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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아빠는 영웅이였다.

Marco12345 |2021.03.09 14:40
조회 130 |추천 2

우리 아빠는 영웅이였다.
IMF 이전 제법 규모가 있는 한 회사를 운영했었다.
책임져야 할 사람들이 늘어가고 버블경제에 취해
무리하게 사업을 늘려갔다. 이후 얼마 안가 IMF가 터지고 같은 해 내가 태어났다.

그 흔한 돌잔치, 돌반지 그런 것은 사치였다
수억원에 달하는 빚을 갚기 위해 아빠는 집,차 모두 처분하였고 조그마한 회사에 영업직으로 들어가 주 7일을 일하며 죽을듯이 일했었다.

회사를 운영하면서 누군가에게 피눈물을 흘리게 했으니 자신의 업보라던 우리 아빠는 한달에 한번 쉬는 날 나와 형을 데리고 강원도로 캠핑을 떠났다 그 무거운 눈꺼풀을 부릅뜨고 쉬고싶지만 쉴 수 없는 가장이기에 달콤한 휴일은 나와 나의 형을 위해 에너지를 쥐어짜냈다.

어느덧 초등학교에 입학한 나는 축구가 하고싶었고 가정형편이 어려웠지만 자신이 어렸을 적 자신의 아버지(할아버지)가 반대하여 운동을 그만두게 되었고 그것이 평생의 후회라고 늘 말했던 아버지는 흔쾌히 허락하셨다. 그 후 중학교 전지훈련 한달에 백만원에 육박하는 훈련비, 회비를 감당하기 위해 늘 야근, 철야까지 하며 자식을 키웠던 아버지는 고등학교 1학년 나의 생일이 얼마 남지 않았을 무렵 선물로 축구화를 사주겠다 라는 얘기를 끝으로 연락이 두절되었다. 합숙을 하고있던 나는 주말에 합숙이 끝난 뒤 집으로 가기위해 어머니에게 전화를 걸었다.
“아빠 뇌출혈로 쓰러져서 중환자실에 있어” 나는 세상이 무너지는 줄 알았다. 아니 그날부로 내 삶의 이유가 없어졌다. 나는 숙소를 나오자마자 울음이 터졌고 친구의 부모님 차에 올라타 분당의 한 병원으로 갔다. 어머니와 형이 얘기하는 것을 엿듣게 되었다 간병인을 써야하는데 돈이 많이나온다는 그런얘기로 기억한다.

나는 내 꿈을 위해 헌신한 아버지의 짐을 덜어드리고 싶었다. 이후 어머니와 축구부 감독님과 일주일에 달하는 면담끝에 운동을 그만두고 집 근처 학교로 전학오기로 결정하였다 난 곧장 짐을싸고 2달동안 학교도 가지않고 아버지의 병간호를 시작하였다.

2달 뒤 아버지의 수술과 치료가 모두끝난 뒤 나에게 한 첫마디는 휴가나왔니? 시합은 어떻게 되었어? 나는 울음을 삼키고 운동을 그만뒀다고 얘기하였다. 아버지의 눈물을 처음본 날이다.

첫등교날 내 생일이였다. 아버지는 쓰러져계시는동안 빚을 갚지못하여 구치소에 들어가게되었다.
퇴원하자마자 교도소를 보낸 대한민국이라는 나라가 처음으로 싫어진 날이였다.

3년형을 받았다 돈은 갓 20살이된 친형이 알바를 하며 번 109만원 월세와 관리비를냐면 10만원정도 남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항상 배를 굶주렸고 맘편하 배부륵 먹었던 적이 손에 꼽는다 겨울에는 가스비를 못내 얼음장같이 차디찬 물로 신음을 내며 씻었고 배가 너무고파 야간자율학습을 신청하면 석식을 준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야자를 시작했다 그렇ㄱ 2년을 누구보다 힘들게 보냈던 것 같다 고등학교 졸업식 먼저 취업을했던 나는 교복도 못입고 사복을 입고 학교로 왔다 많은 학부모들이 자신의 자식들에게 꽃을주고 기념사진을 찍고 맛있는 밥을 먹으러 가는 것을 구경하였다.
나는 부모님과 사진은 커녕 밥조차 먹지못하고 집으로 돌아갔다 내 인생에서 가장 비참해떤던 순간이다 그렇게 군입대를 앞두고 있던 어느날 아버지가 돌아왔다. 누군지 몰라볼 만큼 핼쑥해보이고 없던 흰머리가 많이 자랐고 왜소해졌다. 난 아빠를 끌어안고 울었다

아버진 그렇게 일주일 뒤 다시 교도소로 들어갔다 새벽에 들이닥친 형사들에게 수갑이 채워져 내앞에서 떠나갔다.

군입대날이다 주변엔 부모님과 친구들과 같이온 내또래 남자들이 많이 보인다. 난 오늘도 혼자다.

가기전애 엄마와 형에게 다녀온다는 짧은 전화를 끝으로 훈련소에 입소했다.

전역 후 처음본 아버지는 날 아직 축구하던 고등학교1학년의 나로 기억한다.

혈관성치매라고 판정을 받았다. 누구보다 힘들게 살아왔고 악착같이 버티며 아등바등살고 있다. 내 친구들도 기억하지 못하는 아빠지만 나는 그 옛날의 슈퍼맨으로 기억하고 있다 우리아빠가 나를 축구선수로 기억하는 만큼 나도 아빠를 슈퍼맨으로 영웅으로 기억한다 얼마나 더 내 곁애 남아계실지 모르겠다. 내소원은 아버지가 죽기전에 장례식과 납골당에 모실 수 있는 비용을 마련하는거다. 배우지도 못한 나지만 무슨일아 이 있더라도. 내 명의가 아니더라도. 우리집 남의집이 아닌 우리집에서 아빠와 자고 싶다.

추천수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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