.
20여년에 걸친 고구려와의 전쟁에서 패배한 수나라는 그 후유증으로 인해 결국 쇠락의 길에 들어섰다. 양제는 마침내 자신의 신하인 우문화급(宇文化及)에게 살해되었고, 반란군의 수괴 이연(李淵)이 장안을 점령하고 당(唐)을 건국함으로써 수(隨)의 짦은 역사는 막을 내리고 말았다.
수나라가 중원을 통일한 지 38년만에 멸망하게 된 것은 그 직접적인 원인이 고구려와의 전쟁에 있었다. 양제는 모든 인적·물적 자원을 요동벌판에 쏟아부었지만 실익은 하나도 챙기지 못했다. 수나라와의 전쟁은 고구려인들에게 반외세(反外勢) 저항의식을 심어주었고 뒷날 민족사의 주체의식과 자주의식을 고양시켜 주었다. 특히 을지문덕은 이 전쟁을 승리로 이끈 주역으로서 민족사의 귀감이 되었다. 그러나 고구려와 수나라 사이의 전쟁이 완전히 끝난 후에 을지문덕에 대한 역사의 기록은 더 이상 등장하지 않는다. 따라서 을지문덕이 전쟁 이후 어떻게 됐는지, 언제 사망하여 어디에 묻혔는지 알 수가 없기 때문에 우리 민족사 최고의 영웅인 그의 묘소(墓所)는 현존(現存)하지 않게 되었다.
● 한국인으로서 한국 역사의 위대한 영웅을 알지 못한다면…?
수(隨) 양제(煬帝)의 침략을 막아내고 여수전쟁(麗隨戰爭)을 고구려(高句麗)의 승리로 이끈 고구려 말기의 전설적인 영웅 을지문덕(乙支文德). 한국 근대(近代) 민족주의사학(民族主義史學)의 시조(始祖)인 단재(丹齋) 신채호(申采浩) 선생이 우리 민족의 역사에서 가장 중요하고 위대한 인물로 고구려의 훌륭한 군사전략가 을지문덕을 부각시킨 것은 일제(日帝)의 침략으로 국운(國運)이 기울던 시기에 우리 민중에게 영웅을 숭배하는 마음을 고취시켜 민족자주정신(民族自主精神)을 되살림으로써 한국의 민족해방운동(民族解訪運動)을 활성화하겠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일제의 한반도 식민지 지배가 종결된 지 65년째가 되었으나, 국내에서도 국외에서도 여전히 과거사(過去史) 청산(淸算)은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일본 정부는 아주 오래 전부터 자국의 청소년들에게 그들의 정체성을 확립하게 하기 위한 역사 교육을 강화하면서 일제의 한국 침략을 미화하고 한국의 역사와 문화를 심각하게 폄하하는 내용으로 왜곡하여 서술된 엉터리 역사 교과서를 편찬하고 이것을 전국의 각급 학교에 사용하도록 허락하려는 의도를 드러냈다. 여기에 덧붙여 중국 정부는 지난 2000년부터 정식으로 고조선·부여·옥저·고구려·발해 등의 역사를 한국의 고대사에서 분리시켜 중국사에 편입시키려 하는 동북공정(東北工程) 프로젝트를 시작하였고, 지난 2007년에 이미 그 연구를 마무리하였다.
이런 주변국가의 역사인식에 비하면 우리 나라는 자국의 역사 교육에 관심을 두기보다 오히려 고사(枯死) 지경으로 몰아가고 있다.
한국의 초등학교에서는 국사(國史) 수업이 아예 없다. 중학교에서도 국사 과목이 없어진 지 이미 오래다. 고등학교에서는 국사가 선택과목으로 밀려나면서 학생들이 국사를 배우지 않아도 되는 상황으로까지 번졌다.
결국 우리 나라의 청소년들은 국사 과목 교과서를 단 한 줄도 읽지 않고도 대학 진학이 가능해졌고, 행정·사법·외무고시에도 국사 과목이 없으니 국사를 모르는 사람들로 공직이 채워질 위기에 놓였다.
세계에서 자국의 역사를 교육하지 않는 나라가 있는가? 불행하게도 대한민국만이 제 나라의 역사를 교육하지 않는 나라로 전락했다. 이에 대한 교육부 관계자의 해명은 “수능시험에 시달리는 고교생들에게 짐을 덜어주기 위해서는 한 과목이라도 더 줄여줘야 하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정말 참담한 망언(妄言)이다.
심지어 “국사 교육을 하게 되면 국수주의적인 사고방식을 길러주게 돼 세계화에 역행한다”고 주장하는 고위급 공직자도 있다. 더욱 기가 막힐 망언이다. 아무리 형편없는 나라라고 해도 과연 이런 사람들에게 청소년 교육을 맡겨도 좋을지 심각하게 고민해보지 않을 수 없다.
이런 판국인데도 정부와 집권 수구정치세력은 ‘국민 1인당 소득 2만 달러’ 시대를 열어가자고 억지 희망을 홍보하며 열을 올린다. 결단코 말하거니와 지금과 같이 천박해진 사회 분위기로는 ‘2만 달러’ 근처에도 도달할 수 없다. 이 암울한 현실에서 벗어나기 위해 우리가 당장 해야 할 일이 무엇이겠는가? 수출의 증대, 외자유치, 정치개혁 등일까? 그 어느 것도 정답이 될 수 없다.
세계은행의 예측에 따르면 2020년 정도면 중국 경제가 미국을 추월할 정도로 성장할 것이라고 한다. 그때 세계에서 유일하게 분단된 국가인 한국은 세계 최강국인 중국과 UN 상임이사회 진출을 노리고 있는 일본 사이에 낀 샌드위치가 될 것이라는 불길한 예언도 이미 나와 있다. 그 2020년 무렵에 한국의 정치·경제·과학을 이끌어 갈 핵심적인 인재들은 과연 어디에서 배출될까? 바로 초등학교 상급반의 유소년 학생들이다. 그 유소년들에게 국사를 가르치지 않고 민족의 정체성에 대해 깨닫지 않게 하고서도 국제 경쟁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방도가 많다고 생각한다면 이만저만한 착각이 아니다.
지금도 한국이 제대로 먹고 살기 힘든 나라라면서 외국으로 이민을 가거나 국적을 버리는 국민들이 많은데, 한국을 ‘타율적종속성(他律的從屬性)의 역사를 지닌 노예 민족의 나라’라고 폄하하는 중국과 일본의 왜곡 행위에 의해 우리 나라의 인재들이 만약 조국에 대한 혐오감으로 국적을 버리고 외국으로 떠난다면 과연 한국의 운명은 어떻게 될까?
정부가 지금 당장 서둘러야 할 일은 운하를 만들거나 사대강에 보(洑)를 쌓는 것이 아니라 우리 나라 국민들의 정체성을 바탕으로 한 정신적 근대화 작업에 나서는 일이다. 오직 그 하나로 피폐할 대로 피폐해진 이 정신적 공황에서 헤어날 수 있는 것이다. 지금까지는 우리의 전통적인 부분을 내다버리는 것을 자랑으로 삼았을 뿐, 우리 민족의 본 바탕에 흐르는 정체성이 무엇인지를 논증하는 일에 너무도 소흘했다. 이른바 세계화라는 외형에만 요란을 떨었지 국가의 웅비(雄飛)에 준비하는 프로젝트를 운영할 궁리도 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아무리 세계에 한국식 브랜드를 알리면서 명성을 날리는 기업인이 많다고 해도, 아무리 세계 최고의 피겨스케이트 스타가 있다고 해도, 아무리 과학 연구에서 세계적 수준을 인정받고 있는 물리학자나 유전학자가 있다고 해도, 아무리 해외에서도 유명세를 타며 한류 열풍을 지속시킬 대중문화예술계의 톱스타가 있다고 해도, 아무리 한국인 UN 사무총장이 있다고 해도 동아일보(東亞日報)가 선정한 ‘2020년 대한민국을 세계에 빛낼 인물 100인’이 한국의 역사에 대한 기본적 상식도 없고, 한국의 구국영웅(救國英雄)이 누구였는지도 모른다면 ‘한국의 세계화’는 공허한 망상에 불과하다.
한국인이 한국인으로서 카이사르·나폴레옹·제갈공명·웰링턴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면서 을지문덕·강감찬·이순신·김좌진을 모른다면 그 사람은 절대 한국인이라고 말할 수 없다. 프랑스 민주공화국 제21대 대통령 프랑수와 미테랑은 “자국의 역사를 배우지 않는 국민은 자신의 정체성을 상실한 국민이다”고 말했으며 백암(白巖) 박은식(朴殷植) 선생은 “나라는 멸망할 수 있으나 역사는 소멸될 수 없다”고 말했다. 이래도 수구정치세력이 배출한 대한민국 제17대 대통령과 제2대 교육과학기술부 장관은 국사 교육이 별로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할 것인가?
7세기 초반 세계 최정상급 강국인 수나라와의 전쟁에서 고구려는 당당히 승리를 거두었고, 그 중심에는 영웅 을지문덕이 있었다. 우리가 정말 고구려인들의 후손이 맞다면 을지문덕의 위대한 전공(戰功)과 웅혼(雄渾)한 기상(氣像)을 절대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그것이 바로 ‘국민 1인당 소득 2만 달러’ 시대를 이룩하는 가장 근본적인 방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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